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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해진 극장 안, 긴긴밤의 시간이 도래하면

크로서오버 언박싱 <긴긴밤>

장기영

제255호

2024.06.13

예정된 공연 시간이 임박했다. 극장 문이 닫히고 객석은 어둡고 고요해진다. 무대 위 조명이 밝아지고 배우들이 무대 위에 등장한다. 공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둠이 드리워진 극장 안에 ‘긴긴밤’의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긴긴밤>의 리허설 사진. 객석보다 조금 높은 무대 위에 검은 상의와 하의를 입은 여덟 명의 배우들이 일렬로 앉아 있다. 그들은 각자 검은 정사각 큐브를 의자 삼아 앉았으며, 무대 뒷벽 중앙에는 푸른 초원 이미지가 영사되고 있다. 객석에는 빈 등받이 의자가 열 맞추어 놓여있다.

1. 훌륭한 코끼리인 코뿔소, 훌륭한 코뿔소인 펭귄의 이야기

<긴긴밤>은 흰바위코뿔소 노든과 함께 살아온 또 다른 흰바위코뿔소, 코끼리, 펭귄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복수형은 지워질 수 없다. 한 개체는 한 종(種)을 대표할 수 없고, 한 종은 하나의 상(像)으로 축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든은 코끼리 무리에서 자란 흰바위코뿔소이다. 그는 자신이 코끼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에게 안락하고 넉넉한 세계는 이미 당도해 있지만, 자신의 얼굴엔 긴 코 대신 뿔이 자리하고 있다는 고적한 사실(이자 의문)은 자꾸만 짙어진다. 그리하여 그는 코끼리 무리를 떠나 코뿔소 가족과 친구를 만난다. 한편, ‘나’는 흰바위코뿔소에게서 자란 펭귄이다. 그 또한 아늑한 코뿔소의 품을 떠나 펭귄 무리가 있을 바다로 떠나려 한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보고 배운 것은 코뿔소의 것들이니 “코뿔소가 되는 게 더 쉬”워 보인다. 이질적인 세계로 발걸음을 떼는 일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나’는 “코뿔소로 살겠다”며 뒷걸음친다. 아빠가 된 노든은 자신이 들었던 말을 ‘나’에게 들려준다.

“너는 이미 훌륭한 코뿔소야. 그러니 이제 훌륭한 펭귄이 되는 일만 남았네.”

노든은 ‘내’가 태어난 후의 아빠였다. 그러나 지금껏 ‘내’가 만난 세계 전부가 노든이었다고 해서, 그의 탄생이 이룩되기까지의 세계가 ‘없는’ 것이어선 안 되었다. 노든은 ‘내’가 태어나기까지의 아빠들(치쿠, 웜보), 그리고 지금의 노든이 아빠가 될 수 있도록 곁에서 삶을 나눠준 또 다른 아빠들(코끼리들, 노든의 아내와 딸, 앙가부 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서 ‘아빠’는 가부장으로서의 젠더적 개념이 아니라, 한 존재를 존재케 하는 데 크거나 작게 기여한 모든 존재로 읽히길 원한다.1)
‘나’에겐 보고 자란 펭귄이 없었다. 그가 닮을 수 있는 펭귄이 없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펭귄이 되는지, 펭귄이란 무엇인지를 참고할 이가 없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내’가 꼭 펭귄이 되어야만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이미 펭귄이기 때문이다. 수영해본 적 없을지라도 물속을 유유히 누비며, 바다를 본 적 없을지라도 바다로 향해갈 수 있다. 이미 펭귄인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 펭귄인지를 알아내는 일보다, ‘펭귄임’과 ‘펭귄 아님’을 구분하지 않는 일이었다. ‘나’에게서 내가 착안한 것은 ‘무엇으로써 펭귄일 수 있는가’가 아니라, ‘펭귄이 아닐 수 없는 자신을 펭귄이 아닌 것처럼 여기게 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 기제는 무슨 일을 하는가’에 천착하는 것이다. 이미 펭귄인 ‘내’가 펭귄이 되려고 노력할 때 도리어 펭귄됨2)은 훼손되기에.
노든과 ‘나’는 각자 자신이 속해 있던 세계를 떠난다. 이들은 자신의 종(species)이 되기 위해 여정을 떠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그 종이다. 아니, 실은 그 종이라 여겨지지 않아도 괜찮다(이 ‘종’이라는 분류 자체에 대해 의심을 품어도 좋다). 다만 그들은 “혼자서는 코뿔소(혹은 펭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의하여 이 여정을 떠났다. ‘홀로’ 살고 있다는 허상 대신, 자신이 늘 ‘함께’로서 살아왔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실재를 외면치 않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혼자서는 제 자신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예외 없는 존재론적 사실, 즉 우리가 우리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 의해서다(인간의존의 사실, fact of human dependency).

<긴긴밤>의 공연 사진. 한 남성 배우가 앞으로 걸어가는 듯한 포즈로 정면을 바라보고, 그 뒤에 양팔로 펭귄의 날개 모양을 본뜬 자세를 한 여성 배우가 엉거주춤하게 서 있다.

2. 훌륭한 이야기이기 위하여 숨죽여진 것은 없는가

배우들의 열연이 돋보이는 낭독극이었다. 또한 노든, 앙가부, 치쿠, 웜보를 비롯하여 이름 지어지지 않은 생명체들이 종을 넘나들어 공존해온 ‘한 편의 이야기’가 밀도 높게 구현되기도 했다. 관객에게 전달될 내용이 청각적인 것 중심으로 재편되는 낭독극이라 할지라도, 이번 공연은 배경 이미지, 배우들의 동물 흉내, 조명 디자인 및 동선·자리 배치 등이 함께 고려되며 구성되었다. 원작은 관찰자였다가 주인공이 된 1인칭(펭귄 ‘나’) 시점에 의해 전개되지만, 이번 무대화는 8명의 배우들을 무대에 등장시켜 주요 캐릭터를 입체감 있게 표현했다. 또한 후반부에는 ‘나’를 내레이터와 캐릭터 즉 두 명의 배우로 분화시킴으로써 ‘나’의 말이 전언을 거쳐 발언으로까지 이동하는 클라이맥스를 시각적이고도 극적으로 연출해내었다.
다만, 나는 리뷰 첫 단락에서 서술한 이 공연의 ‘밀도 높은 적요’가 다소 우려되었다. 이 층층의 이야기를 ‘잘’ 전하기 위하여 숨죽여진 것들이 눈에 어렸기 때문이다. 나에게 훌륭한 낭독극이었다는 사실이, 그 자리 그 시간에 존재했던 -혹은 존재할 수도 있었던- 다른 몸들에게까지도 통용되는 사실이라 확정 지을 수는 없었다. 나는 아직까지 이 긴긴밤의 서막이 시작되기 위하여 굳게 닫힌 극장 문을 응시한다. 그 문으로 들어오지 못한 이는, 혹은 들어오기 자체를 미리 포기한 이는 없을까.
여기서 가리키는 적요함은 이 공연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극장을 ‘서사 안’으로만 배치하려는 관습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그 관습이 누구를 추방하고 있는지를 말하고자 한다. 공연자가 자신이 준비한 작품을 관객에게 잘 전해야 한다는 ‘일념’은, 이곳―이때에 모인 각기 다른 몸들의 소란을 ‘이물질처럼’ 여기는 감각을 가지게 할 수 있다. 그래서 공연은 더욱 고요해진다. 극을 위한, 극으로 향하는 집중이 깨지는 그 어떤 ‘소란’도 불가해진다. 그 자리에 어울리는 관객이 되는 요령을 강제하는 곳이라면, 그 요령을 수행할 수 없는 이들은 그 장소에서 이미 추방당한 것과 다르지 않다. 자신이 그 공연에 어울리지 않는 몸이라며 예매를 포기하거나, 애초에 극장이라는 장소에 자신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인식 등의 자기검열은, 추방이 이미 시작되어왔음을 말한다.3)

<긴긴밤>의 공연 사진. 남성 배우가 몸을 낮추고 양손을 주먹 쥐어 어깨높이로 들어 올린 채 두 볼에 바람을 넣어 개구진 표정을 짓고 있다. 뒤에 선 여성 배우는 깍지 낀 두 손을 남성 배우의 머리 위에 올린 채 볼에 바람을 넣고 웃음 짓는다.

종종 배리어프리(barrier-free) 공연, 릴랙스드 퍼포먼스(relaxed performances)란 무엇인가, 접근성은 어떻게 수행할 수 있는 것인가, 에 대한 창작진들의 고민을 듣기도 하고, 나 또한 그 고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더욱 개념 혹은 명명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한다. 개념에 함몰된다면 이 ‘무엇’과 ‘어떻게’는 달성할 수 있는/없는 것으로 수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명명 또한 그 이름이 무엇인지를 밝혀두면 마치 그것이 전부라는 안도감을 강하게 호출시키기 때문이다. 어느 공연이 ‘장애, 다양성, 포용성’ 등의 단어로써 자기 지시한다는 것은, 그 무대와 객석에 자리한(할) 이들의 ‘개별의 몸’을 인지하고 의식함을 의미해야 한다. 즉 ‘한때와 한곳을 함께 자리하는 일’의 범주를 넓히는 것이다.
작품 한 편이 잘 매듭지어졌다는 느낌과는 별개로, ‘배리어프리’라는 기호와 연관되길 원하는 공연의 표지4)가 그 기능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는 반드시 고민되어야 한다. 작품 중심의 공연은 기획되고 통제된 무대를, 더욱 조용하고 정리된 객석을 안전한 상태로 인식하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비장애중심적 사회와 극장에서 “장애는 소란을 피우”(토빈 시버스)기 마련이다. 너무나 관습적이어서 ‘조용해진 그 공기’가, 기실 제각기 다른 몸과 그 상태를 수용하지 않아 ‘숨찬 곳’임을 주지시키는 것이 바로 장애이기 때문이다. ‘배리어프리 공연’을 표방한다는 것은, 여러 ‘특성’을 가진 신체가 극장에 함께 모이도록 하는 일이자, 다양한 특성을 가진 신체가 가질 수 있는 ‘상태’의 다양성에도 감응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중요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매혹에서 벗어나, 곳과 때를 나누며 부대끼는 몸들의 ‘소란스러움’을 기대하는 것이다.

<긴긴밤>의 컨셉 사진. 무대 위에 배우들이 모여 각자 동물의 움직임을 본 딴 움직임을 하며 카메라를 응시한다.

<긴긴밤>은 종을 가로지르는 양육, 산란(혹은 출산)만으로는 실현되지 않는 탄생을 이야기한다. 각기 다른 몸과 그 몸이 살아온 시간의 누적을 ‘이야기’로써 탁월하게 전달하는 이야기이다. 지금의 청자는 다음의 화자가 되기도 하고, 지금의 화자는 자신 이전의 화자들을 호출한다. 지금 하려는 이야기 이전에도 이야기가 존재했음을, 우리의 이야기는 지금 막 생성되는 듯하지만, 실은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이야기 덕분에 가능한 이야기라는 점을 층층이 읊어 준다. 이렇듯 세대를 이어, 종을 교차하며 쌓인 이 겹겹의 이야기는, 시점을 분화하고 중첩함으로써 짧지 않은 현재를 가능케 한다.
잠들 수 없어 길어지는 밤에라야 이야기는 이어졌다. 이야기는 시간의 켜를 확장했다. 화자의 말을 이어받는 청자의 말. 이 겹겹의 이야기는 사람을, 시간을 광활하게 만든다. 노든과 ‘내’가 전해준 이 이야기의 짧은 청자로만 남지 않기 위해서는, 즉 우리 또한 이 이야기를 이어받는 화자가 되기 위해선, 조금 더 소란스러운 극장이 필요하지 않을까. 카타르시스 경험을 제공하는 극장뿐 아니라, 다 다양한 몸들과 그 몸이 지녀온 역사들을 부대끼며 교차할 마주침의 현장이다. 닮지 않았어도, 닿지 않았어도 이야기는 이어질 수 있다. 믿어보자, 노든과 ‘내’가 들려준 이 이야기를.

[사진 ⓒ백록담]

크로스오버 언박싱 <긴긴밤>
  • 일자 2024.6.1 ~ 6.2
  • 장소 이음아트홀
  • 원작 루리 각색 및 연출 한규남 출연 정연심, 구자승, 박재현, 채명석, 김하리, 김정규, 강민지, 정혜임 PD 김세영 기획 박인영 조연출·음향 서진희 음악작곡 송인효 영상디자인 윤호섭(시노픽스) 조명디자인 김민재 조명 전하경 디자인 정주원 사진 김광렬(블라썸 스테이지) 접근성매니저(자막) 장준화, 지명규 접근성매니저(진행) 구한나, 임윤채 각색 도움 이상직, 구례극단 마을 주최·주관 크로스오버 언박싱 협찬 서경대학교 캠퍼스타운 사업단
  • 관련정보 https://playticket.co.kr/nav/detail.html?idx=3074
  1. 모든 존재는 산모의 배태뿐 아니라 배태 이외의 돌봄, 즉 태아가 직접적으로 자라나는 장소 외에도 그 배태를 가능케 하는 2차, 3차 이상의 돌봄관계들로써 존재 가능해진다. 여기서 에바 키테이가 언급한 “둘리아(doulia)”는 이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둘리아는 그리스 시대에 산모가 아이를 돌볼 때, 산모를 돌보는 의무를 칭한다. 둘라(doula)라 불리는 산모 도우미는 아이를 직접 돌보는 것이 아니라, 산모를 돌본다. 산모를 돌봄으로써 산모가 아이를 잘 돌볼 수 있도록, 그래서 아이가 산모로부터 좋은 돌봄을 잘 받을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한다.
  2. 에바 키테이의 ‘인간됨(personhood)’이라는 표현을 차용했다. 키테이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돌봄관계’라는 사실을 짚어낸다. 타인과의 돌봄관계 없이 인간은 인간다운 인간이 될 수 없다. 누군가 말을 할 수 없고,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고, 몸을 자유로이 쓸 수 없고, 시장에서 원하는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였다고 해도, 그는 인간이기에 부족함이 없다. 돌봄관계 속에 있는 한, 그는 인간이다.
  3. 이 단락은 ‘릴랙스드 퍼포먼스 제작의 몇 가지 관점’이라는 표제가 달린 권주리의 글에 도움을 받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권주리, 「발달장애 관객만 편안한 극장? 모두에게 특별한 극장!」, 『웹진 이음』, 2020.12.30, (https://www.ieum.or.kr/user/webzine/view.do?idx=145, 검색일: 2024.6.5) 참고.
  4. 이 낭독극이 이음홀에서 공연되었다는 점, 또한 공연 홍보물에 “배리어프리 기반의 연극 공간을 조성한다”는 문장이 적혀 있다는 점, 또한 공연 안내사항에 휠체어 이용 관객 및 한글자막 서비스 등에 대한 문구가 적혀 있다는 점 등은 이 공연이 ‘배리어프리’라는 기호와 연관되고자 하는 의도를 파악 가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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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영

장기영
한국문학을 공부했고 여러 종류의 글을 쓰고 있다. 공연/영화/전시/문학 등에 대한 연구와 평론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주중에는 주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주말에는 쓰고 싶은 글들 혹은 써야 하는 글들을 쓰고 있다.
kalce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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