비평
잃지 않고 나아가기
1.
이 글의 공식 청탁서는 내게 2020년의 ‘지금 비평’이 무엇이 ‘되어야’하는지를 묻는다. 난감한 질문이다. 생각이 다른 이들의 얼굴을 보기 민망해서는 아니다. 정답을 바라는 질문이 아니라는 것 역시 알고 있다. 만약 내게 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명징한 방향성이 있다면, 그것은 그저 인간을 이해하는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모순과 불분명의 속성이 그렇듯, 문학의 모순과 불분명이야말로 내가 문학을 사랑하는 이유다.
‘되어야’ 한다는 건 ‘필요’의 문제다. 물론 문학은 ‘기능’한다. 이 세계의 흐름과 사회의 장치, 궁극적으로는 인간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고발한다. 이 기능하는 감각에서 여러 가지 문학의 존재 이유와 윤리가 탄생한다. 한편으로는 문학이 써먹을 수 없다는 것을 중요한 특징으로 갖는다는 말에도 동의한다.1) 그 특징에서 자유가 파생되며 그 자유로 모든 것을 말할 가능성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작고 쓸모없는 존재들에서 삶을 찾아내고 질문하는 문학의 기능과도 관통한다. 삶이 무엇인지 묻지 않아도 삶은 살아진다. 다만 그것을 물었을 때, 삶의 모양은 바뀌거나 바뀌지 않을 가능성을 갖는다. 그러나 필요라는 건 가능성보단 집단성을 염두에 둔 단어로 들린다. 모든 문학이 필요하다는 나이브한 차원이 아니라면, 그것은 동시대 문학가와 독서가들이 공유하는 지향점을 말한다. 혹은 그 지향점이 있어야 한다는 의식이다.
단편적인 반발이 떠오른다. 필요한 문학(혹은 비평)이 있다면 그 반대급부인 불필요한 문학은 존재하는가. 좀 더 양보하여 덜 필요한 문학은 어떤가. 어떤 문학이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으로 가시적인 효용이 있을 수 있고, 그런 사례의 귀중함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 성취를 성공이라 여긴다면 가장 서운해할 이는 바로 작가일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어떤 작가도 과녁에 화살을 쏘듯 글을 쓰지 않는다. 문학이 채워야 하는 필요가 있다면 작가 개인의 욕망 정도일까.
그러나 이런 원론적인 주장을 내세우려는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지난 몇 년간 문학은 현실의 갈급함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문제의식을 발전시켜왔다. 시민 혹은 지식인의 윤리를 지키고 실현한 그 작업의 실효성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성과는 ‘지금 비평’의 과제를 묻는 뿌리이기도 할 것이다. 다만 나는 그 갈급함을 필요가 아닌 기능의 영역에서 되짚고 싶은 마음으로, 앞선 질문을 조금 바꿀까 한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의 비평이 무엇이 ‘되어야’하는 게 아니라 ‘됐으면’ 하는지 말이다.
2.
서사 콘텐츠들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 영화와 티브이 드라마 외에도 웹 소설, 웹툰, 넷플릭스 드라마, 스토리에 기반한 콘솔 게임 등은 엄청난 자본과 접근성으로 이야기를 원하는 대중의 갈증을 채우고 있다. 나는 우리가 스마트폰 화면이 이야기의 창구가 되는 시대에 살게 되었음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출판 시장 역시 전자책으로 그 변화에 부응하고 있으나 문학 소비의 양상이 크게 바뀌었다는 실감은 잘 들지 않는다.2) 나 역시 스마트폰을 손에 쥔 채 종이책을 읽고 있으니 말이다. 심지어는 우리가 피상적으로 상정하는 ‘순수문학’ 혹은 ‘한국문학’이란 장르가 콘텐츠의 측면에서 컬트화 된 게 아닌가 하는 염려마저 든다. 물론 컬트는 멋진 스타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산업 종사자의 입장에서 컬트화는 그리 반가운 흐름이 아니다. 여기서 문학의 ‘필요’에 대한 회의가 다시 떠오른다. 어떤 문학이 정말 필요했다면, 귀신같은 자본주의 손길이 문학을 가만히 두었을 리 없다는 것.
하지만 그렇기에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10)을 필두로 한 페미니즘 소설의 약진은 의미가 남다르다. 3)현실의 갈급한 문제의식과 문학이 만든 ‘김지영 붐’은 베스트셀러 탄생에서 그치지 않고 한 시대 정서의 상징이 되었으며 그 주제 의식은 다시금 문학에 투입되는 순회전을 이어갔다. 거대 기업과 자본을 등에 진 기획 창작물이 아닌 개인의 창작물이 이룬 이 성과는 컬트화 되어가는 문학의 공공적 기능을 다시금 일깨우는 소중한 경험이다. 그러나 엄연히 말하자면 이는 페미니즘 혹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진지한 태도의 성과이지 문학 자체의 부흥은 아니다. 지난 몇 년간 문학이 현실에 기능하거나 효용성을 발휘했던 부분은 그것이 전달하는 메시지의 차원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는 대중이 문학에 기대하는 효과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중요한 지표이기도 하다.
문학의 사회적 메시지는 독자와의 중요한 연결고리이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건 예술가의 시민적 자아다. 즉 작가와 독자의 시민적 자아가 공명했을 때 작품은 그 시민성의 상징이 되어 사회적 에너지를 갖는다. 현재 이 시민적 자아의 광범위하고 강력한 움직임은 한국 사회를 흔들었던 사건들에 기원을 둔다. 기원이란 단어는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할 테지만, 2014년 4월 16일은 그 무게를 기꺼이 감당할 만하다. 무고한 희생이 있었고, 우리는 그것이 사고가 아닌 사건임을 깨달았으며, 광장으로 몸을 움직였다. 촛불혁명의 경험은 부조리에 대한 감각을 전에 없이 날카롭게 벼르게 했으며 그것은 페미니즘 정신의 뿌리로 작동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특히 문학이 기민하게 반응한 것은 문단 내부 이슈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몇몇 기성 남성 문인들의 추태와 이를 고발하는 미투 운동은 문단이라는 사회와 예술이라는 명목이 여성 예술가/지망생에게 이중적 부조리로 작동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이는 문제적 작가와 작품의 구분에 대한 해묵은 질문을 꺼내게 할 만큼 퇴보적인 일이었다.
해묵은 질문이라 했지만, 대단히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다. 특히 문학을 하는 이들에게는 더 그렇다. 작가와 작품을 동일군에 넣건 개별 선상에 놓건 예술적 자율성과 시민의 윤리성 중 하나를 잃지 않기란 힘들다. 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잃는가’에 관한 포기의 문제이기도 하다. 많은 논의가 오갔지만, 애초 합의점이 존재할 영역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문제의식에 대한 응답은 소설에서 징후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여성, 퀴어 등 소수자성에 집중하는 소설 경향은 결국 이 세계와 예술의 정치적 올바름을 요구하는 간접적인 발언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문학의 메시지적 기능이 사회가 필요로 했던 지점을 충족시킨 셈이다. 그리고 이 일련의 현상 속에서 소설적 형식 하나가 부쩍 눈에 띈다.
3.
‘지금 비평’을 말하기 위해 ‘지금 소설’이라는 디딤돌을 디뎌보고자 한다. 지금을 사는 예술가의 욕망과 역시 지금을 사는 비평가의 시선이 만났을 때 비평은 탄생한다. 그것은 다분히 다양하고 유동적이어야 하며, 명제가 아닌 가능성으로 남겨두어야 할 것이다. 다만 임의의 기준을 바탕으로 오늘날 문학의 특성 일부를 밝힐 순 있겠다.
‘지금 소설’이란 무엇일까. 가장 최근에 창작된 소설은 아닐 테고, 큰 출판사에서 발표되거나 많이 팔린 소설들도 아니다. 나름의 합당한 기준을 세운다면 비교적 많이 읽히고 많이 말해지며 비교적 평단의 합의를 거친 소설 정도일까. 그래서 이 글에서 ‘지금 소설’의 표본을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하 『젊은작가상』으로 표기한다)으로 제시해볼까 한다. 이상문학상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로 문학상 자체에 대한 회의가 퍼져나가고 있지만, 문학상은 작가 개인의 영예 이전에 문학이 서 있는 지점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다. 더불어 대중과 멀어져가는 한국문학 안에서 『젊은작가상』의 노출과 회자 정도는 수록 소설들이 참고할 만한 자료임을 말해준다. 이 같은 면에서 『젊은작가상』은 시의성과 예술성 등 소설의 여러 기능을 보편적으로 만족시킨 좋은 예가 아닐까 싶다. 이는 수상작이 아닌 오늘날의 소설들이 각기 다른 방법으로 가치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올해 『젊은작가상』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지점은 역시 페미니즘이다. 김봉곤 작가의 실제 대화 도용 사례 이전을 기준으로, 총 일곱 작품 중 대상 작품 「음복」을 비롯한 최은영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이현석의 「다른 세계에서도」, 장류진의 「연수」 네 작품은 직·간접적으로 여성 문제를 다룬다. 그리고 김봉곤의 「그런 생활」과 장희원의 「우리(畜舍)의 환대」 두 편이 성 소수자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문학의 관심사는 여전히 ‘정치적 올바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4) 그리고 이를 구현하는 방식으로의 리얼리즘은 소설 속 일상의 구체성과 메시지를 전달하는 강력한 토대가 되고 있다.
「음복」은 결혼 후 시댁의 첫 제사를 겪은 ‘나’(세나)를 통해 가족 내 여성 차별이 어떤 방식으로 갈등을 재생산하고 또는 무마하는지 보여준다. 가정 내 여성들의 신경전은 이미 많은 드라마와 소설에서 반복한 “시시”(39쪽)해 보이는 소재다. 「음복」의 구도는 ‘이유 있는 악녀’ 주인공이 등장하는 드라마의 서사와 닮았다. ‘딸’이기에 감내한 온갖 부조리에도 모자라 자신의 딸 정원에게까지 세습된 차별(“야, 너 정원이 재수 시키지 마라. 주제를 알아야지. 지가 무슨 약대를 간다고.”(36쪽))에 집안의 악인이 된 고모의 화살은 조카며느리인 ‘나’와 시어머니에게 쏟아진다. ‘나’와 정우가 즐겨보는 중국 드라마의 황궁 암투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백미는 송곳이 할퀴고 지나가는 듯한 갈등의 순간마다 이 집안의 ‘남성’인 정우를 확인하는 시선에 있다. 정우는 보상 없이 집안의 감정 노동만을 떠맡은 ‘딸’인 고모가 정확히 그 반대의 입지를 점하고 있는 ‘아들’인 아버지를 보듯 자신을 증오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외할아버지가 좋아하던 ‘토마토 고기찜’을 게걸스레 먹으며 “무지할 수 있는 권력”(48쪽)과 “서서히, 고요하게, 모든 그늘이 사라진 얼굴”(13쪽)을 물려받는다. 「음복」의 갈등 양상과 그로 인한 여성 문제의 발현이 일종의 드라마적 표피라면 ‘나’의 시선으로 그것을 찢고 들어가 발견한 정우의 해사한 얼굴은 그 안에서 안전히 숨쉬던 세포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증식하는, 현미경을 아주 가까이 들이밀어야 보이는 세포 말이다.
문득 현대 미술 기법 중 하나인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이 떠오른다. 하이퍼리얼리즘은 간단하게 말해 ‘리얼리즘 이상의 리얼리즘’을 제시하여 가시화하고, 그것을 ‘하이퍼리얼리티’로 간주한다. 리얼리즘이 많은 작가들의 수단이자 도구라면, 하이퍼리얼리즘은 사물 그 자체의 이미지를 완전히 재현하려는 예술운동이다.5) 하이퍼리얼리즘의 기본적 충격은 현실의 미세함마저 복제한 인위적 대체물인 시뮬라크르가 결국 현실이 아니라는 것에서 오는데, 이는 리얼리즘과 회화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던진다.6) 형식적인 측면에서, 「음복」은 리얼리즘의 세포 낱낱을 전면적으로 드러내고 낯섦을 성취했단 점에서 하이퍼리얼리즘적 성질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본다’는 형식은 이 소설의 내용과 형식 모두에 중요하다. ‘나’는 정우를 봄으로써 권력의 해사한 얼굴을 알게 되고, 독자는 제사의 풍경과 ‘나’의 시선을 병치시킴으로써 ‘드라마보다 더한’ 현실의 악순환적 구도를 목도한다. 이같은 시도는 최은영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와 이현석의 「다른 세계에서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각각의 작품은 용산 참사와 학계에서의 구조적 성차별(「아주 희미한 빛으로도」)과 외환위기와 낙태죄 폐지법(「다른 세계에서도」)이라는 실질적 사회 문제를 전면으로 다룬다. 그러나 소설이 구현하는 면은 이 사회의 일상들이다. 소설들은 젊은 여자란 이유로 학계와 학생들에게 무시당하는 여강사가 후대 여성 연구자에게 그것을 선뜻 ‘차별’로 정의하지 못하는 내면적 충돌과 낙태죄 폐지 시위에 참여하는 여성이 동생의 임신 앞에서 느끼는 윤리적 충돌에 집중한다. 다소 도식적인 견해지만, 정치적 올바름에 입각한 오늘날의 리얼리즘 소설은 이념으로는 파악 불가능한 미세한 일상의 모순과 충돌을 드러내며 현실의 어려움을 부각하는 듯하다. ‘시시하고 뻔한’ 리얼리즘의 표피를 확대하여 세포(일상)의 충격적 세계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말이다. 아쉬운 것은 이러한 형식이 회화의 하이퍼리얼리즘이 성취한 전복성과는 달리 리얼리즘적 메시지의 층위를 복합적으로 공고화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차이는 소설이 그 어떤 예술보다도 우리의 현재와 맞닿은 장르임을 말해주는 결론이기도 하다.
4.
짚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지점이 하나 있다. 지난 7월, 김봉곤 작가의 『젊은작가상』 수상작인 「그런 생활」과 등단작 「여름, 스피드」에 대한 논란이 뜨거웠다. 지인과의 실제 대화를 동의 없이 도용했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고, 몇 차례 공방 끝에 작가는 그것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이에 도용을 사실로 전제하고 이야기를 전개하자면, 그것은 다분히 징후적인 사건이다. 작가는 시간이 없거나 상상력이 부족하거나 혹은 게으르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현대 소설이 무엇인가에 대한 적지 않은 고민이 있었을 거라고 본다. 작가의 도용 행위는 구성된 ‘픽션’보다 ‘현실’ 자체가 더 ‘소설다우며’ ‘소설적으로 살아있는 것’임을 전제하고 있다. 훼손하지 않은 일상을 그대로 복제하는 것, 즉 하이퍼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이 같은 태도는 가공의 느낌을 전면적으로 배제한다. 이런 (아마도) 무의식적인 시도는 작가 개인의 욕망으로 해석될 일만은 아니다. ‘현실과 같음’만이 소설이 정치적 올바름을 드러내는 강력한 코드가 되었다고 한다면 너무한 판단일까. ‘현실 같음’과 구분되는 의미로서의 ‘소설 같음’의 행방을 생각해본다.
5.
먼 길을 돌아 이제야 비평의 이야기를 한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소설의 정치적 올바름과 리얼리즘 형식에 비평은 발맞춰갔다. 물론 그것을 전적으로 동의했다는 게 아니라, 예술의 윤리적 효용과 미학적 성취의 관계를 활발한 논의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함이 맞겠다. 그러나 『젊은작가상』의 결과로 보아 비평 역시 작가의 시민적 자아에 손을 들어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같은 리얼리즘 소설을 대하는 비평의 역할은 무엇일까. 작품을 되짚어 현실과의 연결점을 찾고 메시지를 언어화하여 던지는 것일까. 아마 맞을 것이다. 누군가는 낡았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이야말로 다양한 비평의 가지를 칠 수 있게 하는 뼈대임은 틀림없다. 다만 소설이 정치적 올바름을 표상하고 그 메시지를 전면화할 때, 즉 어떤 현실을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하고 구체적인 디테일로 드러낼 때 그 소설은 비평의 전통적 역할을 내재하고 있다. 작가의 작의가 현실의 갈급한 문제이며 고발이라면 그 작의는 소설을 경유하여, 소설이 아닌 메시지로서 독자에게 닿기 때문이다. 비평을 작동하는 힘은 새롭거나 강력한 주제가 아니라 예술이 내재하는 모든 질문을 발견해내겠단 의지다. 나는 그 의지가 비평가가 문학을 사랑하는 방법이라 여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모든’이라는 단어다. 비평은 작가 혹은 사회 현실과의 직·간접적인 관련 또는 무관함을 지향할 수 있다. 하지만 하이퍼리얼리즘적인 소설이 리얼리즘을 옹호할 때, 비평은 질문을 던지는 자가 아닌 그것의 충격적 생생함을 읽어내는 자의 자리에서 만족하게 된다. 이는 소설의 훌륭함과는 별개로, 비평의 난제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문제는 역시 편향성이다. 『젊은작가상』에서 보이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하이퍼리얼리즘적 접근은 현실의 갈급한 문제의식이 낳은 결과라기엔 과중된 감이 없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것이 기본적으로 ‘평단’이라는 비평을 토대로 한 가치 부여 집단에 의해 결정되었다면, 비평 역시 그 결과로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에 동참한 게 아닐까. 물론 이 ‘동참’은 한 시대의 유행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문학사의 소중한 경험이다. 현실의 명징한 부조리에 소설가의 윤리적 자아를 태동시키고, 비평가가 그 윤리성을 더 확실히 현실에 던져 더 큰 반향과 공감을 만들어 내는 일은 ‘문학의 사회적 효용’이란 잊고 있던 기능을 새로이 생각하게끔 한다. 예술의 사회적 효용이 문학만의 일이라거나, 그래서 문학이 ‘필요’한 건 아니겠으나 이 ‘기능’이 사회적으로 큰 동의를 얻는다면 그것은 문학사의 기록으로 남아야 마땅하다. 다만 그것이 ‘기록됨’으로 인해 다가올 과제 역시 가볍지 않다. ‘지금’은 영원하지 않고 우리는 새로운 일상을 살아내야 한다. 문학이 다른 콘텐츠와 구별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이 한 시대의 기성품으로 소비되는 것을 강력하게 거부한다는 점이다. 만약 이러한 편향성이 새로운 일상을 맞아 ‘옮겨간다면’ 문학이 이룩한 효용 역시 일시적이다. 좀 더 과감하게 말하면 문학은 한때 사용된 셈이다.
곧 ‘코로나 시대의 문학’이 우리를 맞이할 것이다. 이미 몇몇 작품의 배경엔 코로나와 마스크, 강제 휴가 등의 배경이 등장하고 있다. 우리는 코로나가 인류의 어떤 전환점이 될지 ‘아직’ 알지 못하기에, 소설은 ‘아직’ 조심스럽다. 앞서 말했듯, 어떤 소설도 한 시대의 유행으로 소비되길 바라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기화된 코로나와 2.5단계(이 글이 발표될 때, 우린 정말 3단계를 경험하게 될까)까지 올라 온 국가 주도적 방역은 분명 우리가 겪어보지 못했던 통제와 생명의 위기, 혐오를 양산하고 있다. 2014년 4월 16일이라는 강력한 사건이 그랬듯, 코로나가 야기한 생물학적·생존적 공포는 우리 소설의 갈급한 문제가 될 것이다. 문학의 조명이 시대의 문제를 비추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특히 한국 문학의 유전자엔 그 효용성에 대한 인식이 각인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사 우리가 함부로 ‘비슷하다’고 표현하는 작품들이 쏟아져나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막을 순 없다. 그들에게 ‘다른 것’을 써야 한다는 과제를 주는 것은 부당하다. 그것은 무엇을 쓰지 말라고 요구하는 말보다도 폭력적이다.
다만 그 뜨거운 열기에서 한발 물러난 비평에 대해 생각한다. 갈급함을 해소해주는 작품 앞에선 그것의 시야를 넓히는 비평의 역할 또한 갈급하다. 소설의 작의와 비평의 작의가 같은 갈급함에서 나온다면, 문학은 많은 경우 메시지에 안착한다. 이는 결국, 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으로 종착한다. 내가 아는 한, 문학은 인간이 무엇인지 묻는 물음이다. 비평은 그에 대한 답이라기보단 숨겨진 물음들을 찾고 재언어화하는 행위다. 그리고 그 다양함엔 분명 정치적 올바름, 페미니즘, 퀴어, 소수자성이 다른 것과 ‘더불어’ 있을 것이다. 갈급한 것들은 언젠간 덜 갈급해진다. 그 문제가 해결됐기 때문이 아니라, 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현실은 또 한번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만약 오직 하나만 잡을 수 있는 손이 문학이라면, 지난 몇 년간 성취한 것을 놓아야 할 시간 역시 분명히 온다.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오로지 인간의 편을 든다는 점에서 문학은 무력하다. 힘이란 공평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코로나 팬더믹을 겪으며 들리는 이야기는 주로 두 가지다. 첫째는 목숨, 둘째는 돈. 우리의 일상은 이 두 가지에 전전긍긍하며 겨우 버텨가는 듯하다. 이런 세상에서 문학이 우리를 구원한다면, 그 길은 너무나 멀고 희미하다. 그럼에도 나는 문학가들, 특히 비평가들이 즐겁길 바란다. 누군가는 응당 물어야 할 것을 묻거나 혹은 아무도 묻지 않는 것을 묻거나. 그들은 물음으로써 우리의 일부를 사라지지 않게 해주기 때문이다. 인간성이라고 부르는 그 무엇을 말이다.
이 글의 공식 청탁서는 내게 2020년의 ‘지금 비평’이 무엇이 ‘되어야’하는지를 묻는다. 난감한 질문이다. 생각이 다른 이들의 얼굴을 보기 민망해서는 아니다. 정답을 바라는 질문이 아니라는 것 역시 알고 있다. 만약 내게 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명징한 방향성이 있다면, 그것은 그저 인간을 이해하는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모순과 불분명의 속성이 그렇듯, 문학의 모순과 불분명이야말로 내가 문학을 사랑하는 이유다.
‘되어야’ 한다는 건 ‘필요’의 문제다. 물론 문학은 ‘기능’한다. 이 세계의 흐름과 사회의 장치, 궁극적으로는 인간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고발한다. 이 기능하는 감각에서 여러 가지 문학의 존재 이유와 윤리가 탄생한다. 한편으로는 문학이 써먹을 수 없다는 것을 중요한 특징으로 갖는다는 말에도 동의한다.1) 그 특징에서 자유가 파생되며 그 자유로 모든 것을 말할 가능성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작고 쓸모없는 존재들에서 삶을 찾아내고 질문하는 문학의 기능과도 관통한다. 삶이 무엇인지 묻지 않아도 삶은 살아진다. 다만 그것을 물었을 때, 삶의 모양은 바뀌거나 바뀌지 않을 가능성을 갖는다. 그러나 필요라는 건 가능성보단 집단성을 염두에 둔 단어로 들린다. 모든 문학이 필요하다는 나이브한 차원이 아니라면, 그것은 동시대 문학가와 독서가들이 공유하는 지향점을 말한다. 혹은 그 지향점이 있어야 한다는 의식이다.
단편적인 반발이 떠오른다. 필요한 문학(혹은 비평)이 있다면 그 반대급부인 불필요한 문학은 존재하는가. 좀 더 양보하여 덜 필요한 문학은 어떤가. 어떤 문학이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으로 가시적인 효용이 있을 수 있고, 그런 사례의 귀중함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 성취를 성공이라 여긴다면 가장 서운해할 이는 바로 작가일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어떤 작가도 과녁에 화살을 쏘듯 글을 쓰지 않는다. 문학이 채워야 하는 필요가 있다면 작가 개인의 욕망 정도일까.
그러나 이런 원론적인 주장을 내세우려는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지난 몇 년간 문학은 현실의 갈급함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문제의식을 발전시켜왔다. 시민 혹은 지식인의 윤리를 지키고 실현한 그 작업의 실효성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성과는 ‘지금 비평’의 과제를 묻는 뿌리이기도 할 것이다. 다만 나는 그 갈급함을 필요가 아닌 기능의 영역에서 되짚고 싶은 마음으로, 앞선 질문을 조금 바꿀까 한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의 비평이 무엇이 ‘되어야’하는 게 아니라 ‘됐으면’ 하는지 말이다.
2.
서사 콘텐츠들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 영화와 티브이 드라마 외에도 웹 소설, 웹툰, 넷플릭스 드라마, 스토리에 기반한 콘솔 게임 등은 엄청난 자본과 접근성으로 이야기를 원하는 대중의 갈증을 채우고 있다. 나는 우리가 스마트폰 화면이 이야기의 창구가 되는 시대에 살게 되었음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출판 시장 역시 전자책으로 그 변화에 부응하고 있으나 문학 소비의 양상이 크게 바뀌었다는 실감은 잘 들지 않는다.2) 나 역시 스마트폰을 손에 쥔 채 종이책을 읽고 있으니 말이다. 심지어는 우리가 피상적으로 상정하는 ‘순수문학’ 혹은 ‘한국문학’이란 장르가 콘텐츠의 측면에서 컬트화 된 게 아닌가 하는 염려마저 든다. 물론 컬트는 멋진 스타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산업 종사자의 입장에서 컬트화는 그리 반가운 흐름이 아니다. 여기서 문학의 ‘필요’에 대한 회의가 다시 떠오른다. 어떤 문학이 정말 필요했다면, 귀신같은 자본주의 손길이 문학을 가만히 두었을 리 없다는 것.
하지만 그렇기에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10)을 필두로 한 페미니즘 소설의 약진은 의미가 남다르다. 3)현실의 갈급한 문제의식과 문학이 만든 ‘김지영 붐’은 베스트셀러 탄생에서 그치지 않고 한 시대 정서의 상징이 되었으며 그 주제 의식은 다시금 문학에 투입되는 순회전을 이어갔다. 거대 기업과 자본을 등에 진 기획 창작물이 아닌 개인의 창작물이 이룬 이 성과는 컬트화 되어가는 문학의 공공적 기능을 다시금 일깨우는 소중한 경험이다. 그러나 엄연히 말하자면 이는 페미니즘 혹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진지한 태도의 성과이지 문학 자체의 부흥은 아니다. 지난 몇 년간 문학이 현실에 기능하거나 효용성을 발휘했던 부분은 그것이 전달하는 메시지의 차원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는 대중이 문학에 기대하는 효과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중요한 지표이기도 하다.
문학의 사회적 메시지는 독자와의 중요한 연결고리이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건 예술가의 시민적 자아다. 즉 작가와 독자의 시민적 자아가 공명했을 때 작품은 그 시민성의 상징이 되어 사회적 에너지를 갖는다. 현재 이 시민적 자아의 광범위하고 강력한 움직임은 한국 사회를 흔들었던 사건들에 기원을 둔다. 기원이란 단어는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할 테지만, 2014년 4월 16일은 그 무게를 기꺼이 감당할 만하다. 무고한 희생이 있었고, 우리는 그것이 사고가 아닌 사건임을 깨달았으며, 광장으로 몸을 움직였다. 촛불혁명의 경험은 부조리에 대한 감각을 전에 없이 날카롭게 벼르게 했으며 그것은 페미니즘 정신의 뿌리로 작동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특히 문학이 기민하게 반응한 것은 문단 내부 이슈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몇몇 기성 남성 문인들의 추태와 이를 고발하는 미투 운동은 문단이라는 사회와 예술이라는 명목이 여성 예술가/지망생에게 이중적 부조리로 작동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이는 문제적 작가와 작품의 구분에 대한 해묵은 질문을 꺼내게 할 만큼 퇴보적인 일이었다.
해묵은 질문이라 했지만, 대단히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다. 특히 문학을 하는 이들에게는 더 그렇다. 작가와 작품을 동일군에 넣건 개별 선상에 놓건 예술적 자율성과 시민의 윤리성 중 하나를 잃지 않기란 힘들다. 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잃는가’에 관한 포기의 문제이기도 하다. 많은 논의가 오갔지만, 애초 합의점이 존재할 영역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문제의식에 대한 응답은 소설에서 징후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여성, 퀴어 등 소수자성에 집중하는 소설 경향은 결국 이 세계와 예술의 정치적 올바름을 요구하는 간접적인 발언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문학의 메시지적 기능이 사회가 필요로 했던 지점을 충족시킨 셈이다. 그리고 이 일련의 현상 속에서 소설적 형식 하나가 부쩍 눈에 띈다.
3.
‘지금 비평’을 말하기 위해 ‘지금 소설’이라는 디딤돌을 디뎌보고자 한다. 지금을 사는 예술가의 욕망과 역시 지금을 사는 비평가의 시선이 만났을 때 비평은 탄생한다. 그것은 다분히 다양하고 유동적이어야 하며, 명제가 아닌 가능성으로 남겨두어야 할 것이다. 다만 임의의 기준을 바탕으로 오늘날 문학의 특성 일부를 밝힐 순 있겠다.
‘지금 소설’이란 무엇일까. 가장 최근에 창작된 소설은 아닐 테고, 큰 출판사에서 발표되거나 많이 팔린 소설들도 아니다. 나름의 합당한 기준을 세운다면 비교적 많이 읽히고 많이 말해지며 비교적 평단의 합의를 거친 소설 정도일까. 그래서 이 글에서 ‘지금 소설’의 표본을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하 『젊은작가상』으로 표기한다)으로 제시해볼까 한다. 이상문학상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로 문학상 자체에 대한 회의가 퍼져나가고 있지만, 문학상은 작가 개인의 영예 이전에 문학이 서 있는 지점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다. 더불어 대중과 멀어져가는 한국문학 안에서 『젊은작가상』의 노출과 회자 정도는 수록 소설들이 참고할 만한 자료임을 말해준다. 이 같은 면에서 『젊은작가상』은 시의성과 예술성 등 소설의 여러 기능을 보편적으로 만족시킨 좋은 예가 아닐까 싶다. 이는 수상작이 아닌 오늘날의 소설들이 각기 다른 방법으로 가치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올해 『젊은작가상』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지점은 역시 페미니즘이다. 김봉곤 작가의 실제 대화 도용 사례 이전을 기준으로, 총 일곱 작품 중 대상 작품 「음복」을 비롯한 최은영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이현석의 「다른 세계에서도」, 장류진의 「연수」 네 작품은 직·간접적으로 여성 문제를 다룬다. 그리고 김봉곤의 「그런 생활」과 장희원의 「우리(畜舍)의 환대」 두 편이 성 소수자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문학의 관심사는 여전히 ‘정치적 올바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4) 그리고 이를 구현하는 방식으로의 리얼리즘은 소설 속 일상의 구체성과 메시지를 전달하는 강력한 토대가 되고 있다.
「음복」은 결혼 후 시댁의 첫 제사를 겪은 ‘나’(세나)를 통해 가족 내 여성 차별이 어떤 방식으로 갈등을 재생산하고 또는 무마하는지 보여준다. 가정 내 여성들의 신경전은 이미 많은 드라마와 소설에서 반복한 “시시”(39쪽)해 보이는 소재다. 「음복」의 구도는 ‘이유 있는 악녀’ 주인공이 등장하는 드라마의 서사와 닮았다. ‘딸’이기에 감내한 온갖 부조리에도 모자라 자신의 딸 정원에게까지 세습된 차별(“야, 너 정원이 재수 시키지 마라. 주제를 알아야지. 지가 무슨 약대를 간다고.”(36쪽))에 집안의 악인이 된 고모의 화살은 조카며느리인 ‘나’와 시어머니에게 쏟아진다. ‘나’와 정우가 즐겨보는 중국 드라마의 황궁 암투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백미는 송곳이 할퀴고 지나가는 듯한 갈등의 순간마다 이 집안의 ‘남성’인 정우를 확인하는 시선에 있다. 정우는 보상 없이 집안의 감정 노동만을 떠맡은 ‘딸’인 고모가 정확히 그 반대의 입지를 점하고 있는 ‘아들’인 아버지를 보듯 자신을 증오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외할아버지가 좋아하던 ‘토마토 고기찜’을 게걸스레 먹으며 “무지할 수 있는 권력”(48쪽)과 “서서히, 고요하게, 모든 그늘이 사라진 얼굴”(13쪽)을 물려받는다. 「음복」의 갈등 양상과 그로 인한 여성 문제의 발현이 일종의 드라마적 표피라면 ‘나’의 시선으로 그것을 찢고 들어가 발견한 정우의 해사한 얼굴은 그 안에서 안전히 숨쉬던 세포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증식하는, 현미경을 아주 가까이 들이밀어야 보이는 세포 말이다.
문득 현대 미술 기법 중 하나인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이 떠오른다. 하이퍼리얼리즘은 간단하게 말해 ‘리얼리즘 이상의 리얼리즘’을 제시하여 가시화하고, 그것을 ‘하이퍼리얼리티’로 간주한다. 리얼리즘이 많은 작가들의 수단이자 도구라면, 하이퍼리얼리즘은 사물 그 자체의 이미지를 완전히 재현하려는 예술운동이다.5) 하이퍼리얼리즘의 기본적 충격은 현실의 미세함마저 복제한 인위적 대체물인 시뮬라크르가 결국 현실이 아니라는 것에서 오는데, 이는 리얼리즘과 회화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던진다.6) 형식적인 측면에서, 「음복」은 리얼리즘의 세포 낱낱을 전면적으로 드러내고 낯섦을 성취했단 점에서 하이퍼리얼리즘적 성질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본다’는 형식은 이 소설의 내용과 형식 모두에 중요하다. ‘나’는 정우를 봄으로써 권력의 해사한 얼굴을 알게 되고, 독자는 제사의 풍경과 ‘나’의 시선을 병치시킴으로써 ‘드라마보다 더한’ 현실의 악순환적 구도를 목도한다. 이같은 시도는 최은영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와 이현석의 「다른 세계에서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각각의 작품은 용산 참사와 학계에서의 구조적 성차별(「아주 희미한 빛으로도」)과 외환위기와 낙태죄 폐지법(「다른 세계에서도」)이라는 실질적 사회 문제를 전면으로 다룬다. 그러나 소설이 구현하는 면은 이 사회의 일상들이다. 소설들은 젊은 여자란 이유로 학계와 학생들에게 무시당하는 여강사가 후대 여성 연구자에게 그것을 선뜻 ‘차별’로 정의하지 못하는 내면적 충돌과 낙태죄 폐지 시위에 참여하는 여성이 동생의 임신 앞에서 느끼는 윤리적 충돌에 집중한다. 다소 도식적인 견해지만, 정치적 올바름에 입각한 오늘날의 리얼리즘 소설은 이념으로는 파악 불가능한 미세한 일상의 모순과 충돌을 드러내며 현실의 어려움을 부각하는 듯하다. ‘시시하고 뻔한’ 리얼리즘의 표피를 확대하여 세포(일상)의 충격적 세계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말이다. 아쉬운 것은 이러한 형식이 회화의 하이퍼리얼리즘이 성취한 전복성과는 달리 리얼리즘적 메시지의 층위를 복합적으로 공고화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차이는 소설이 그 어떤 예술보다도 우리의 현재와 맞닿은 장르임을 말해주는 결론이기도 하다.
4.
짚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지점이 하나 있다. 지난 7월, 김봉곤 작가의 『젊은작가상』 수상작인 「그런 생활」과 등단작 「여름, 스피드」에 대한 논란이 뜨거웠다. 지인과의 실제 대화를 동의 없이 도용했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고, 몇 차례 공방 끝에 작가는 그것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이에 도용을 사실로 전제하고 이야기를 전개하자면, 그것은 다분히 징후적인 사건이다. 작가는 시간이 없거나 상상력이 부족하거나 혹은 게으르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현대 소설이 무엇인가에 대한 적지 않은 고민이 있었을 거라고 본다. 작가의 도용 행위는 구성된 ‘픽션’보다 ‘현실’ 자체가 더 ‘소설다우며’ ‘소설적으로 살아있는 것’임을 전제하고 있다. 훼손하지 않은 일상을 그대로 복제하는 것, 즉 하이퍼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이 같은 태도는 가공의 느낌을 전면적으로 배제한다. 이런 (아마도) 무의식적인 시도는 작가 개인의 욕망으로 해석될 일만은 아니다. ‘현실과 같음’만이 소설이 정치적 올바름을 드러내는 강력한 코드가 되었다고 한다면 너무한 판단일까. ‘현실 같음’과 구분되는 의미로서의 ‘소설 같음’의 행방을 생각해본다.
5.
먼 길을 돌아 이제야 비평의 이야기를 한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소설의 정치적 올바름과 리얼리즘 형식에 비평은 발맞춰갔다. 물론 그것을 전적으로 동의했다는 게 아니라, 예술의 윤리적 효용과 미학적 성취의 관계를 활발한 논의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함이 맞겠다. 그러나 『젊은작가상』의 결과로 보아 비평 역시 작가의 시민적 자아에 손을 들어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같은 리얼리즘 소설을 대하는 비평의 역할은 무엇일까. 작품을 되짚어 현실과의 연결점을 찾고 메시지를 언어화하여 던지는 것일까. 아마 맞을 것이다. 누군가는 낡았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이야말로 다양한 비평의 가지를 칠 수 있게 하는 뼈대임은 틀림없다. 다만 소설이 정치적 올바름을 표상하고 그 메시지를 전면화할 때, 즉 어떤 현실을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하고 구체적인 디테일로 드러낼 때 그 소설은 비평의 전통적 역할을 내재하고 있다. 작가의 작의가 현실의 갈급한 문제이며 고발이라면 그 작의는 소설을 경유하여, 소설이 아닌 메시지로서 독자에게 닿기 때문이다. 비평을 작동하는 힘은 새롭거나 강력한 주제가 아니라 예술이 내재하는 모든 질문을 발견해내겠단 의지다. 나는 그 의지가 비평가가 문학을 사랑하는 방법이라 여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모든’이라는 단어다. 비평은 작가 혹은 사회 현실과의 직·간접적인 관련 또는 무관함을 지향할 수 있다. 하지만 하이퍼리얼리즘적인 소설이 리얼리즘을 옹호할 때, 비평은 질문을 던지는 자가 아닌 그것의 충격적 생생함을 읽어내는 자의 자리에서 만족하게 된다. 이는 소설의 훌륭함과는 별개로, 비평의 난제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문제는 역시 편향성이다. 『젊은작가상』에서 보이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하이퍼리얼리즘적 접근은 현실의 갈급한 문제의식이 낳은 결과라기엔 과중된 감이 없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것이 기본적으로 ‘평단’이라는 비평을 토대로 한 가치 부여 집단에 의해 결정되었다면, 비평 역시 그 결과로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에 동참한 게 아닐까. 물론 이 ‘동참’은 한 시대의 유행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문학사의 소중한 경험이다. 현실의 명징한 부조리에 소설가의 윤리적 자아를 태동시키고, 비평가가 그 윤리성을 더 확실히 현실에 던져 더 큰 반향과 공감을 만들어 내는 일은 ‘문학의 사회적 효용’이란 잊고 있던 기능을 새로이 생각하게끔 한다. 예술의 사회적 효용이 문학만의 일이라거나, 그래서 문학이 ‘필요’한 건 아니겠으나 이 ‘기능’이 사회적으로 큰 동의를 얻는다면 그것은 문학사의 기록으로 남아야 마땅하다. 다만 그것이 ‘기록됨’으로 인해 다가올 과제 역시 가볍지 않다. ‘지금’은 영원하지 않고 우리는 새로운 일상을 살아내야 한다. 문학이 다른 콘텐츠와 구별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이 한 시대의 기성품으로 소비되는 것을 강력하게 거부한다는 점이다. 만약 이러한 편향성이 새로운 일상을 맞아 ‘옮겨간다면’ 문학이 이룩한 효용 역시 일시적이다. 좀 더 과감하게 말하면 문학은 한때 사용된 셈이다.
곧 ‘코로나 시대의 문학’이 우리를 맞이할 것이다. 이미 몇몇 작품의 배경엔 코로나와 마스크, 강제 휴가 등의 배경이 등장하고 있다. 우리는 코로나가 인류의 어떤 전환점이 될지 ‘아직’ 알지 못하기에, 소설은 ‘아직’ 조심스럽다. 앞서 말했듯, 어떤 소설도 한 시대의 유행으로 소비되길 바라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기화된 코로나와 2.5단계(이 글이 발표될 때, 우린 정말 3단계를 경험하게 될까)까지 올라 온 국가 주도적 방역은 분명 우리가 겪어보지 못했던 통제와 생명의 위기, 혐오를 양산하고 있다. 2014년 4월 16일이라는 강력한 사건이 그랬듯, 코로나가 야기한 생물학적·생존적 공포는 우리 소설의 갈급한 문제가 될 것이다. 문학의 조명이 시대의 문제를 비추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특히 한국 문학의 유전자엔 그 효용성에 대한 인식이 각인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사 우리가 함부로 ‘비슷하다’고 표현하는 작품들이 쏟아져나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막을 순 없다. 그들에게 ‘다른 것’을 써야 한다는 과제를 주는 것은 부당하다. 그것은 무엇을 쓰지 말라고 요구하는 말보다도 폭력적이다.
다만 그 뜨거운 열기에서 한발 물러난 비평에 대해 생각한다. 갈급함을 해소해주는 작품 앞에선 그것의 시야를 넓히는 비평의 역할 또한 갈급하다. 소설의 작의와 비평의 작의가 같은 갈급함에서 나온다면, 문학은 많은 경우 메시지에 안착한다. 이는 결국, 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으로 종착한다. 내가 아는 한, 문학은 인간이 무엇인지 묻는 물음이다. 비평은 그에 대한 답이라기보단 숨겨진 물음들을 찾고 재언어화하는 행위다. 그리고 그 다양함엔 분명 정치적 올바름, 페미니즘, 퀴어, 소수자성이 다른 것과 ‘더불어’ 있을 것이다. 갈급한 것들은 언젠간 덜 갈급해진다. 그 문제가 해결됐기 때문이 아니라, 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현실은 또 한번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만약 오직 하나만 잡을 수 있는 손이 문학이라면, 지난 몇 년간 성취한 것을 놓아야 할 시간 역시 분명히 온다.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오로지 인간의 편을 든다는 점에서 문학은 무력하다. 힘이란 공평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코로나 팬더믹을 겪으며 들리는 이야기는 주로 두 가지다. 첫째는 목숨, 둘째는 돈. 우리의 일상은 이 두 가지에 전전긍긍하며 겨우 버텨가는 듯하다. 이런 세상에서 문학이 우리를 구원한다면, 그 길은 너무나 멀고 희미하다. 그럼에도 나는 문학가들, 특히 비평가들이 즐겁길 바란다. 누군가는 응당 물어야 할 것을 묻거나 혹은 아무도 묻지 않는 것을 묻거나. 그들은 물음으로써 우리의 일부를 사라지지 않게 해주기 때문이다. 인간성이라고 부르는 그 무엇을 말이다.
최선영
평론 활동을 하고 있다. 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자리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중이다. 되도록 다양한 방향의 평론을 읽고, 쓰려 한다.
2020/09/29
34호
- 1
- 김현, 『한국문학의 위상』, 문학과 지성사, 1996, 243쪽.
- 2
- 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 성인 대상 도서 선호 분야는 종이책의 경우 29.5%로 문학이 가장 높게 나타났지만 (도서 선호 분야 : 종이책 (성인)) 전자책의 선호 분야는 30.8%로 장르 소설이 앞서며 문학은 19%로 뒤떨어져 있다.(도서 선호 분야 : 전자책 (성인)) 이 두 가지 결과로 속단하긴 이르나, 적어도 문학 시장이 여전히 종이책 출판에 많은 부분 기대어 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 3
- 『82년생 김지영』은 평범한 대한민국 여성이 마주하는 불합리한 차별들이 어떤 방식으로 일상화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소설의 힘은 성차별의 내성을 찢고 떠오르는 일상적 디테일과 ‘맘충’과 같은 혐오 단어에서 온다. 여성 혐오는 관념이 아닌 구체적 사례와 구체적 단어에서 오며, 그것들이 모여 만들어진 ‘김지영’의 일상은 강렬하고 즉물적인 공감을 끌어낸다.
- 4
- 2010년대 후반 문학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논의는 이은지(「문학은 정치적으로 올발라야 하는가」, 『문학3』, 2017.)을 시작으로 조강석(「메시지의 전경화와 소설의 ‘실효성’」, 『문장웹진』, 2017.), 임지훈(「비평은 정치적으로 올바를 수 있을까?」, 『문학3』, 2017.), 복도훈(「신을 보는 자들은 늘 목마르다」, 『문장웹진』, 2017.), 조연정(「문학의 미래보다 현실의 우리를」, 『문장웹진』, 2017.) 등의 초기 논의를 시작으로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소설의 정치적 올바름과 미학의 자유로움은 병립할 수 없는 지점을 만들어 낸다. 이는 앞서 말했듯 어느 하나를 기꺼이 포기해야만 하는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떤 가치가 더 소중하다 따질 수 없듯, 이에 대한 답은 개인의 기본적인 문학관에 달려 있다고 본다. 나 역시 그에 따라 미학의 자유로움에 한 표를 던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문학의 정치적 올바름의 효용을 부정할 순 없으며, 이 모순이야말로 문학이 고차원적인 예술임을 반증하는 지점이라 생각한다. 언젠간 이에 대한 후속 글을 쓸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조연정의 글의 한 문장을 빌려 선행 논의에 대한 소개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처럼 서로 결이 다른 목소리들이 공존하며 문학에 관한 다양한 고민들을 풀어놓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자면 한국 문단이 완벽히 고인 물은 아닐 것이라는 반가운 기대를 하게 된다”.
- 5
- 박경애, 「하이퍼리얼리즘에 나타난 파생실재이미지(Image of Hyperreality) 연구」. 『예술과 미디어』 15(2), 2016. 참고.
- 6
- 김현화, 「하이퍼리얼리즘, 20세기의 눈속임(Trompe-l`oeil): “나는 너의 거울이 될 거야”」, 『미술사와 시각문화』 11(0), 2012. 참고. 하이퍼리얼리즘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박경애와 김현화의 논문을 참고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