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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의 시작, 그리고 지속을 말하다

연극인의 커리어: 어떻게 연극하고 있나요?

정리_연극in 편집부

제255호

2024.06.13

웹진 연극in에서는 지난 3월에서 4월 사이, 약 3주에 걸쳐 서울 지역에서 활동하는 연극인을 대상으로 “연극인의 커리어: 어떻게 연극하고 있나요?”라는 주제의 설문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이번 [기획]에서는 이 설문조사의 결과 분석을 토대로, 이 시대 연극 활동의 특수성을 확인하고 연극인의 지속 가능한 활동을 위한 환경을 함께 고민해보려 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20대 연극인들의 좌담을 통해 이제 막 연극을 시작하는 위치에서 각자가 경험하는 창작·제작의 현실을 짚어봅니다.

일시:
2024년 5월 28일 화요일 오후 1시~3시 30분
장소:
서울문화재단 대학로센터 2층
진행:
박하늘(웹진 연극in 편집위원)
참여:
김남현, 심지후, 정희원, 지구, 최아련


무릎 높이의 원탁 두 개를 가운데 두고 좌담 진행자와 참여자 다섯 명이 디귿 자로 둘러앉아 있다. 각자 무릎 위에 노트북이나 태블릿PC를 얹어둔 채로, 혹은 인쇄물을 손에 든 채로 설문조사의 결과를 확인하고 있다. 이들의 뒤쪽 벽면에는 각기 다른 예술가의 얼굴이 들어 있는 행사 포스터 여러 장이 붙어 있다.
하늘
오늘은 웹진의 설문조사 결과를 토대로 20대 연극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 합니다. 아무래도 이제 막 작업을 시작하는 시기이다 보니 다른 세대와 차이가 나는 응답들이 다수 있었는데요. 웹진에서는 오로지 이 결과만을 놓고 20대 연극인들을 일반화하지 않으려 주의하고 있습니다. 오늘 자리에서는 각자의 위치에서 고민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나눠주세요. 자기소개를 먼저 부탁드릴게요. 주요 직무, 병행하는 직무, 연극을 시작하게 된 경로 등을 토대로 얘기해주세요.
지구
안녕하세요. 저는 <허우적>의 작가이자 <남자 사랑 레즈비언>을 쓰고 연출한 지구라고 합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신촌극장에서 <안녕히 계세요 또 올게요>라는 작품으로 연극을 시작했어요. 극장에 무작정 대관이 되는지 문의했어요. 지금아카이브에 소속되어 있었고, 지금은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남현
안녕하세요. 1년 차 기획자 김남현이라고 합니다. 작년 신촌극장에서 <세 개의 짧은 연작들>로 연극을 시작했고 지난 4월에 <쉬는 시간>이라는 작품을 끝낸 후 지금 다른 작품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는 예술 고등학교, 예술 대학을 졸업했어요. 연극과 영화를 하다가 현실적인 판단 때문에 광고 회사로 잠시 도망을 간 적도 있는데요. 빚이 남아 있는 느낌이 들어 다시 동료들과 이 길을 걸어가려 하고 있습니다.
아련
안녕하세요. 저는 최아련이라고 하고요. 저는 기획자, 작가, 연출가, 퍼포머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저도 예술 고등학교, 예술 대학을 졸업하고 런던 드라마스쿨에서 대학원 과정을 수학했습니다. 2019년 런던에서 <Mind the Gap>이라는 작품으로 창작활동을 시작했고요. 2021년부터 서울에 돌아와 프로젝트 뉴 플래닛이라는 팀을 결성하고 활동 중입니다. <Let’s Go To My Star 시즌1, 2>로 관객을 만났고요, 올해 시즌 3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후
안녕하세요. 저는 심지후고요. 주로 연출을 하고 조연출도 합니다. 저는 2019년에 연극을 시작했어요. 예술이 아닌 전공으로 학부를 졸업하고, 막연하게 연극이 하고 싶어서 입시를 준비했거든요. 입시 과외 선생님의 작품에 조연출로 참여하면서 연극계에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오르막길의 평화맨션>, <올가의 방>, <큰 가슴의 발레리나>, <비밀의 화원> 등의 작업을 했습니다.
희원
저는 극단 드림플레이 배우 정희원입니다. 다른 직무를 많이 해보지 않았지만, 오퍼레이터 제안을 꽤 받습니다. 제가 처음 본 연극이 지금 속해 있는 극단의 작품이었거든요. 그때 연극의 현장성과 연극이 주는 메시지에 감동 받았고, 자연스럽게 대학교를 졸업하면 연극을 꼭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어서 연극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늘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설문조사 자료를 살펴보시면서 전반적으로 어떻게 느끼셨는지, 공감 가는 결과나 아쉬운 문항들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해볼까요?
지구
저는 제 응답과 설문 결과를 비교해봤는데요. 생각보다 20대의 일반적 응답과 제 응답이 달랐고, 오히려 직무가 같은 분들과 비슷한 답변이 많았던 것 같아요. 제일 인상 깊었던 문항은 “5년 뒤 자신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였는데요. 저는 지금과 똑같이 살 거라고 대답했는데, 같은 대답을 하신 분들이 많았거든요.
남현
저도 20대 답변과 제 답변이 다른 부분이 많아서 흥미로웠어요. 특히 “연극의 창작·제작 활동을 노동이라고 인식하나요?” 문항에서 20대의 평균이 가장 낮았거든요. 저는 예술노동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공연예술노조 조합원이기도 한데요. 공연을 끝내고 제 사례비를 보면, ‘이걸 노동으로 생각하면 버티기 힘들겠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던 것 같아요. 아르바이트하는 것보다 더 많은 애정과 품을 들이는데 그 결과가 최저시급에도 못 미치는 경험이 쌓이다 보면 이것을 노동으로 인식하기 어려울 수 있겠다고 추측했어요.
희원
제가 평소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많아서 새로운 생각들을 많이 해볼 수 있었어요. 특히 직업인으로서 연극인의 활동을 ‘연극 활동’, ‘연극 관련 활동’, ‘연극과 전혀 상관없는 활동’으로 나눈 것을 보면서 지금까지의 제 활동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지후
설문조사에서 연극 창작·제작 환경의 특수성을 불안, 고립감, 경쟁구도라는 세 가지 항목으로 제시하잖아요. 연극을 하면서 느끼는 정서를 잘 요약해서 물었다는 생각이 들어 재미있었어요. “어떤 계기로 연극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됐나요?”라는 질문에 답하면서 지금의 위치를 확인했고, 3년 전에는 지금과 다른 정체성과 위치였단 걸 발견했어요. 같은 20대라고 해도 다양한 위치성을 가진 이들이 있다는 것이 결과에서도 드러나서 설문 결과를 잘 독해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아련
모든 질문과 결과가 흥미로웠어요. 사회구성원으로서 연극인의 위치와 역할 파트가 재미있었는데,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활동 환경에 대한 인식을 시작하다

하늘
문항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서 더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연극인으로서 자신의 현재 상태에 대한 인식이 첫 카테고리인데요. 다른 세대에 비해 20대에서 매너리즘과 번아웃을 느낀다고 응답한 비율이 가장 높았습니다. 이제 막 창작을 시작한 20대 연극인들이 자신의 상태를 이렇게 인식하는 데에는 어떤 환경적 요인이 영향을 끼쳤을까요? 개인적인 경험들을 토대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진행자 박하늘. 검은색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머리를 뒤로 묶었다. 노트북을 펼쳐둔 채로, 양손을 앞으로 내밀어 이야기하고 있다.
박하늘
희원
저는 매너리즘과 번아웃은 아직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제 성격일 수도 있는데, 어딘가 막히는 지점이 생기면 ‘내가 변화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먼저 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요. 또 저는 너무 운이 좋게 극단에 들어와 있었고, 가까이서 선배님들을 볼 수 있어서 많은 도움을 받은 것 같아요. 연극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당장 성장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련
20대에 프로젝트팀, 혹은 극단을 꾸리면 프로뎍션 규모가 작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한 사람이 해내야 하는 역할과 업무의 양이 늘어나죠. 한국에서 첫 공연을 올릴 때만 해도 모든 일을 떠안더라도 연극이 너무 하고 싶었고 이를 충분히 할 수 있는 건강한 몸과 마음의 에너지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활동을 거듭하다 보니 부차적인 일도 많아졌고, 체력과 마음이 소진된 것 같아요. 지원사업에 선정되면 협업자를 고용할 수 있지만, 선정되지 않으면 모든 일을 해야 하고요.
또 번아웃이라는 게 일에 지칠 때만 오는 게 아니라, 연극 생태계의 부조리를 경험했는데 상황을 개선할 수 없을 때 느끼는 좌절감에서 더 절실하게 온다고 느꼈거든요. 일이 많으면 잠시 쉬거나, 자금을 마련하고 분업하는 등 해결책을 찾을 수 있어요. 하지만 좌절감에서 오는 번아웃은 제 선에서 쉽게 해결책을 찾을 수 없어요.
남현
저도 비슷한 번아웃의 경험이 있어요. 대학 졸업하자마자 처음으로 대학로 극장에서 동료들과 공연을 올렸어요. 그때 ‘너네 마음에 안 든다, 내가 위약금 물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 걔는 앞으로 내 극장 출입금지다’ 이런 말을 들었거든요. 극장 일정도 빠듯한데 어떻게 대응할지조차도 모르겠는 거예요. 동료들과는 안전한 창작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는데, 팀의 외부로부터 불안전함이 들어오니까 무기력하더라고요. 앞으로 연극을 함에 있어서 이런 상황을 계속 마주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번아웃이 왔어요.
지구
저는 처음 데뷔할 때부터 매번 ‘이게 내 은퇴작이다’라는 생각을 하는데요. 부조리한 체계에 대한 무기력함과 동시에 ‘내가 타인을 착취한다’는 생각의 무게도 일조했던 것 같아요. 주변 사람들을 착취하는 게 어려운 일이고, 빚을 계속 지는 구조 같아서 지치더라고요.
지후
저는 동료들의 사례비를 터무니없이 책정했을 때 매너리즘에 빠지더라고요. ‘이렇게까지 해서 연극을 해야 하나’라는 생각과 ‘연극 하려면 이렇게 해야 해’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면서 지향과 실제의 괴리가 나를 옭아맨다고 느꼈어요. 아련 님 말씀처럼 체력적인 요소는 번아웃과 매너리즘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것 같아요.
하늘
연극계의 부조리와 착취구조가 크게 와닿아 마음이 무겁네요. 부끄러움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설문조사 결과의 또 다른 특징으로, 이 카테고리의 여러 문항에 대해, 20대에서는 다른 세대와 비교해 “매우 그렇다”와 “매우 그렇지 않다”를 선택한 비율이 높았습니다. 응답이 중간값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양극단으로 나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만큼 20대 연극인들이 놓여 있는 조건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일까요?
지구
연극계의 특성상 개인의 네트워크에 따라 한 해의 작업량이 크게 차이가 나잖아요. 일 년 동안 공연을 아예 못 하는 경우도 있고, 끊임없이 작업을 이어 나가는 사람도 있고요. 20대에게 안정적인 환경이 갖추어지지 않다 보니, 좀 더 극단적인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남현
함께 작업하는 동료집단의 분위기나 방향성에 따라서 연극 경험의 편차가 양극단으로 나뉠 것이고요.
지후
20대는 작업의 기회가 양적으로 적기도 하고, 스스로 획득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잖아요. 연극계에 진입했다 하더라도 궤도에 오르기까지 어려움이 있고요. 그렇다 보니 주변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런 민감함이 극단적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하늘
“몸이 아파도 동료들과의 약속을 지킨다”, “불필요한 감정 노동을 한다고 느낀다” 등의 문항에 대한 결과를 보면, 20대는 다른 세대보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를 지키면서 연극을 하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서로가 다른 만큼 다양한 세대가 함께 작업하는 경우 갈등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와 관련한 직간접적인 경험이 있다면 공유해주세요.
지구
건강한 상태를 지킨다기보다, 연극계가 다른 곳들에 비해 조금 더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하지만 동료들과 있을 때 대체로 안전하다고 느끼면서도 세대나 경력 차이가 나는 선배들을 만날 때 위축되는 게 있어요. 아무것도 모른다거나 선배의 의견을 무조건 수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압박이 있어요.
지후
경력이 많은 40대 창작 스태프분들과 작업할 때 눈치를 봤어요. 나이 차이보단 경험과 기술 차이 때문에요. 스스로 찾아야 할 연출적 비전을 선배들을 통해 확인받고 싶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작업을 계속해나가면서 그런 경향이 옅어졌어요.
아련
20대의 경우 다양한 세대가 함께하는 작업에 주체적인 역할로 참여하기는 어렵거든요. 이미 활발히 활동하는 선배의 팀에 조연출이나 컴퍼니 매니저, 무대 조감독 등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죠. 프로덕션의 전체 방향이나 주도자의 성향이 개인이 추구하는 가치관이나 스타일과 맞지 않는 프로덕션에 속하면 힘들어지는 것 같아요.
남현
저는 지금까지 또래 집단하고만 작업을 하고, 이제 곧 다양한 세대와 함께하는 작업에 참여할 예정인데요. 계약 단계에서부터 걱정이 되어서, 무서워하고 있어요. 한 가지 궁금했던 건, 몸이 아픈데 약속을 지킨다고 대답한 분들이었어요.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다르겠지만, 몸이 아픈 상황만큼은 존중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참여자 김남현. 살짝 컬이 들어간 머리에 검은색 뿔테 안경을 썼다. 하얀색 티셔츠 위에 아이보리색 남방을 입었다. 무릎 위에 노트북을 얹어둔 채 이야기하고 있다.
김남현
지구
저는 몸이 아파도 약속을 지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거든요. 제가 작가로 참여하고, 연출가가 따로 있으면 연습에 빠질 수 있어요. 그런데 연출가로 참여할 때는 제가 빠져버리면 연습이 아예 진행되지 않거든요. 그래서 어쩌면 직무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을 것 같아요.
하늘
제가 연극을 막 시작하려 할 때, 어떤 선배가 ‘연극은 배우 한 명이 죽어도 올라가는 거야’라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경험한 세계에는 절대적인 것이 있었어요. 지금은 안전한 창작환경에 대한 인식이 공유되면서 연극계가 건강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코로나 팬데믹 기간을 거치면서 공연이 얼마든 취소될 수 있다는 인식도 일반화되었고요.
지후
저는 운이 좋아서 대부분 평등한 제작환경을 지향하는 프로덕션에 참여했거든요. 그럴 수 있었던 건 2019년에 연극을 시작했기 때문이에요. 그 수혜를 톡톡히 입는 중입니다.

불안, 고립감, 경쟁 구도: 기회의 문제

하늘
그럼 두 번째 카테고리로 가볼게요. 연극 창작·제작 활동 환경의 특수성인데요. 불안을 경험하는 비율은 60대 이상을 제외하면 20대에서 꽤 낮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다만 불안을 경험하는 이유에 대해서, 여러 보기 중 “창작의 영감이 고갈될 것 같아서”를 1순위로 선택한 비율이 가장 높은 세대는 20대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무엇일까요? 개인적으로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될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놓고 20대에게 이걸 묻는 것에 대한 죄송한 마음이 있어요.
희원
저는 창작의 영감이 고갈될 것 같아서 불안을 경험해 보진 않은 것 같아요. 제가 다른 직무를 병행하지 않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도전을 좋아하는 성격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요. 20대 연극인들이 더 다양한 공연과 새로운 경험을 접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지구
저는 미리 대본을 써놓지 않는 편이거든요. 마감이 있으면 영감이 있든 없든 글을 쓰게 돼요. 그래서 어쩌면 20대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 더욱 불안을 야기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원사업을 늘리면 이런 불안을 해소할 수 있겠죠.
지후
20대 작업자는 뭐든 해보려는, 창작을 지속하기 위해 시도하려는 마음이 큰 것 같아요. 저도 나름 결이 다른 작품을 시도했는데, 네 번째 작품을 마친 후에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것 같은데,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생기더라고요. “창작의 영감이 고갈될 것 같아서”라는 문항에 대답한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영감을 얻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면 불안을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요. 동료들, 선배들과 작업 고민을 나눈다든지, 지적인 훈련도 할 수 있는 안정된 유휴시간을 보장받고 싶어요. 작업 중에는 시간이 없거든요.
아련
저는 이 지점이 제도적으로 해소될 지점인지 고민했어요. 주변만 들여다봐도 할 이야기가 너무 많고, 이걸 발굴하는 훈련은 예술가로서의 평생 숙제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고갈될 것 같다는 불안의 내면을 더 고민해봤어요. 예술가 개인의 취향, 철학, 문제의식을 예술적 언어로 전환하고, 개발, 심화할 방도를 함께 고민할 동료가 없다는 뜻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동료 네트워크를 통해 불안을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요.
동시에 20대 때에는 제작극장에서의 기회를 거의 얻을 수가 없어요. 청년지원이 많아졌지만, 인건비를 지급하면 제작비나 연구비로 쓸 예산이 많지 않아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상상력을 거세하게 되는 거예요. 나의 기획을 현실적으로 구현할 수 없으니 자꾸 작은 상상력에 희망을 품고, 창작의 영감이 있어도 당장의 실현은 어쩔 수 없이 미루는 거죠. 기획력이 뛰어나지 않거나, 자기 생각을 지원서에 풀어내는 데에 미숙한 20대에게는 이것이 충분히 부담과 불안으로 다가올 것 같아요.
남현
무언가를 온전히 고민할 시간이 주어져야 창작의 영감을 받고 연극도 만들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 연극 활동 이외의 아르바이트나 다른 노동에 쏟는 시간이 많은 20대한테는 창작의 여유가 없을 수도 있는 거죠. 연극 관련 활동으로 기본적인 생계 지원이 되면 해소될 수 있지 않을까도 생각했어요.
하늘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고립감 경험도 60대 이상을 제외하면 20대에서 가장 낮았는데요. 20대는 고립감의 이유로, “연극 현장에서 함께할 학연·지연·혈연이 없어서”,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고 느껴서”, “지원금 미선정 경험이 누적되어서”를 공동 1순위로 선택했습니다. 20대 연극인들에게 네트워킹 기회가 더 필요한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어떤 네트워킹을 하고 계신가요? 어떤 제도적 뒷받침을 원하시나요?
아련
작년에 서울연극센터에서 플레이업 아카데미 극작 수업을 들었거든요. 감사하게도 상호협력의 관계를 이어 나가는 동료들을 얻었어요. 이처럼 공공에서 교육 프로그램, 네트워킹 프로그램을 열어주면 좋겠어요. 선배 연극인을 만나서 수업도 듣고, 연극인으로서의 고민도 나누고, 서로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거든요. 세대 간의 네트워크도 비공식적인 술자리가 아니라, 공적으로 마련되면 유익할 것 같아요.
참여자 최아련. 단발머리에 퍼프 소매의 남색 재킷을 입었다. 무릎 위에 노트북을 얹어두고 양손을 몸 앞쪽으로 모으고 있다.
최아련
지후
저도 세대 간에 네트워킹이 활발해지면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작업 공동체가 있는데요. 또래들과 30, 40대 작업자분들까지 세대와 경험이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어 도움을 많이 얻었거든요. 또 지금 예술 대학원에 다니는데 만날 일 없는 작업자들과 기꺼이 응원하는 마음으로 거침없이 서로의 작업을 피드백할 수 있어서 좋아요. 이렇게 작업자들끼리 모여 건강한 비평을 주고받을 수 있는 모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희원
저는 작년에 대한민국 연극제 in 제주 네트워킹 페스티벌에 참여했는데요. 일주일간 제주에 머무르면서 공연을 하고, 보고, 모든 팀이 모여 만남을 가졌어요. 돈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공간과 돈이 마련되면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하늘
한편 현장의 경쟁과 관련해서는 “예술이 승자독식 구조에 종속되는 것은 문제다”라는 문항에 대한 20대의 평균이 다른 세대와 비교해 매우 낮았습니다. 이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을 들려주세요.
지후
세 가지를 추측해봤는데요. 첫 번째는 익숙해져 있어서가 아닐까요. 아무래도 시기상 대학입시와 가장 가까운 세대잖아요. 대입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승자독식이고, 많이 노출된 만큼 그것을 수용한 게 아닐까요. 또 예술계 진입 과정에서 난항을 겪는 경험이 이 결과에 영향을 줬을 수도 있고요. 작업의 질적, 양적 확장이 제도적으로 뒷받침되면 충분히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해요. 두 번째는 관객의 위치에 있다가 창작자로 넘어오는 경우가 많다고 느꼈거든요. 창작자가 되어서도 예술작업에 대해 소비자적 태도로 접근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긍정적으로 본다면 창작자들의 조건이 다양화된다는 것이죠. 마지막으로는 소수에게만 지급되는 지원금 시스템에 대한 의존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무의식적으로 기관의 욕망에 자신을 투영한 예술가의 답변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구조의 한계, 다양한 기반의 필요성

하늘
세 번째 카테고리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연극인으로서 지속 가능한 활동을 위한 커리어 관리 현황인데요. 20대는 연극인 정체성 획득 계기에 대해서, 다른 세대에 비해 “처음 계약서를 작성하면서”와 “처음 창작 지원금에 선정되면서”를 가장 높은 비율로 선택했습니다. 그만큼 계약서 작성이 일반화되었고, 젊은 세대를 위한 창작 지원금도 늘어난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원금 기회는 여전히 부족하고, 계약서 작성이 일반화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적정한 사례를 보장한다거나 완전히 안전한 조건을 약속하는 것은 아닐 텐데요. 이와 관련한 여러분의 경험을 듣고 싶습니다.
지구
저는 계약서 작성이 일반화되고 창작 지원금이 늘어났다는 걸 실감한 적이 없어서 이 질문이 흥미로웠어요. 저로서는 계약서를 쓰는 게 일반적인 환경에서 연극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페이가 적어 생계를 보장할 수 없다는 게 가장 안전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희원
저는 누군가 만든 프로덕션에 참여하는 입장이라 사실 지원사업과 거리가 멀었던 것 같아요. 올해 들어서 지원서를 써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알아봤는데,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예요. 제가 작품을 써보거나 기획해보지 않아서 혼자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선배들의 도움으로 지원서를 써냈어요. 선정되지는 않았지만요.
지후
작년이나 재작년에 비해 올해 창작지원금의 수혜 대상도 줄고 항목도 변했거든요. 그래서 어떤 연도를 기준으로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지 복잡했습니다. 올해를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지원금 기회가 정말 턱없이 부족하죠. 그리고 기회가 안정적으로 주어지지 않고 단발성으로 개별 사업, 개별 작품에만 지원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래도 젊은 예술인이 계속 실험하고 시도할 계획을 장기적으로 세우기 어려운 조건이에요.
참여자 심지후. 머리를 뒤로 묶어 앞머리와 옆머리를 내렸다. 노란색과 카키색이 섞인 소매가 짧은 니트를 입었다. 손에 펜을 들고 양손을 모은 채 이야기하고 있다.
심지후
하늘
특히 개인 예술가, 청년 예술가를 지원해주는 사업 자체가 적고 예산도 삭감되었죠.
남현
지금으로서는 20대 연극인이 그나마 안전하게 공연을 제작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지원사업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저는 작년에 처음 지원서를 썼는데, 그때 ‘바뀐 장관에 맞춰서 지원서를 써야 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실제로 그런 분위기가 있었고요. 정치 흐름에 의해 연극계 전체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서 이 가운데서 어떻게 작업을 지속할 수 있을지, 안전한 환경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했던 것 같아요.
지후
정치가 돌아가는 판을 읽으려고 연극하는 게 아닌데 연극을 하려면 정치를 살펴야 한다는 게 이상해요. 정권 따라 흔들린다는 건 연극예술에 대한 공공의 이해가 없다는 말이잖아요. 연극은 사회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산업이에요. 그런데 그나마 남아 있던 연극계 거버넌스도 올해 들어 무너지고, 공공예술센터들도 폐관되거나 운영 방향이 바뀌고 있어요. 거기에 대응할 만한 연극계 내부 동력이 많이 위축되었다는 생각도 들어 여러모로 답답하죠.
하늘
다음 질문으로 가볼까요. 한편 20대에서는 창작·제작 지원금을 위한 지원서 및 여타 공개모집 신청서를 작성해본 경험이 다른 세대에 비해 꽤 높았습니다. 기회가 늘어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직접적인 창작·제작에 관련된 것이 아닌 부수 노동을 그만큼 많이 해야 한다는 뜻일 수도 있겠지요. 또한 이러한 지원서와 신청서 작성은 모두 경쟁을 통한 선정/미선정 결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시는가요?
아련
마음이 착잡합니다. 구조적으로 우리는 지원사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예술을 하려면 경쟁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인 것 같아요. 내가 예술가로서 누구이고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지원사업에 기대어 고민하는 것 같아요. 국가 입장에서는 경쟁구조를 통해 지원금을 분배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10~20페이지의 지원서로만 당락이 결정되는 게 아쉽기도 하고요. 현재의 심사 방식과 심사자 선정도 더욱 다양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술을 향유하는 일반 시민, 관객들이나 젊은이들이 심사자로 들어올 수는 없는지, 민주적으로 다양한 의견이 오갔으면 좋겠고요.
우리가 하는 일은 계속해서 자신을 증명하고 평가받는 일이잖아요. 사실 지치고 피곤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경쟁 없이 예술을 창작하고 향유하며 교류할 수 있는 축제나 판을 만들어서 우리 안에서라도 협력하고 연대할 기회를 만들어 저항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지구
지원서를 쓰는 것도 노동이잖아요. 그런데 지원서를 쓰고 선정된다 하더라도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요. 그런 지점에서 무력감이 드는 것 같아요. 결국 구조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는데, 이게 소모적이고 힘들기도 해요.
지후
공개모집으로 지원금을 받는 것도 얘기해보고 싶어요. 공모 방식의 한계도 있거든요. 공공극장 등이 많아져 예술 목적의 공간이 늘어나고 거기서 각자의 특화된 기획으로 레거시를 쌓으면 좋겠어요. 단발적 공모사업이 아니라, 공간만의 장기 기획이 늘면 지역주민들도 다양한 예술을 향유할 수 있고, 지역사회와도 연결되는 긍정적 영향이 생길 거라 생각해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현실

하늘
네 번째는 직업인으로서 연극인이 경험하는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한 것인데요. 연극인들이 하는 활동을 “연극 활동”, “연극 관련 활동”, “연극과 전혀 상관없는 활동”으로 나누어보았습니다. 전체 결과를 보면 20대는 “연극 관련 활동”을 하는 비중이 꽤 낮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만큼 경험이 더 쌓인 연극인들에게 “연극 관련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돌아간다고도 볼 수 있는데, 20대의 전문성을 기반으로 할 수 있는 “연극 관련 활동”을 제안해주신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지후
여러 예술 관련 활동들이 경력과 전문성을 요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거든요.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자리가 생기면 좋겠어요.
지구
저는 제가 연극계에서 가지는 경쟁력이 젊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연극계는 제 젊음을 능력으로 생각해주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아요.
남현
네트워킹, 거버넌스 활동을 위해서도 지원서를 써야 해요. 만나고 싶어도 만남 자체를 평가받고 재단 받는다는 느낌이 들어요. 취지는 좋고, 이해하지만 조금은 장벽 없는 만남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희원
저는 지금 놀터 페스티벌에 참여하고 있어요. 청년들이 모여서 공연을 올리고, 서로의 공연을 보며 대화할 수 있는 프로그램인데요. 이 페스티벌을 통해 협업할 사람을 구상하고 만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런 자리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늘
이런 이야기들에 대한 고민이 더 확장되기를 바라봅니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 볼게요. 연극인으로서 더 만족스러운 활동과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 필요한 제도적 장치에 대해, 다른 세대에서는 모두 “예술인 기본 소득 보장”을 1순위로 선택했는데, 20대에서는 “연극과 전혀 상관없는 활동이지만 필요할 때 단기 일자리를 연결해주는 제도”를 1순위로 꼽았습니다. 실제로 연극과 전혀 상관없는 활동은 여러분들의 연극 활동과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나요?
희원
“예술인 기본 소득 보장”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드니까 후순위로 미루고 “단기 일자리”를 택하게 된 것 같아요. 고정적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연을 하면, 공연 시간과 아르바이트 시간을 조율해야 하고, 누군가에게 계속 죄송해야 해요. 그 자체가 피로한 일이더라고요.
참여자 정희원. 눈썹을 살짝 덮는 앞머리가 내려와 있다. 검은색 긴소매 라운드 티셔츠를 입었다. 손바닥이 위로 가게 오른손을 몸 앞으로 내밀어 이야기하고 있다.
정희원
지후
저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했어요. 조연출 일을 할 때, 페이가 연습 시작할 때와 공연이 끝날 때 두 번에 나누어서 지급되는데 시간 차가 있으니 그사이에 당장 쓸 생활비가 필요한 거예요. 구인 사이트에서 하루 이틀짜리 아르바이트를 하면 다음 주에 돈이 들어오니까, 그걸로 생활했거든요. 죄송할 일이 없고 내 작업에 피해 주지 않는 선에서 당장 돈을 구할 수 있는 건 단기 일자리였어요.
하늘
그 외에 연극과 전혀 상관없는 활동과 연극의 상호영향에 대해 느끼시는 바를 이야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지구
저는 영어 학원에서 강사 일을 2년 정도 했어요. 공연하는 한두 달 정도 일정을 조율할 수 있어 편안했고, 고정적인 일이 주는 안정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매달 연극을 하지 않고, 당장 페이가 들어오지 않더라도 안정적인 수입이 있다는 게 연극을 하는 데 좋은 기반이 되었어요. 오히려 제 작품과 무관한 일을 한다는 게 더 편안했던 때도 있었던 것 같고요.
아련
저는 연극과 전혀 상관없는 활동이 직접적인 생계유지에 훨씬 도움이 되었는데요. 연극 관련 활동을 하면 창작활동에 집중하기 어려울 때가 있어요. 업무 강도도 세고, 시간도 많이 들고, 그에 비해 보상도 충분하지 않고요. 관련 활동을 하면서 어떤 의미와 가치를 발견했는지도 의문일 때가 있고요. 또 일을 하다가 문제가 생겼을 때, 연극과 전혀 상관없는 활동이 법적으로 더 보호받을 수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복잡한 이해관계 때문에 눈치 볼 일도 없고요.
지후
예술인 기본 소득이 보장된다면 안정적인 생활과 창작의 디딤돌이 될 수 있겠어요. 하지만 실행되는 데까지 시간이 걸릴 테니, 그전까지는 연극과 전혀 상관없는 활동을 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남현
연극 바깥의 활동들은 제가 얼마나 취약한 위치에 있는지 상기시켜주는 것 같아요.

사회와 연결되기, 다양한 위치성을 연결하기

하늘
다음은 사회구성원으로서 연극인의 위치와 역할입니다. “연극은 미적 가치 외에 사회적, 실천적, 윤리적 가치를 고민해야 한다”는 문항에 대해서는 20대의 점수가 낮고, “연극은 사회 운동과는 명확히 구분된다”는 문항에 대해서는 20대의 점수가 높습니다. 또한 20대는 연극 관련 활동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도 전반적으로 높지 않다고 응답했습니다. 연극은 사회와 어떻게 연결된다고, 혹은 연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나요?
남현
동의하진 않지만,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를 오래 고민했어요. 큰 담론이라 말하기 어렵지만, 순서를 뒤집고 싶어요. 연극은 미적 가치 외에 사회적 실천적 가치를 고민해야 한다가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고민하는 우리가 연극을 한다, 사회운동을 하는 우리가 연극을 한다고요.
지구
이해하려 노력하며 봤을 때 약간 공감되는 부분도 있더라고요.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높지 않다는 대답에서, 사회를 대중이라고 보면 사실 연극을 보는 사람도 없고 하는 사람도 적다고 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희원
사회 운동과 구분된다에 대한 응답은 경험과 관점의 차이인 것 같아요. 저는 제가 출연한 공연을 보고, 관객들이 관련된 주제에 대한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간다면 사회운동을 한 거라고 느끼거든요.
아련
저는 연극의 미적, 사회적, 윤리적, 철학적, 교육적, 실천적, 학문적 가치 모두 다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중 어떤 가치에 중점을 둘 건지는 예술가의 관심사나 가치관에 따라 결정되기에 모든 의견을 존중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지원사업이나 특정 기획으로 인해 어느 하나의 가치가 유행이 되는 건 경계해야 하는 것 같고요.
저는 연극의 사회적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연극은 사회와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연결될 수밖에 없거든요. 연극을 만드는 건 아주 지난하고 비효율적인 과정인데, 그럼에도 제가 만드는 작품이 사회적 가치를 갖고, 사소하더라도 영향력을 가질 때 연극인으로서 효용감을 느껴요. 연극 관객의 수가 적어서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높지 않다는 대답에 대해서도 고민을 해봤는데요. 대중이 극장을 찾지 않는다면 우리가 먼저 다가가는 방법도 고민해야 하는 것 같아요.
지구
사회와 연극이 연결되어 있어야 제가 연극을 지속할 것 같아요. 관객 한 명 한 명을 만나는 것이 큰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 같고요. 제 연극이 누군가에게 닿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게 큰 힘이 되기도 하고요.
지후
“연극은 미적 가치 외에 사회적, 실천적, 윤리적 가치를 고민해야 한다”는 질문에 저도 아니라고 답변했어요. 대신 미적 가치와 정치적 가치가 일치하는 연극이 좋은 연극이라고 생각해요. 정치적 가치라는 말에 사회적, 실천적, 윤리적 가치가 모두 담겨 있다고 생각하고요. 이런 연극들은 관객들에게 자리 잡은 기존 질서를 감각적으로 재편성하고, 관객의 사유를 능동적으로 촉진하기 때문에 일상의 변화를 야기할 수 있다고 보거든요. “연극은 사회 운동과는 명확히 구분된다”에도 동의해요. 거리에서의 회집과 극장에서의 회집은 목적이 다르니까요.
하늘
다음 질문으로 가볼게요. 다른 세대의 응답을 통해 앞으로의 연극 활동을 생각하게 되나요? 다른 세대의 응답 중 인상적인 것이 있었다면 무엇인가요?
남현
저는 결과 중에서 “40대는 다른 세대와 비교해 확연하게 많은 이들이 안전한 창작환경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언급했으며, 선배들에 대한 존중과 미래 세대를 위한 희생이라는 의견을 모두 제시했다”가 인상적이었는데요. 안전한 창작환경, 선배들에 대한 존중, 미래 세대를 위한 희생이 잘 연결되지 않더라고요.
지구
저는 20대의 전반적 응답을 보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고민했어요. 무엇이 같고 왜 다른지 고민하면서 만나고 함께 나아가야 할 것 같아요. 인상적인 부분은 세대 구분 없이 비슷한 답이 나온 답변들이었어요. 관객을 만나며 성취감을 느낀다거나, 5년 뒤에 여전히 연극을 할 거라는 답변들이요.
참여자 지구. 가슴께까지 내려오는 노란색과 갈색이 섞인 머리에 투명한 뿔테 안경을 썼다. 앞면에 붉은색과 노란색, 하늘색 그림이 그려진 흰색 반소매 티셔츠를 입었다.
지구
지후
연극인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세대별 답변이 재밌었어요. “예술을 하는 것만으로 사회에서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다”에 60대 이상 분들이 평균 64.4점을 주셨더라고요. 희망이 된달까요. 제가 60대가 되면 나도 64.4점을 줄 수 있겠지, 그런 막연한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바로 앞 질문인 “연극은 대중적인 예술이 될 수 없다” 문항에 20대가 가장 높은 평균 점수를 보여요. 연극이 사회적으로 충분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20대가 60대가 될 때까지 어떤 변화들이 있을지, 그동안 가만히 있지 않을 또래 동료 연극인들이 얼마나 더 자기 욕심껏 활동할지 기대가 됐어요.
하늘
마지막으로 연극인으로서 지속적인 활동을 해나가기 위해 연극 현장, 혹은 정책 영역에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이야기해주세요.
아련
세대 간의 만남과 소통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다들 개인으로 활동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작은 연극 생태계에 속한 이상 공동체의 일원임을 부인하기 어려워요. 결국 20대와 60대가 서로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미치고 있을 거고요. 그렇기 때문에 서로 피하지 않고 같이 모여서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안전한 창작환경이나 우리 안에서의 돌봄 같은 것들이요. 다만 ‘선배가 시키는 대로 해’라든지, ‘선배들은 다 꼰대야’ 이런 식의 태도를 갖고 만나는 건 의미가 없고요. 서로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자유롭고 민주적으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열린 마음과 태도로 만나면 좋겠어요. 서로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는 시간을 마련할 수 있게 대화의 장이 열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후
연극 생태계 안에서 세대 간 건강한 문화가 필요하다는 데에 동의해요. 이 문화의 전제로 성폭력, 위계폭력에 책임이 있는 주체들이 지난 과오에 대한 마땅한 성찰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요.
지구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 같은데, 지금 연극 할 돈 좀 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어요. 사람도 계속 만나고, 연극도 올리려면 지금은 돈이 제일 절실해요.
희원
엉뚱한 생각일 수도 있는데 배우들 페이를 공연하는 곳에서 안 받고 나라에서 받는 걸 생각해봤어요. 배우가 지원사업을 타내는 게 쉽지 않거든요. 배우 섭외 비용을 지원하면 프로덕션의 부담을 줄이고 다양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캐스팅 기회가 일부 배우들에게 쏠리는 게 문제가 되겠지만요.
지후
티켓비 지원도 있으면 좋겠어요. 공연을 보며 동료들의 작업을 읽고, 다음 작업을 궁금해하는 게 대화의 시작일 텐데 생활비 때문에 망설여질 때가 있거든요. 예술인 기본 소득이 보장되면 어느 정도 해결되겠죠.
남현
마지막 질문을 보고 같이 학교 생활했던 동료들을 떠올렸어요. 예술대학을 졸업했지만, 현장 예술인에는 속하지 않는 유령 같은 존재들이요. 연평균 1,000~1,500명이 연극영화과에 입학하는데 졸업 이후 현장과 연계되는 시스템이 부족하다 보니까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유지하면서 정체성을 고민하는 경우가 많아요. 또 예술을 가르치는 대학도 학생의 폭을 더 넓혀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예술 고등학교, 대학교에 다니면서도 장애를 가진 예술창작자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거든요.
하늘
설문 결과를 보면 장애연극인과 비장애 연극인의 응답이 나뉘는 경우가 있어요. 비장애 연극인들은 아카데미에서 훈련을 하는데, 장애연극인들은 혼자서 발전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답변을 많이 주셨거든요. 아카데미나 교육, 제도 등에 장애연극인들이 들어올 매개가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지구
제가 연극계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만큼, 연극계도 제가 들어온 걸 인정해주는 방향들을 고민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늘
오늘 20대 연극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더 나은 환경에서 연극하기 위해 다 같이 고민해나가야 할 지점들을 말씀해주셨어요. 근 몇 년간 연극계가 실천한 안전한 창작환경을 위한 약속, 자성의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20대 연극인들이 처한 상황은 좀 낫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아직도 부당한 상황에 놓이고, 충분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부수 노동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서 답답한 한편 부끄러웠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연극을 하는 것인지, 제도 개선을 위한 움직임은 얼마나 품을 들여서 할 수 있을지, 고민되었는데요. 다행히 오늘 이 자리의 말씀들을 들으면서 함께 구축해나갈 연극계가 기대되기도 했고, 동료로서 응원과 애정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연극하는 재미들도 같이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주제의 특성상 무거운 내용이 많았습니다. 오늘의 만남을 계기로 어떻게 연극하고 계신지 종종 안부 묻고 싶어졌어요. 우리의 이야기가 테이블 너머로 확장되길 기대하며 오늘 자리를 마치겠습니다.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