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Speaking in Throat_목놓아 말하기

‘없이’ 쓴 희곡

임수림

제257호

2024.07.11

[희곡] 코너에서는 2020년부터 ‘다른 손’ 희곡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희곡 쓰기를 하나의 몸짓으로 생각하며 희곡 쓰기를 구성하는 몸짓들 중 하나를 소거한 희곡들을 싣습니다. 극-창-작과는 무관해 보이는 한 존재가 없는 세계에서, 그 부재의 틈새에서 찾아오는 낯선 다른 손들을 받아들이며 도래할 새로운 희곡을 만나보세요.

무대
부둣가를 연상시키는 바람, 뱃고동, 갈매기 우는 소리 등이 들린다.
일러두기
배우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영상, 조명 및 음향 등 그 외 효과는 모두 동원할 수 있으나,
사람이 표현하는 것은 오직 소리로 전달된다.

나는 목구멍이다.
식도와는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밝혀둔다.
침 범벅이 된 음식물이 엉켜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여기에는 사람들이 끝내 입 밖으로 뱉지 못한 말들이 멈춰있다.
알다시피 세상에 말이 그렇게 넘쳐나도, 일단 입 밖으로 나와서 말이 되는 말들은 대부분 쓸데없다. 헛소리라고. 알밥에서 가장 맛있는 데가 뚝배기 맨 아래에 눌어붙은 밥인 것처럼 진짜들은 숨어 있고, 가라앉아 있거든.
… 나를 자꾸 막아버리려 하는 음식 놈들을 싫어하긴 하지만, 이 비유가 가장 적절했다.
이렇게 틀어박힌 말들을 위해 굿이 필요하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당신은 쌓여서 고약한 진물을 흘리는 말들을 위한 제의를 아는가?

소리 #1

우리 제발 돈지랄하자.
그만 구질구질해지자.
아메리카노가 눈앞의 메가커피에서 더 싼지, 육백 미터 더 가면 있는 컴포즈커피에서 더 싼지 생각하면서 주저하지 말자고. 야, 남들이 들으면 비웃어. 돈지랄을 운운하면서 저가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백 원, 이백 원 차이 따지는 거 말이야. 시즌 한정 메뉴 머시기말차트리플초코칩아몬드생딸기프라푸치노 이딴 것도 아니고, 고작 아아 마실 거면서.
바다도 돈이 든다니. 그게 말이니? 물론 바닷물은 공짜지. 하지만 순간이동으로 바다에 도착해서 발만 담그고 다시 순간이동으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면.
그만해. 그만하라고.
너는 재희가 아니야.
내가 알던 재희는 이렇지 않아.

(기억 속 목소리)
비범하지 않으면 남과 다르게 살아서는 안 되는 거야?
난 이런 영화가 어떻게 끝나는지 잘 알아. 주인공은 모두가 인정할 만큼 성공하거나,


사이

… 죽지.
하지만 우리야, 난 그러지 않을 거야.
‘아이고. 쟤, 저렇게 될 줄 알았어’의 쟤가 되지 않을 거라고.


끼어들지 마. 내가 화내게 내버려 둬. 내 목구멍이잖아. 내 말이잖아.
네 꿈과 상황을 그만 이해하고 싶어.
그냥, 기억이 나질 않아.
네가 말하면 눈을 감을 게 아니라 귀를 손으로 막아야 하는데,
일단 눈부터 감아 널 어둠 속으로 밀어냈던 게.

소리 #2

여기 오는 게 교회 가는 거랑 뭐가 다른 건지 모르겠어요.
다큐멘터리인가 어디서 봤는데 엄청 많은 사람을 강간 살해하고 식인까지 한 미국의 어떤 또라이 살인마도 마지막에 세례를 받았대요. 어떤 목사가 “하나님은 모든 죄를 용서하십니다” 이런 말을 감옥에 있는 그 인간한테 해줬다는 거죠. 제가 교회에 안 가는 건 저 말고 그런 놈들한테도 똑같이 베푼다는 게 참을 수 없어서예요.
그러니까 저 대신 그놈, 저한테 그런 짓을 한 놈이 여기 앉아서 ‘전 죽어 마땅해요.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기억이 나지 않아요’라고 말하면서 운다면요,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겠죠. ‘이미 저지른 일 다음에 어떻게 행동하고 느끼고 있는지가 더 중요해요. 내담자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부모님을 비롯해 주위 어른들이 개자식 씨를 방치하고 정서적으로 학대한 게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여요. 많이 힘드셨겠어요.’ 이런 식으로 어쩌고저쩌고. 아닌가요?
완전 똑같지는 않겠죠. 하지만 선생님은 그놈을 이해하려고 할 거예요. 그게 싫다고요. 바로 그게, 선생님과의 시간이 아무 의미 없다고 느끼는 핵심이에요. 이 상담소가 그 미친 식인 살인마에게 용서를 입에 담는 교회랑 비슷한 것 같다고요.
누가 앞에 앉아 있어도 다 이해하는 척하려고 하는 거요! 그럴 순 없잖아요. 그런 건 없어요. 그놈은 미친놈이고 나쁜 새끼고 갱생 불가능해요! 이유 따위는 알 바 아니라는 거예요. 여기 누가 앉아 있어도 이해하려 하고, 나아지게 해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나한테? 없어요! 정말 없어요. 제가 원하는 건 선생님의 직업적 사명이건 뭐건 상관없이 그놈은 쓰레기이며, 상담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는 인간말종에 개만도 못한 새끼라고 퍼부어주는 거예요. 네 놈의 불우한 성장 과정이든 정신적 질병이든 내 알 바냐고. 어차피 그것도 네 간사한 혓바닥에서 나온 알량한 주장 아니냐고, 이렇게요. 누구나 힐링 음악을 듣거나 상담을 받는다고 위로를 찾을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제가 진짜 바라는 건…!

사이

어떻게 죽일까. 정말 많이 생각해봤어. 내 동작 하나하나, 그리고 그 동작의 사이사이 어느 타이밍에 숨을 몇 번 들이쉴지도 전부 다. 그놈이 집 앞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을 때가 좋을 것 같더라고. 어두운 골목 전봇대 앞에 쓰레기봉투를 내놓으려 허리를 굽힐 때, 무방비로 등을 보일 면. 바로 그때, 뒤에서 목을 감싸고 커다란 회칼을 그놈의 목젖에 갖다 댈 거야. 절대 바로 찌르진 않을 거야. 이게 무슨 상황인지, 내가 누구인지 다 파악할 시간을 줄 거야. 그놈의 동공이 확장되고,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숨이 곧 넘어갈 것처럼 호흡이 거칠어질 때까지 기다릴 거야. 당황하면서 뭐라고 지껄이려고 첫 마디를 뱉으려 할 때, 목에 겨누던 칼을 순식간에 입 안에다 찌를 거야. 혀를 자를 수 있으면 좋겠어. 이 세상에 더 이상의 헛소리는 필요 없으니까. 다음 날 아침, 나는 개운하게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켜겠지.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서면 대각선 화장실 문 사이로 찬란한 붉은빛이 쏟아지듯 새어 나올 거야. 다가가 화장실 문을 열면 잘린 머리가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고, 나는 환희에 전율할 거야. 비로소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니었으며 신이 있음을 믿게 될 테지.
진실한 사과, 따위의 말이 내 귀를 더럽히기 전에 모든 것을 이뤄냈음을.

소리 #3

오랜만입니다.
봄이 되면 더 죽고 싶어지는 저는 어쨌든 가을의 초입까지 또 살아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당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뱉을지 벌써 상상이 가는군요.
아직도 어리광이나 부리는 놈한테 어른스러움을 보여주겠다, 는 너그러운 표정으로 말하겠죠.
‘그건 진짜 죽고 싶은 게 아니에요.’
그럼 저는 당신이 ‘사실 누구보다 살고 싶다는 말이죠’라는 헛소리까지 뱉기 전에 얼른 화제를 돌릴 겁니다. ‘오늘 낮에 떡튀순 세트를 먹었어요. 제가 분명 순대에 간은 빼고 허파만 넣어달라고 부탁했는데 글쎄 간이 훨씬 많았어요. 누가 퍽퍽한 간 같은 걸 먹고 싶어 하겠어요. 안 그래요?’
순대 간에 대한 의견은 진심입니다만, 그 외에는 별로 영양가 없는 말이므로 당신이 했던 말과 비등비등하겠지요. 우리는 이렇게 또 사이좋게 엉터리들끼리 주거니 받거니 할 것입니다.
그럼 저는 이 위선과 허세가 뒤섞인 인간사의 모든 것에 짜증이 나기 전까지는 즐겁게 어울리겠죠. 우리의 얄팍한 공통점이 황무지만큼이나 넓은 차이점을 천사의 커다란 날개처럼 덮을 수 있을 거라 믿는 사람처럼요.
하지만 전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하루의 십 분 정도는 그럴지도요. 길고 긴 하루의 십 분이면 저도 이런 아름다운 믿음에 저를 내주기도 해요. 하지만 알다시피 하루는 1,440분이라고요.
제가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물었죠. 자란 적도 없는데 매우 늙은 기분입니다. 늙기 위해서는 일단 자라야 하잖아요? 그 순서가 일그러진 느낌입니다. 이렇게 혁명적인 일그러짐이 곧 미라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라니. 제 업적을 칭찬해 주세요. 주변의 사람들은 다 열심히 살아요. 너무 열심히 살아요. 제 자리는 ‘다들 왜 이렇게 열심히 사는 거야, 라고 투덜대며 본인은 아닌 척하지만 실제로는 존나 바쁘게 사는’ 사람들에게까지 밀려 저 구석 정도로 밀렸어요. 그러니까 사실 진짜 정직한 건 나뿐이라고요.
버려진 수영장 바닥에 가라앉고 싶어요. 엄청나게 차가운 걸 만지고 ‘앗, 뜨거워!’라며 소란을 떨고 싶어요. 여기가 어디인지 관심 없습니다. 다른 데여도 달라질 건 없어요. 사람들이 잔인하다고 부르는 것을 보고 ‘고작?’ 이렇게 말하면서 비웃고 싶어요.

사실 다 거짓말입니다. 아, 말과 글이란 얼마나 허망한지요.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당신도 마찬가지로 나를 모르지요.
우리는 각자의 춤에 몰두하고 회전하는 시야 속에서 서로의 형체를 인식도 하지 못하고
그러니까, 내 말은,
대체
이게 다

무슨

#소리 4,5,6,7,8,9,10,11,12와 그 외

하지만 얘야, 왜 그놈이 하나라고 생각하니. 놈들은 하나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아.
-
엄마, 우리 이제 다 그만하면 어때? 그냥 나 같은 자식은 없다고 생각해. 날 포기하라고. 이제 나도 엄마를 놓고 싶어. 우리는 만나면 안 됐어.
-
저 입사하고 얼마 안 됐을 때, 신입이 발렌시아가 메고 왔다고 소문 쫙 돌아서 다신 안 들고 다녔어요. 재밌죠? 그럴 필요 없었는데. 그때는 저도 어려서 누가 나에 대해 수군거리는 것 자체가 싫었거든요. 그 이후로는 코치 정도로만 들고 다녔어요. 참나, 에르메스도, 샤넬도, 디올도 아니고 발렌시아가로 그 난리라니. ‘우리 집이 부자는 아니지만, 딸에게 발렌시아가 싼 라인 정도는 사줄 수 있으니 들었습니다’ 이렇게 일일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다니는 것도 웃기지 않나요.
그러니까, 여기 되게 구리다고요. 사람들도 조직도 하다못해 건물도. 여기 붙어있었던 나도 구린 건 맞는데, 앞으로는 구린 것들끼리 잘 먹고 잘사시라고요.
-
너무 담배 땡긴다. 널 좋아한다는 걸 들키느니 담뱃불이 발바닥에 붙어서 타 죽는 게 낫겠어. 나는 안목도 지지리 없지. 망한 사랑만 하는 사람이 하는 게 사랑이긴 한가. 진짜 담배 말린다, 말려.
-
그게 아니고,
왜 나한테만 그래,
오해야,
거짓말이야,
아무도 없어,
이렇게 사는 게 사는 걸까,
다들 뭔가 가졌는데 나만 아무것도 없어,
아프다고 하면 또? 라고 할 거니,
너 나만 만만하지,
마음대로 해,
정말로 괜찮고 싶어,
예의 좀 지켜,
사실 관심 없어,
이게 괜찮아 보이냐,
그러니까그러니까그게아니고그게아니고아정말지겨워다정말지겹다고.
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야.

수많은 목소리가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윙윙거리다 잦아든다.
그 후 다시 목구멍이 말을 시작한다.


어떤가.
내용이 의외로 낯설지 않았을 텐데. 당연하다.
이건 나와 당신의 몸 어딘가에 처박혀 있던 말들이니까.
우리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니까.
어쨌든 이 일련의 과정들을 천도재라고 부르는 이도 있는데,
그건 옳지 않다. 그건 죽은 넋을 기리는 행위다.
이 말들은 아직 죽지 않았거든. 죽었으면 차라리 다행이다.
죽지도 살지도 못한 것이야말로 언제나 비극 그 자체가 아니었나.
그리고 이건 다른 인간들에게 부탁하는 천도재만큼 터무니없이 비싸지도 않다.
방법이 어렵지도 않다.
시작.
언제나 어려운 그것이 조금 더, 정말 조금 더 어려울 뿐이다.
당신은 내가 지금까지 알려준 대로만 따라 해보면 된다.
이제 당신 차례다.

아,
구겨진다.
일단 구겨야 한다. 펼치기 위해서는.

무대가 일그러지다 팽창한다.
귀가 얼얼한 만큼 우렁찬 제3의 목소리로,

‘아’라는 글자가 점점 크기가 커지고, 선이 굵어지면서 여섯 번 이어쓰여 있다. 마지막 가장 큰 ‘아’ 뒤에는 굵은 가로줄이 그어져 있다.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선택 버튼

임수림

임수림
소설과 희곡 위주로 글을 씁니다. 이런 자리에 쓸 멋진 말을 생각해 내는 데 곧잘 실패합니다. 제보받아요.
@of.soolim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