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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으로서의 연극, 사회적 인정과 가치투쟁

연극인의 커리어: 어떻게 연극하고 있나요?

정리_연극in 편집부

제258호

2024.07.25

웹진 연극in에서는 지난 3월에서 4월 사이, 약 3주에 걸쳐 서울 지역에서 활동하는 연극인을 대상으로 “연극인의 커리어: 어떻게 연극하고 있나요?”라는 주제의 설문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이번 [기획]에서는 이 설문조사의 결과 분석을 토대로, 이 시대 연극 활동의 특수성을 확인하고 연극인의 지속 가능한 활동을 위한 환경을 함께 고민해보려 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연극을 노동으로 인식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럼으로써 연극인의 활동이 어떻게 사회적 인정을 획득할 수 있고 그 가치를 확산해갈 수 있는지 이야기해봅니다. 이 기획의 긴 여정을 마무리하는 이번 기사를 통해, 연극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 예술노동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사회적 합의를 구축해가길 기대합니다.

일시: 2024년 7월 15일 월요일 10시 반-12시 반
장소: 서울연극센터 2층 다목적실
참여: 윤형중(랩2050 대표), 이양구(극작가, 연출가)


양구
윤형중 대표님 오늘 자리에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몇 달간 웹진 연극in에서 연극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하고 좌담까지 이어가고 있는데, 이번에는 연극 바깥의 분을 모셨어요. 법이나 제도, 정책을 포함해서 노동으로서의 연극에 대한 조금 더 근본적인 이야기를 해보기 위해서인데요. 그러니까 연극이 노동이냐 예술이냐를 떠나서, 연극을 노동이라고 하면 뭐가 달라질 수 있는지, 이런 생각들을 나눠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한창 민간 씽크탱크에서 여러 대안에 대해 고민하고 계시는 윤형중 대표님과 대화를 해보고 싶었어요.
형중
네,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작가님이 꽤 오랜 시간 동안 문화정책 관련해서 참여하신 경험들과 그 자리의 논의들을 저도 공부 삼아 좀 듣고 싶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지면에 의미 있는 이야기를 남겨야 하는데, 제가 정책연구를 꾸준히 해오긴 했지만 그래도 연극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건 아니니까 공부를 좀 하고 왔습니다(웃음). 웹진의 기획 기사들을 보면서 제 생각들을 정리하고, 기존에 제가 고민하고 있던 것들과 연결지점을 찾아보았는데요. 제가 요즘 깊이 고민하는 것 중 하나는, 어떤 정책이나 대안에 대한 논의가 왜 제대로 확산되지 않을까, 하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가장 강력한 수단이 사실 정책이거든요. 법과 예산, 주목까지 동원이 되니까요. 사람들의 인식, 그리고 포괄적 차원의 문화까지 바꿀 수 있는 수단이 정책이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정책에 대한 논의는 상당히 미진해요. 그러니 근본적으로 각 분야에 계신 분들이 정책에 대한 관심을 더 가져야 하는 거죠. 저는 그걸 정책 리터러시가 높아진다고 표현하는데요. 그래서 정책 리터러시가 높아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이런 고민들을 많이 해왔습니다.
물론 예전에 소득보장 정책을 고민하면서 예술인기본소득 정책의 입안에 참여한 적이 있었고, 최근 경기도에서 진행하는 여러 기회소득 정책의 자문단으로 참여하고 있기도 한데요. 경기도에서도 가장 먼저 나온 기획소득 정책이 예술인기회소득과 장애인기회소득이었어요. 사실 예술인기회소득 정책은 예술인기본소득 정책에서 비롯된 거였는데, 그 정책의 입안자가 저였거든요. 그리고 예술인청년문화패스라든지 이런 정책들을 입안해본 경험들도 있긴 한데요. 혹자는 저에게 예술을 모르면서 예술인 정책을 만드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할 수도 있을 거예요(웃음). 사실 다른 분야에서 소득보장 정책을 설계해본 경험이 있어서 하게 된 거긴 했는데, 이런 자리를 통해서 이 분야에 대한 이해와 고민도 더 깊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양구
원래 윤형중 대표님은 한겨레 신문 기자셨잖아요. 2014년 노란봉투법이 이야기되던 초창기에, 방금 말씀하신 인식 확산, 일종의 캠페인 같은 것에 제가 참여했는데, 그때 저를 인터뷰하셨지요. 그래서 이 이야기를 바로 이어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대안이라든가 정책에 대한 논의는 많은데 이것이 왜 연결되거나 확산되지 않을까, 라고 질문해보면, 사실 연극계에서는 이걸 굉장히 오랫동안 선도적으로 해왔어요. 캠페인에 참여하는 공연이라든가 소수자 목소리를 대변하는 연극들도 많았고, 때로는 관객과의 대화라는 형태로, 때로는 포럼의 형태로 이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죠. 웹진의 설문에서는 연극인의 일을 ‘연극 활동’과 ‘연극 관련 활동’으로 분류했지만, 사실 두 활동이 상당히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고, 그 속에서 이런 활동들을 해왔던 겁니다. 그런데 해온 역할에 비해 그것이 사회제도 안에서 가시화되지는 못했어요. 공적인 인정체계 안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저평가되고 있는 거죠. 오늘 윤형중 대표님이 연극계 외부의 시선으로, 이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들려주시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좌담 참여자 이양구와 윤형중이 책상을 붙여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있다. 이양구는 앞에 노트북을 펼쳐두고 오른손을 높이 들어 올려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고, 윤형중은 양손을 앞으로 모으고 이야기를 듣고 있다.

연극을 노동으로 인식하고 재평가하기

형중
작가님이 오늘 만남 전에 미리 질문들을 좀 보내주셨잖아요. 노동으로서 예술의 성격과 관련해서, “예술에 대한 향유 없는 노동의 재생산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표현이 있었는데, 사실 이건 노동을 굉장히 숭고하게 여기는 측면의 표현일 수 있을 것 같아요. 노동을 재생산하는 수단으로 예술을 평가하니까요. 이런 맥락을 포괄해서 보자면, 예술이 그동안 사회에서 저평가되고, 제대로 가치평가를 받지 못한 데에는, 예술을 너무 숭고하게 생각하거나 예술을 너무 가치 없게 생각하거나, 그런 극단의 평가가 존재했던 영향이 있어요. ‘자본주의에서 예술이 하는 역할이 도대체 뭐야, 뭘 생산하기는 해?’ 이런 생각과 ‘예술은 노동 같은 거 아니야, 예술은 그 이상의 것이야’라는 평가는 맞닿아 있거든요. 그런데 법률적으로 보면 노동은 숭고하거나 가치 없는 게 아니잖아요. 노동은 그냥 노동이죠. 어떤 행위를 지나치게 높이거나 낮춰 노동과 구분하려는 시도는 대부분 노동권을 약화하려는 기획 속에 있었어요. 마찬가지로 예술에 대한 극단의 인식이 법률에 반영될 때 예술은 사회 안전망 안으로 들어오기가 어렵죠. 노동이냐 노동이 아니냐를 따지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이런 거잖아요. 예술이 노동이면 한마디로 예술가들에게 노동3법상의 근로자성이 생기는 건데, 그러니 근로자가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들을 갖게 되는 거고요.
이런 맥락에서 저는 예술 자체를 노동의 재생산 도구라고 보는 관점은 지나간 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활동을 다른 무언가의 재생산을 위한 것으로 보는 방식, 생산이 가장 중요하고, 생계를 유지하는 노동이 가장 중요하다는 인식을 토대로 근대사회가 구축되었죠. 지금은 그런 인식들이 무너지고 있어요. 이미 많은 생산체계가 인간을 배제하고 있기도 하고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면, 예술만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게 돌봄노동이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활동을, 다른 활동을 위한 수단, 재생산의 도구라고 보면 그 활동의 가치가 저평가되는 거예요. 돌봄과 예술은 그 자체로 삶의 질을 높이고 그 기반을 다지는 중요한 행위인데도 말이죠. 오히려 이런 시대에 예술의 가치를 재평가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인공지능도 작곡을 하고, 그림을 그리며 소설을 쓰는데요. 그것들과 인간의 예술이 구분되는지, 그렇다면 진정 예술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볼 계기가 된 것이죠.
양구
실은 저도 예술노동 개념에 대해 깊이 공부해본 적은 없어요. 오늘 자리를 준비하면서 관련 논문들을 찾아보고, 좀 전에 말씀하신 관점 같은 것을 인용해봤는데요. 예술에 대한 향유 없이 노동의 재생산이 불가능하다는 표현에 대해 저는 이렇게 이해했어요. 예술의 향유가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일상의 보편적인 경험으로 들어와 있다고요.
형중
네, 맞아요. 그러니 무엇보다 기존의 노동 개념 자체가 바뀌어야 해요. 시장에서 수요로 결정되지도 않고, 비가시적이고, 직접적인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것을 노동으로 인식하고 그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해야 하는 거죠. 그걸 어렵다고만 생각하는데, 막상 해보면 그럴 것도 없거든요. 예술인고용보험이라는 시스템만 두고 보더라도 시작하기 전에 얼마나 우려가 많았어요. 이게 작동할까, 가능하기나 해? 그런데 이미 매년 4,000명 정도는 구직급여나 육아휴직수당을 받고 있다고 들었어요. 궁극적으로는 노동 관련법 체계 안에서 예술활동이 보장되는 형태로 가는 게 맞고요. 예술 외에도 법률상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활동을 재평가하는 작업도 시작해야 합니다.
양구
마침 노동 개념과 관련법에 대한 말씀을 해주셨으니 한 가지 사례로, 故 박송희 님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2018년에 김천시 문화예술회관에서 공연을 준비하던 한 스태프가 추락해 사망한 사건이 있었어요. 당시 제가 이 문제를 깊이 들여다봤는데, 그때 그 스태프는 ‘문예회관과 함께하는 방방곡곡 사업’이라는 프로그램 지원을 받아서 그곳에 공연을 하러 갔습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보조금 관리법의 적용을 받는 위치에 있었던 거죠. 같이 공연을 준비해도 문화예술회관, 그러니까 극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공무원이라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을 받는데, 사고가 난 스태프는 그냥 보조사업을 수행하는 사람, 극단 대표가 사업주인 용역관계에 놓여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공공극장안전대책연극인모임’에서 법을 바꿔보려고 했거든요. 보조사업자로 들어가서 작업하다 사망사고가 나면 문체부, 예술위원회가 주무 부처로서 배상책임을 지는 방향으로요. 물론 잘 안되었지요. 이 사례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극장은 근로기준법상 보호를 받는 노동과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는 노동이 교차하는 영역이거든요. 문화예술노동은 어마어마한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데도 경제학적으로 보면 외부효과일 뿐인 거죠. 이렇게 예술이 만들어내는 외부효과를 어떻게 권리화, 가시화해서 인정받는 노동 개념으로 자리 잡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간단치 않아요.
형중
사실 노동에 대해서 복잡한 논의를 만드는 것 자체가 자본의 기획이거든요. 그러니까, 법률이라는 게 먼저 개념을 정의하잖아요. 그리고 그 정의한 개념에만 법률이 적용되고요. 노동을 혐오하거나 숭고한 것으로 바라보거나, 그런 식의 담론을 덧붙이는 것도 바로 그 개념 안에 무언가 더 들어가지 않게 하려는 공작들인 거죠. 실제로 산재보험법상 근로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례들이 많아서, 누군 인정을 받고 누군 못 받고, 그러면서 누더기 체계가 만들어지고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가는 것도 정치적 투쟁의 결과물이란 말이죠. 그리고 연극도 그렇게 갈 수 있고요. 이를테면 저는 예술인고용보험이 작동한다는 걸 중요한 레퍼런스 삼아서, 예술인들도 보편적인 노동권을 가질 수 있다는 전략을 짜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향유 중심, 저비용의 가성비 높은 프로그램 지원 정책의 한계

양구
그런데 연극의 가치가 왜 저평가되고 있는지를 논의하려면, 한국이라는 국가에서 연극이 무엇이었는지를 들여다봐야 해요. 이야기가 좀 길어지겠지만, 식민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면, 식민지 초창기에는 모든 게 통제 대상이었다가 3.1운동 이후 드디어 말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리게 되죠. 그러면서 연극도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다가 1930년대가 되면 다시 검열, 통제의 시기가 오거든요. 소위 상업적인 연극 외에는 요즘 말하는 의미에서 기초예술이 설 자리가 없어진 거죠. 그렇게 1940년대가 되면 정부가 연극을 지원하는 모델이 형성됩니다. 당대는 국민연극이라고 해서 일제의 2차대전 참전을 독려하는 선전극들을 제작 지원하는, 지금의 국가지원 시스템의 모델이 만들어진 시기였어요. 기본적으로 비판적인 목소리는 제거하고 국가의 정책을 홍보한다거나 정부와 뜻을 같이하는 연극을 지원하는 식으로 오게 된 거죠. 그리고 특히 권위주의 정부 시절, 연극계의 중요한 자리에 있던 분들이 그런 길을 함께했죠.
국가와 연극의 이러한 관계가 바뀌게 된 것은 민주화가 진행되면서부터예요. 1990년대 이후 전국에 문화예술회관이 들어서면서, 잘 만들어진 서울의 작품을 지역에도 보내자는 취지로, 그러니까 기본적으로는 향유를 중심으로 하는 연극 정책이 설계됐죠. 극장은 만들어졌지만, 거기에 고용이 따라붙는 식으로, 연극인의 노동권을 보장하는 접근이 아니었던 거예요. 창작지원 중심으로 출발한 한국문화예술위원회나 서울문화재단도 예산이나 인력 규모 면에서 보면 이젠 향유지원기관에 가까워요. 그러는 와중에 연극 관련 학과가 폭증하면서 연극인이 엄청나게 쏟아져나왔죠. 지금의 연극 정책을 제 식대로 표현해보자면, 제작비용의 외주화, 외부화라고 할 수 있는데요. 모든 비용을 연극인들에게 전가하면서 향유를 확산하는, 저임금 고효율 구조로 연극 정책이 왔다고 보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예술에 대해 국가가 취해온 입장이 수면 위로 올라온 계기가 바로 2003년 구본주 작가의 죽음, 그리고 2011년 최고은 작가의 죽음이었죠. 그때 예술인복지재단이 만들어졌는데, 정말로 죽지 않을 정도의 긴급한 지원을 해주는 식이었기 때문에 예산은 증가해도 구휼기관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이양구. 하늘색 반소매 티셔츠를 입었다. 몸 앞쪽으로 양손을 자연스럽게 들어 올려 이야기한다.
이양구
형중
일단 문화예술 정책 자체가 향유 위주로 이루어졌는데, 그걸 공급하기 위해 저비용의 가성비 높은 정책 구조를 취하고 있다는 건데요.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저는 한국의 엘리트 체육인 시스템과 문화예술 분야의 시스템이 닮아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엘리트 체육을 예로 들면, 정말 소수의 직업 체육인이 어렸을 때부터 성적을 내야 하는 강압적인 상황에서, 오로지 운동만 하잖아요. 그러니 국제사회에서는 ‘아니, 한국에는 핸드볼을 하는 인구가 얼마 되지도 않는다는데 어떻게 금메달을 따지?’ 이런 의문을 가지는 거고요. 분명 어떤 식의 경쟁 모델에서는 최적화되어 있는 구조예요. 그런데 과연 그런 정책으로 체육이 우리 사회에서 해야 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나,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하는 거죠. 누가 금메달 땄다고 국민 건강이 증진되는 게 아닌 것처럼, 대단한 예술가가 탄생했다고 예술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프로그램 지원 중심의 연극 정책도 마찬가지예요. 아주 적은 예산을 책정해서 경쟁적인 구조로 밀어 넣는 거죠. 살아남는 사람이 대단한 걸 만들어내면 좋은 거고요. 그런 식의 체계에 있다 보니 프로그램 지원이라도 많아져야 한다는 방향으로 가게 되고, 이게 또 다른 문제로 이어지는 거예요. 아직 예술에 대한 가치, 인정이 미진한 상태에서 프로그램만 많아지니까 관에서 생각하는 기준에 맞춰야 할 필요도 생기죠. 그런 구조에서 예술인들이 정말 자신들의 기획, 표현을 살리는 작업을 할 수 있을까요?
양구
그래서 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프로그램 지원 중심의 시스템을 기반 시설 중심의 지원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가령 전국의 어느 마을을 가도 국가나 지자체가 만든 공원이나 체육 시설을 흔히 만날 수 있잖아요. 산책을 하고 운동을 할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저는 폭증하는 예술 인력에 대해, 전국의 모든 마을에 작은 공연장이나 연습실 등을 필수 시설로 만들고, 거기에 예술인을 고용하는 방안을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기업 등이 다양한 모델의 형태로 채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여기에는 일상생활에서 예술창작활동을 경험하거나 향유하는 것이 보편적인 문화권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는 거지요.
형중
현재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아이들 방과 후 수업에 들어가 있잖아요. 여러 업체들이 경쟁적으로 입찰을 넣어요. 이제는 대기업까지 진출하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 업체들이 하나같이 저렴한 인건비로, 비용체계를 낮춰서 운영되는 회사라는 걸 강조합니다. 그러면 학교는 정해진 예산에서 적절한 곳을 선정하는 거죠. 코로나 때 경험해봐서 알지만, 그 사업에 참여하는 문화예술인들의 근로 형태는 굉장히 불안정해요. 방과 후 과정이 아예 열리지 않는데, 고용보험에 가입된 상태도 아니었지요. 이런 게 프로그램 지원정책의 한계인 거예요. 그래서 저는 기반 시설을 포함해서 예술인이 주도하는, 자유도가 높은 형식의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주목했던 건 문화패스 정책이었는데요. 그것이 지역화폐 형태로 지급이 되면, 각 지역에서 여러 영역의 소비가 촉진되지 않을까 했던 거죠. 그리고 그런 것들이 삶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정책과 병행되면 예술인들이 지역 안에서 자유도 높은 기획들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했어요. 그런데 구체적인 정책 차원에서는 여전히 어려워요. 담론이나 지향 차원에서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알겠는데, 그게 정책으로 잘 연결이 안 되는 거죠.

예술인의 고용 보장, 그리고 예술의 일상적 경험 확산

형중
저는 무언가를 제대로 향유하려면 그것을 소비하는 행위와 생산하는 행위 양쪽 경험을 모두 해봐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직업적 생산자가 되기는 어렵겠지만 동아리 모임에서 작품을 써볼 수도 있고 연기를 해볼 수도 있잖아요. 그런 경험을 해보면 소비를 할 때도 달라져요. 저도 신문사에 있을 때 한동안 르포를 써야 했거든요. 사실 공대 출신인데 말이죠(웃음). 어쨌든 그러면서 르포 작가들의 책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좋은 작가들이 어떤 식으로 현장을 관찰하는지, 어떤 식으로 질문을 던지는지를 다시 보게 되는 거예요. 내가 생산자 입장에 서니까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콘텐츠를 소비하게 된 거죠.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예술을 제대로 즐기게 하기 위해서는, 효율성이 높은 방식으로 소수에게 지원해서 작품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예술을 경험하게 해야 하는 거죠.
양구
소비와 생산이 만나야 한다는 맥락에서 이야기해보자면, 마을 극장을 계속 확산해가고 여기서 예술인들이 상주극단, 상주 예술인 같은 개념으로 청소년극도 하고 마을 주민도 만나면 가능해지는 것들이 생겨요. 극장이 일종의 커뮤니티를 형성할 수 있는 거점 공간의 대안이 될 수도 있고, 교육 기능을 담당하면서 예술가들이 자기 작품을 할 수도 있는 토대가 되는 거죠. 그런데 지금 우리의 지원체계는 극장 대관료 지원, 프로그램 지원으로 한정되어 있고, 그나마 개별 예술인에 대해서는 예술인복지재단의 창작지원금 사업이 있을 뿐이죠. 종합적으로 연극인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게 아니라, 영역별로 다 토막 내서 모두 경쟁구조로 만들어 놓았어요.
그래서 만약 저한테 무언가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제일 먼저, 정부 직제를 바꾸고 싶어요. 간단하게만 설명해보자면, 문화예술과 관련된 주무 부서가 문화체육관광부잖아요. 예술정책은 문화예술정책실 예술국에서 만들어지는데, 거기 예술정책과, 시각예술디자인과, 공연전통예술과, 예술인지원팀, 그러니까 사실상 예술인복지과가 있는 구조예요. 그리고 그 아래 담당 기관들이 있어서 프로그램 예산이 지원되는 거죠. 반면에 지역문화정책국 안에는 기본적으로 문화기반과가 있어서, 박물관, 미술관 같은 시설을 만드는 일을 계속해요. 도서관정책기획단에서는 작은 도서관을 만들고요. 하지만 예술국에서는 대형 공연장 사업은 해도 작은 공연장을 만들진 않는 거죠. 즉 연극에 대해서는, 광범위한 고용을 창출할 수 있는 기반 시설을 만들어내고 그 일을 담당할 정부 부처가 없다는 뜻입니다.
형중
여기서 잠깐 정책 리터러시와 관련된 말씀을 드려보고 싶어요. 왜냐하면 정책 제안 중에 제일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게 정부 조직을 개편하자는 거라서요. 각 분야에서 다들 직제를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거든요. 정부도 무언가 생색낼 때 먼저 부서를 만들잖아요. 그리고 두 번째로 안 받아들여지는 것이, 이 사업에 몇 퍼센트의 예산을 책정해달라, 하는 건데요. 이것도 많이 나오는 이야기지만, 안 받아들여지거나 받아들여진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반영이 안 되죠. 사실 정책당국을 설득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사례를 만드는 겁니다.
예산 비중으로 따지면, 이미 한국은 지자체들이 이런 정도의 정책을 펼 수 있는 자율성을 확보하고 있어요. 그런데 아이디어나 인식이 부족한 거죠. 물론 문화체육관광부의 예술국에서 신경을 쓰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이런 사례들을 지자체와 함께 만들어갈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극장이 만들어지고 예술인들이 축제도 하고, 그런 식으로 자생적 커뮤니티가 생겨나면, 그러니까 전환적 정책을 통해 사례를 만들어내기 시작하면, 그걸 다른 지자체가 따라 하고 그럼 중앙에서도 효능감이 높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정책 리터러시가 중요해요. 연극인들도,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지자체에 목소리를 내면서 바꿔 갈 수 있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요.
윤형중. 하늘색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사각의 검은 테 안경을 썼다. 한 손에는 핸드폰을, 다른 한 손에는 연필을 들고 있다. 책상 위에는 메모가 적힌 종이가 놓여있다.
윤형중
양구
사례는 이미 많아요. 천장산우화극장, 미아리고개예술극장, 성미산마을극장, 등등 지자체 차원에서 이미 오랫동안 해온 작업들이 쌓여 있죠. 그러면 왜 이것이 정책 단위에 반영이 안 되는가 생각해보게 되는데요. 제가 몇 년 전 어느 공공기관의 사회적 가치와 관련된 포럼에 갔었거든요. 그때 제가 발언 기회를 얻어서 연극이 이미 그런 일들을 많이 하고 있으니 그런 사례들을 참고해보면 좋겠다고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거기 참여하신 패널분이 그러시는 거죠. 논문이 없다고요. 이미 연극계에 많은 사례가 있지만, 그것이 학술재단의 논문이라든가 연구 같은 것으로 이어지질 않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그 활동들이 연극계를 넘어서 한국사회의 공적인 인정체계 안에서 인지가 안 되는 거죠. 왜냐면 꾸준히 이 작업을 전담해서 사회에 알리고 정책에 반영될 수 있게 하는 단위가 없거든요. 조금이라도 예산이 있으면 연극 만드는 일에 지원을 하니까요. 그런데 문화산업 쪽으로 가면 이런 일들을 다 하고 있어요. 정책 그룹을 운영하고 정부에 대한 협상력도 좋고요. 안타깝게도 연극 쪽에서는 협회조차도 정부보조금에 의존해서 프로그램을 운영하기에 바쁘니 그런 상설정책집단을 유지하는 게 불가능한 거죠. 그걸 할 수 있는 계기가 있긴 했어요. 2020 연극의 해 당시에, 축제 중심의 행사로 가려던 걸 현장의 의견을 수렴해 방향성을 재설정했거든요. 그때 연극 정책에 대해 여러 논의들을 하면서 좋은 보고서도 만들었죠. 그런데 연극계에서 정부와 협상력이 있는 분들이 그런 방향으로의 전환을 원치 않아요. 이런 와중에 연극인들이 연극하는 것만으로도 힘들고,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집단지성으로 정책 논의를 지속해가기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가치투쟁과 정책연구를 시작해야 할 때

형중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오면서 생각했던 중요한 테마 중 하나가 연극과 예술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거였어요. 원래 정책연구 안에서도 정책평가 분야가 취약하거든요. 학계에서의 논의는 대개 진단에 치중되어 있고, 많은 논문과 보고서의 결론은 ‘이런 문제의 개선을 위한 대안이 필요하다’에요. 어떤 정책이 실제로 변화를 만들어낸 이후에도 그걸 평가하는 연구가 미진한 거죠. 말씀을 들어보니, 연극계도 마찬가지네요. 이미 의미 있는 사례들이 만들어졌는데 그에 대한 평가와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아 확산, 공론화가 시작되지 못하는 거군요. 그렇다면 전반적으로 연극의 사회적 가치를 재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논의를 좀 더 구체화해서, 정책으로 변화를 만든 사례에 대한 평가 연구를 어떻게 해나갈지 고민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를 제안해본다면, 먼저 국책연구기관에서 하도록 요구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나라 씽크탱크 비중을 보자면 국책연구기관이 95%, 나머지가 5%이기 때문에, 국책연구기관의 역할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어요. 문화 쪽 국책연구기관은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죠. 그런데 관광까지를 포괄하는 굉장히 넓은 범주의 연구 기관에 연극 한 분야에 대한 연구를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니, 연극 단위에서의 기금과 체계를 만들 필요도 있어요.
우선은 연극계 안에 정책연구를 담당하는 곳이 있어야 할 것 같고요. 웹진 연극in에서 설문조사를 한 것도 굉장히 의미 있는 시도예요. 이런 시도를 정기적으로 지속했으면 좋겠어요. 사실 저는 코로나 이전과 코로나 시기, 그리고 코로나 이후를 비교해볼 수도 있을 것 같고, 예술인실태조사가 이미 있지만 그것과 비교해보는 연구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한두 명의 전임연구자라도 생기면 설문 문항부터 시작해서 이 답변 결과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더 풍부한 자료를 구축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그 인건비조차 마련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게임이나 영화 쪽 예를 들어보면 일단 기금을 만들어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어요. 연극 쪽에서도 어떤 형식으로든 기금에 대한 고려를 해야 해요. 예를 들면 이런 방식도 가능하겠죠. 사실 우리나라의 많은 콘텐츠가 연극에 빚지고 있잖아요. 논리와 명분은 충분히 있으니까 돈이 도는 곳에서 일부를 각출하게 하는 요구를 아주 선명한 구호로 만든다든지, 그런 캠페인을 진행할 수도 있겠죠. 그렇게 기금을 만들어서 돈이 들어오면 연구하고 확산하는 작업이 시작될 수 있을 거예요.
양구
사실 그 이전에는 문예진흥기금이 있었는데 관객에게 징수했던 부담금이 2003년에 위헌 판결을 받았어요. 관객이 사는 공연 티켓 값에 그 기금이 포함되어 있었던 거죠. 위헌 판결 이유는 부담하는 사람과 향유 층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봤기 때문인데요. 좀 이해가 안 가는 결정이었지만 어쨌든 그 뒤로 문예진흥기금이 적립되지 않았어요. 대안은, 헌법재판소가 위헌 판결했던 걸 뒤집어 보는 거예요. 연구를 통해서 수혜자와 부담자가 일치한다는 논리를 만드는 거죠. 그렇게 징수하는 게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고요. 하지만 현재의 정책 예산으로도 마음만 먹으면 연구는 충분히 가능해요. 관심의 문제일 뿐이죠.
이양구. 사진 앞쪽에 윤형중의 뒷모습이 반쯤 잡혀 있고 그 맞은편에 이양구가 있다.
 
또 다른 대안은 한국벤처투자가 운영하는 모태펀드를 이용하는 건데요. 이를테면 거기 영화계정이나 문화계정은 있는데 기초예술계정은 없거든요. 저는 그래서, 사회적 논의를 통해 기초예술계정을 만들고, 문화계정이나 영화계정 같은 돈 많은 곳에서 발생하는 수익의 일부를 의무적으로 가져오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모태펀드는 돈을 넣었다 빼는 구조라, 그러니까 투자해서 수익이 들어오는 것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어요. 기초예술은 돈이 안 되니까 투자해도 수익이 안 들어올 거고, 그러니 설득이나 합의가 어려운 상황인 거죠. 바로 여기서 조금 전에 이야기하신 그 논리, 한국의 많은 문화 영역이 연극에 얼마나 빚지고 있냐, 이 논리를 이용할 수 있을 텐데요. 그러려면 연극계가 힘을 결집해서 그 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으니 고민인 거고요.
형중
부담금이 위헌 결정 난 것에 대한 대항 논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에 저도 동의합니다. 헌재가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내릴 때가 많지만, 원래 부담금이라는 게 간접적인 수혜와 연결되는 경우가 많이 있거든요. 사실 부담금, 분담금 다 직접적인 수혜자와 원인제공자에게 돈을 내게 하는 거고, 그게 조세랑 가장 다른 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를 통해서, 연극을 보는 관객이 거기서 만들어진 기금의 직접적인 혜택을 입는다는 것을 밝혀내야 할 것 같고요. 또 좀 더 근본적으로는 연극인들이 목소리를 강하게 내야 한다고 봐요.
지금 소위 한국의 잘나가는 콘텐츠는 굉장히 저평가된 예술 영역의 노동에 빚지고 있잖아요. 아주 열악한 환경에서 만들어진 인프라, 경쟁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이 그런 콘텐츠를 생산해내고, 그 결과물에 대해선 국가적으로 굉장히 자랑스러워하죠. 정작 중요한 가치를 만들어낸 분야, 그리고 그 안에서 활동한 사람들에게 기여분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담론은 제기되지 않아요. 이를테면 몇몇 연극계 출신의 작가, 배우, 연출들이 직접적으로 나서서, 시상식이라든지 사회적 발언을 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런 말들을 해주는 것도 큰 힘이 될 거예요. 그렇게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면서 다른 플랫폼, 콘텐츠들에서 수익들이 났을 때 그 돈이 어떤 식으로 연극 분야에까지 순환되도록 할 것인가에 대한 정책적 고민들이 필요합니다.
양구
어떤 가치 인정이라고 했을 때 그런 걸 안 만들었냐, 하면 그건 아니에요, 대한민국예술원제도가 대표적인 거죠. 회원제이고, 여기 가입하는 예술인은 명예는 물론이고 매달 수당까지 받아요. 기존 회원들의 합의제로 신규회원이 가입하는 구조이고, 장르별로 소수의 엘리트만 회원이 될 수 있죠. 심지어 문체부에 사무국도 있어요. 즉, 예술계가 예술인의 보편적인 노동권을 설계하는 방향을 추구해온 게 아니라, 소수에 대한 인정과 신분보장, 특혜를 강화해주는 방식을 택했던 거죠. 법까지 만든 특별한 제도고, 지금도 잘 작동되고 있어요.
한편으로 국가와 연극인의 관계를 넘어서, 경제, 시민사회 영역과의 관계도 더 깊이 얘기해봐야 할 필요가 있어요. 연극인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분명 있을 거란 말이죠. 그런데 연극 전공하면 전공을 살려서 취업이 안 돼요. 사실 저는 현실적으로 여러 기업들에서 예술인을 필요로 하는 수요가 있다고 보는데요. 다만 예술인, 단체, 기업들이 매칭될 수 있는 구조가 없을 뿐이죠. 예를 들어 문화예술진흥법에 따르면 일정 규모 이상 건축물을 만들 때 미술작품을 설치하게 되어 있는데, 취지는 다르지만, 이러한 구조를 고려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있어요.
형중
결국엔 무언가에 얼마만큼의 사회적 가치를 부여할 것인가의 문제예요. 예를 들면 한국은행이 금리를 결정하잖아요? 이때 그 금리를 결정하는 금융통화위원들이 있어요. 그런데 이들이 임기 4년 동안 3억이 넘는 연봉을 받는단 말이죠. 대부분 대학교수예요. 그런데도 엄청 으리으리한 사무실과 기사 분이 있는 차까지 제공되는 정도의 가치 인정을 받거든요. 금리를 결정하는 게 국가 경제에 중요하니까 어마어마한 대우를 해주는 거죠. 그렇다고 그분들이 없으면 금리 결정을 못 할까요? 한국은행의 스태프들은 이미 충분히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는데도, 금리를 결정하는 위원회까지 만들고 그 위원들에게 이런 대우를 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그것이 엄청 중요하다는 가치 인정이 있는 거잖아요. 실제로 공공기관의 많은 직책을 보면 우리 사회가 무엇에 가치를 매기고 있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죠. 가령 변호사들의 경우 자문 요청을 하면 시간 수당까지 정해서 큰 사례비를 쳐주거든요. 그런데 연극이 만들어내는 가치에 대해서는 아무도, 어떤 고려도 하지 않아요. 결국엔 다 정치고 가치투쟁인데, 좀 뼈 아픈 얘기를 드리자면 연극인들이 그 가치투쟁에 덜 나섰던 거죠.
윤형중. 사진 앞쪽에 이양구의 뒷모습이 반쯤 잡혀 있고 그 맞은편에 윤형중이 있다.
양구
이제 슬슬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할 것 같은데요. 윤형중 대표님은 웹진 연극in의 이번 기획에서 어떤 점이 눈에 띄셨나요? 저는 인상 깊었던 게 예술인복지재단에서 하는 사업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눈 부분이었어요. 그게 예술인들이 사회 영역과 만나는 하나의 케이스인 거죠. ‘예술로’ 사업은 기업, 시민사회의 필요와 예술인들의 작업이 만나는 중간 접점이거든요. 앞서 이야기했듯이 기반 시설을 신설하는 것도 방법인데, 경제사회 영역에서 이미 가지고 있는 기반 시설을 이용할 수도 있는 거니까요. 그런데 현재 이 사업은 예술인 일자리 지원사업 성격이 더 강해요. 문화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이 경제적 가치를 중심에 두고 형성되어 있다는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죠. 그래서 저는 어떻게 예술의 내재적 가치를 중심으로 인식 전환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형중
저는 설문에서 의미 있는 응답들을 많이 발견했어요. 특히 세대별 인식 격차가 극명하게 나타나서 더 궁금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있었는데요. 무엇보다 20대들의 인식이 다르다는 게 흥미로웠어요. 젊은 세대일수록 더 매너리즘에 빠져 있고, 자신이 잘한다고 느끼지 못하고, 번아웃이 왔고, 그런 부분들이 뼈아팠지요. 하지만 그보다 저한테 더 의미 있었던 결과는, 연극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거의 모든 문항들에서 20대의 점수가 가장 낮았다는 사실이에요. “사회의 다른 영역에 예술적 아이디어를 도입한다”, “사회의 불평등과 부조리를 개선하는 데 참여한다”, “신념을 지키며 원하는 삶의 가치를 확산한다”, “전문 예술가가 아닌 사람들이 예술을 경험할 수 있도록 매개한다”, “동료들이 더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매개한다” 같은 문항들이죠.
각자의 예술관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자기 안에서 끓어오르는 생각들을 의미 있고 정제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게 예술의 중요한 기능이잖아요. 그리고 그렇게 끓어오르는 것들은 사회에 대한 인식, 내가 처해 있는 상황으로부터 나오게 마련이죠. 그래서인지 이러한 결과가 예술이 지니는 사회적 역할과 효능에 대한 처참한 성적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앞으로 20대 연극인들의 인식을 바꿔 갈 수 있는 정책적 지향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젊은 연극인들이 연극의 사회적 효능감을 자신의 직업에서 느낀다면, 이 직업에 있지 않은 분들도 예술을 통해서 그 효능감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연극에 대한 인식, 평가도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양구
저는 예술인이 존재하는 방식에 주목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연극인들이 극단이나 협회에 속해 있지 않고, 개인으로 존재하거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소규모 그룹으로 만났다 흩어졌다 하거든요. 그럼 지원 체계도 그에 맞춰서 설계되어야 하는 거죠. 그렇게 보자면, 서울연극센터 같은 기관이 할 수 있는 일들도 있을 거예요. 작년에 서울연극센터 재개관 당시 향후 운영방안 연구에 제가 참여했었는데요. 그때 잡았던 개념이 “예술적 앎”이에요. 일종의 감각 기관으로서 서울연극센터가 존재했으면 좋겠다는 거였죠. 연극과 연극인, 시민들과 연결되어서 사람, 사회, 제도를 감각할 수 있는 그런 기관으로서 정체성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였어요. 이런 논의들을 토대로 정치, 경제, 사회 각 영역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는 문화로서의 연극을 다시 세워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윤형중 대표님, 오늘 긴 시간 의미 있는 이야기들 함께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