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걷는 것의 차이, 그 사이

우주마인드프로젝트(신문영, 김승언)

제236호

2023.06.29

‘빼앗긴 유머감각에도 봄은 오는가’

팬데믹 시대를 거치면서 잃은 것 중 개인적으로 가장 뼈아픈 것은 유머감각이었습니다. 코로나19가 창궐한 첫해인 2020년, 중앙정부 산하 기관뿐 아니라 각 지자체와 문화재단들이 재난 상황에 의한 피해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하고자 다양한 형태의 ‘긴급’ 사업들을 쏟아냈습니다. 당연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아무튼 자격 조건을 충족하는 지원 사업들을 찾아 코로나로 인한 피해 사실을 증명하는 지원서를 열심히 작성하고 제출했습니다. 운 좋게 최종 선정된 지원 사업이 있었는데 그 결과 발표로부터 우울증이 시작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어쨌거나 그렇게 나의 유머감각은 사라져갔습니다.
‘우울증’이라고 단정하기엔 사실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으니 ‘우울감’, ‘우울심’ 혹은 ‘우울기’ 정도로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쨌거나 극심한 소심증과 우울심으로 인해 유머감각을 회복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지만, 삶에 대한 의무감을 외면할 수는 없었으므로 커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일종의 이중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나의 우울한 상태가 아이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나아가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 가서 눈 흘기지 않도록, 이 우울한 상태의 근원지를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종로에서 맞은 뺨이 부어오르면 종로에 있는 약국에 가서 안티푸라민을 사서 바르고 아이들과 함께 한강에 가서 소풍을 즐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종로에 있는 약국에서 안티푸라민을 구입하려 하니 약국마다 값이 제각각입니다. 약국이 너무 많은데 어느 약국을 가야 하는지 갈등이 됩니다. 괜히 이 약국에서 샀다가 저 약국에서 100원 싸게 판매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너무 억울할 것 같습니다. 왜 값이 다른지 설명해달라고 한들 납득이 되는 설명을 해줄 것 같지도 않을뿐더러 권위적이고 무례한 태도로 일관한다면 내 단전에서부터 분노가 솟아올라 거친 언어들이 거침없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은 가만히 있는데 호흡이 거칠어지고 맥박이 격하게 빨라지는 일종의 ‘정중동’의 상태로 빠져들어 갑니다.
이쯤 되면 모든 원인이 내 마음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습관’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습관’입니다. 그리고 팬데믹 같은 극한 상황에서 개인의 습관이란 것이 타인에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괴력을 발휘하는지를 경험하고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 코로나 시기의 가장 큰 수확이 아닐까 하고 위안을 삼아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종로에서 맞은 뺨은 얼얼하고 쓰라리고 점점 부풀어 오르는데 내가 왜 뺨을 맞았는지 그 이유는 도무지 알 수가 없고 사과를 받으려 하니 차라리 경동시장에서 싸게 구입하는 게 나을 것 같고, 어쨌거나 아픈 건 내 뺨이라 치료를 하자니 내 돈 들여서 약을 사야 하는 이 상황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으므로 그저 ‘내 뺨을 때린 그 손바닥에 주부습진 같은 만성질환이나 생기면 좋겠다’는 저주 어린 마음만 간절합니다.
결국 외부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시키고 내 마음의 밑바닥을 파헤쳐 보기로 했습니다. 어디가 진짜 밑바닥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갈 수 있는 데까지는 가야만 했습니다. 가다 보니 별의별 상처가 다 있습니다. 아물지 않고 여전히 피고름이 흐르는 상처도 있고 언제든 재발 가능한 정도로 어설프게 나은 상처도 있고 희미하게 남은 흉터에서 지난 상처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슬슬 내 마음의 밑바닥을 확인하는 일을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가려 하니 돌아갈 길도 막막하기만 합니다. 아마 지금은 그 마음속 길의 중간 어딘가에서 헤매는 중인 것 같습니다. 바닥도 표면도 아닌 어중간한 지점에서 방향을 잃고 한참을 떠돌다 보니 희한하게도 이런 상태가 익숙해지고 적당히 적응도 한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다시 마음의 밑바닥을 찾기 위해 뿌연 안개 속에서 손을 휘저으며 걸음을 옮기는데 자세히 보니 내 손바닥에도 희미하게 주부습진 같은 것이 생긴 것 같습니다.

<수상한 나라의 엘니뇨> 공연 사진. 녹음이 푸르른 숲을 뒤로하고 검은 바람막이와 검은 바지를 입은 김승언과 신문영이 사다리를 사이에 두고 
      좌우에 서 있다. 사다리는 두 사람의 어깨보다 조금 낮은 높이인데 좌측은 4단, 우측은 5단으로 높이가 다르게 고정되어 비스듬히 서 있다. 
      수직에 가깝게 서 있는 사다리 좌측에 기댄 김승언은 한쪽 다리를 접어 사다리의 가장 낮은 단에 올리고 두 손으로 사다리를 잡고 어깨를 움츠렸으며, 
      사다리 오른쪽의 신문영은 한 손을 허리춤에 짚고 다른 손의 손가락 끝을 사다리의 세 번째 단에 가볍게 올려두었다.
우주마인드프로젝트 <수상한 나라의 엘니뇨> Ⓒ안산국제거리극축제

‘지경 혹은 경지’

현장에 대한 글을 부탁받았을 때 처음엔 그냥 작품 활동과 관련한 이야기를 하면 되는 건가 생각했더랬습니다. 그런데 쓰려고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습니다. 이전에 올라온 연극in 현장 코너의 글은 우리가 떠올린 글의 성격과 전혀 다른 것들이어서 그냥 일상사를 늘어놓아서는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현장이란 단어는 쉽게 소화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현장? 현장이 뭐지? 떠오르는 것은 소소하고 특별할 것도 없는 신변잡기적인 일뿐인데.
잠시 삶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자면 이렇습니다.
올해 5월 안산국제거리극축제에 참여했을 때 일입니다. 정말 이젠 코로나가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다들 들썩들썩했습니다. 지난 3년간의 시간 - 매일 아침 확진자 수를 확인하고, 이번엔 무사히 공연을 할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코로나에 걸려 오진 않을까 전전긍긍, 급작스레 바뀌고 취소되는 일정에 가슴이 타들어 가고, 매일 매일 일상과 비상 사이를 줄타기하던 시간들이 정말 거짓말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전의 감각으로 아주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3년 만에 사회적 거리두기 없이 열리는 축제였고 우리도 정성 들여 준비한 공연을 선보일 예정이었는데 뭔가 상황이 좋지 못했습니다. 3일간의 축제 중 이틀 동안 엄청난 비가 예보되어 있었고, 아이들은 고열에 토하고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아… 잠깐 사이 수만 가지 생각이 오갔습니다. 코로나면 어떡하지? 공연은? 오늘 리허설은? 누구한테 맡기지? 맡길 순 있는 건가? 공연을 못 하게 되면? 여태 연습한 것은? 공연료는? 이번 달 카드 값은? 차라리 비가 계속 많이 왔으면… 다행히 코로나는 아니었고 열나고 토하는 어린이 둘을 어쩔 수 없이 집에 두고 최대한 시간을 빠듯하게 잡아서 움직입니다. 가는 길에 끼니를 해결하려고 했는데 그 흔한 김밥집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길은 막히고, 시간은 점점 밭아지고, 차 기름은 떨어져 가고, 주유소는 멀고, 공간 적응과 음향 체크는 할 수 있는지, 아이들 걱정, 공연 걱정에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된 상황에 올라간 공연은 단번에 힘을 폭발시켜야 하는 단순 육체노동에 가까웠습니다. 나도 배우답게 공연을 올리기 전 몸도 섬세하게 풀고 목소리도 가다듬고 꼼꼼하게 볼륨 체크하고 기술적인 준비들을 단단하게 한 다음 공연을 올리고 싶은데, 이게 웬걸, 호흡은 말 그대로 턱 끝까지 차오르고 집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웜업은 무슨, ‘공연하면서 몸 푸는 거지’ 하면서 정신없이 공연을 올리고 나면 과연 이것이 예술 작업인 것인지, 아니면 정신없이 정신없는 육체노동인지, 침체된 육체를 끌고 가는 정신노동인지,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심각한 자아분열 상태에 다다릅니다. 그래도 공연을 하다 보면 여태껏 열심히 준비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관객의 눈빛과 표정을 통해 확인하게 되고, 정리되지 못한 것들이 관객을 만나면서 좌라락 정리가 되면 ‘아, 우리 공연이 이런 거였구나, 역시 공연의 완성은 관객이야’ 감탄하며 비로소 말라버린 입술과 빈 위장을 적시고, 마음의 짐들을 잠시 내려놓게 되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떠오른 이야기를 기반으로 창작 작업을 하다 보니 일상의 모든 순간이 작업의 현장이 되는 것인데, 실상은 이게 생활을 하는 것인지, 일하는 것인지 구분이 안 돼서 늘 피곤한 창작자에 불과합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가족인지, 애인인지, 동업자인지, 동료인지, 적군인지, 아군인지, 마구 버무려져 있는 이 일상이 과연 작업의 현장이라 할 수 있는 것인지… 호박을 썰면서 공연 장소에 대해 논의하고, 아이들 젖은 머리를 드라이기로 말려주면서 공연의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일상생활 하는 것과 작업하는 것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아서 결과적으로는 끊임없이 일하고 있는, 산만하기 짝이 없는 일상 현장입니다. 더구나 정작 집중이 필요할 때는 모드 전환이 잘되지 않아, 이것저것 생각하고 결정해야 할 일들이 마구 쌓여 있는데 버벅대기만 하다가 막상 기한이 다가오면 다시 또 정신없이 쫓기고 뒤죽박죽이 되어, 마침내 삶이 예술이 되는 경지 혹은 지경에 이릅니다. 정말 예술적 삶이 되면 참 좋을 텐데, 일상은 끊임없이 예술 노동을 하는 일터밖에 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굳이 정신 차리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삶이 어떻게 하나로 정리되겠어? 이런 면도 있고 저런 면도 있고, 그래서 뭐라고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게 예술이고, 인생인 것 아니겠어?’ 이러면서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저절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현장이지?

우주마인드프로젝트의 집안 풍경을 찍은 사진이다. 
      나무 무늬의 바닥 위에 커다란 레고 블록과 레고로 만든 자동차, 카 캐리어 모형, 퍼즐 등을 비롯한 장난감이 가득 놓여 있다. 화면 중앙 하단에 노란 실내복을 입은 아동의 옆모습이 보인다.
집안 풍경 (사진: 필자 제공)

‘공존을 위한 생존을 위한 관계’

최근에 <수상한 나라의 엘니뇨>라는 공연을 재창작하면서 주제의식이나 지식정보 등의 내용적 측면보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과 표현양식 등의 형식적 측면에 더 깊은 고민이 있었는데 나름의 해법을 발견하고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조금 식상하게 이야기하자면 내용이 형식이고 형식이 곧 내용이라는 다소 20세기적인 고민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고민을 해야만 했던 이유는 창작자와 관객의 관계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질문은 나 자신을 향합니다.
‘중꺾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라고 한다지만 생활과 생존의 문제 앞에서 내 마음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꺾일 수 있다는 딴생각을 해봅니다. 절대적 진리라는 것이 있기나 한 것인지,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게 몇 마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옳음’을 말하는 행위는 태도와 상관없이 항상 옳은지, 생태계라는 말은 정말 건강하고 건전한 ‘공존’의 개념을 내포할 수 있는지, ‘공존’을 말하지만 정말 공존할 의지가 있는지, 공존을 위한 필요조건이 무엇인지, 공존이란 것이 과연 현실에서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의구심이 커집니다.
집중력이 떨어진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일상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일직선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과 저런 생각이 있고, 이런 일과 저런 일이 일어나고, 작품 잘 만들고 싶고, 돈도 벌어야 하고, 작품에 집중해야 하는데, 전염병이 돌고, 아이는 아프고 맡길 데는 없고, 집안일은 밀리고, 지원서도 쓰고 작품 준비도 해야 하는데 몸은 지치고, 통장 잔고는 걱정되는데 여기저기 들려오는 뉴스 소식에 분노와 절망감에 휩싸이고, 핸드폰을 너무 들여다본 탓이라고 생각하지만 핸드폰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고, 온갖 현실적 문제들이 교차하고, 응당 추구해야 할 가치와 그와 상반되는 욕구들이 갈등을 일으킵니다. 일상 현장은 모든 것이 각자의 방향을 향해 마구잡이로 달려가고 있는 잡탕 같습니다.
가장 큰 딜레마는, 예술은 일종의 신념으로, 작품 활동은 그것을 실천하는 행위가 되고자 하는 바람과, 예술이 벌어 먹고사는 수단이 될 때 생길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경제적 문제 사이에, 어떤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 기준과 ‘신념’이 충돌해서 결국에 변경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을 때 생기는 어려움에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술이 꼭 신념이 되어야 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고 관점의 차이도 있겠지만, 일상과 작품 활동이 마구 뒤섞여 있다 보니 우리가 무엇을 떠들어대고 있는지, 어떤 작품을 만들고 있는지 어쩔 수 없이 뒤돌아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작품과 일상은 충분히 실천적인가? 얼마나 날카로운가, 얼마나 치밀한가 하고 말입니다.

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이 몽실몽실 떠 있는 한적한 풍경이다. 사진 중앙 오른편으로 봉긋한 산이 보이고, 산 아래로 가정집과 창고 등이 보인다. 
      사진 중앙엔 하늘이 비치는 못이 있고, 그 주변으로 초록색 풀들이 풍성하게 자라있다.
집 근처 풍경 (사진: 필자 제공)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걷는 것의 차이, 그 사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작년 초겨울 경기도 어느 작은 시골 마을로 이사를 왔습니다. 마음 같아선 서울을 완전히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러진 못하고 살짝 다리 하나 걸친 곳으로 왔습니다. 지금 이곳은 온통 초록초록 합니다. 한쪽엔 풀과 나무들과 논과 밭들이 그득하고, 다른 쪽엔 물류창고와 물건들과 도로에 트럭들도 그득합니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많이 괴로웠고 그래서 나름 실천이랍시고 시골로 왔는데 막상 와 보니 한계만 더 뚜렷이 보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고민은 대체로 대도시의 삶에 기반한 것이었습니다. 거리예술을 하고 있지만 ‘거리’라는 개념도 얼마나 도시적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골 농촌의 거리는 도시의 거리와 정말 다르고, 시골이라고 해서 다 똑같지도 않고, 그래서 여태껏 해온 거리공연들이 지금 이곳의 거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껴집니다. ‘공공’이라는 말도 그렇습니다. 도시 외곽 작은 마을에서의 공공의 의미는 왕복 10차선 도로나 넓은 광장, 잘 조성된 공원이 있는 대도시의 그것과 다르게 다가옵니다.
공연을 만드는 과정도 제품 생산의 구조와 비슷하다고 느껴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작품을 생산하고, 판매하고, 돈을 버는 거죠. 매년 새로운 제품/공연을 생산해 내야 하고, 잘 되면 적당히 먹고 살 정도 되지만, 잘 팔리지 않거나 아예 생산을 못 하게 되면 얼른 다른 방도를 찾아봐야 합니다. 아니면 복지 제도의 문을 두드립니다. 하지만 거기서 또한 경쟁해야 하고 증명해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머리와 마음속에도 어떤 기준들이 생각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가령, 아이들 돌보는 일 ‘때문에’ 공연 준비를 많이 못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정말 그러한지, 그러하다고 여기는 것인지, 아니면 세상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인지, 혹은 사회적 가치 평가가 지나치게 내면화된 탓인지 헷갈립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시되고 중요하다고 말하는 현실 논리 앞에서 아무리 그 논리를 부정해도 자주 실패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경험하지 않았으면 고민하지 않았을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아이들 ‘덕분에’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깨닫게 되고, 도시를 떠나 농촌 시골로 이사 와서 이곳의 생활은 어떠한지 알아가고 있습니다. 만약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우리는 지금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서울의 무지막지한 주거비용은 대도시가 제공하는 수많은 편리함과 편의성에 기인한 것이라는 생각이 꽤 오랫동안 가지를 뻗어나가던 차였습니다. 거주지를 옮긴다는 것이 단순히 이 집에서 저 집으로 향하는 문제가 아니라 생활환경이 180도 달라지는 문제가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그저 생각만으로 그치지 않으려면 강한 결심과 굳은 의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실행에 옮기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극도의 불안감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도시’와 ‘자본주의’적 이상의 반대쪽에서 더 나은 환경과 미래를 향한 길을 찾아 걸어가겠다는 그야말로 원대한 포부 따위는 정작 시골 생활이라는 낯선 현실 앞에서 불편하고 불안하고 고되기만 한 노을처럼 퇴비 냄새 그윽한 바람과 함께 미세먼지 그득한 허공으로 흩어져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도시를 아주 멀리 벗어나지 못한 탓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이 시골에서 보이는 것은, 도시와 시골의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관계로 인한 문제라는 것이고, 단순히 시골 혹은 농촌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불편한 진실입니다. 길을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길을 직접 걸어가기 시작했지만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좌절감이 밀려옵니다. 게다가 한두 걸음 더 가다 보니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길은 환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내가 아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니었다는 자괴감에 휩싸일 틈도 없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이 길을 계속 걸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거부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길을 잃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단지 본 적도 걸은 적도 없었던 어떤 낯선 길을 지금 막 걷기 시작했을 뿐입니다.

<수상한 나라의 엘니뇨> 공연 사진. 비스듬히 선 사다리 사이에 신문영이 무릎을 모아 팔로 감싸 웅크리고 앉아 오른편을 응시한다. 
      눈썹을 덮지 않는 길이의 앞머리를 내리고 뒷머리는 귀 높이에서 하나로 묶었다. 사진 앞쪽에는 초점이 나간 기타와 마이크 스탠드 두 대가 보인다.
우주마인드프로젝트 <수상한 나라의 엘니뇨> Ⓒ안산국제거리극축제

‘일상적 예술, 예술적 일상을 위한 상상력’

사실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복잡한 것이 정리되길 원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어림값으로 단순화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순간 일상―작업의 현장은 진짜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일상―작업의 현장은 각각 고유한 상황 속에서 발생하는 복잡 미묘하고 모순되고 부조리한 순간들로 채워지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지금 우리의 현장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그렇다고 해서 일반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수년 전 거리예술과 인연을 맺게 되고 공연을 해오면서, 작품 활동을 하는 현장은, 일상과 뒤범벅이 되고, 수련과 자기 집중이 아니라, 온갖 잡다한 노동과 산만한 시공간들의 엮음이 되고, 그래서 이젠 대박을 목표로 하는 무명의 여정이라기보다는 나의 삶의 방식, 노동으로서 곁에 존재하게 되었달까요. 더 나아가 우리의 일상은 모든 사람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고, 지금은 이 일을 하지만 언젠가 더 이상 연극을 할 수 없겠다 싶으면 가깝거나 먼 미래에 예술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을 문득문득 상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상한 나라의 엘니뇨> 공연 사진. 숲을 배경으로 한 잔디밭에서 연기하고 있는 김승언의 뒷모습이 보인다. 
      양 무릎을 굽히고 왼팔을 하늘 위로, 오른팔을 바닥으로 뻗은 채 움직이고 있다.
우주마인드프로젝트 <수상한나라의엘니뇨> Ⓒ안산국제거리극축제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선택 버튼

우주마인드프로젝트(신문영, 김승언)

우주마인드프로젝트(신문영, 김승언)
우주마인드프로젝트는 탈극장 장소맞춤형 공연을 지향하는 <토커티브 비주얼 씨어터>입니다. 신문영, 김승언 두 배우가 ‘사회’와 ‘개인’ 사이의 문제에 대한 질문을 품고, 거대 담론 아래 현존하는 우리 삶의 이야기들을 직접적이면서도 섬세하고, 날카로우면서도 유쾌하게 그려냅니다. 유희적 언어와 소리와 음악과 신체움직임이 현실의 공간과 어우러지는 시적 시공간으로 관객을 초대합니다.
https://www.facebook.com/wouldyoumindproject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