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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 K의 눈물겨운 이소 과정

<십장새>

이의자

제256호

2024.06.27

관객들이 마트에 진열한 계란처럼 오와 열을 맞춰 객석에 앉아 있다. 새의 세계관을 배경으로 삼은 연극 <십장새>에서 관객은 부화하기 전까지 어떤 새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알이나 다름없다. 주인공 K의 퇴근길, 그는 자신을 건드리지 않는 알들 사이 어스름한 객석에 앉고서야 안정을 찾는다. 빈 무대는 조용하고, 어두컴컴한 객석은 냉장고 안처럼 시원하고 안락하다. 하지만 이대로 연극을 끝낼 수는 없는 일이라 새들이 몰려나와 비몽사몽 잠에 취한 K를 다시 무대로 끌어낸다.

<십장새>의 공연 사진. 무대 전면 가운데 검은색 상하의를 입은 K가 의자에 앉아 있다. 그는 무표정으로 두 손을 허벅지에 올려두었으며, 그의 왼 손목에는 푸른색 긴 리본이 묶여 있다. K의 뒤에 선 남성은 K의 머리를 잡으려는 듯 두 손을 그의 머리에 가져다 댄다. 바닥에는 검은 깃털들이 흩뿌려져 있다. 무대의 뒤편에는 일곱 명의 인물들이 K를 바라보며 서 있다.

어린 새가 둥지를 떠나서 독립하는 이소 과정에서 사람이 땅바닥에 떨어진 새를 구조하는 순간, 새는 생존 요령을 배울 시기를 놓치고 만다. 사람 손에서 자란 새는 야생으로 돌아가면 살아남기 힘들다. 새들 사이 ‘키 2m에 4개의 날개를 가졌고 부리 사이로 삐져나온 이빨이 도끼같이 무시무시해서 목이 마르면 지하수를 파버린다’고 알려진 ‘십장새’도 마찬가지이다. 사람 손이 탄 십장새는 사람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만 하루 한 시간씩 산책이 필요한데, 탄산가스 중독이라 사람들로 북적이는 장소에 데려가야 한다. 하지만 무대로 끌려 나와 십장새를 떠맡게 된 K는 사람 많은 곳이 영 불편한 성격이다. 무엇보다 심각한 조류공포증을 앓고 있다.

십장생, 십방새로 극과 극의 혼동을 줄 만한 이름으로 불리는 십장새는 K의 전의식(preconscious)에 기반을 둔 이상 거부할 수 없는 존재이다. 이를테면 십장새는 K에게 “너 사장 애인이야? 스토커? 탕비실 커피믹스 가져간다며?”라고 묻는다. 그것은 회사 직원들이 K에 관해 수군거리는 소문으로, 회사 근처 나무에 앉아 있던 십장새는 창문너머로 이 내용을 들었다. 주변인들이 굳이 숨어서 그의 험담을 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는, K가 처한 회사 생활의 비참한 현실을 드러낸다. 하여 ‘팀장도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라고 십장새에게 애써 변명하는 건 서글픈 자위이다. K가 간섭하거나 침범하지 않고, 보고도 못 본 척 말을 걸지 않는 알들 사이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이유다.

극장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는 K가 어렸을 때 겪은 트라우마가 불시에 터져 나온다. 옥상 위에 있는 앳된 모습의 친구는 종이 박스를 무대로 떨어뜨릴 듯 내밀며 K에게(충분히 사정거리 안에 있는 관객들을 포함해) 병아리를 키워달라고 요구한다. 그 친구는 공연이 끝날 때까지 극 흐름과 상관없이 같은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버틴다. 객석이든 무대든 친구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날 사각이 보이지 않는다. 조명이 매달린 캣워크를 차지한 이상, 친구는 감시탑이기도 하여 빛이나 어둠으로 숨기거나 숨을 수도 없다. K가 어른이 된 지 한참인 지금도 고개를 처박고 들지 못하도록, 먹이를 받아먹지 못해 영원히 어린 새인 상태로 머물 수밖에 없도록, 하여 새장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누르고 있다.

<십장새>의 공연 사진. 캣워크 위에 주저 앉은 친구를 아래서 올려다보며 촬영한 사진이다. 친구에게 나뭇잎 그림자가 진 조명이 드리워져 있고, 그의 앞에는 종이 상자 하나가 놓여있다.

무대에서는 K와 친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관객마다 특정 공포증에 대한 이해가 전혀 다를 수밖에 없는 탓인데, 다만 친구가 소녀인 채로 옥상 같은 자리에 묶인 지박령인 것으로부터 사정을 짐작해볼 수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병아리를 핑계로 피난처가 필요했던 친구의 부탁을 (“이것 좀 맡아주라. 너네 집은 안 혼나잖아”) K가 거절한 이후 혹여 벌어졌을지 모를 친구의 극단적 선택(“재수 없어. 사람들이 다 너 착한 줄 알지. 나쁜 년. 좀 키워달라고! 진짜 떨어뜨린다!”)이 회피성 성격장애로 번지게 된 원인일 수 있다. 극 중 등장하는 새들이 노새, 빡새, 쿠새1), 매무새 등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태도에 관한 부정적인 속어로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보면 K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은 고충을 드러낸다.

옥상에 똬리를 틀고 객석의 알을 노리는 듯 내려다보는 시선이 객석에서도 신경 쓰이고 거슬린다. 무대가 정사각형이고, 2층 높이로 천장고가 높은 신촌문화발전소 극장은 흡사 새장과 비슷한데 그 정점에 위치한 친구는 K를 누르는 걸림돌인 동시에 새장 문에 달린 튼튼한 자물쇠이기도 하다. 자유를 막는 억압인 동시에 외부의 위험을 막는 방패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K가 십장새를 찾는 여정에서 알게 된, 새들이 겪는 현실은 인간의 관점과 다르게 새끼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음식물 쓰레기 경쟁에서 밀려 굶어 죽는 잔혹하고 냉정한 세상이다. K는 이제 ‘자유’란 바람을 타고 다니며 즐기는 낭만이나 여유가 아니라 잠시라도 날갯짓을 멈추면 추락하거나 잡아먹히고 마는 삶의 무게라는 걸 안다.

야생에서 이소란 날개가 온전히 자라지 않은 새끼를 어미가 둥지 밖으로 내쫓는 과정이다. 어미가 며칠만 더 돌보면 잡아 먹히거나 반려동물로 새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의 수는 확실히 줄어든다. 하지만 머무르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포식자에게 몰살당할 확률이 높아진다고 한다. 하여 이소 과정은 몰살을 막는 처절한 생존 방식으로, 사실 확률 계산 역시 인간의 관점일 뿐 어떤 선택이 더 나은 판단인지 알 수 없다. 십장새의 도움을 받을망정 K는 조류공포증을 극복하기 위해 공포의 대상을 마주하는데 그 과정이나 대가가 모험 동화 몇 줄처럼 간단히 넘어갈 수 있는 건 아니다.

<십장새>의 공연 사진. 무대 전반에 푸른색 조명이 깔려 있다. K가 바닥에 가부좌를 트고 앉아 검은색 가죽 토드백을 왼손으로 쥐어 다리 위에 올려둔 채 정면을 멍하니 응시한다. 그의 뒤로 등을 돌려 쪼그려 앉아 K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두 인물이 있고, 그들의 앞에 높은 사다리가 하나 놓여있다. 뒤편으로는 2단짜리 작은 사다리가 하나 놓여있다.

K

K를 처음 만났을 때 십장새는 K에게 ‘긴장했을 때 겨드랑이에서 나는 고수 냄새’가 난다고 했다. 조류공포증으로 인한 불안 반응일 수 있지만, 비유하자면 충분히 날 수 있을 만큼 커진 날개를 접고 있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창문만 열면 날아갈 수 있지 않냐는 십장새의 조언은 새장에 자물쇠 따위 처음부터 없었거나 K가 잠그고 있었다는 걸 암시한다. K는 첫 비행에 성공했을까. 하여 ‘날개가 하도 커서 해도 달도 다 가리’는, 새들의 추앙을 받는 존재로 각성하게 될까.

이소 과정은 늘 불안하고 위태롭다. 무대 밖으로 떠난 K의 행방을 관객은 알지 못한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그레고리 잠자는 가족의 무관심에 서서히 말라 죽지만, 그 과정에서 책임감으로부터 완벽하게 해방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창문 밖으로 추락했을지 모를 K의 사례는 인간의 관점에서 비극이지만 날아올라 내려다봤을 때 좁쌀 한 알만하게 보이는 새장, 그러니까 세상으로부터 자유를 꿈꾸는 새가 된 K의 선택이라면 존중받아 마땅하다. 친구가 상자를 뒤집자 우수수 깃털이 흩날리며 떨어진다. K가 힘차게 날고 있다고 믿는다. K가 십장생처럼 오래오래 살았든 회사가 있는 방향를 향해 “씨방새!”를 외치며 떨어졌든 알껍데기 속으로 숨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계란판처럼 보이는 객석에서 새들이 하나둘 깨어난다. “십장! 십장!” 관객을 향한 십장새의 울음은 “심장! 심장!” 가슴이 이끄는 대로 살라는 조언이다.

<십장새>의 공연 사진. 눈을 크게 뜨고 바닥에 멍하니 누운 십장새의 모습을 위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는 가죽 토드백을 머리에 베고 왼손은 바닥에 늘어뜨린 채 오른손을 가볍게 복부에 올렸다. 그의 머리맡에 핑크색 스니커즈가 가지런히 놓여있고, 주변에는 검은 깃털이 흩어져 있다.

손바닥을 펼쳐봐. 그리고 네 마음을 여기 담아. 그리고 주먹을 쥐는 거야. 다시 펴. 다시 꽈악 쥐고, 여기 니가 원하는 게 있어. 주먹을 가슴으로 가져가면, 십장, 십장~

[촬영: 김재우]

<십장새>
  • 일자 2024.6.14 ~ 6.22
  • 장소 신촌문화발전소
  • 작·연출 수정 출연 김병건, 김수완, 김진복, 이가은, 이관목, 이지혜, 이현경, 조은, 홍명환 음악 우치 그래픽·의상 사니 조명 호랑이삼촌 무대감독 손청강 진행 김강태 오퍼레이팅 강유나 목소리 으뉴짱 후원 서울문화재단, 서울특별시 주최·주관 김수정
  •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4007209
  1. くせ(癖), ‘고쳐야 하는 나쁜 습관’이라는 뜻의 일본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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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자
연극 <산재일기>(23.04)에서 무대와 객석 사이에 있는 이 의자는 산재 앞에 누구도 제3자일 수 없다는 경고인 동시에 관객의 시선이 관습에 머물지 말라는 의도라고 봤다. 연극이 동사라면 ‘이 의자’는 무대에서 말하는 순간 ‘잇자’가 될 수도 있다. gubose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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