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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드를 넘어 행진하기

2024 제25회 서울퀴어퍼레이드

김민조

제256호

2024.06.27

퍼레이드, 움직이는 극장

‘당신은 춤을 추고 있는 중인데 갑자기 음악이 멈춰버렸다. 그리고 당신은 계속 춤출 준비를 하고 있다.’ 러시아 연출가 바흐탄코프는 이처럼 어떤 자세가 행위로 이어지지 않고 내적인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를 “중단 속에 살기(vivre dans les pause)”라고 불렀다고 한다.1) 사츠(sats)라는 개념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이 잠재적이고 역동적인, 고요한 표면 아래 봉인된 에너지. 연기라는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이 개념을 우리는 일상 속으로 데리고 들어올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상이야말로 치열한 연기가 수행되는 장이기 때문이다. 퀴어가 아닌 척, 효녀인 척, 우울하지 않은 척, 뉴진스 새 뮤비 생각만 하고 있으면서 성실하게 업무 보는 척, 들뜨지 않은 척, 화나지 않은 척. 비록 우리는 춤출 준비만 하면서 고요한 하루를 보내지만 중단된 춤의 단속적인 리듬과 에너지는 우리의 몸에 차곡차곡 쌓인다. 그리고 축제란, 그 지연된 에너지가 마침내 현실화되는 순간이다.
퍼레이드는 일상의 풍경을 극장으로 삼는 하나의 거대한 공연이다. 연극이 일상으로부터의 차단을 전제하는 것과 달리 퍼레이드는 일상의 한복판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그것을 변형시킨다. 깃발을 따라 행진하는 참가자들이 흡사 배우들과 같은 에너지를 내뿜는 이유는 그들이 실제로 무대를 활보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행진하는 배우들은 저마다 다른 의상을 차려입고 헤어밴드와 팔찌를 끼고 큐티한 화장을 한 동료 배우들의 모습을 즐겁게 곁눈질한다. 아니, 후줄근한 티셔츠와 운동화 차림으로 나온 사람들이라도 상관없다. 이곳은 누구든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고, 자신이 꿈꾸는 모습을 전시할 수 있는 극장이기 때문이다.
퀴어 퍼레이드는 입성식이나 가두 시위 등 다른 종류의 ‘행렬 공연(processional performance)’과 구별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독립적인 무대로서 기능하는 여러 대의 공연 트럭을 행렬 내부에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퀴어 퍼레이드는 n개의 무대가 직렬로 연결된 옴니버스 형태의 이동 극장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여러 개의 트럭 공연이 동시에 상연되는 구조상 참가자 개인이 모든 공연을 일람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그러나 그런 문제에 개의치 않는 것, 단지 지금 내 앞에서 상연되는 퍼포먼스를 즐기며 발걸음을 휘발시키는 것이야말로 퀴어 퍼레이드다운 향유의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을지로입구역과 종각역 사이, 자동차 도로에 퀴어 퍼레이드에 참여한 사람들이 가득하다. 커다란 철제 구조물에는 무지개 배경에 ‘2024 제25회 서울퀴어퍼레이드’가 적힌 좌우로 긴 플래카드가 걸려 있고, 그 오른편에는 ‘yes, queer’가 적힌 정방형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퀴어 퍼레이드에서 보는 주체와 보여지는 대상의 관계는 복합적이다. 트럭 무대에 올라 공연하는 그룹과 퍼포먼스를 관람하는 참가자들, 행렬 바깥에서 퍼레이드를 구경하는 행인 사이에 다층적인 시선의 얽힘이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심지어는 퍼레이드 바깥에서 참가자들의 관심을 촉구하는 장외 퍼포먼스를 펼치는 그룹이 출현할 수도 있다. 2019년에 열린 제20회 서울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한 김연재 연출가는 이러한 다면체적인 시선의 구조를 담백하게 묘사하고 있다.

“퀴어에 반대하는 무리가 구호를 외치면, 행렬 안에서는 환호성으로 대응했다. 퍼레이드를 구경하는 퀴어 반대자들은 행렬 안에서 볼 수 있는 행렬 밖 무대를 만들어주었다. 퍼레이드를 연결하는 트럭이 있고, 트럭을 따라가는 참여자가 있고, 그들을 위해 공연하는 반대자가 있고, 그 무리들을 바라보는 관객이 있다.”2)

퍼레이드는 다가오는 공간에 기억을 새기며 지나가는 행위이다. 퀴어를 혐오하는 이들은 종로라는, 베를린 광장이라는, 삼일로라는 고유한 공간에 대한 기억이 퀴어들의 행진으로 인해 오염된다고 믿는다. 퀴어 퍼레이드는 그러한 시선을 ‘마주보는’ 방식으로 응수하며 걷는 퍼포먼스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사실은 혐오세력이 퍼레이드 참가자들의 시선과 행렬을 구경하는 시민들의 시선 사이에 둘러싸여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퍼레이드를 적대적으로 응시하는 익명의 관객이기 이전에 보여지는 대상으로서 그 자리에 놓이게 된다. 혐오세력의 방해 공작이 (그들의 의도와 달리) 종종 재미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이 퍼레이드의 경관에 흡수된 또 다른 퍼포먼스로서 ‘구경될 수 있는’ 성질을 띠기 때문이다. 퀴어 퍼레이드 특유의 퍼포먼스적 역량은 여기에서도 발견된다. 자신의 신체성을 흔쾌히 구경거리로 전시하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 또한 구경거리의 일부로 만드는 것.

시청역에서 광화문으로 향하는 퀴어퍼레이드 행렬을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 중앙에, 검은색, 회색, 하얀색, 보라색으로 구성된 무성애 깃발이 휘날린다.

도래할 무지개들

이번 서울퀴어퍼레이드2024에 참가한 트럭은 총 8대였다.3) 올해 퍼포먼스 그룹들의 착장은 유난히 다채롭게 느껴졌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모두의 결혼’ 트럭이 선보인 순백색의 웨딩드레스, ‘친구사이×큐사인’ 트럭의 청량하고 스포티한 의상, 파워레인저를 오마주한 다섯 색깔의 크롭티로 무장한 ‘레즈히어로즈’ 트럭, 10년 만에 트럭 무대로 돌아온 ‘언니네트워크’의 알록달록한 세라복, 이번 퀴어문화축제의 시그니처 컬러이기도 한 주황색의 드레스가 인상적이었던 ‘길리어드사이언스코리아×서울드랙퍼레이드’ 트럭 등등. 전반적으로 비비드한 컬러감을 강조하면서도 귀여운 느낌을 살려낸 의상들이 돋보였다고 여겨진다. 필자가 관람할 수 있었던 트럭 무대가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다소 편협한 감상이 될 수 있겠지만, 올해는 홍등이 늘어선 단란주점의 이미지를 강조한 ‘마굿간’ 트럭을 제외한다면 관능적인 매력이나 다크 판타지에 초점을 둔 퍼포먼스보다는 명랑하고 에너제틱한 퍼포먼스를 선보인 트럭들이 주를 이루었다고 느껴졌다.
서울퀴어퍼레이드는 한국 퀴어문화의 변천사를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지표이기도 하다. 레이디 가가의 <Born this way>가 명실상부한 퀴어 애국가로 군림하던 시절을 지나 한국의 로컬한 퀴어문화로부터 발굴된 노래들이 더 많은 퀴어들에게 애창되기 시작했고, 케이팝의 계보화가 진행되면서 세대를 격한 퀴어 송가들이 같은 자리에서 함께 불리는 일도 이제는 낯설지 않게 되었다. 우호적이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한국 퀴어문화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성숙의 과정을 거쳐왔다. 2000년도에 50여 명이 함께 대학로 일대를 걷는 것으로 시작되었던 서울퀴어문화축제가 25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15만 명에 달하는 참여 규모를 자랑하는 서울 최대의 민간 축제로 성장한 것이 가장 분명한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퀴어퍼레이드2024에 참여한 트럭과 퍼포머를 촬영한 사진이다. 트럭에 구조물을 올려 무대를 만들었다. 무대에는 ‘레즈 히어로즈 파워 레즈걸’이 적힌 플래카드를 걸고, 서울의 랜드마크를 장식하였으며, 무대를 둘러싼 난간은 하늘색 털과 별모양 풍선으로 꾸몄다. 트럭 아래 세 퍼포머들이 두 손을 활짝 편 채 입 근처에 가져다 대고 포즈를 취한다.

그러나 우리는 퀴어로서, 퀴어이기에, 질서정연한 행진 대열의 한복판에서 만끽하는 안전한 자긍심의 감각에 대해 어떤 불안을 느낀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일상 속에서 만날 수 없었던 다른 퀴어들의 현존을 확인하는 기쁨을 누리는 동시에 이 극장에 어떤 존재들의 얼굴이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직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프라이드에 대한 위화감은 혐오세력을 비롯한 외부의 환경으로부터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기이할 정도로 성공적인 퍼레이드의 내부로부터 솟아난다.
그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이번 서울퀴어퍼레이드2024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스펙터클은 행진 대열 사이에 나부끼는 팔레스타인 국기와 “퀴어는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반대한다”라는 표어였다. 170여 개의 시만단체가 참여한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한국 시민사회 긴급행동’은 축제가 열리기 전에 서울퀴어문화축제의 공식 파트너십에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과 학살을 군사적으로 원조하고 있는 미국, 영국, 독일 대사관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강력하게 비판한 바 있다. ‘긴급행동’의 비판에 공감하는 시민들은 축제 당일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학살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 퍼레이드 행렬에 합류했다. 전쟁 범죄와 결부된 “퀴어 자긍심”에 반대하며 행진 속에서 또 다른 행진을 감행한 이들의 시도는 한국에서 퀴어문화축제가 자본화·대형화되어가는 흐름에 대한 대항적인 액션이 출현한 사례로 기록될 만하다.
해외의 경우 프라이드를 중심으로 결집하는 대형 퀴어 축제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는 오래전부터 가시화된 바 있다. 1998년 퀴어 축제의 상업화에 반대하며 뉴욕에서 시작된 ‘게이 셰임(Gay Shame)’ 운동, 2006년 마드리드에서 핑크 워싱, 동성애 규범성, 동성애 민족주의 등을 비판하며 시작된 ‘크리티컬 프라이드(Orgullo Crítico)’ 운동, 2015년 프라이드 페스티벌의 탈정치화와 핑크 캐피털리즘에 저항한 ‘나이트 프라이드(Prides de Nuit)’ 운동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퀴어문화축제에 대한 비판이 등장한 것은 올해가 처음이 아니었다. 예컨대 2007년 서울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한 ‘에이즈와 연대(AIDS & Solidarity+)’ 행진단은 에이즈 치료제의 공급 독점으로 이윤을 창출하는 초국적 제약회사와 이들의 후원을 받는 퀴어문화축제를 비판했고,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2023년 결성된 ‘노프라이드 파티’는 “퀴어가 정상 사회의 긍정과 존중을 얻는 일에 방해가 되는 속성을 가진”4) 퀴어 망명자들 간의 연대를 모색하며 프라이드 정치 너머로 나아갈 것을 촉구한 바 있다.
이처럼 퀴어문화축제가 물질적·상징적 자본을 획득하면서 중앙화되는 과정 속에서 이에 대항하는 움직임이 내부로부터 솟아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정당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까지나 억압적인 사회에 맞서는 단일 대오로서의 퀴어 퍼레이드를 상상하는 일에 만족할 수는 없다. 이번 서울퀴어퍼레이드2024의 경우에는 축제조직위원회와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한국 시민사회 긴급행동’ 간에 사전 협의가 이루어져 두 개의 행진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향후 도래할 축제의 현장에 보다 전면적인 균열과 갈등이 가시화될 가능성을 닫아두어서는 안 된다. 서울퀴어퍼레이드를 서울 지역의 유일하고 적법한 퀴어 행진으로 간주하는 대신 더 많은 대안적이고 비판적인 행진이 창발될 가능성을 상상해보는 것, 퀴어문화축제의 역사를 선형적인 진보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대신 규모의 성장 속에서 소실되어온 작고 다양한 가능성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는 것. 퀴어 퍼레이드라는 움직이는 극장이 더욱 불온하고 이질적인 존재들로 인해 교란되는 풍경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과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서울퀴어퍼레이드2024의 현장 사진. 행렬 사이에서 휘날리는 무지개 깃발을 화면 가득 촬영하였다.

[사진 제공: 서울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

참고문헌

빅터 터너, 『제의에서 연극으로: 놀이의 인간적 진지성』, 민속원, 2014.
유제니오 바르바, 안치운·이준재 역, 『연극인류학: 종이로 만든 배』, 문학과지성사, 2001.
아널드 애런슨, 도현진 역, 『환경공연 시노그래피의 역사와 이론』, 연극과인간, 2020.
서울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 『처음 만나는 퀴어문화축제의 역사』, 2024.
김연재, 「다양하게 행진하는 길거리극장: 2019 제20회 서울퀴어퍼레이드」, 『연극in』 제61호, 2019.6.13., www.sfac.or.kr/theater/WZ020600/webzine_view.do?wtIdx=11800.
노프라이드 파티 선언문, 「‘프라이드’가 부끄럽게 여기는 불법 존재들의 노 프라이드 no pride 파티」, 2023. nopride2023.my.canva.site.

2024 제25회 서울퀴어퍼레이드
  • 일자 2024.6.1
  • 장소 남대문로 및 우정국로 일대(을지로입구역~종각역)
  • 주최 서울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 주관 서울퀴어퍼레이드집행위원회
  • 관련정보 https://www.sqcf.org
  1. 유제니오 바르바, 안치운·이준재 역, 『연극인류학: 종이로 만든 배』, 문학과지성사, 2001, 114쪽 참조.
  2. 김연재, 「다양하게 행진하는 길거리극장: 2019 제20회 서울퀴어퍼레이드」, 『연극in』 제61호, 2019.6.13., www.sfac.or.kr/theater/WZ020600/webzine_view.do?wtIdx=11800.
  3. 작년에 이어 레인보우 라이더스가 행렬의 선두를 이끌었고 1호차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모두의 결혼, 2호차 친구사이×큐사인, 3호차 레즈히어로즈, 4호차 언니네트워크, 5호차 마굿간, 6호차 프로젝트 프레이, 7호차 에이스×스팟, 8호차 길리어드사이언스코리아×서울드랙퍼레이드가 뒤를 이었다.
  4. 노프라이드 파티 선언문, 「‘프라이드’가 부끄럽게 여기는 불법 존재들의 노 프라이드 no pride 파티」, 2023. nopride2023.my.canva.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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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조

김민조
협단체에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 비평가를 지향합니다.
동시대 퀴어, 페미니즘, 장애, 포스트휴먼 연극의 흐름에 대한 반응과 아카이빙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 밖으로 나오기와 공연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기를 잘 못해서 큰일입니다.
wingmn1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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