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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뱅이가 워커홀릭이 된 건에 대하여

비수기 수기(手記)

이수림

제253호

2024.05.16

비수기라고 하면 평소에 못 했던 자기개발이라든지, 휴식이라든지, 취미를 발견하는 시간들을 보내기 마련인데요, 어째서인지 저는 원래 있던 취미마저 잃어버렸습니다.
다음 작업을 준비하면서 자료조사도 하고 싶고, 늘어지게 누워서 ‘아직 시청 중이신가요?’에 몇 번이고 ‘네’를 누르면서 시간을 보내고도 싶은데, 여러 이유 때문에 잘 되지는 않습니다.

저는 연출부, 오퍼레이터, 무대감독 등으로 공연에 참여했고 최근에는 한글자막 해설 디자인과 오퍼레이터를 하면서 ‘연극으로 전업하기’의 가능성을 찾아가고 있는데요, 2023년은 저에게 ‘예술로 먹고살기’의 체험판 같은 해였어요. 예술인 파견지원사업 기획사업(이후 예술로 기획사업)에 참여예술인으로 참여해서 6개월간 달에 최소 120만 원의 수입이 있었거든요.
예술인이 기업과 함께 예술과 관련된 활동을 기획하고, 내가 가능한 시간에 일을 하는데, 처음에는 자료조사, 아이디어를 고민하는 시간도 노동시간으로 인정되는 것이 괜히 양심에 찔렸어요. 지원서를 쓸 때는 그것을 ‘노동’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잖아요.

지원서 하니까 손가락이 근지러워지면서 말이 많아지네요. 많은 분들이 저와 비슷한 시간을 보내실 것 같아요. 연말과 연초에 뜨는 지원사업을 쓰고, 애타게 결과를 기다리고.
선정되면 기쁘(고 앞길이 막막해지)지만, 선정되지 않았을 때의 은은한 타격감은 몸의 한켠에서 오랫동안 저를 괴롭히곤 합니다. ‘내용이 흐릿했나? 독창적이지 않았나? 노력이 부족했나?’, 그러다가 결국 ‘기관이 원하는 내용이 아니었나 보다’라는 결론을 마음대로 내려버려요. 그래서 이번에 예술로 기획사업 지원서를 준비할 때에는 ‘복지재단이 이런 거 좋아하지 않을까?’를 유행어처럼 주고받았어요. 사실, 재단이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면서요.

‘나의 조력자 유형은?’ 테스트의 시작 화면. 화면 중앙에 일러스트로 다양한 외모를 한 이들의 웃는 모습을 둥그렇게 배치한 이미지가 있다. 이미지의 중앙에는 ‘나의 조력자 유형은? 나는 나의 친구, 동료에게 어떤 조력자일까요?’라는 테스트의 제목이 배치되어 있다. 제목의 상단에는 성평등작업실 이로의 로고가, 하단에는 ‘주최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주관 성평등작업실 이로, 후원 문화체육관광부, 위 내용은 한국예술인 복지재단에서 주최하는 2023년 예술로 기획사업의 일환으로 시행되었습니다’라는 안내 문구가 쓰여 있다. 사진의 하단에는 파란색 ‘테스트 시작하기’ 버튼이 있다.
필자가 2023년, 성평등작업실 이로와 함께 제작한 ‘나의 조력자 유형은?’ 테스트
(이미지를 누르면 테스트 화면으로 연결됩니다)

근데 열심히 쓴 기획안이 선정되면, 기획안을 작성한 시간, 돈을 보상받을 수 있을까요?
기획안을 쓴 시간, 내용으로 시급을 책정할 수 있을까요? 그 돈은 누가 줄까요? 돈 말고 다른 것으로 보상할 수 있을까요? 지원서가 선정될 경우, 지원서를 쓴 사람들의 인건비를 추가 지급할 수 있을까요? 금액은 얼마 정도여야 할까요?
회사에서 구직자에게 ‘면접비’를 주듯이 지원서를 제출한 예술인들에게 ‘지원서 제출비’를 주면 어떨까요? 그 돈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냐고요? 그럼 선정 안 된 사람은 어떻게 하냐고요?
위 질문들에 대한 좋은 의견이 있으시다면, 부디 알려주세요. 매해 지원서를 쓰면서 질문하는데, 이렇다 할 답변은 아직 못 찾았거든요.

대신 예술가의 노동에 접근하는 주장이 담긴 보야나 쿤스트의 글 일부를 소개하겠습니다.

“지금은 모든 무용함을 생산성으로 전환해야 하는 시대이다. 개인은 자신의 잠재적 능력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해야 한다. 지금의 자신과는 뭔가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수행하고, 그러면서 비생산적이고 유용한 일의 영역과는 영영 거리를 두어야 한다. 모든 현재의 순간들이(활동을 하지 않는 순간을 포함해서) 일을 더 잘 하기 위해 투자된다.


[중략]


예술이 서구에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은 간단하다. 서양의 예술가들은 게으르지 않기 때문이다.”1)

중략 이후의 내용은 크로아티아의 개념예술가인 믈라덴 스틸리노비치가 1992년에 쓴 ‘게으름을 향한 찬양’이라는 제목의 선언문 중 일부입니다. 동유럽과 서유럽(사회주의 세계와 자본주의 세계)이 게으름을 어떻게 다르게 이해하는지 비교하면서, 마냥 게으를 수 없는 제도와 시스템을 짚어냅니다.

연초에 부지런히 일한 덕분에 결국 저는 예술로 기획사업의 리더예술인이 되었고, 올해도 6개월의 수입을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작년에 참여예술인으로 함께 활동했던 이청(배우, 접근성 매니저)과 근 몇 년간 접근성 작업을 이어왔는데요, 연극에서의 접근성 이슈가 활발하게 논의가 되었던 것에 비해 여전히 관련 정보는 부족하고, 막다른 길에 놓인 것 같다는 감각을 공유하면서 접근성 작업자끼리의 소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리하여, 공연예술의 접근성 작업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는 ‘조금다른 주식회사’와 예술로 기획사업을 꾸려보기로 했습니다. 아래의 과정을 통해서 준비했어요.

밖에서 보는 ‘예술로 기획사업 지원하기’의 과정

  1. 공고문 확인
  2. 지원서 작성 및 면접
  3. 최종 결과 발표

‘2. 지원서 작성 및 면접’을 조금 더 들여다볼까요?

진짜 ‘예술로 기획사업 지원하기’의 과정

  1. 공고문 확인
  2. 함께 할 기업 정하기
  3. 리더예술인 정하기
  4. 참여예술인 모집하기1
  5. 기업과 컨택하기
  6. 예술로 기획사업 지원 확정 짓기
  7. 기업에게 제안할 아이디어 회의(참여예술인들과 함께)
  8. 기획안 초안 작성
  9. 초안으로 기업과 회의
  10. 기획안 보완 및 수정
  11. 다양한 분야의 참여예술인 모집하기2
  12. 최종 기획안 작성과 검토
  13. 기획안(지원서) 제출
  14. 서류심사 기다리기
  15. 서류 합격
  16. PT 면접 자료 준비, 대본 작성
  17. 예술인-기업 간 면접 관련 회의
  18. 면접
  19. 최종 결과 발표


준비할 땐 몰랐는데, 쭉 적어보니 꽤 많은 과정을 거쳤네요.
이번 사업을 준비하면서 기업과 예술인이 모두 참여한 전체 회의 1회, 기업 담당자와 리더예술인의 회의 1회, 예술인끼리의 비대면 회의 2회 및 대면 회의 1회를 진행했습니다.

화상회의 어플리케이션 줌의 화면을 캡처한 사진이다. 상단에 두 개, 하단에 하나의 영상이 배치되었다. 하단 영상에는 한 화면에 두 명의 참여자가 있다. 참여자의 얼굴은 각자의 이모지로 대체되어 있다.
지원서 작성을 위한 줌 회의 장면 캡처

올해 예술로 기획사업의 총평을 보며, 한 해를 살아가기 위해 종종댔던 비수기의 나와 지원서들을 떠올렸어요.

“예술로 사업은 결과물뿐만 아니라 예술인과 기업·기관이 협업하는 ‘과정’을 지원하는 사업입니다. 예술인의 활동영역 확장이나 기업·기관의 문제해결이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기획이 ‘2개월 리서치-2개월 제작-2개월 제작물 공유’라는 일반적인 지원사업의 틀에 맞춰져 있는 점이 안타까웠습니다. [중략] 이미 기획이 완료되었더라도 필요하시다면 얼마든지 ‘더 이기적’인 방향으로 ‘각자의 속도와 리듬’에 맞추어 기획을 변경해가며 2024년 예술로 사업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2)

2024년 5월 2일 목요일, 2024년 예술로 기획사업의 OT가 있었어요. 결과물에 대한 의무감 대신, 기업과 예술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과정을 고민해보기를 바란다는 당부와 격려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선정된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면, 지원사업을 준비할 때 창작과 관련된 작업보다 다른 것에 더욱 신경을 많이 썼던 것 같아요. ‘예술인복지재단이 좋아할 것 같은’ 거창한 목표와 결과물을 꾸미는 것, 내 이력을 화려하게 포장하는 것. 복어처럼 몸을 부풀리고 공작새처럼 날개를 한껏 펼쳐야 나를 먹여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여전하지만, 다음엔 덜 멋져 보이게 써봐야겠습니다.

“‘덜 일하기’의 가능성은 예술과 일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프리즘이 된다. 게으름의 반란이나 비노동의 특권, 자유 시간의 연장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적 일이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게 하는 것, 아감벤의 말을 바꿔 말하자면, 일이 ‘특질을 갖지 않는 일’이 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바로 이 덜 할 수 있는 능력, 이렇게 ‘적음’ 속에서 끝없이 지속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을 시간적 차원으로 열어젖히고 역사적인 존재로 만든다”.3)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올해는 불안함과 조급함은 조금 내려놓고, 이상하고 게으르고 덜 일하는, 비효율적인 무언가를 제안해보고 싶습니다. 다음 비수기는 이번 비수기보다 게을러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요.

[사진 제공: 필자]

  1. 보야나 쿤스트, 김신우 옮김, 「예술과 노동Ⅰ」, 『우리가 공유하는 시간』, 작업실 유령, 2023, 230쪽.
  2. 2024년 예술인파견지원-예술로 기획사업(단년) PT·인터뷰 심의 총평의 일부.
  3. 위의 책, 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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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림

이수림
팀 다이빙라인에서 공연을 만들고 있습니다. 개념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에 흥미를 가지고 있고, 모든 작업은 사람과 함께하는 일임을 잊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인스타그램 @_divingline, @_waterforest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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