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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어떻게, 쉼을 얻고 계신가요?

비수기 수기(手記)

백소정

제250호

2024.02.29

0. 모두들 안녕하신가요?

저는 안녕합니다. 아, 저는 연극 배우 백소정입니다. 현장에서 만났던 동료들도, 만나는 중인, 곧 만나게 될 연극인 모두 ‘안녕’하신지 묻고 싶어요. 그리고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간 관객 여러분도요. 코로나 시기 동안은 서로 거리감을 좁히기 위해 꽤나 애썼던 것 같은데, 오히려 그 이후로 자연스레 각자의 공간과 시간 속으로 자리 잡아 더 거리가 생긴 것 같아요. 그때 닿았던 온기들이 제 몸에 몽글몽글 남아 있어요. 그래서 궁금한가 봐요. 동굴 속에서 머물며 안식하고 계신가요? 끊임없이 추락하며 잡을 곳을 향해 손을 뻗고 계시는가요? 상상치도 못했던 경험 위에 두둥실 올라탔나요? 어느 순간에 있든지 부디 안녕하시기를 바라요. 혹여 목소리가 닿지 않는 곳에 있더라도요.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아래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주변으로 커다란 나무들이 있다. 사진 중앙에는 가지 없이 몸통이 일자로 곧게 뻗은 키가 큰 나무가 있고, 백소정이 그 나무에 기대어 물구나무를 서고 있다.

1. 당신은 쉴 수 있는 인간입니까?

재작년에 처음으로 ‘비수기’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어요. 연극 활동이 없는 시기를 비수기라고 하더군요. 사실 저는 필라테스 강사 일을 하고 있어서 비수기라는 말이 잘 와닿지는 않았어요. 연극 배우 입봉과 필라테스 일이 거의 동시에 시작되어서 양쪽 일을 오가며 허덕이고 있거든요. 그래서 활동이 없는 시기가 반드시 필요하기도 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딱 올해만 살 것처럼 제 몸을 혹사하고야 말았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또 쉬기를 바라진 않았어요. 쉰다는 것은 곧 잊힌다는 것 같은, 원치 않는 정지 상태에 놓이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캐스팅 제의가 없어서 타의로 쉴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든 그 시기를 더 알차게 보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쓰고 보니 정말 저는 쉴 수 없는 인간이네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쉴 수 있는 인간입니까?

2. 루틴이, 아니 부적이 되어버린 것이 있나요?

저는 매년 찾아오는 비수기에 정기적으로 하는 훈련이 있어요. 링클레이터 발성과 호흡 훈련인데요. ‘자유로운 음성을 위한다’는 아주 멋진 목표를 가지고 있답니다. 처음 링클레이터를 알게 된 것은 국민대학교 워크숍에서였어요. 김혜리 선생님의 수업을 들었고, 그 이후로 지속적으로 훈련하려고 노력 중이에요. 처음에는 연기를 잘하고 싶어서 뭐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에 링클레이터를 했어요. 작업이 없어서 했고, 작업이 없지만 뭐라도 지속하고 싶어서 했어요. 혼자 하는 게 고단해질 즈음에는 동료 배우들에게 제안해서 팀으로 훈련을 시작했어요. 역시나 혼자보다는 여럿이 낫더군요. 쉬는 동안 생기는 여러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놓기도 하고, 훈련이지만 단지 연습실에 올 수 있다는 것이 위로가 되기도 했어요. 이 기회를 통해 지나온 훈련에 함께 숨 쉬어준 동료들에게 감사합니다. 함께 훈련해주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하품을 하고, 척추를 세우고, 진동을 울려 낼 때마다 서로 느꼈을 것이라고 믿어요.

링클레이터 발성은 자연적 인간의 음성을 자유롭게 하도록 디자인되었으며, 따라서 이 테크닉은 인간의 표현에 자유를 부여할 수 있도록 계발되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몸을 음악적인 악기로서만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악기로서의 기능을 개발하는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표현을 억제하고 가로막는 여러 가지 요소들을 제거하는 데 있습니다. 소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을,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마음과 몸을,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 『자유로운 음성을 위하여』 중


여러 계절의 여러 팀이 지나가고 나서 지금은 고정적으로 만나는 배우 동료들이 생긴 것 같아요. 아주 소수지만 고된 훈련을 굳이 만들어서 하려는 엄청난 배우들이랍니다. (한혜진 배우님, 김의태 배우님을 자랑합니다) 같은 사람끼리 반복해서 훈련하다 보니 그다음을 그려보게 되더군요. 훈련으로만 끝나지 않고, 작업으로 연결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함께 고민했던 것 같아요. 훈련한 것을 적용해 자유로운 음성으로 연기해내는 배우가 되자는 더 명확한 목표가 생겼달까요? 이렇게 쓰면 난처해하면서 ‘자유로운 음성은 턱도 없다’는 얼굴들을 할 것 같은데요. 매년 같은 훈련 방법이지만 우리의 소리는 매년 달라지고 있어요. 저는 그걸 느껴요. 지난 겨울에는 허선혜 작가님의 「바퀴벌레의 오른팔에 달린 아가미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때」라는 희곡을 함께 읽었어요. 매번 다른 훈련 내용에 맞춰서 다르게 읽었는데, 그 워크숍에서 몸속의 진동 공간들을 구체적으로 가지고 놀았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이렇게 논답니다. 제비로 각자 역할을 뽑아요. 그리고 진동할 부위를 뽑아서 극단적으로 연기해요. ‘바퀴벌레’ 역할과 ‘눈썹 뼈’를 뽑아 연기했을 때, (눈썹 뼈로만 소리를 울려낸다고 상상하면서 다음 문장들을 읽어보세요) 소리가 높아지면서 점점 예민성이 느껴지고, 신경질적으로 상대를 몰아붙이게 되더라고요. 이런 식으로 어떤 것이 배우 몸으로 느껴지는지 관찰하고, 밖에서 관찰한 인물의 특징과 효과를 공유하기도 했어요. 저희끼리는 너무 재미있어서 지원서도 넣고, 작가님께도 공연해서 작가료 드리겠다고 당당히 제안 드렸지만… 지원사업의 턱은 높았습니다. 지원사업의 당락과는 관계없이 이제는 몸에 꼬-옥 지니는 부적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링클레이터가 저의 비수기를 넉넉히 채우고 있어요. 여러분이 각기 지닌 부적은 무엇들인지 또 궁금해지네요.
얼마나 잘 연기해 내느냐와 상관없이 그리고 얼마나 좋은 소리를 내느냐와도 무관하게 모두가 각기 가진 몸을 통해 자유로운 음성이 흘러나오기를 바랍니다. 멀리서나마 저의 자유로운 호흡을 응원해주세요. 저도 여러분들의 호흡이 몸과 마음을 평온하게 하기를 잠시나마 기도할게요.

눈 덮인 바위산의 정상 즈음에 녹색 상의와 검은 하의를 입고 흰 장갑을 낀 백소정이 서 있다. 그는 양팔을 난간에 가볍게 걸친 채 허공을 바라보며 웃고 있다.

3. 이제야 쉬는 방법을 배우는 중이에요

22년도 말부터 ‘카포에라’라는 운동을 시작했어요. 함께 작업하던 강보름 연출님이 연습이 끝나면 뒤도 안 돌아보고 어딘가로 향하길래 호기심에 따라나섰는데, 벌써 시작한 지 1년 반이 되었답니다. 덕분에 길었던 작년 비수기 동안 동굴에서 빠져나와 온전히 내 몸에 집중할 수 있었어요. 너무 재미있어서 어떤 때는 연습하느라 카포에라를 못 가면 괜히 심술이 나기도 해요. ‘아니, 카포에라를 못 갈 정도로 연습해야겠어?’ 하고요. 연극하는 것 말고, 처음으로 느끼는 재미있는 일이기도 해서요. ‘공연만 끝나 봐라, 매일 카포에라 가야지?’하고 혼자 벼르기도 한답니다. 연습 들어가면 당연히 일상을 포기해버리는 삶에서, 이제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릴 수 있게 되었어요. 공연하는 삶 이외의 것들이 자리잡는 중이랄까요?
무엇이 그렇게 즐거우냐고 물으신다면 자랑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요. 혼이 나갈 것 같은 운동량에 복잡한 생각들이 묻히는 건 기본이고, 숨을 헐떡이면서 다리를 휘두르는 내 몸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기도 해요. 특히 저는 연기할 때, ‘배움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즐기는데요. 예를 들면 나이가 든 역할을 했을 때, 연습 과정 동안 그 연기를 배울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아요. 그래서 ‘어떤 프로덕션에서 제발 악기나 운동이나 뭔가 기술을 요구해줬으면 좋겠다. 나 그거 어떻게든 배워갈 수 있는데’ 이런 욕망을 내비치기도 한답니다. 여튼 그런 점에서 저에게 카포에라도 연극만큼의 전문적 활동으로 깊고 길게 배울 수 있는 장르였던 것 같아요. 단순히 운동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카포에라 문화에 대해 배우기도 하고, 카포에라 음악과 악기를 배우기도 하거든요. 하나의 종합예술을 내 몸으로 익혀내는 거죠. 일면식도 없었던 세계와의 만남이 비수기의 저를 들끓게 했던 것 같은데요. 요즘은 비수기가 생긴다면 ‘meia lua de compasso’(카포에라 기술 이름) 끝내버려야지. 이런 마음으로 살다 보니 비수기가 오는 것이 무섭지는 않아졌어요. 쉬는데도 쉬는 것 같지 않고, 불안과 걱정 속에 살게 되는 ‘비수기’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이 저를 덮쳤던 시기를 지나고, 이제야 쉬는 방법을 배우고 있는 것 같아요. 여러분은 어떻게, 쉼을 얻고 계신가요?

[사진: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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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소정

백소정
고양이를 좋아합니다. 운동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친구들과 모여 노는 것을 좋아합니다. 친구들과 연극할 때를 더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계속 찾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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