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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데려갈 것이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없이’ 쓴 희곡

김희수

제258호

2024.07.25

[희곡] 코너에서는 2020년부터 ‘다른 손’ 희곡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희곡 쓰기를 하나의 몸짓으로 생각하며 희곡 쓰기를 구성하는 몸짓들 중 하나를 소거한 희곡들을 싣습니다. 극-창-작과는 무관해 보이는 한 존재가 없는 세계에서, 그 부재의 틈새에서 찾아오는 낯선 다른 손들을 받아들이며 도래할 새로운 희곡을 만나보세요.

* 이 희곡의 제목은 루카복음 17장 34-35절에 나오는 구절이다.

우이
흙이 괜찮네.
호연
빛이 너무 세.
우이
여름인가 보다.
호연
아직 사월 초인데.
우이
식목일을 앞당겨야 한다는 말이 있더라.
호연
물 줘 봐.
우이
우리 여기 나무 심을까.
호연
물 좀 달라니까.
우이
걸어오면서 다 마셨잖아.
호연
그래. 네가 자꾸 다른 길을 고집해서 이십 분 걸리는 길을 한 시간이나 걸어 도착했지.
우이
미안해. 상추나 심자.
호연
오늘은 텃밭만 배정받기로 했잖아.
우이
사장님이 호미랑 모종이랑 씨앗이랑 다 들려 주는데 어떡해.
호연
그녀가 우리의 오늘을 망쳤네.
우이
사장은 장사꾼이고, 우리는 초보 농부니까.
호연
순식간이긴 했어.
우이
적상추부터 심자.
호연
통굽 워커를 신었잖아, 내가. 진흙이 다 묻었잖아.
우이
이따 물티슈로 닦아 줄게.
호연
너는 늘 이런 식이지…….
우이
나도 새로 산 꼬까신 신었잖아.
호연
그래, 맞네.
우이
청상추부터 심을까.
호연
얘네 상태가 메롱인 것 같은데.
우이
우리도 늙으면 저렇게 주름질걸.
호연
늙기도 전에 죽을 텐데, 뭐.
우이
왜 말을 그렇게 해.
호연
밭 갈라진 것 좀 봐. 가뭄 아냐?
우이
밭은 갈면 돼.
호연
요즘은 지구 열탕화라고 하잖아, 온난화가 아니고.
우이
응.
호연
근데 말이 좀 못생겼어.
우이
획수가 많아서 그래.
호연
지구 구이나 지구 조림이라는 말이 좋겠어.
우이
네가 적상추를 심어. 내가 청상추를 심을 테니까.
호연
얼굴에 땀이나 닦아.
우이
쟁기 가져왔어?
호연
응?
우이
네가 가져온다며.
호연
무슨 말이야.
우이
226번 텃밭이 하도 안 보여서 우리 헤맸잖아. 326번 텃밭 앞에서, 226번 텃밭을 찾아내고 나면 네가 가져오겠다고 했어.
호연
내가 언제 그랬어.
우이
네가 정말 그랬어.
호연
안 그랬다니까.
우이
그래. 내가 다녀올 테니까 너는 물뿌리개에 물 담아와. 저기 수도랑 호스 있어.
호연
응.

잠시.

우이
왜 안 일어나?
호연
죽고 싶어졌어.
우이
왜? 나는 너랑 농부가 되니까 좋은데.
호연
나는 너랑 동반 자살할래. 죽어 버려서 이 텃밭을 모를래. 자꾸만 길 잃는 너도 모를래.
우이
이 텅 빈 땅이 일 년 동안이나 우리 거라니까.
호연
너무 아무것도 없어.
우이
네가 원하는 무엇이든 심을 수 있어.
호연
고작 상추, 깻잎, 감자, 고구마, 고추…….
우이
꽃과 나무도 심을 수 있지.
호연
앵두나무?
우이
그래. 씨앗 상점에 다녀오자.
호연
내가 기른 앵두가 불타는 상상을 했더니 마음 아파.
우이
왜 그런 상상을 해?
호연
너무 덥잖아. 뜨겁잖아.
우이
상상을 그만했으면 좋겠어.
호연
우리가 타 죽는 상상을 했더니 더 마음 아파.
우이
우리가 왜 죽는데.
호연
묵시록의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
우이
이상한 소리 하지 마.
호연
엄마 아빠 우리 집 강아지 다 휴거1) 되면 나 어떡하냐.
우이
내가 있잖아.
호연
그거랑 다른 문제야.
우이
괜찮아. 우리도 천국 갈 수 있어.
호연
무슨 수로.
우이
하나님도 성 소수자니까.
호연
그게 무슨 말이야.
우이
신의 성별은 인간의 상상일 뿐이야. 성별뿐 아니라 형체도.
호연
하나님의 모양이 빛이라면 여기 하나님 엄청 많다.
우이
이제 진짜 상추 심자.
호연
하나님을 심자.
우이
심어서 뭐 하게.
호연
몰라, 그런 건.
우이
자, 여기 상추.
호연
다음에 심자.
우이
네가 자주 부르는 찬양 제목이 뭐였더라.
호연
천국은 마치?
우이
그래. 거기서 아무도 모르는 보석이 땅속에 묻혀 있다고 하잖아. 혹시 몰라. 네가 선택받은 자라서 그런 걸 발견하게 될 수도 있어.
호연
그럼 얼른 쟁기 가져와.
우이
너는 물뿌리개 가져와.
호연
응.

잠시.

우이
뭐 해.
호연
보석 찾으려고.
우이
그렇다고 구덩이를 파면 어떡해.
호연
보석 안 나오면 무덤으로 삼게.
우이
그래. 마음대로 해.
호연
그거 뭐야?
우이
우주에서 가장 기분 나쁜 온도의 물.
호연
물 다 마셨다며.
우이
네 몫은 네가 다 마셨지.
호연
너는 나 사랑하긴 하냐.
우이
나 다음으로 너 사랑하지.
호연
비켜.
우이
호미는 무슨 죄가 있다고 던져.
호연
화나잖아.
우이
너는 나를 너 다음으로도 사랑하지 않지.
호연
뭐라는 거야.
우이
물뿌리개 가져오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어.
호연
까먹었어.
우이
나를 생각하지 않는 거잖아.
호연
그냥 기억력이 안 좋은 거야.
우이
땅 그만 파.
호연
보석 찾을 거라고.
우이
너 그냥 거기 들어가라.
호연
아, 밀지 마.
우이
죽고 싶다며.
호연
살고 싶어졌어.
우이
이제는 내가 죽고 싶다.
호연
들어갈래?
우이
응.
호연
기다려. 파 줄게.
우이
깊게 파.

잠시.

호연
있잖아.
우이
응.
호연
집에 가는 게 좋겠어.
우이
그런가.
호연
너 너무 축축하다.
우이
무덤을 팠으니까.
호연
상추는 다음에 심자.
우이
딱 다섯 개만 심고 가자.
호연
아니, 그냥 가자.
우이
너나 가.
호연
잘못했어.
우이
나는 아직 죽고 싶다.
호연
사랑해.
우이
그러든지.
호연
정말 누우면 어떡해.
우이
그러게. 어떡할까.
호연
같이 죽자.
우이
그러든지.
호연
우이.
우이
말 걸지 마. 죽었으니까.
호연
우이.
우이
…….
호연
우리는 상추야.
우이
…….
호연
상추는 자가 수정 작물이야.
우이
우리는 상추가 아니네.
호연
상추 꽃대를 베어서 말린 후에 막대기 같은 걸로 툭툭 치면 작은 씨앗들이 나온대.
우이
우리는 상추가 아니네.
호연
채종 시기는 오뉴월이야.
우이
한두 달 더 누워있으면 상추가 될지도 모르겠네.
호연
사람들이 너무 쳐다보는데 일어나면 안 돼?
우이
난 안 일어나.
호연
창피해.
우이
혼자 일어나서 자살 방조자가 되든지.
호연
아니야. 미안.
우이
낮잠 자는 게 어때.
호연
흙 위라서 그런지 시원하네.
우이
잠이 잘 올 거야.
호연
응.

잠시.

우이
호연.
호연
……
우이
일어나.
호연
아……
우이
잘 잤어?
호연
꿈꿨어.
우이
그새 꿈도 꾸고.
호연
너랑 나한테 아이가 있었어. 누가 낳았는지는 모르겠는데 나를 닮아서 아주 예쁘장했어.
우이
응. 근데 일어나서 말하는 게 좋겠다.
호연
아까는 안 일어나겠다며.
우이
지금은 일어나고 싶어.
호연
그래.
우이
자, 이제 말해.
호연
그게, 우리 아이가 유치원생이었거든.
우이
응.
호연
아침 일찍 아이를 씻기고 밥 먹이고 옷 입히고 정신없이 유치원 등원 준비하고 있는데, 생각해 보니까 네가 집에 없는 거야. 돌이켜 보면 한밤중부터 없었던 것 같은 거야. 아이한테 물어보려 했는데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엄마 어디 갔어? 물어보면 아이는 엄마 여기 있잖아, 하고 나를 가리킬 것 같은 거야. 너무 이상하지 않아? 아이에게 엄마가 두 명이라면…… 아이는 엄마들을 어떻게 구분해서 불러야 해? 엄마와 또 다른 엄마를 갈라야 한다면, 그것도 이상해. 무슨 기준으로 분류해? 키 큰 엄마와 키 작은 엄마? 귀여운 엄마와 사악한 엄마?
우이
사악한 엄마가 너인 거지.
호연
장난하지 말고.
우이
간단해. 이름을 부르게 하면 되지.
호연
하나도 간단하지 않아. 우리 아이가 혼란을 겪는다니까.
우이
네가 겪는 것 같은데.
호연
아빠가 있는 아이들은 쉽잖아. 엄마가 있으면 아빠가 있고. 아빠 형의 아내는 큰엄마, 아빠 동생의 아내는 작은엄마. 그런데 우리 아이는 태어나 보니 그냥 엄마만 둘이야. 이 엄마를 불렀더니 저 엄마가 튀어나와. 첫째 이모 막내 이모 하듯이 첫째 엄마 막내 엄마 정할 수도 없고.
우이
편한 대로 부르라고 하면 돼. 별 문제 아니야.
호연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야. 불공평하다고.
우이
그래, 들여다보면 그렇겠지.
호연
너는 왜 네 일이 아닌 것처럼 말하냐.
우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일이니까.
호연
…….
우이
왜?
호연
이럴 때면 외로워.
우이
외로울 게 뭐가 있어.
호연
너는 내가 매사 유난 떠는 것 같지.
우이
그런 생각 한 적 없어.
호연
그럼 왜 태평해.
우이
신경 곤두세워서 뭐 해.
호연
왜 다 괜찮을 거라고 말해?
우이
다 괜찮을 거니까, 정말로.
호연
…….
우이
또 왜.
호연
내 아이 낳아 줘.
우이
나는 산고 견딜 생각 없어.
호연
그럼 네 아이를 내가 낳을래.
우이
출산은 여성의 몸에 해로운 변화를 가져오기도 해.
호연
닥쳐.
우이
너도 알잖아.
호연
나랑 결혼해.
우이
그래, 그게 먼저지.
호연
할 거야?
우이
나를 배우자 삼고 싶다면, 너는 오늘 내로 상추를 심어야 할 거야.
호연
그냥 알겠다고 하면 덧나나 봐.
우이
상추 저기 있어.
호연
나도 보여.
우이
착하네.
호연
그러니까 잔말 말고 협조해.
우이
상추도 못 심는 애랑 인간 육아를 어떻게 하라고.
호연
보여주면 되잖아.
우이
제발 좀 보여줄래.
호연
봐, 지금. 시력 문제없지. 보이지.
우이
응. 이제 흙 덮으면 돼.

잠시.

호연
좋아.
우이
나도 좋아.
호연
이제 혼인신고만 남았어.
우이
아직도 그 얘기야.
호연
해외 가서 살자.
우이
어느 나라?
호연
동성 부부가 아이를 입양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우이
우리가 아시안인 건 잊지 않았지.
호연
그런 거 하나하나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 해.
우이
내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야.
호연
결혼은 나에게 있어서 무지 중요한 과업이라고.
우이
하나님이 그러래?
호연
하나님이 하라는 거 해본 적 없는데.
우이
너 은근 독실해.
호연
무슨 말이야.
우이
있어, 그런 거.
호연
성경에, 여자 둘이서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 둘 것이라는 말이 있어. 예수가 재림하면 사람을 분별해서 천국에 데려간다는 거야.
우이
응.
호연
무섭잖아. 자꾸 그렇게 겁을 주잖아. 근데 사랑도 결혼도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으니까.
우이
나는 안 그러는데.
호연
너는 왜 그러지.
우이
글쎄다.
호연
내가 이성애자였다면 벌써 다자녀 가구 이뤘을 거야.
우이
속상하다.
호연
속상해?
우이
조금.
호연
뭐가.
우이
우리 둘 닮은 아이가 태어날 수 없다는 게.
호연
갑자기 왜 이래.
우이
다시 무덤에 눕고 싶어.
호연
같이 눕자.
우이
창피하다며.
호연
난 네 껌딱지니까.
우이
너 닮은 아이는 정말 귀엽겠다.
호연
말이라고 해? 우주에서 가장 귀엽겠지.
우이
그렇겠지.
호연
있잖아.
우이
응.
호연
하나님이 간과한 게 있어.
우이
응?
호연
나는 너랑 계속 맷돌질할 거라서 불러도 안 간다는 거.
우이
가야지. 천국인데.
호연
나 필요 없어?
우이
그게 아니고.
호연
맘대로 사랑할 수 없는 천국이라면 그건 천국이 아니야.
우이
집이 천국이구나.
호연
그거야.
우이
이제 집에 가고 싶어.
호연
하나님이 잘못한 게 또 있네.
우이
뭐?
호연
너를 길치로 빚은 거.
우이
네가 안내하면 되지.
호연
생각해 보니까 아이는 못 가지겠다.
우이
왜.
호연
너무 더워서. 옷이 다 젖었다.
우이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호연
매년 더 뜨거워지잖아. 고문 같잖아.
우이
너는 상냥한 신이구나.
호연
상냥한 게 아니고 당연한 거지.
우이
그런가.
호연
가자, 집에.
우이
그래야겠지.
호연
집은 천국 이상의 천국이라니까.
우이
그래. 씻고 드러눕자.
호연
응. 손잡고 곯아떨어지자.

  1. 예수가 재림하여 세상을 심판할 때, 구원받는 사람을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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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김희수
시와 희곡 씁니다. 사랑하는 상상이 사랑을 데려올 것이라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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