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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는 배우이기 이전에 관객이었지

서점 인스크립트 창업기

박세인

제244호

2023.10.26

2023년 7월, 세인과 주영은 희곡 서점을 열었다. 이름은 인스크립트.

올해 6월쯤에 끄적거려놓은 메모가 있다. To. 출판사OO 대표님께… 저희 서점은… 어쩌고저쩌고…. 그때는 서점을 준비하고 있던 때로, 출판사에 전화 혹은 메일 하나 보내는 것이 너무 두렵고 가슴 떨렸다. 내가 뭐라고. 우리와 직거래 의향이 있을까? 그렇게 덜덜 떨며 썼던 메일은 어느새 일상이 되었다. 서점 오픈 후, 대부분의 직거래 출판사 대표님들께서 서점에 직접 방문해 응원의 말을 건네주었다. 사양산업의 대표주자로 얘기되는 책과 안 그래도 찾는 사람 몇 없는 희곡의 결합이라니. 우려도 걱정도 많이 받았지만, 걱정을 내비치는 얼굴들에서 은근한 기대와 작은 희망 같은 것을 엿볼 수 있었다. 사실 서점 오픈 초반에 머뭇거릴 때, 지금보다 더 많이 무서워할 때, 나를 힘 나게 했던 것은 바로 그런 얼굴들이었다. 완전한 기대도, 백 퍼센트의 우려만도 아닌 무언가 뒤엉킨 얼굴들. 걱정은 가득하지만 어떤 반짝임이 있던 눈빛들. 그 눈들을 위해서라도 서점을 하는 것이 괜찮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은 그 눈들 이전에 나 자신이 있었다. 인스크립트의 소개글에는 ‘무대 위 사람들을 위해서, 무대 곁 사람들을 위해서’ 등등의 말이 나오지만, 사실 그 ‘사람들’은 바로 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이 서점을 떠올렸고, 그것이 우리만을 위한 위로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데에 생각이 가닿은 것뿐이다. 서점의 출발은 관객으로서의 정체성에서 비롯되었다. 한동안 모든 공연이 꼴 보기 싫었던 적이 있다. 어떤 공연은 심각해서 싫고, 저건 너무 가벼워서 싫고. 저 공연은 너무 좋은데 나는 출연하지 못했고, 이 공연은 진짜 별로인데 심지어 나는 여기 출연하지도 못했고… 어떠한 의미, 자긍심, 동지애, 도전 의식 등 소중히 여겼던 것들이 스스로에 대한 불안감에 매몰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비대해져 버린 자아만을 가지고 둥둥 떠다니다가 결국 나는 공연 보기, 공연 하기를 멈춰버렸다. 그렇게 멈추었던 동안 - 멈춤이라는 것에 몸서리치며 괴롭기만 할 줄 알았던 나날들이 의외로 괜찮았다. 아무렇지 않았다. 그 덕에 아무래야 한다는 나 자신에 대한 강박은 잠시 잊을 수 있었고,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생각이나 하며 지냈다. 그때, 공연에 대한 생각이 두둥실 떠올랐다. 정말로 재미있게 봤던 공연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 공연은 내 거구나. 그 공연의 주인은 배우도, 연출도, 작가도 그 누구도 아닌 객석에 앉아 있던 나구나. 내가 보고 느낀 건 아무도 못 뺏어가는구나. 아, 맞다 나는 배우이기 이전에 관객이었지. 관객으로서의 기쁨은 뭘까. 당연히 공연을 보는 데에 있겠지만, 그보다 조금 더 작고, 은밀하고, 손쉽게 누릴 수 있는 기쁨 중 하나는 희곡을 읽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서부터 흘러 흘러 희곡서점을 열게 되었다.

서점 인스크립트의 외관 사진. 빨간색 프레임에 전면이 유리로 되어 있다. 그 너머로 책방 내부가 얼핏 드러난다. 
        입구로 올라가는 세 칸의 돌계단 옆에는 나무 데크가 있는데, 빨간색 좌식 의자가 두 개 놓여 있다.

서점을 한다고 해서 이곳에 들이는 모든 책이 내 책이 되는 건 아니다. 물론 사입해 온 책들이기에 어떤 면에서는 나의 책이 맞기는 하나, 팔려야 하는 운명이기 때문에 온전히 나의 책이라 부르기는 어렵다. 구겨서는 안 되고, 훼손해서도 안 된다. 특히나 책이라는 물건은 책장을 넘기면 앞장이 접히고 들려 곧바로 헌 책이 되므로 서점 주인인 나 역시 책을 살펴볼 때는 조심스레 들춰보아야 한다. 손님들에게도 구입하지 않은 책을 다룰 때에는 그와 같이 조심히 다뤄주십사 정중히 부탁드린다. 많은 책을 곁에 두고 보게 되었으니 마냥 책 부자가 될 줄 알았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늘 책을 사냥하는 기분으로 서점에 출근한다. 어떤 책을 집으로 데려갈까. 어떤 책의 포장 비닐을 벗길까. 무슨 책의 앞 장을 찐하게 열어젖혀 볼까. 책 표지를 넘기고, 첫 장을 펼쳐 꽉꽉 눌러 접을 때의 쾌감은 말로 못 하게 크다. 서점 주인이 되니 그 쾌감이 더 소중하다. 모든 책을 가질 수 없으니. 아니 (어쩌면) 모든 책을 곁에 둘 수 있어도 모든 책을 동시에 읽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언제나 한순간엔 하나의 일밖엔 못 하니까. 여러 책의 여러 줄을 한 번에 읽을 수는 없으니까. 여기서 말하는 ‘동시’란 어떤 시간차를 둔 ‘기간’이 아니라, 정말 이 순간. 어떤 한 순간을 뜻한다. 그래서 자꾸 스스로 차려놓은 희곡 밭을 어슬렁거리는 것이다. 어떤 책이 지금 내 입맛에 제격일까. 무슨 책을 읽어야 내 몸이 좋아할까. 뭘 읽어야 지금 이 순간 필요한 책이었다고 느낄까. 책을 소개하고 신간을 살펴야 하는 필요성에 의해 부러 애써 읽는 책들도 있지만 그 많은 책 중에서도 현재의 나에게 꼭 알맞은 책은 분명히 나를 찾아오고, 그럴 때 읽는 몇 줄, 몇 장은 마음속에 오래 남는다. 휘발되어 사라진다 한들, 내 피 속에 따끈히 남아 오래도록 나를 지켜준다. 그 경험의 기회를 나누고 싶어 서점을 차렸을지도 모르겠다.

신기하게도 서점에 오시는 분들은 이미 그 맛을 잘 알고 계신 듯하다. 손님들은 오래도록 고민하고 신중하게 책을 살펴보다가 필요한 책들을 쏙쏙 골라 집어 들고 내게 건넨다. 그럼 나는 그 책들을 다시 종이봉투에 넣고, 책갈피와 스티커도 쓱 밀어 넣은 뒤 봉투 입구를 봉해 다시 손님에게 건네고, 그들은 부스럭거리는 책 꾸러미를 옆구리에 낀 채 서점을 나선다. 서점을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는지 자주 물어보는데, 당연히 대답은 제각각이다. 그 이유가 어찌 되었든 간에 늘 신기하다. 항상 무대 저편으로만 낯선 사람들을 만나왔던 나로선 하루 안에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과 면대면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지는 것이 새삼스럽고 특별하다. 서점을 여는 날이면 꼭 모든 날이 공연을 한 것만 같아서 체력이 쭉쭉 떨어지고 기가 소진된다. 사람을 만나고 얘기하는 기쁨과는 별개로 힘들다. 그렇지만 나에겐 장점이 하나 있는데, 모든 일을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을 잘한다는 것. 그래서 새로운 일을 할 때 낯설어하고 힘들어하지만, 그만큼 기쁨이 오래간다. 비비언 고닉의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에 이런 말이 나온다. “거리는 내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내게 해준다. 거리에서는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나는 스스로 일종의 거리를 만든 셈이다. 나의 작은 산책로에 사람들이 놀러 오고,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다 간다. 무엇보다, 와서 그들의 삶을 잠시 놓아두고 가는 것이다. 자신들의 시간을 한 조각 떼어 놔두고 간다. 그것이 신기하고, 반갑고, 즐겁다.

서점 인스크립트의 내부 사진. 나무 책장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고, 붉은색 책등의 지만지 희곡들이 하나의 책장 전체에 꽂혀 있다. 
        바로 옆 책장에는 민음사를 비롯한 다양한 출판사의 책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책장 앞에는 철제 프레임으로 만들어진 선반에 책과 화분이 조화롭게 놓여 있다. 왼편 통창을 통해 햇빛이 한껏 들어온다.

서점 운영과 공연 연습을 함께 하는 지금, 생각보다 더 바쁘다. 나는 서점 대표인가, 배우인가. 어쩌면 그 무엇도 아닌 그냥 우주 먼지일지도. 누군가 나와 주영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일어나서 할 일이 있네?’ 그 말이 고깝게 들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할 일을 만들었다는 생각에 은근한 보람과 어느새 뚝딱 일을 벌여버렸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마음이 함께 들었다. 그 ‘할 일’이 연극과 관련된 일이어서 좋고, 또 그동안 해왔던 연기와는 다른 일이어서 좋다. 언젠가는 이 서점이 힘에 부칠 날이 올 수도 있고 - 사실 벌써 어렵고도 힘든 일이 많지만, 어쨌거나 시작을 했고 아직은 가보고 싶은 길이 천 리다. 포기할 가능성이 있으면서도 시작하는 것. 그것이 내게는 중요하다. 언젠가 고요해지고 싶을 것을 알면서도 지금은 시끄럽게 굴어보는 것. 굴곡이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 그 굴곡 안에서 오늘도 서점 문을 열러 간다.

[사진: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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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인

박세인
이야기 곁에 머무르는 것을 좋아한다. 주로 배우로 활동하며, 희곡가게 ‘인스크립트’를 운영 중.
인스타그램 @ppacseine / @inscript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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