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11월, 연희문학창작촌은 ‘문학으로 모이는 방법들’이라는 만남의 자리를 열었습니다. 그중 5회차로 진행된 11월 29일의 행사 ‘같이 읽기 - 웹진 《비유》를 중심으로’에서 다뤄진 작품들을 이번 ‘큐레이션’ 코너에서 재구성해 소개합니다. 시인이자 비평가인 오석화, 소설가 이미상, 비평가 이하나의 글은 각기 다른 관점과 해석을 통해, 《비유》의 글들을 다시 읽어보기를 제안합니다.



잠이 오지 않을 때 양을 세어본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머릿속 들판에 울타리 하나 세워두고 양들이 차례로 뛰어넘는 장면을 상상한다. 그러다 비몽사몽간에 어디까지 셌는지를 잊어버리곤 한다. 불면자로서는 양 한 마리쯤 잃어버려도 큰 문제가 아니지만, 실제의 목동이라면?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먼 옛날의 목동들은 울타리에 칼집을 내어 눈에 보이지 않는 수를 눈에 보이는 홈으로 새겼고, 그 표식을 본 사람들은 직접 세어보지 않고도 양들이 몇 마리인지 알 수 있었다.
  머릿속에서만 벌어지지 않고 표면에 작은 상처를 남기는 일. 목동이 새긴 이 ‘홈’은 스코어(score)라는 단어의 어원으로서, 이는 시대를 거치며 술집의 장부가 되고, 스포츠 경기의 점수가 되고, 급기야 음악의 악보까지 의미하게 되었다. 음악 분야에서 스코어는 연관된 보표들을 한 번에 읽기 위해, 여러 보표를 세로로 ‘그어 연결하는 선’으로부터 총보(總譜)를 뜻한다. 이 단어의 여정을 돌아보았을 때, 결국 스코어란 ‘홈’으로서 ‘셈’과 ‘기록’을 가능케 하는 표식을 가리킨다. 나아가 그 표식은 여러 층위를 ‘연결’해 하나의 수행(performance)을 호출하는 장치로 발전한다.

웹진 《비유》 75호에 실린 「‘윙크 워크숍(가제)을 위한 워크숍’ 옆에서 뒤에서」에 등장하는 스코어가 호출하는 것은 재미있게도 ‘윙크’다. 우리 몸이 수행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움직임 중 하나일 윙크를, 그러나 기존의 사회적 의미와 다르게 성립된 규칙과 지침 속에서 행해본 적이 우리에게 있을까? 눈꺼풀 하나의 깜빡임에 집중할 때 우리에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일까?

눈을 ‘마음의 창’ ‘소통’ 뭐 이런 단어들로 표현하잖아요. 근데 솔직히 좀 추상적이죠. 저는 눈을 감고 뜰 때 그 순간에 집중하면 묘하게 매콤함이 느껴져요. (...) ‘워크숍 워크숍’을 준비하면서 눈을 감고 뜨는 행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어요. 눈꺼풀이 닫혔다가 떨어지는 순간의 촉감이 낯설게 느껴져 자꾸 해보니, 어느새 눈을 감고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어요.


―김시원, 이윤정, 「‘윙크 워크숍(가제)을 위한 워크숍’ 옆에서 뒤에서」 부분
이처럼 스코어가 지시하는 대상이 악보에서의 ‘음’이라는 청각적 요소에 국한되지 않고 ‘윙크’와 같은 미세한 움직임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면, 역으로 우리는 주변의 무수한 표식―즉 텍스트들을 스코어로 읽어 그것이 의도한 바를 넘어선 움직임을 끌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위 글에서 인용하는 이세승 안무가는 자신의 〈읽고 추기〉 워크숍을 통해, 거기서 춤을 ‘상상’할 수 있는 한 “책은 댄스 스코어가 될 수 있다”고 과감하게 말하고 있다.1)
  문득 문학 웹진인 《비유》에 움직임이나 춤을 다룬 또 다른 텍스트가 있을까 궁금해졌다. 웹진의 검색 기능을 활용해 ‘춤’이라고 검색했을 때 걸려 나온 결과들은 그러나 다음과 같았다. ‘입맞춤’, ‘엉거주춤’, ‘멈춤’…… 멈춤도 춤이다?

화이트 큐브 형태의 공간에서 시인과 안무가가 함께 만든 퍼포먼스가 이루어지고 있다. 정면으로 보이는 흰 벽면에는 하얀 배경 위에 검은 글씨들이 쓰이고 있다. 흰 옷을 입은 안무가는 그 글자들 앞에서 춤을 추고 있다. (또는, 그 글자들로 이루어진 벽에 기대어 있다.) 왼쪽 벽면에는 큰 조명과 테이블, 그리고 그 테이블 앞 의자에 앉은 시인이 있다. 시인은 이 이미지 아래에 인용된 시를 쓰고 있다. “어떤 날은 벽에 기대고 싶은 때도 있다 벽이 바닥보다 편안하게 느껴질 때, 나는 그것을 공연이라고 부른다”
「빛과 신의 놀이-교차 창작의 시」

  어떤 날은 벽에 기대고 싶은 때도 있다 벽이 바닥보다 편안하게 느껴질 때, 나는 그것을 공연이라고 부른다 이 공연은 번역이다 저기 움직임을 무어라고 부를까 두드리면 열리는 소리라고 부를까 열리는 소리는 열리는 소리이다 계속 열리는 소리이다 끝없이 열리는 문이다 그렇게 부딪치는 소리이다


―김연필, 「빛과 신의 놀이」 부분
김연필 시인의 시 「빛과 신의 놀이–교차 창작의 시」에는 독특하게도 글의 저자와 더불어 춤의 저자가 나란히 적혀 있다. 또 그 아래 있는 링크를 타고 들어가면, 두 저자인 시인과 안무가가 실시간으로 텍스트와 움직임을 주고받는 퍼포먼스 영상을 볼 수 있다. 텍스트가 지면에 ‘쓰이는’ 대신 무대의 일부에 ‘새겨지는’ 이 공간에서, 시는 언어적 의미로 해석되기에 앞서―최소한 그와 동시에―어떤 움직임으로 “번역”되는 스코어로 쓰이고 있으며, 또 그 움직임으로부터 역으로 자신을 지속시키는 “교차”를 발생시키고 있다.
  그러나 왜 다른 장르가 아닌 시일까? 나는 어떤 언어로 쓰인 텍스트가 시로서 구분되기 위해서는, 그 텍스트에 얼마간의 수행성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그리고 이것이 시의 기원이기도 하다). 시는 자신의 의미를 전달하기에 앞서, 예컨대 언어의 반복과 중단을 통해 읽는 몸에 리듬을 부여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이는 시가 특정한 움직임을 명시적으로 지시한다는 뜻이 물론 아니고, 오히려 자신을 구성하는 바로 그 언어에 언제나 새로운 기호적 차원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를 스코어로 읽는다는 것은, 텍스트를 뜻풀이의 대상으로만이 아니라 연결과 절단의 규칙으로, 즉 자신만의 맥락과 계열 속에서 우리의 호흡과 주의를 배치하는 지시문으로 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텍스트와 스코어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현상은 비단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음악 쪽에서도 발생해온 것이다. 「연주를 시작하세요」에서 음악비평가 신예슬은 악보가 음악 기호의 모음이기에 앞서 “누군가 무언가를 수행한 결과, 혹은 누군가 무언가를 수행하게끔 하는 텍스트”이며, 따라서 “과거 혹은 미래의 수행을 바라본”다고 말한다. 이 수행성을 따라 악보를 읽는 일, 즉 그것의 의도에 따라 소리를 ‘밖’으로 꺼내는 일을 우리는 ‘독보’라고 부른다. 그러나 어떤 악보를 소리 내지 않고 ‘안’으로 읽어낼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텍스트로 ‘독서’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는 이 교차의 순간이야말로 ‘악보가 현재에 놓이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생각의 멈춤과 시작은 연주와 침묵처럼 명확히 교대되는 것이 아니라 밀물과 썰물처럼 점진적인 것에 더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이 스코어[텍스트 스코어]를 수행하는 더 좋은 방법은 그 점진적인 변화를 계속해서 받아들이게 되는 ‘읽기’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읽고, 읽음으로써 무언가를 수행한다.


―신예슬, 「연주를 시작하세요」 부분
신예슬이 인용하는 김뉘연의 시나 슈톡하우젠의 텍스트 스코어와 같이 어떠한 “멈춤”을 가리키는 텍스트가 있을 때, 그것을 침묵으로 ‘연주하는’ 일과 생각으로 ‘읽어내는’ 일은 문득 겹쳐지며 현상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이 과정을 거슬러 오름으로써, 우리는 독서를 위해 쓰였다고 믿었던 텍스트들을 “조금씩 의심”하고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이세승 안무가의 말처럼, 문제는 ‘상상’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종이에 새겨지고 책으로 닫혀 어딘가 완강해보이는 텍스트들이 있는가 하면 웹진에 실린 것과 같이 페이지를 미끄러지며 타고 넘을 수 있는 텍스트들도 있다. 우리가 ‘읽기’라는 움직임을 통해 하나의, 또는 그 이상의 텍스트를 각자의 방식으로 통과할 때, 그것은 독자로서 우리가 수행하는 ‘몸짓’이자 ‘춤’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어느새 적지 않은 텍스트가 축적된 《비유》는 하나의 훌륭한 무대가 되어줄 것이다. 혹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아직 감이 오지 않는다면, 이 문장 아래 적힌 글들을 클릭하는 것으로 출발해보면 어떨까? 울타리를 뛰어넘는 양처럼 말이다.

관련 작품 바로가기
① 김시원, 이윤정, 「‘윙크 워크숍(가제)을 위한 워크숍’ 옆에서 뒤에서」 click
② 김연필, 「빛과 신의 놀이」 click
③ 신예슬, 「연주를 시작하세요」 click


오석화

2018년 《비유》에 시 「P.S. Sorry So Sloppy」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도 쓰고 공부도 하지만 블로거인 듯하다. 요새는 베르나르 스티글러에 관심이 많다. 블로그 ‘무개화차’(바로가기)를 운행 중.

2026/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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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승, 「춤 예술 교육의 고유성 찾기: 〈읽고 추기〉 워크숍」, 《춤웹진》 2025년 7월.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