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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에 도래한 퀴어 핍진성

제6회 페미니즘 연극제
팀 티티새 <건널목 교차로>

연혜원

제258호

2024.07.25

제6회 페미니즘연극제의 개막작이라고 할 수 있는 <건널목 교차로>의 첫 번째 공연의 다음 날이었던 2024년 7월 18일, 한국에 역사적인 판결이 일어났다. 대법원이 동성 부부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해야 한다고 판결한 것이다. 대법원은 “건강보험공단이 동성 동반자인 원고를 피부양자로 인정하지 않고 이 사건 처분을 한 것은 합리적 이유 없이 원고에게 불이익을 줘 그를 사실상 혼인 관계에 있는 사람과 차별하는 것으로 헌법상 평등원칙을 위반해 위법하다”며 “두 사람의 관계가 기본적인 사회보장제도인 건강보험의 피부양자 제도에서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차별 행위이고, 그 침해의 정도도 중하다”고 판결했다. 이는 사실상 한국에서 동성 부부의 권리를 인정한 첫 판결이다.

그다음 날인 2024년 7월 19일에는 역시 기념비적인 자리인 제1회 성소수자 대학원생/신진연구자 네트워크 학술대회가 열렸다. 첫 번째 기획 세션이었던 <비판적 퀴어연구의 구축과 과제>에서는 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그 가운데 중요한 주제였던 것 중 하나는 한국이라는 포스트식민주의 지형에서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비롯해 퀴어 담론이 서구의 퀴어운동사를 모델로 삼고 따르는 것을 경계해야 할 뿐 아니라, 서구의 퀴어운동사를 모델로 하는 선형적 발전주의 서사를 경계해야 한다는 논의였다. 이는 자연스럽게 현재 한국뿐 아니라 태국을 비롯해 대만과 일본 등 아시아에서 권리의 인정투쟁으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동성 커플의 가족구성권 쟁취를 위한 운동에 대해 여러 질문을 가지게 하는 것이기도 하며, 동성 커플만으로 대표되지 않는 퀴어 가족구성권에 대한 논의를 더욱 정교하게 하는 상상력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연극 <건널목 교차로>의 무대와 관객은 퀴어의 가족구성권을 둘러싸고 이렇게나 실시간으로 활발하고 복잡한 한국의 사회적 현실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러한 사회적 현실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건널목 교차로>는 퀴어의 가족구성권 논의를 생산해내는 데 동시적으로 적극적인 기여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과장 없이 극장을 운동의 현장으로 만들고 있기도 하다.

<건널목 교차로>의 공연 사진. 베이지색 빈티지 자켓을 입은 지원이 휴대폰을 진지하게 바라본다. 지원의 왼편에 하늘색 셔츠와 검은 슬랙스를 입은 윤정이 무릎을 끌어모아 쭈그리고 앉아 있다. 무대 뒤편에 휴대폰의 메신저 화면이 흐릿하게 영사된다.

연극은 레즈비언 부부 윤정(이청 役)과 지원(김세영 役)에게 균열이 찾아온 굉장히 동시대적이고 사실적인 시간을 조명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한국에서는 실제로도 수많은 퀴어커플들이 결혼식을 올리고, 또 부부임을 선언하고 함께 살아가고 있다. 퀴어커플이 부부임을 결심하고 선언하는 것은 사랑이 깊어졌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 이상의 ‘가족’이 되겠다는 결심이다. 그런 윤정과 지원 부부라는 2인 가족에게 균열을 가져오는 것은 윤정의 혈연 가족이며, 윤정과 지원 각자가 지니고 있는 혈연 가족과의 기억이다. 윤정의 언니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윤정과 지원의 집에 찾아온 윤정의 조카 서율(김가림 役)과, 그런 서율로 인해 달라진 집이라는 장소는 지원으로 하여금 자신의 가족뿐만 아니라 윤정의 혈연 가족들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했던 기억을 복기시킨다.

한편 이 극은 퀴어 청소년 당사자의 삶을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있기도 하다. 레즈비언 부부로 살아가고 있는 이모 윤정과 윤정의 아내 지원을 만나게 되는 조카 서율에게는, 같은 시간대에 학교에서 아우팅 사건의 피해자로 고립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급생 도연(나윤희 役)이 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한 엄마의 죽음으로 고립된 시간을 공유하게 된 도연과 서율의 시간이 교차하며, 둘은 쉽지만은 않게 서로에게 마음의 문을 연다. 이 가운데, 사실 자신도 퀴어 당사자였다는 서율의 고백은 이야기 전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각자 고립되어 있던 도연과 서율의 거리를 좁혀주기도 하며, 이모인 윤정이 서율과 앞으로도 함께 살고 싶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어주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한다. 또한 청소년 성소수자 인권센터의 멘토와 멘티로 만나는 지원과 도연의 관계성은, 가족 밖에서 이뤄지는 퀴어당사자의 세대 간 만남을 구체적인 일상으로 그려낸다. 연극은 이렇게 퀴어 존재 내 복수의 세대 정체성이 교차하는 퀴어 간의 만남을 그려내고, 그 사이에서 관객들이 새로운 질문을 건져 올릴 기회를 만들어준다. 따라서 <건널목 교차로>가 핍진하게 그려내는 동시대 한국 퀴어당사자들의 삶은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네 사람의 등장인물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교차성으로 발생한다.

<건널목 교차로>의 공연 사진. 교복 차림의 서율과 도연이 마주 보고 서 있다. 서율은 가슴께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를 늘어뜨렸으며, 도연은 긴 생머리를 하나로 묶어 올렸다.

연극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장면이 있다면, 윤정이 ‘나는 그저 무민 가족이 좋을 뿐’이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극 중에서도 언급되는데, 토베 얀손은 무민 시리즈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여성 작가로 유명하지만, 동시에 여성 파트너 툴리키 피에틸라와 사망 전까지 함께 산 퀴어 당사자이기도 하다. 윤정, 그러니까 부모가 사망하기 전까지 부모에게 커밍아웃하지 않고, 보수적인 기독교 신자였던 언니와는 퀴어 정체성으로 갈등했던 그에게 무민 가족과, 이를 그린 작가 토베 얀손이 어떤 안식처이자, 어떤 즐거움이었을지, 그 대사를 듣는 순간만큼은 나 또한 퀴어 당사자로서 조금의 거리감도 없이 수긍해버리고 말았다. 한국 사회는 퀴어한 존재들에게 자꾸 증명과 설명을 바란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정말 내가 그 증명과 설명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살아갈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윤정이 그저 무민 가족을 좋아하듯이, 사실 대체로 모든 것은 단순한 사랑에서 시작된다. 다시 단순한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쩌면 이 지난한 시간의 목표일지도 모르며, 그것은 사실 가족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존재론이자 인식론일지도 모른다. 윤정이 무민을 사랑하는 마음은 지원을 사랑하는 마음과 연결되어 있고, 서율을 사랑하는 마음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잃고 싶지 않은 모든 이들을 향한 마음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 단순한 마음들에 위계를 부여하고, 법률적 권리를 제한하고, 규범의 밖에 놓는 것이 사회라면, 윤정이 대사를 하면서 쏟아내는 울음은 사회가 언어와 규범으로 해체해 놓은 마음을 다시 본래의 자리로 소환해 놓는 주술적 순간을 만들어낸다.

아주 조금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도, 그러니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모든 매체와 예술에서 ‘퀴어 청소년’이라는 존재는 일시적인 것, 임시적인 것, 교정되어야 하는 것, 불안하고, 우울하며 고립된 것으로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2005년 다큐멘터리 <이반 검열>, 2007년 다큐멘터리 <아웃 - 이반 검열 두 번째 이야기>, 2020년 다큐멘터리 <명: 우린 같지만 달라>, 2020년 연극 <김이박이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김이박이 고등학교에 입학한다>와 2021년 연극 <제1강: 거절하는 방법> 등 소수의 빛나는 작품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건널목 교차로>는 그러한 계보 속에서 퀴어 청소년을 퀴어 비청소년과의 세대 간 관계 안에 위치시키고, 연령을 넘어 그들의 세대 간 관계를 각자의 기억과 역사로 직조한 서사라는 점에서 퀴어 청소년 서사의 새로운 동시대성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드디어 대체로 무너져도 스스로를 구하고, 비청소년과 적극적으로 관계 맺는 퀴어 청소년들을 극장에서 만나는 시간까지 도착한 것이다.

<건널목 교차로>의 공연 사진. 남색과 흰색 배색의 똑같은 트레이닝복을 맞춰입은 도연, 윤정, 서율, 지원 네 사람이 각자 큐빅 위에 앉아 있다. 큐빅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지원이 웃으며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다른 이들이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들의 뒤편에 철제 사물함이 있다. 열린 사물함 문은 ‘yes queer’ 슬로건과 트랜스젠더를 상징하는 하늘색, 핑크색, 흰색 배색의 깃발 등으로 장식되어있고, 사물함 안에는 어린이 보호 표지판이 놓여있다.

[사진: 김하영]

제6회 페미니즘 연극제
팀 티티새 <건널목 교차로>
  • 일자 2024.7.17 ~ 7.21
  • 장소 나온씨어터
  • 작·연출 조승혜 출연 김가림, 김세영, 나윤희, 이청 조연출 조제인, 한고은 무대감독 안정빈 기획 박용훈, 송서영 무대디자인 윤다현 조명디자인 고민주 사운드디자인 손희정 그래픽디자인 방지연 홍보자문 양수진 행정자문 유세훈 제작 팀 티티새 주최/주관 페미니즘 연극제 운영위원회 후원 한국여성재단
  •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4008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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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혜원

연혜원
책 『퀴어돌로지』 기획자이자 공저자이며 투명가방끈 활동가이자 사회학 연구자, 퀴어예술매거진 발행인 및 편집자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직접 쓰고 연출한 <가장자리를 위한 복수 노트>에 출연했다. hyewony09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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