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여러 직무를 병행하신다고요?

연극인의 커리어: 어떻게 연극하고 있나요?

정리_연극in 편집부

제256호

2024.06.27

웹진 연극in에서는 지난 3월에서 4월 사이, 약 3주에 걸쳐 서울 지역에서 활동하는 연극인을 대상으로 “연극인의 커리어: 어떻게 연극하고 있나요?”라는 주제의 설문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이번 [기획]에서는 이 설문조사의 결과 분석을 토대로, 이 시대 연극 활동의 특수성을 확인하고 연극인의 지속 가능한 활동을 위한 환경을 함께 고민해보려 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다양한 직무를 병행하는 연극인들의 좌담을 통해 변화해가는 연극의 창작·제작 현실을 살펴봅니다.

일시: 2024년 6월 18일 화요일 11시-13시
장소: 서울연극센터 2층 다목적실
진행: 박하늘(웹진 연극in 편집위원)
참여: 강보름, 마두영, 문병재, 이하영, 이효진

  • 이번 좌담은 아래의 설문조사 결과를 공유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병행하는 직무가 없다고 응답한 경우, 다음의 문항들에서 두드러지게 다른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여타 직무를 병행하는 경우와 비교해 가장 높거나 가장 낮은 점수를 보인 항목들입니다.


가장 높은 점수
  • 나는 내가 잘하고 있다고 느낀다.
  • 되도록 일정한 시간을 정해두고 그 안에서 일한다.
가장 낮은 점수
  • 나는 번아웃이 왔다고 느낀다.
  • 내가 주체가 되어 다음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 불필요한 감정 노동을 한다고 느낀다.
  • 자기 착취를 경험한 적이 있다.
  • 동료들과 상호 착취를 경험한 적이 있다.
  • 경쟁 구도에 대해 불필요하게 과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 창작·제작 지원금 공모 지원서 작성 경험
  • 각종 공개모집의 지원서, 신청서 작성 경험
  • 연극과 전혀 상관없는 활동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의 비중


하늘
안녕하세요. 오늘은 연극의 창작·제작 활동 가운데 여러 직무를 병행하고 계시는 분들을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설문조사 결과에서 병행하는 직무가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 사이에 두드러지는 차이가 보이기도 해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유의미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주변을 보면 여러 직무를 병행하는 연극인들이 적지 않은 것 같은데요. 이게 시대의 요구인지, 경향성인지, 우리에게 하나의 역할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재능이 있는 것인지, 혹은 연극이라는 장르의 불안정성이 영향을 끼친 건지, 다양한 질문을 통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각자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주요 직무, 병행하는 직무, 연극을 시작하게 된 경로 등을 토대로 얘기해주세요. 저는 주로 배우를 하고 있는데, 창작자, 음성해설사, 접근성 매니저 등을 병행업무로 하고 있어요. 극회를 통해 연극을 시작했고, 극단에 소속되어 있다가 지금은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효진
안녕하세요. 저는 주로 무대감독으로 활동하는 이효진입니다. 연출부와 자막 디자이너로도 일하고 있고요. 저는 연극학과를 졸업하고 극단에 있다가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중입니다.
하영
저는 이하영이라고 하고요. 배우로 활동하면서, 2017년부터 2023년도까지 미아리고개예술극장에서 상근 극장 매니저로 일했어요. 현재는 성북구 협동조합고개엔마을 조합원으로 활동하면서 예술로 기관담당자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안산에서 극단 활동을 시작해서 총 두 개의 극단을 거쳐 지금은 프리랜서로 있습니다.
보름
안녕하세요. 강보름이고요. 저는 주로 연출, 접근성 매니저, 조연출, 각종 오퍼레이터 역할을 합니다. 대학 동아리에서 연극을 시작했고, 2017년에 서울문화재단 청년예술지원사업을 통해 연출로 데뷔해 이후 활동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두영
저는 마두영입니다. 주요 직무는 배우이지만, 연출, 무대감독, 제작자를 병행하고 있어요. 저는 연극영화과 전공으로, 처음에는 프리랜서로 활동하다가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 단원으로 들어갔고, 지금은 극단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병재
저는 문병재라고 하고요. 창작집단 툭치다의 대표이고, 주로 글 쓰고 출연하고 연출하고 있습니다. 무대 크루, 오퍼레이터를 병행하면서,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에서 하우스 어셔로도 일하고 있어요. 원래 힙합동아리를 만들려고 문화의 집에 갔다가 연극동아리의 창단 멤버로 스카웃되어 연기를 시작했고 관련 학과에 진학했어요. 지금은 대학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좌담의 전경. 좌담 진행자와 다섯 명의 참여자들이 책상 네 개를 정사각형 모양으로 이어 붙여 앉아 있다.
하늘
설문조사 전반에 대해서는 어떻게 느끼셨나요? 공감 가는 결과, 아쉬웠던 문항 등 자유롭게 생각을 나눠 주세요.
두영
저는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즐기면서 하고 있다”는 질문의 답변에서 접근성 스태프의 만족도가 가장 높고, 기획·제작자의 만족도가 가장 낮은 것에 공감했어요. 40대 작가이자 연출, 제작자인 사람들의 평균과 제 응답이 비슷한 부분이 많았어요.
하늘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특히 40대 연극인들의 고충이 있다고 나오더라고요. 쉽게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타당성 있는 결과로도 보여요.
보름
저는 1인 극단을 하고 있습니다. 대표로 지원금을 타서 프로젝트 형식으로 동료를 모아 작업하거든요. 연출이자 대표이자 제작자의 역할을 겸하기 때문에 분명 소모적이고 지치는 부분이 있는데, 저는 스스로를 제작자라고 인식하지 않았더라고요.
하영
저는 설문에 응답하면서 예전 기억이 많이 떠올랐어요. 2022년에서 2023년 넘어가는 시기에 번아웃이 와서 배우가 아닌 스태프 일을 하거나 연극 관련 활동을 통해 나름 치유했던 기억이 있거든요. 연극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 다른 활동을 한 건데요. 응답자들이 단순히 생계 때문에 연극 활동 외의 일을 했을지, 저처럼 작업을 지속하기 위해 했을지 궁금하더라고요.
두영
한편으로는 “연극의 창작·제작 활동을 노동이라고 인식하나요”에 낮은 점수를 준 60대분들이 궁금했어요. 30, 40대는 연극이 노동이라고 명확히 이야기하는데, 60대분들은 왜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더라고요.
병재
저는 코로나가 시작되던 시기에 30대가 되었는데요. 20대의 저는 전업 연극인의 기준을 묻는 질문에 ‘지원사업에 선정되었을 때’라고 대답했을 거예요. 그런데 30대가 되니까 같은 계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걸 인지할 때 소속감을 느끼더라고요. 30대가 되면서 동료가 훨씬 많이 생겨나기도 했고, 지원사업에 선정되지 않아도 사람을 통해 동력을 얻는 것 같아요.
효진
저는 고립감에 관한 문항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연극을 하면서 각자 고립되는 순간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연극을 떠나기도 하고, 지속하기도 하고요. 개인적인 경험이 많이 떠올라서 공감이 됐던 문항이에요.

다른 직무를 병행하게 된 계기

하늘
이제 구체적인 질문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연극의 창작·제작 활동에서 주요 직무 외 처음 다른 직무를 병행한 것은 언제이고, 어떤 계기로 그 직무를 병행하게 되었나요? 이후 추가적으로 계속해서 또 다른 직무를 병행하신다면, 그 이야기들도 더불어 들려주세요.
진행자 박하늘. 남색 반소매 셔츠를 입고 어깨에 살짝 닿는 단발머리를 늘어뜨렸다. 좌담 참여자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박하늘
두영
저는 학교에서 연출을 해본 적은 있는데, 졸업한 후에는 주로 배우 활동만 했어요. 그 이후 극단에 있다 보니, 저와 제 주변 배우들에게 주어진 역할이 늘 비슷한 거예요. 계속 한정된 역할에만 머무는 게 안타까워서 연출을 시작했어요. 동료 배우들의 역량 강화를 고민했던 거죠. 당시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 대표였던 성기웅 연출이 ‘어차피 연출할 거면 네 단체를 만들어 네 커리어를 쌓으라’고 조언해주어서 디렉터그42라는 단체를 만들었어요. 영미권, 일본어권, 국내 창작자들 사이 연결고리가 되겠다고 시작했는데, 사실 하다 보니 기존의 극단 작업과 별다른 차별성이 없어서 발전적으로 해체했고요. 이후로는 제안이 들어오면 연출을 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무대감독 일도 가끔 하는데요. 학교 선배가 국립극장에 무대감독으로 있어서 무대감독보 일을 하다가 간간이 무대감독으로 섭외되어서 지금까지 하게 된 것 같아요.
보름
저는 장애인 동료 창작자들과 협업하면서 접근성에 대한 인식을 처음 하게 되었는데요. 2020년 하반기 혜화동1번지 7기 동인의 ‘맞;춤 페스티벌’에서 접근성 매니저라는 크레딧을 처음 써보았어요. 당시에는 제가 이 역할에 필요한 역량과 업무를 잘 알지 못한다는 자기검열과 공포감이 있었는데요. 7기 동인 창작자들이 접근성을 중점적으로 고민하는 역할이 연극계에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그 역할을 육성하려는 목적으로 불러주신 것 같아서 같이 공부하며 배워나갔어요. 이후 다른 작업에서도 계속 접근성 매니저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하영
저는 극장 재개관을 도와주러 갔다가 상근직으로 일하게 된 경우예요. 극장 매니저라는 호칭으로 일했지만, 기획적인 부분부터 재단과 함께 논의하는, 보다 큰 의미의 매니징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극장에서 일한다는 것도, 배우가 아닌 다른 역할로 극장에 존재한다는 것도 좋았던 것 같아요. 무엇보다 창작자들이 극장 안에서 안전하게 창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에 가치를 두고 일했어요. 미아리고개예술극장이 공공극장이긴 하지만 위치나 시설이 좋지는 않거든요. 주어진 환경에서 어떻게 안전하게 극장을 운영할지 고민했습니다.
병재
저 같은 경우는, 제가 배우로 속해있던 극단의 연출이 활동을 그만두게 되면서 연출을 맡게 되었어요. 원래 다큐멘터리, 공동창작을 표방하는 극단이라 배우들이 글을 쓰고, 장면 디자인을 제안하는 게 자유로운 분위기였고, 그래서 연출하는 것도 자연스러웠습니다.
2020년에 첫 지원금을 받아 준비하던 공연이 코로나로 인해 취소됐거든요. 2021년도에도 연달아 공연이 취소되니까 연극을 할 수 없겠다는 불안감이 컸어요. 당시 극장 방역 일을 하게 됐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오퍼레이터도 하게 되더라고요. 마침 2021년도에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예술인 안내원을 뽑았는데, 날짜를 선택하면 제 일정에 맞춰 근무할 수 있게 배려해주는 전형이에요. 작업할 때도 일정을 조율할 수 있어서 지금까지 3년 3개월간 병행하는 중입니다.
효진
저는 여러 직무를 병행하다가 주요 직무에 대한 인식이 생겼어요.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들어간 극단이 뉴다큐멘터리 씨어터를 하는 곳이라서 이것저것 많이 했거든요. 사운드도 하고, 편집도 해보고, 셋업, 조명, 무대 다 해본 것 같아요. 그러다가 갑자기 연락을 받는 일들이 생겼어요. 혹시 이거 할 수 있냐고. 그럴 때 “해보겠습니다” 해서 2017년부터는 무대감독을, 2020년부터는 자막 디자인을 계속했는데요. 요즘은 조금 다른 국면을 맞이한 것 같아요. 제가 주요 직무를 선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많은 걸 해보는 건 좋은 경험이었지만, 어느 순간 하나를 선택해서 전문성을 가져야 앞으로도 큰 줄기를 가지고 연극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직무 관련 자기 인식

하늘
이렇게 여러 직무들을 병행하는 가운데 어떤 기준으로 자신의 주요 직무를 이야기하게 되나요? 주요 직무만 하던 때와 비교해 지금은 자신을 소개하는 방식이 달라졌나요? 각자 자신을 정체화하시는 기준이나 방식이 궁금합니다. 주요 직무와 병행하는 직무 사이에 우선순위가 모호해지거나 전통적인 방식으로 직무 구분을 하는 것이 유효하지 않다고 인식하시는 경우가 있다면 그 경험도 들려주세요.
두영
저는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의 대표이자 배우를 맡고 있는 마두영입니다”라고 소개하는 것 같아요. 가끔 무대감독도 하고 연출도 하지만, 먼저 언급하지는 않아요.
병재
저는 배우만 할 때는 “연기하는 문병재입니다”라고 했던 것 같은데, 작·연출하고 영상, 음악을 만들기도 하면서 저를 하나로 명명하기 어렵더라고요. 요즘은 그냥 “연극하는 문병재입니다”라고 소개해요. 수식어를 붙이면 제한이 생기는 것 같아서요. 다른 사람들이 병재 씨, 병재 님, 문병재 이렇게 불러주는 걸 좋아하고요.
하영
저도 “연극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게 돼요. 그리고 성북구에서 오래 활동하다 보니 “주로 성북구에서 활동하는 편”이라고 덧붙여서 이야기하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연극에서 뭘 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배우라고 이야기하지, 굳이 먼저 말하진 않아요. 배우라고 하면 어디 나왔냐, 내가 본 거 있냐고 물어보잖아요(웃음). 매니저로 일하는 중에 좋았던 건 다른 극장에서 많은 질문을 받았던 거였어요. 주변의 민간극장, 소극장 등에서 어떻게 극장을 운영해야 하는지, 어떻게 매뉴얼을 만들어야 하는지 먼저 논의해보자고 제안해주셨거든요. 그런 일들을 통해 제 활동이 연극 생태계에도 좋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뿌듯함도 느끼고요. 그래서 저를 배우가 아니라 연극인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물론 무게감도 상당했지만요.
 참여자 이하영. 주황색 원피스 위에 회색 카디건을 걸쳤다. 어깨를 조금 덮는 단발머리다. 테이블 위에 태블릿PC를 올려두고 좌측을 바라보며 이야기한다.
이하영
보름
저는 사실 보름 님으로, 그냥 이름으로 불리는 게 편해요. 극장에 프로덕션 매니저, 하우스 매니저, 접근성 매니저 등등이 많아서 헷갈리거든요. 최근 해외 창작자들과 교류할 때도 소개를 고민했는데, 디렉터가 어떤 개념으로 받아들여질지 잘 모르고, 접근성 매니저도 특수한 개념이라 통용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공연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한 것 같아요.
효진
저는 다른 사람을 만날 일이 많지 않은 포지션이라(웃음) 저를 소개할 일이 별로 없긴 한데요. 그래서 그때그때 프로덕션에서 맡은 포지션으로 소개합니다.
하늘
저는 한편으로 주변에서 안부를 물어볼 때 때로는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하더라고요. 일 많이 하더라? 하고 그저 안부를 묻는 건데, 연극 예술 안에서 먹고 살려고 발버둥 치는 스스로가 가엾기도 하고, 부끄러운 것 같기도 하고요.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병재
저도 하우스 어셔로 일하면서 많은 분을 만나요. 그러다 보면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제가 창작활동을 그만뒀다고 생각하겠지, 하고 지레짐작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묻지도 않았는데 제 상황을 이야기하게 되고요. 그런 시선에 대한 불안감도 있는 것 같아요.
두영
저도 처음 연출할 때 제일 많이 들었던 질문이 ‘이제 배우 안 해?’였거든요. 일 년에 연출은 한 편하고 나머지는 다 배우로 참여했는데, 한 편 했다는 이유로 이제 배우 안 한다고 생각하더라고요. 지금은 많은 배우들이 연출을 겸해서 자유로워지긴 했어요. 요즘은 오히려 제가 연출 작업을 계속하는 게 맞는지 고민이 되긴 해요. 제 주요 직무는 배우인데, 제가 연출가로 지원사업에 선정이 되면 연출만 하시는 분들의 기회를 빼앗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서요.
하영
가끔 제가 과연 배우와 매니저를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의문이 들 때도 있어요. 배우로 무대를 준비해야 하는데 극장의 다른 것들이 보이는 거죠. 그런 상황을 몇 번 겪고 나니까 내가 배우여야 할 시간에 다른 걸 생각하는 게 불필요한 일이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됐어요.
보름
저는 작년에 인스타그램에 ‘이제 접근성 매니저는 안(못) 할 것 같다’라고 올린 적도 있는데요(웃음). 그래도 연극계에 접근성 매니저는 필요한 직무라는 생각이 들어서 불러주신다면 연출 작업과 병행하려 해요. 물론 스트레스도 많이 받지만, 이 직무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긍정적인 경험도 있고요.

여러 직무의 병행, 그 사이의 균형

하늘
연극인들이 여러 직무를 병행하게 되는 이유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말씀해주신 내용을 통해 유추해보자면, 우연한 계기에 그 일을 만나게 되시거나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 하셨던 경우도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일을 만들고 찾으신 경우도 있고요. 그렇다면 여러 직무들 사이에 어떤 상호작용이 일어나는지도 궁금한데요.
보름
접근성 매니저는 작품과 밀접하게 연결된 직무이지만 연출보다는 책임감이 약간 덜하거든요. 연출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에너지를 다 소진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니까요. 그런 점에서 만족도가 있는 것 같아요. 그동안 극장에 올 수 없었던 장애인 관객을 만난다는 기쁨도 있고요.
작품 규모가 큰 프로덕션에 접근성 매니저로 섭외되면 함께 시행착오를 겪어보고 발견한 노하우를 제 연출 작업에 적용해보기도 해요. 두 직무를 오가면서 긍정적인 영향을 받은 거죠. 그리고 다른 직무를 병행하게 되면 생계에 도움이 되니까, 올해는 연출 작품 몇 개, 접근성 매니저 작품 몇 개를 해야겠다, 생각하기도 해요. 제가 연출하며 제대로 사례하지 못한 동료의 공연에서 접근성 매니저를 하는 경우도 있고요.
병재
주요 직무를 할 때는 압박감 속에 있다가 병행하는 직무를 하면 약간 거리를 둘 수 있어서 편안해요. 물론 하우스 진행 일을 하다가 퍼포머가 될 때도 있는데 부담스럽기보다는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것 같아요.
참여자 문병재. 남색 긴 소매 셔츠를 입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한다. 책상 위에는 태블릿PC와 안경, 텀블러와 휴대전화가 놓여있다.
문병재
두영
사실 제가 만든 단체를 운영할 때는 제작자 역할을 감당하기 힘들지 않았어요. 제가 선택한 일이고 제가 사람들을 모았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원래 단원으로 있던 극단 대표를 하다 보니 원치 않게 제작자가 된 건데, 병행하는 업무가 너무 힘에 부쳐요. 일 년 내내 지원서를 비롯해 중간보고서, 결과보고서 같은 것도 작성해야 하고요. 또 제작자는 지원서부터 정산보고까지 모든 과정을 다 감당하거든요. 지원서를 기획하고, 작성하고, 인터뷰 심사를 준비하고, 프로덕션을 꾸려 연습하고, 공연 올리고 정산보고를 하면 일 년이 다 가요. 분명 전문 분야, 전문 인력이고 긴 시간 노동을 하는데, 기획자나 제작자의 업무가 연극 작업 안에서 어떻게 평가되는지는 다른 문제인 것 같거든요. 기획자와 제작자의 만족도가 낮은 게 너무 공감되더라고요. 솔직히 저는 주요 직무인 배우로 섭외되면 너무 편해요.
하늘
한편 설문 결과를 살펴보면 병행하는 직무가 없다고 응답한 경우, 다른 직무를 병행하는 응답자들보다 더 건강한 상태에서 연극 활동을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주요 직무 외 다른 직무를 병행하게 되면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되나요?
하영
설문 결과에 다른 직무를 병행하지 않는다고 응답한 사람이 생각보다 많아서 놀라웠어요. 제 주변엔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러면 그분들은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건인지, 아니면 계속 쉼 없이 정당한 사례를 받으며 공연을 올리는 것인지 궁금하더라고요.
두영
‘연극 관련 활동’과 ‘연극과 전혀 상관없는 활동’을 통해 수입을 만들어 한 직무에 종사하는 경우도 있을 것 같아요. 저도 연극과 무관하게 정기적으로 하는 아르바이트가 있거든요. 한 달에 한두 번씩 10년 넘게 하고 있는데, 주요 직무와 병행하는 직무로도 충분하지 않은 수입을 보완하기 위한 거예요. 대학에 강의도 나가고요.
하영
사실 저는 극장에서 배우가 아닌 역할로 일하면서 고립감을 느끼기도 해요. ‘나는 배우인데, 왜 무대를 바라봐야 하지?’ 하는 생각이 많이 들거든요. 물론 극장 매니저로 일하면서 극장 무대에 서지 않기로 약속하기도 했어요. 제가 극장에서 일하면서 무대에까지 오르면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배우 섭외가 들어와도 극장 매니저 업무와 일정이 겹치면 고사하기도 했거든요. 그럴 때면 나의 제1직업인 배우를 뒷전에 두고 왜 이걸 하고 있는지 스스로 많이 질문했어요. 그래도 정말 안전한 극장을 만드는 일이 좋고, 하고 싶어서 계속 극장 매니저로 일했어요. 하지만 극장에서 만난 분들이 제가 배우를 그만둔 줄 아실 때면 의구심이 들더라고요. 그런 고민을 계속 하다가 2022년에는 배우 일에 더 집중하고 싶어서 공연이 있을 때만 업무를 보겠다고 이야기하고, 지금은 공연이 있을 때마다 단기적으로 일을 합니다. 일을 계속 하면서도 고민이 되긴 해요. 이 일을 계속해야 할지, 놓아야 할지.
보름
연출이자 1인 극단의 대표로 연극계에 처음 진입한 시기에는 불안과 공포가 더 심했던 것 같아요. 지원금을 따지 못하면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명분이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지원금 경쟁 구도 안에서 생존해왔으니까요. 예전에는 작업이 끝나면 에너지가 소진되고 고립감, 공포, 허무 같은 감정이 밀려와서 일주일간 집 밖에 못 나가고 그랬거든요. 지금은 여러 작업을 병행하거나, 한 작업이 끝나면 푹 쉬고 다음 작업을 계획할 수 있어요. 강박에서 많이 벗어나서 지원사업에 떨어져도 프로젝트를 제안하는 용기도 생겼고요. 목표와 관심사, 지향점이 통하는 동료들이 많이 생기기도 했고, 프로젝트의 시작은 나일지라도 과정은 다 같이 만드는 만큼 책임과 고난도 나누어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많이 편안해졌어요. 연출로 공연에 참여하면 제가 사람들을 섭외하고 설득하는데, 접근성 매니저는 저를 불러주시잖아요. 그게 심리적으로 편한 것도 있는 것 같아요.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불렀겠지 하는 마음.

병행하는 직무에 대한 인정과 보상

하늘
병행하는 직무가 많아지고 있는데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잖아요. 연극 현장을 둘러싼 여러 제도 안에서 다양한 직무를 병행할 때 부딪히게 되는 문제가 있다면 공유해주세요. 이를테면 현재 예술활동증명을 신청하게 되면 각각의 직무에서 활동한 내용이 합산되지 않는데요. 이와 같이 제도가 현장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까요?
병재
얼마 전에 아예 학부도 나오지 않고 연극 경험도 없이 ‘연극을 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상경한 분을 만났어요. 그런 분들은 보통 운이 좋으면 오퍼레이터, 진행 크루, 조연출로 경력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런 경력은 배제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더라고요. 작은 역할에서도 배우는 것이 많을 텐데 주요 창작 업무만을 경력으로 인정하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보름
공공 제작극장의 조연출을 했던 적이 있어요. 조연출은 연출보다 책임이 덜하고, 들어가는 시간도 적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계약금도 적었고요. 근데 일해보니 그게 아닌 거예요. 처음 약속한 시간보다 몇 배의 일을 하고 있더라고요. 구체적인 근거를 들어서 연출의 동의를 구하고 PD에게 이야기해서 다시 계약서를 쓴 적이 있어요. 너무 과도한 업무가 주어지는데 그거에 대해 항의한 사람이 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더더욱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데에는 미투 운동과 KTS 활동의 영향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동시에 제가 연출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적은 지원금 안에서 인건비를 해결하다 보니 늘 동료들에게 미안해하는 입장에 놓이거든요. 내가 프로젝트를 주관할 때는 남들을 착취하면서 내가 공공극장에서 착취당할 때는 이야기하고, 이렇게밖에 작업을 지속하지 못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두영
보름 님도 그 과정에서 착취를 당하잖아요. 내 사례비를 줄여서 다른 사람의 사례비를 올리고. 저는 지원사업 내에서 대표자 사례비 책정 조항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대표자가 있고, 제작은 다른 누군가가 하는 식으로 분업이 잘 되어있으면 좋겠지만, 대표가 제작자이자 연출인 경우가 많아요. 대부분은 다 개인사업자고 면세사업자죠. 그런데 일괄적으로 지원금의 몇 퍼센트 이내로 대표자 사례비를 제한해버리면 대표는 결국 무보수로 일하거나, 최소한의 수입만 갖게 되거든요. 대부분 대표들은 여러 직무를 병행하고 있을 텐데 행정적 편의를 위한 조항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참여자 마두영. 검은 반소매 티셔츠를 입었으며, 짧은 머리는 곱슬곱슬하다. 왼손으로 턱을 괴고 오른손은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마두영
하늘
제도적 보완도 필요하지만, 모두의 인식을 바꾸는 일도 중요할 것 같아요. 실제로 한 프로덕션 안에서 두 개 이상의 역할을 하게 되면 충분한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환경인가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떤 합의의 과정을 거쳐 적절한 기준을 마련할 수 있을까요?
하영
저는 같이 일하는 동료가 두세 가지 일을 하고 있을 때, 크레딧에 꼭 올려달라고 요청해요. 그게 경력이 될 수 있고, 사례비 책정에 영향을 줄 수도 있잖아요. 극단 활 할 때 많이 신경 썼던 것 같아요. 극단에서는 자신의 능력치를 보여주고 싶어서, 또 극단의 작품이 잘 되길 바라서 희생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수고했어’ 한 마디로 넘어가는 건 인정해주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뭐라도 남길 수 있도록 제안했던 경험이 있어요.
두영
저도 한 공연 안에서 배우이자 무대감독을 하거나, 연출을 하면서 오퍼레이터나 하우스 매니저를 하기도 하는데요. 제작자 입장에선 프로덕션 안에서 어떤 동료가 두 가지 직무를 병행하게 되면, 최소한이더라도 사례비를 차등해서 편성하거나, 크레딧을 신경 쓰고 있어요. 사례비를 많이 주면 좋을 텐데, 그럴 수 없어 참 미안한 마음도 있고요.

직무 전문성의 획득과 재구성

하늘
이제 직무 전문성의 획득과 재구성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새로운 직무를 병행하면, 그 직무가 요구하는 기술과 노하우 등의 전문성은 어떤 방식으로 얻게 되나요? 해당 직무에서 전통적으로 전문성을 습득하는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을 재구성해가시는지 궁금합니다.
병재
예전에는 어떤 일을 하고 싶어도 방법을 모르겠더라고요. 오퍼레이팅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핑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디서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고요. 점점 동료들이 생기고 그들이 작업하는 걸 보다 보니 저도 그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저는 주변 분들이 일하는 모습을 매뉴얼화해서 적어요. 나중에 비슷한 업무 제안이 들어오면 할 수 있을 만큼 관찰하고 기록합니다. ‘저 일이 언젠가 내 일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런 마음으로 역량을 키우니 연극과 관련 없는 활동은 덜 하게 되고, 더 건강해지는 것 같아요.
두영
배우로 활동하면 연출가들을 많이 만나잖아요. 그들을 통해 배우는 것 같아요. 어떻게 배우 및 스태프와 소통하는지, 어떻게 작품 리서치를 하고 프로덕션을 운영하는지 살피고 제가 연출할 때에 참고하는 거죠. 저는 동료 배우들에게도 연출을 한번 해보면 얻는 게 분명 있고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고 이야기해요.
하늘
서로서로 배우게 되는 것 같아요. 그게 좋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것의 저작권이 있는지, 상도덕을 지키지 않는 건 아닌지 고민이 되기도 하고요.
보름
접근성 매니저는 전공 학과나 커리큘럼이 마련된 것도 아니라서 알아서 어깨너머로 배워야 하는 영역이거든요. 얼마 전 문체부 연구사업팀에서 활동지원사, 수어통역사처럼 장애 관련 매개자 직군의 개념으로 접근성 매니저를 육성하려 한다고 해서 자문을 한 적이 있어요. 접근성 매니저에게 가장 필요한 역량과 양성 방법을 물어보시는데, 현재 상황에서는 공연 장르에 대한 이해, 예술적 감수성, 기술적인 능력과 경험이 있어야 접근성 스태프로서 창작진들과 소통할 수 있다고 대답했어요. 장애 혹은 접근성에 대한 이해로 공연 분야에 접근하는 방식은 뭔가 순서가 거꾸로 되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역량을 쌓았냐는 질문이 이어져서, 동료들과 스터디를 하고 프로덕션마다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시도하고 실패하는 과정이 누적되었다고 답했어요.
하늘
한편 병행하는 직무로 인해 주요 직무를 위한 시간, 체력, 스트레스 관리가 어려울 수도 있을 텐데요. 주요 직무에서의 역량 강화를 위한 훈련, 탐색, 연구, 실천 등을 해나가기 위한 각자의 접근법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두영
저는 서울연극센터의 플레이업 아카데미를 좋아합니다. 지금도 사실 타이트 와이어 줄타기 워크숍에 참여하고 있고, 이전에도 각종 워크숍을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좋은 프로그램이지만 플레이업 아카데미에 참여하려면 지원서를 쓰듯이 자기소개서와 지원동기를 써야 해요. 경쟁률이 높더라고요. 이마저도 경쟁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어떻게든 아카데미를 들어보라고 주변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효진
저는 독학을 합니다. 자막이나 매핑도 혼자 집에서 공부했어요. 사실 작업 제안을 받을 때 안 되겠다 싶은 것들도 다 수락하거든요. 일단 받고 해보는 거죠. 물론 그러다가 결국 안 될 수도 있지만, 어떻게든 방법을 찾으면서 다른 것들이 생성되기도 해요. 연극이 아닌 장르를 만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장르와 환경이 달라지는 데서 발생하는 것들이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지는 거죠.
참여자 이효진. 빨간색 긴소매 셔츠를 입고 짧은 쇼트컷 머리를 했다. 두 손을 포개어 책상 모서리에 올리고 상체를 가볍게 숙여 이야기한다.
이효진
병재
저한테는 세 가지 방법이 있는데요. 저는 사소한 것에서 출발해서 연극을 만드니까 이상한 데서 영감을 얻거든요. 얼마 전부터는 지원사업 일정에 맞춰서 창작을 생각하고 기획하는 게 짜증이 나서 작년 10월, 11월에 올라왔던 모든 지원서를 쓰지 않았어요. 지금은 지원서 시즌에 몰아 쓰는 게 아니라,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지원서를 써요. 제목을 쭉 적어두고, 그렇게 틈틈이 적어두면 생각이 잘 나더라고요. 두 번째는 작업하지 않는 일상에서 연극을 생각하는 것인데요. 어셔 일을 하면서 남의 공연 보고 있으면 왜 이렇게 제 작업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어요(웃음). 제가 절대 안 볼 것 같은 공연도 보고, 티켓을 구하기 어려운 공연도 보고, 사람들도 만나고, 해외 공연의 제작 환경을 가까이서 볼 수 있으니까, 공연 보면서 종이랑 볼펜을 살짝 꺼내서 제 걸 막 쓰기도 해요. 마지막으로는 벗어나기, 저는 낚시를 좋아해요. 낚시하러 가면 아무 생각이 안 나거든요. 그렇게 뇌를 비우고 돌아오는 식으로 역량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하영
저도 플레이업 아카데미 너무 좋아합니다. 작년 겨울에 참여했었는데 혼자 고립감을 느끼다가도 동료들을 만나 같이 집중하는 과정을 거치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동력이 생기더라고요. 또 이하영의 일상을 잘살아보는 것과 내가 모르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걸 하려고 해요. 너무 연극 안에서만 살아서, 연극 바깥의 사람들에 관심을 안 준 것 같더라고요. 살면서 스스로를 관찰하지 않은 것 같아 자신을 살피는 일도 많이 하고요. 배우는 어떤 기회가 있을 때 그에 맞는 기억과 감각을 이용할 수 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하며 일상을 잘 지내고 있습니다.

어떻게 병행 (안) 할 것인가

하늘
이제 마지막 질문을 나눠보려고 합니다. 자신의 직무가 앞으로 어떻게 변화해갈 것으로 예상하시나요? 다른 직무를 병행하는 것과 관련해, 지속적인 활동을 해나가기 위해 연극 현장, 혹은 정책 영역에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들려주셔도 좋습니다.
하영
예술인들의 기본 소득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병행 직무가 계속 발생할 것 같아요. 배우라는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일을 병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니까요. 지원사업 금액이 늘고 대상이 느는 것도 좋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본 소득을 보장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원사업에서 제작비와 인건비가 따로 책정되는 방안도 필요하고요.
보름
지원사업 내에서 식비 같은 건 증빙이 안 되다 보니, 연습이나 셋업 때 식대를 대표자 사례비로 페이백하는 경우가 있어요. 이게 제 소득으로 잡히니까 예술인복지재단의 창작지원금도 떨어지고, 파견예술인 사업에도 참여할 수 없더라고요. 이런 구조라면 제가 연출 작업을 지속할 수 있을지 고민되기도 하고, 소진되는 마음도 커서 다른 배움을 위한 시간을 계획하고 있어요. 충전의 시간을 계획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여유와 에너지가 다시 생기는 것 같아요.
그래도 저는 창작자로서 공공지원을 통해 많은 수혜를 입었다고 생각하고, 연극계 구성원으로서 어떤 시기를 통과하며 겪은 경험자산이 있기 때문에 제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훈련했을 때 그걸 동료들과 나누면서 기여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요. 그렇다면 꼭 연출이 아니더라도 연극을 계속할 것 같습니다.
참여자 강보름. 남색 배경에 초록색 커다란 나뭇잎이 여럿 그려진 재킷 안에 흰색 티셔츠를 받쳐 입었다. 어깨에 살짝 닿는 단발머리의 끝부분 일부가 노란색으로 염색되어있다. 동그란 안경을 썼다.
강보름
두영
설문 결과를 보면 “연극 현장의 경쟁 구도를 통해 동료들과 건강한 자극을 주고받으면서 나의 작업을 돌아볼 수 있다”에 대한 40대의 점수가 낮더라고요. 제 동료들을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40대에 제작도 하고 연출도 하는, 같은 입장을 가진 분들과 만나 하소연하는 자리라도 마련한다면 위로가 될 것 같기도 해요. 또 이 자리에서 이야기 나누다 보니 저도 준비가 되었을 때 지원서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지원사업 기간이 몰려있는 것이 매번 힘들었거든요. 무언가 다 만들어지지 않았는데 지원서는 다 만든 것처럼 쓰고, 막상 지원금 받으면 그때부터 촉박한 시간 내에 만들어야 하고. 이런 일정이 큰 스트레스가 되는데, 확실히 준비되고 완성됐을 때 지원하면 더욱 안전한 환경에서 작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준비된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게 맞는 거죠. 그런 미래를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병재
저는 같은 사람들과 작업을 계속하게 되더라고요. 마음이 맞아서 함께하기도 하지만, 적은 사례비를 주면서 ‘다음에 더 많이 줄게’ 하는 거죠. 그러려면 제가 또 지원서를 계속 써야 하고요. 오늘보다 내일 더 많이 주고 싶고, 지원금도 더 받고 싶은 압박감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대관 사업이나 극장 운영을 비롯해 연극계 대부분의 일들이 지원서 일정을 따라가잖아요. 지원사업에 대한 의존이 너무 과한 것 같아서 일정을 잘 분배할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설문 결과를 보며 제가 앞으로 거쳐 갈 40대, 50대가 고민되기도 하지만, 지금 어떤 이야기와 행동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봐야겠습니다.
효진
저는 어떤 영역이든 각자의 고유성과 역량이 있고, 이를 존중해야 한다고 믿거든요. 그런데 흔히 병행 직무로 여겨지는 오퍼레이팅, 하우스 안내 같은 파트들은 존중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존중받아야 할 일들이 곁가지처럼 보이는 게 싫기도 하고, 그렇다면 저도 하나의 주요 직무를 지속하면서 다른 파트를 존중하는 방식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연극계 전반적으로 각 파트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여러 파트들이 고유성을 가지고 모이려면 전문성에 대한 존중도 있어야 하고, 그 전문성을 갖추기 위한 공부도 필요하겠죠.
하영
극장에서는 여러 일을 겸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배우들이 조명을 달고, 음향을 맡고. 전문적 지식보다는 경험이 더 중시되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건 안전과도 연결되는 문제거든요. 겸업이 너무 심해지면 다른 직무에 대한 존중이 사라지고, 결국 안전과도 멀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력이 없고 비용이 없어 한 사람이 여러 일을 하는 건 소모적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하늘
제도적 뒷받침만큼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는 관계를 형성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병행하는 직무에 있어 각자 역할이 다르고 쌓인 고충이 이렇게 많은데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고 각자의 노동에만 시간을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화의 자리가 더 많이 필요할 것 같아요. 동시에 멋지다는 생각도 들고요. 물론 과노동은 염려가 되지만, 다양한 직무를 수행한다는 건 그만큼 능력이 있다는 것이고, 연극을 애정하는 마음에서 이것저것 하시는 것 같기도 해서요. 물론 연극인들이 지속적인 활동을 해나갈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지만요. 서로를 긍정하는 마음으로 응원하고 싶습니다. 오늘 이야기 나누어 주셔서 감사드리고요. 좌담은 이렇게 마무리하겠습니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