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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

박수진

제238호

2023.07.27

[명사] 1. 벌어져 사이가 난 자리

상반기는 ‘일’ 없이 지났다. 여기에서 ‘일’이란 극장에서 상연된 공연이라 할 수 있겠다. 어쩐 지 꽤 긴 시간을 쉬고 있는 기분이다. 고작 반년 조금 넘는 시간을 길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나의 사유는 현저히 짧고, 나란 배우는 그다지 별 볼 일 있는 배우는 아니다. 숨긴 적 없는 실체가 단박에 들통난다. 일 년을 작품 수로 셈하고, 하루를 연습 시간 한 타임, 두 타임으로 계획하는 일에 익숙해진 탓이다. 공연이나 연습 없이 보내는 나날은 여유롭긴 해도 어딘가 부족하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주체적으로 자신의 작업을 만들어 내는 창작자들을 만날 때면, 그 안이 매우 궁금하다. 별다른 영광 없이도 자신의 작업을 충실히 쌓아가는 창작자들을 슬며시 곁눈질하다가도 어쩐지 겸허해지는 마음에 이내 시선이 바닥으로 꽂힌다. 사정이 이러하니 ‘현장’을 ‘극장’으로 한정하는 것은 특별히 물성 때문이 아니더라도 어딘가 좁고, 꽉 막히고 퀴퀴한 인상마저 든다. 차라리 ‘일’과 ‘일’ 사이 벌어진 틈을 보기로 한다.

시멘트가 덧발라진 회색 면 한가운데 세로로 긴 직사각형 틈이 뚫려있다. 
      틈은 전체의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틈 안쪽으로 흙바닥이 보이고, 잎이 무성한 키 작은 식물이 몇 포기 자라나 있다.

아침은 주로 극단(여기는 당연히, 극장)의 ‘책 읽기 모임’으로 시작된다. 팬데믹을 보내며 시작한 온라인 모임이 느슨한 방식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누군가는 작업준비의 일환으로, 누군가는 혼자 읽기 어려운 책을 읽기 위해, 누군가는 고립이 두려워, 누군가는 그저 동료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함께 한다. 어떤 강제 없이, 정해진 순서 없이 유연하게 운영된다. 때때로 음소거 버튼을 따라 동료의 물 마시는 소리, 열어놓은 창밖의 새소리, 밥 짓는 소리, 세탁기 소리, 반려 (인간, 비인간) 동물들의 소리가 열렸다 닫혔다 하며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유영한다. 그러면 애써 꺼놓은 까만 화면에도 각자의 아침이 활자들과 함께 꿈틀거리며 기지개를 켠다. 굳이 인사를 주고받지 않아도 서로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도 ‘책 읽기 모임’의 장점 중 하나다. 극단은 작년 한 해 동안 작업을 쉬었고, 올해 초 예정되었던 공연도 치열하고 다정한 논의 끝에 취소하였던 터라, 내게는 이 ‘책 읽기 모임’이 주는 안정감도 컸다. 3월에는 <멈춘다는 것과, 기다린다는 것>이라는 이름으로 개념 즉흥 퍼포먼스도 했다. 일종의 내부 발표였다. 공연을 취소한 자리에 이전과 다른 시간을 심는 것에 모두가 동의했다. 무언가 싹트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이었다.

[명사] 2. 모여 있는 사람의 속

작년 9월 미아리고개 예술극장에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라는 공연을 했다. 작품은 허선혜 작가의 타자 쓰기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었다. 네 명의 배우 박수진, 박하늘, LI SIYA(이송아), 정예교가 각각의 에피소드를 맡아 각자의 언어로 관객에게 이야기를 전달했다. 과정에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정제되지 않은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희곡도 등장인물이 다른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을 취했기에 나는 ‘호영’이라는 인물을 맡아, ‘하혜선 작가’의 <「백치 아다다」 다시 쓰기에 실패한 극작가> 에피소드를 관객에게 전했다. 어차피 실패할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호락호락하게 실패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무대 위에 ‘백치 아다다’가 있었으면 했다. ‘아다다’ 뒤에 있고 싶은 마음에 객석의 제일 뒷자리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공연은 무대와 객석의 위치를 뒤바꿔 사용했고, 다른 이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모두 함께 이야기를 들었다. 의도와 달리 나는 가장 높은 위치에 앉아 있는 꼴이 되었다. 가장 뒤쪽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덕분에 극장과 사람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특히나, 타자(다른 인물)의 이야기를 타자(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타자(인물)가 되어 말하고 있는 타자(배우)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보는 일은 그다지 흔한 일은 아니라서, 아무리 따뜻한 눈빛을 보내 봐도 서로가 서로에게 몹시도 타인임을 오롯이 느끼는 일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때 나는 ‘아다다’도 ‘호영’도 ‘하혜선 작가’도 그렇다고 잘 계산된 연기를 하는 ‘배우’도, 그러니까 결국 그 무엇도 되지 못하였지만 가장 높이 있으면서도 가장 뒤쪽인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과제는 오직 듣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쯤 읽던 책 『듣기의 윤리』를 여전히 다 끝내지 못했다.

작년 12월 <사월의 사원>이라는 공연에서도, 나는 관객과 제작진들이 보지 못하는 전경을 볼 수 있는 특혜를 얻었다. 공연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올라갔다. 객석과 무대와 오퍼석이 무대 위에 자리 잡았다. 많은 장면은 무대 위에 새롭게 놓인 삼면의 객석 안에 마련된 무대에서 펼쳐졌다. 그 무대 뒤로 배경처럼 극장의 실제 객석이 보였고, 이때 내가 맡았던 배역 ‘메싸’는 주로 그 극장 객석을 활용하는 동선을 사용했다. 리허설 기간과 공연 기간 나는 때때로 외부인이 되어 무대와 객석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었다. 극장 문을 조심히 열고 어둠 속에 몸을 숨기면 빨간 객석을 가로질러 저 멀리 무대 위에 극장이 있었다. 그곳에서 배우가 연기하고 관객들이 관람했다. 조명과 음향이 일렁였다. 연극을 하는 세계였다. 연극을 하면서, 연극을 하는 세계를 목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분장실과 복도와 로비와 계단을 오가는 사이에도 문 안에는 연극이 있었고, 건물의 유리창 밖으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세계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캐리어를 들고 두 세계에 오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무언가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나 의심해왔다. 오직 파편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랬다. 나는 연극이 펼쳐지는 그 풍경을 조각난 채로 간직할 수 있어 기뻤다. 내 곁엔 연극이 애도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나는 그들이 어떤 심정으로 그 말을 하는지 짐작만 한다. 관객들이 퇴장 때 마주하게 될 수린(메싸의 아들)을 위한 물건들을 계단에 내려놓을 때, 나는 이 극장 안에 있는 존재들과 극장 밖에 있는 존재들의 안녕을 진심으로 빌었다.

불 꺼진 극장 객석의 맨 뒷줄에서 환한 무대를 내려다본 사진이다. 
      무대 깊숙한 곳의 발코니에서부터 가림막, 천정을 가득 채운 조명기들이 모두 드러나 있다. 무대 위에는 의자들이 줄 맞춰 놓여 있고, 나무로 된 문이 하나 서 있다. 
      사람들이 곳곳에 앉거나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사월의 사원> 셋업 기간 중

[명사] 3. 어떤 행동을 할 만한 기회

마음이나 생각이 언어로 다듬어져 나올 때, 나는 그것이 납작해지거나 포장된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주로 헤매고 헤매다가 끝까지 헤매는 전략을 쓰거나, 얼굴이 빨개지는 수법을 자주 사용한다. 그나마 그것이 진정성을 담보할 방법이라고 느껴져 그런가 싶다. 그런데도 언어를 주요 소통 수단으로 삼아 배우라는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내가 작가의 ‘언어를 빌려 쓰는 사람’이라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언젠가부터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있었다. 공연을 쉬는 동안, ‘빌려 쓸 언어가 없어’ 생애 처음으로 그간 벼르고 벼르던 글쓰기 수업을 들었다.

동물권 행동 카라에서 진행한 동물 에세이 글쓰기 강좌였다. 강사는 기록 활동가 홍은전 선생님이었다. 예상대로 글쓰기에 숨을 곳은 없었고, 우습게도 나는 그 수업의 많은 부분을 ‘연기’에 대입하여 들었다. “슬펐다. 다정하다 같은 말은 쓴 것이 아니다”라거나 “개미와 새 사이를 오가며 써라”, “묘사하는 글 뒤에는 꼭 의미와 새로운 해석이 함께해야 한다” 같이 단번에 대응시킬 수 있는 말들도 있었고, “어떤 진실을 전달하기 위해 허구를 재현하는 것이 거짓말은 아니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에 대해 쓰고… 모르는 것들에 대하여 쓰고…” 같은 말은 어쩐지 격려받는 기분으로 들었다. 글쓰기는 오직 한 문장을 발견하는 일 같기도 했고, 그 문장 너머로 쓰지 않은 디테일을 비밀처럼 간직하는 일 같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면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과 매번 ‘감자모임’을 했다. 그때 나눠 먹은 감자와 말들이 너무도 달큰해 여전히 그 맛을 음미하고 있다.

[명사] 4. 사람들 사이에 생기는 거리

그간 생계의 일부분으로 지속해 왔던 수업을 멈췄다. 공간과 방식도 다양했고, 만나는 대상들도 늘 달랐지만, 특히나 연기와 깊이 연결되는 수업일수록 자의식이 강하게 들었다. ‘선생’이라는 말은, 그저 먼저 태어났다는 뜻이라고 구태여 한자 풀이까지 해대 가며 스스로를 설득해 봐도 ‘장유유서’가 퇴색된 이 시대에 어림없는 소리였다. 멈춰도 이미 멈췄어야 할 것을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에 익숙하다 보니 계속 흘려보내고 있었다.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가 생각하는 연기에는 답이 없었고, 답을 구하는 이들에게 답이 없다는 것을 계속해서 말하는 것은 어쩐지 무능함을 증명하는 일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적확한 질문을 던지면, 좋은 답을 찾을 수도 있을 텐데 내게는 아직 재주가 없는 것 같다.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며 살고 싶다. 아쉽게도 가까운 곳에서 그런 동료를 만난 적은 별로 없다. 대부분 ‘일’하기 위해 다른 ‘일’을 하며 산다. 나 역시 가르치는 일 외에도 많은 일을 해왔다. 처음 연극을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그릇이 작아진다”고 했다. 경제적으로 쫓기면 남들과 나눌 것이 적어질 수 있다는 이 말을 당시엔 퍽 낭만적으로 들었다. 지금은 이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세상에는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엄청난 일들도 분명히 있지만, 마음만으로는 할 수 없는 자잘한 일들도 많다. 그리고 그 사소한 것들에 생채기를 입기도 한다. 선택이라는 것이 무언가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에 가깝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의존명사] 1. 어떤 일을 하다가 생각 따위를 다른 데로 돌릴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

나는 종종 어딘가에서 사람들을 만났을 때, 특히나 그곳에서 다루는 이야기가 크거나 첨예할 때 “물 흐리러 내가 왔지”라고 말해 버린다. 그러면 거기 있던 똑똑하고 친절한 사람들은 어김없이 웃음을 터트린다. 재롱에 기꺼이 속아 넘어가 준다. 항상 나보다 먼저 도착해서 기다려 주는 이들이 있다. 손짓하는 이들, 반겨주는 이들, 진심으로 환대할 줄 아는 이들 사이에 내가 있다.

[사진: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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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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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미나리아재비
인스타그램 @parksuuuu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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