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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 들고 떠나는 이유는 사랑이 부족해서 때문만은 아니다

얄라리얄라〈GV 빌런 고태경〉

성수연(요다)

제257호

2024.07.11

어떤 것에 빠져 몇십 년 동안 그 일을 계속해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억하심정이 든다. 그 사람의 충만한 사랑 앞에서 내 사랑은 그냥 고만고만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지금 하는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재능도 없는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이 일은 돈이 안 되는데 사랑만으로 버틸 수 없다.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꼬리를 물고 지나간다. 그러다가 가끔은 그들의 지독한 사랑에, 그것을 따라잡지 못해 백기를 들고 떠나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GV 빌런 고태경〉의 공연 사진. 전반적으로 어두운 무대에 혜나가 양손으로 휴대전화를 잡고 쭈그려 앉아 있다. 곱슬거리는 붉은 머리를 하나로 묶었으며, 흰색 긴소매 셔츠 위에 농구 나시를 입고 통이 넓은 베이지색 바지와 검은 운동화를 신었다. 그의 발치에는 영화감독 알프레도 히치콕의 얼굴 사진이 표지 가득 그려진 두꺼운 책 한 권이 놓여있다. 무대 뒤쪽 스크린에 문자 메시지를 입력하는 휴대전화 화면이 영사되고 있다.

현대적 예술가의 초상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연극 <GV 빌런 고태경>1)에 나로 하여금 억하심정을 느끼게 하는, 영화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여럿 나오기 때문이다. 아련한 옛 영화의 사운드트랙이 흐르던 객석의 불이 꺼지고, 주인공 조혜나가 영화감독을 꿈꾸게 한 영화 <초록 사과>의 한 장면이 무대 뒷벽 스크린에 상영되면서 연극이 시작된다. 혜나는 그렇게 들어가기 어렵다는 한국영화교육센터에 입학하며 제도에 의해 예술가로 호명된다. ‘차세대 봉준호’라도 될 줄 알지만 혜나의 졸업 영화인 <원 찬스>에 대한 평가는 시원치 않고, 혜나는 중고거래 앱으로 트뤼포 자서전을 팔고 알바를 하며 애매한 생활을 유지 중이다.
극의 또 다른 주인공인 고태경의 영화사랑은 한술 더 뜬다. 알바로 참여한 GV에서 혜나는 ‘GV 빌런’으로 유명한 고태경에게 <원 찬스>에 대한 질문테러를 받는다. 고태경에 대한 복수심 반 호기심 반으로 혜나는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다며 고태경에게 접근한다. 다큐멘터리를 촬영할수록 고태경은 단순한 GV 빌런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는 <초록 사과>의 조감독으로 데뷔했지만 자기 영화로는 입봉하지 못한 채 15년 째 꿋꿋이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다. 영화계를 떠난 영화인들을 재조명하는 혜나의 다큐멘터리에 어울리지 않게 고태경은 영화계를 떠난 적이 없는 인물처럼 보인다.
주위의 인물들도 마찬가지이다. 혜나의 전 애인이자 독립영화계의 ‘아이돌’로 떠오르는 배우 종현, 한국영화교육센터 동기이지만 영화에서 유튜브로 갈아탄 윤미, 매번 공모에서 미끄러지지만 시나리오를 계속 준비하는 승호.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영화 업계 안팎을 서성거리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GV 빌런 고태경〉의 공연 사진. 빈 무대에 승호와 혜나, 윤미가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 있다. 혜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 말하고, 휴대전화가 장착된 셀카봉을 든 윤미가 입꼬리에 힘을 주고 눈을 흘기며 그를 바라본다. 승호는 입술을 약간 삐죽거리며 허공을 응시한다.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는 불확실함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좇는 이상주의자에 대한 은유로 소비되며 예술가에 대한 낭만과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고전적인 예술가의 서사에서 재능이 강조되었다면, 현대에 와서 그것은 노력으로 바뀌어 더 보편적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고전적 서사에서 예술가의 삶이 비극적이라면 그 이유는 세간이 그의 천재성을 알아주지 못했기 때문이지만, 현대적 서사에서는 예술에 투자한 그의 노력이 보상으로 이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대에 와서 예술가는 천명이 아니라 직업이며, 이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재능뿐만 아니라 버티기와 갓생 살기의 노력이 필요하다. ‘업’의 세계로 내려온 예술가의 서사는 자본주의 시대의 노력과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생긴다.
<GV 빌런 고태경>은 예술가에 대한 전통적인 낭만적 이미지에 더해 현대의 노력하는 사람에 대한 은유로서 예술가 서사를 확장한다. 혜나와 승호는 촬영현장에서 교통을 통제하는 알바를 하며 이런 대화를 나눈다. “영화를 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계속’, ‘열심히’, ‘잘’하는 것. 나는 ‘계속’이랑 ‘열심히’는 하고 있으니까 이제 ‘잘’만 하면 되겠지”.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은 이제 노력하는 행위로 보여진다. 영화에 대해 징글징글한 사랑과 노력을 퍼붓는 고태경의 모습은 혜나가 들고 다니는 카메라로 촬영되어 무대 뒷벽의 스크린에 실시간으로 송출된다. 관객들이 앉은 객석 맨 뒷줄에 앉아 영화 GV에서 질문하는 장면, 영사실에 쳐들어가 오디오 볼륨에 대해 불평하는 장면은 스크린으로도 보인다.
고태경은 본업으로 택시 운전을 하고, 승호와 혜나는 끊임없이 단기 일자리를 구한다. 하지만 인물들이 무대 안팎을 오가며 하는 행위에서는 노동하는 행위보다 영화를 위해 노력하는 행위가 강조된다. “영화는 체력”이라며 체력 단련을 위해 매일 같이 러닝을 하고 북한산을 오르는 고태경, 15년 동안 시나리오를 100고 넘게 퇴고한 고태경. 분주히 단련하는 고태경을 찍기 위해 혜나는 카메라를 들고 무대 위를 뱅글뱅글 뛴다. 혜나의 뜀박질은 다큐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자 노동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것처럼 그 노력은 노동으로 읽히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예술가 서사는 사랑하는 것을 계속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으로서 낭만과 보편성을 얻는다.

〈GV 빌런 고태경〉의 공연 사진. 무대 앞에 쪼그려 앉은 혜나가 캠코더로 길고 검은 박스 위에 앉은 고태경을 촬영하고 있다. 고태경은 노란 긴소매 셔츠 위에 갈색 조끼를 입고 흰 동그라미 무늬가 있는 빨간 넥타이를 맸다. 조끼와 같은 색상의 긴 기장 바지를 입었으며, 헌팅캡을 썼다. 무대 뒤편 스크린에는 혜나가 촬영하는 고태경의 모습이 실시간으로 영사되고 있다. 스크린 상단에는 한글자막이 떠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태경) 풀샷으로 나를 좀 잡으면 어때. 이렇게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걸 보면 투자자들도 신뢰가 가지 않겠어?’

사랑하는 것을 계속 사랑하기 위해

예술가가 예술가로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모차르트와 같은 천재라고 불리는 예술가에 대해서도, 그를 둘러싼 시대의 예술적·역사적 맥락의 요소들을 분석함으로써 모차르트가 모차르트가 되기 위한 조건들이 무엇이었는지 밝혀낼 수 있는 모델을 구성할 수 있다.2)
현대의 예술가 또한 교육제도부터 주변인들과의 관계, 그 관계 속에서 갖게 된 감정(야망, 수치심,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 등)까지 다양한 것들에 영향받고, 수많은 요인이 그가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되고 성공 또는 실패하게 되는 이유를 구성한다. 고태경은 100번 넘게 고친 시나리오를 오랜 후배이자 영화제작자인 민 대표에게 보여주러 간다. 하지만 그가 쓴 시나리오는 1990년대의 향수에 머물러있다. 고태경은 혜나가 편집하고 있는 그에 대한 다큐를 보고 혜나가 그를 실패한 사람으로 그리고 있다고 화를 낸다. 그는 제도가 만든 입봉이라는 절차를 통화하지 못하고 시류에 맞는 시나리오로 제작자를 만족시키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고태경은 스스로 실패한 예술가의 초상으로 비춰지길 거부한다. 예술가가 만들어지는 조건이 있다면 그 주위의 조건이 그를 실패한 영화인으로 편집한 것일지도 모른다.
반면, 혜나에게는 <원 찬스>가 바르샤바 국제영화제에게 초청받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혜나는 바르샤바에서 신인감독으로 주목받기도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뒤 어떤 우울에 잠긴다. 혜나는 승호에게 “감독이 아니라 나는 사실 뭔가가 되고 싶었나 봐”라는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그런 혜나에게 승호는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들이라며 다큐에 들어가지 못한 NG컷들을 보여준다. 영화는 NG컷을 편집한 결과물이지만 인생에서는 NG컷들을 편집할 수 없다.
연극은 이들의 인생을 실패로 보지 않으려는 태도를 견지하며 전반적 작품의 톤을 코믹하게 그린다. 실패를 신파적으로 그리는 데서 멀어지려는 시도는 코미디와 힐링으로 전환된다. 극의 결말에 이르면 혜나가 찍은 다큐가 서울영화제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 고태경의 삶 또한 주목받음으로써 그동안 그가 영화에 보낸 사랑을 보답받는다. 연극은 무대 뒷벽에 내내 걸려있던 기워진 조각보가 펄럭이고 그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며 끝이 난다. 그 조각보는 NG컷들을 이어붙인 필름이며, 극은 그것이 은유하는 인생을 긍정하며 막을 내린다.

〈GV 빌런 고태경〉의 공연 사진. 무대 전반은 어둡지만, 무대 뒤편 스크린으로 커다란 천에 아주 밝은 빛이 쏟아져 공간을 밝힌다. 커다란 천은 다양한 색, 다양한 모양의 천들을 기워 만들었으며, 상단에는 “(고태경) 자네가 열심히 설득하니까 넘어간 거였지”라는 한글자막이 영사된다. 그 앞에 혜나와 고태경이 서 있다. 고태경의 몸은 객석을 향해 있으며, 고개를 우측으로 돌려 혜나를 바라보며 이야기한다. 혜나는 고태경을 향해 서 캠코더로 그를 촬영한다.

연극이 끝나고 나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한 고만고만한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백기를 들고 업계를 떠나지 않기 위해서는 고태경과 혜나의 영화사랑 만큼의 사랑이 필요할까 생각을 잠시 했다. 하지만 곧 사랑하는 일을 계속 사랑하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이 필요하며 나의 사랑이 부족해서는 아니라는 쪽으로 결론을 짓기로 했다.



[사진 ⓒ이지수]

얄라리얄라 <GV 빌런 고태경>
  • 일자 2024.6.21 ~ 6.31
    장소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원작 정대건 연출·각색 이은비 출연 백현주, 김소정, 강해리, 송석근, 안수정 대본구성 및 창작협력 김소정 조연출 이해인 기획 강윤지 무대감독 이미현 무대/소품디자인 정애솔 조명디자인 박유진 사운드디자인 조연하 의상디자인 EK 영상디자인 장주희 그래픽디자인 정김소리 분장디자인 석필선 조명디자인 어시스턴트 안희주 조명 오퍼레이터 김수려 음향 오퍼레이터 김수민 영상 오퍼레이터 유혜연 자막해설 제작/운영 김태령 사진기록 이지수 영상기록 강수연 주최/주관 얄라리얄라 후원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접근성 운영협력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
    관련정보 https://theater.arko.or.kr/product/performance/258095
  1. 정대건 작가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연극이며, 2022년 두산아트랩에서 낭독극으로 공연된 적이 있다. 원작에서 남성이었던 고태경과 박종현을 연극에서는 여성으로 바꾸었다.
  2. 샹탈 자케, 류희철 옮김, 『계급횡단자들 혹은 비-재생산』, 그린비 출판사,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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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요다)

성수연(요다)
연극이론을 공부하고 있으며 수다스러운 관객을 지향합니다. 기억력이 좋지 않아 걱정이며 항상 기억나지 않는 장면을 함께 보충할 동료를 찾고 있습니다. 가끔 요다라고도 불리며 공연을 보고 집가는 길 지하철에서 와랄라 하는 계정(@walalainthesubway)이 있습니다. claire081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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