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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지구
: 현대연극을위한시민워크숍

‘없이’ 쓴 희곡

이용훈

제256호

2024.06.27

[희곡] 코너에서는 2020년부터 ‘다른 손’ 희곡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희곡 쓰기를 하나의 몸짓으로 생각하며 희곡 쓰기를 구성하는 몸짓들 중 하나를 소거한 희곡들을 싣습니다. 극-창-작과는 무관해 보이는 한 존재가 없는 세계에서, 그 부재의 틈새에서 찾아오는 낯선 다른 손들을 받아들이며 도래할 새로운 희곡을 만나보세요.

필요한 사람들
다수의 불특정 시민(들)
장소
높고 넓은, 시민 회관 대강당

그 무언가를 열망하는 연극에 대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위험할 정도로 비슷하게 행동하며 생각하고, 학습된 행위로 상상하는 방식을 잠시라도 정지시키는, 그러한 희곡의 능력이 지금 가장 큰 가치라고 생각한다.

반짝, 반짝, 눈망울들 강당에 모였구나

연극을 경험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다. 당신 앞에 흰, 아주 하얀 상의와 하얀 하의가 준비되어 있다. 당신이 걸치고 있는 옷을 벗고 당신 앞에 놓여있는 옷으로 갈아입길 바란다. (별도의 탈의실은 준비되어 있지 않다.) 연극을 시작하기 앞서 당신은 선택할 수 있다. 참여할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포기한다면, 출구를 찾아 조용히 나가길 빈다.

고요하다, 적막한 공간이 점점 어두워진다

당신의 옆을 보라. 양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라, 당신과 함께 연극을 이어 나갈 사람들을 기억하라. 당신의 숨소리가 저들과 함께한다. 함께 만들어갈 것이다. 함께 행동할 것이다. 저들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심장이 뛰고 있다. 미열로 몸의 감각이 들뜬다. 걱정하지 마라, 당신들이 참여할 연극은 그런 거니까. 당신은 환복을 마쳤고,
사람들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 1. 날씨기록 -

어떤 기계, 연극적 소품 장치에 대해

노래는 구름이 되고 별자리는 잎사귀에 머무르는 이슬이 되어버렸네
한 손엔 우산을, 또 다른 손엔
당신은 어떤 기계를 들고 있었네, 특별할 것 없는

작은 기계. 반짝반짝 빛나는 금속 덩어리. 곡물의 수분을 분석하는 기계. 목적은 그랬지. 사과를 갈아 넣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기계. 우연하게도 기계 안 작은 소동이, 오늘날 날씨를 측정하는 도구로써 활용가치를 인정받았지. 이것은 날씨를 썩 잘 측정하고 예측한다는 느낌을 받았지. 오늘날 모든 날씨 예측은 이 작은 기계에서 나오고 있어. 믹서기, 택시를 기다릴 때도, 비행기가 연착되더라도, 바닐라쉐이크를 주문할 때도. 기계의 원리와 방법은 간단명료. 흰 사각 종이 그러니까 전문 용어로 천공카드라 부를게. 이 종이를 기계에 밀어 넣고 기다리면, 끝. 기계는 과거의 비슷한 날씨와 사건 사고를 조합한다. 현재 구름과 과거 산속에서 기록한 구름을 대조한다. 기계 안에 어떤 존재가 이 모든 상황들을 정리하고 공기의 수분을 적절하게 섞고 천공카드에 기입한다. 그리고 배출. 밖으로, 기계 밖으로 뱉어낸다. 마을 대표는 천공카드를 광장 종탑 앞에 붙인다. 오늘의 날씨를…

천공카드는 1. 두통이 있는지 없는지 2. 계단이 낡았는지 문제는 없는지 3. 공기가 맑은지 탁한지 4. 견과류의 맛이 과거의 어느 날과 비슷한지 5. 날짜와 서명을 기입하고. 6. 어느 목동의 집에서 태어났는지 7. 세대가 몇 번 지났는지 8. 날씨 교육은 누구와 어디서 받았는지.
이렇게 8개의 항목은 필수 기입이야.
하나라도 빠져 있으면 오늘의 날씨로 인정받지 못한다.

당신들은 기계 안에 잘 훈련된 쥐 3마리가 존재하고 있는지 관심이나 있을까? 기상대를 만든 목동들이 그 안에 존재하는 쥐들을 수 세대에 걸쳐 훈련시킨 결과라고 볼 수 있지. 쥐 대신 벼룩을 훈련시키기도 했는데, 높이 뛰는 벼룩들을 집중적으로 훈련시키는 것이 쉽지가 않았어. 두더지를 훈련시켰지만, 땅속 습도에 너무 민감해서 지상의 날씨를 예측한다는 건 어려웠지. 개를 훈련시키는 일은 쉬운 듯했어. 산에서 그들은 일을 잘 수행했으니까. 문제는 날씨 예측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거든. 그리고 마지막으로 배낭 속에 숨어 있던 쥐가 여러 가지 면에서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지. 지금은 날씨 예측을 위한 전문 교육을 받고 있어. 그렇게 목동들은 쥐를 키우고 훈련시킨다. 쥐는 기계 안에 들어가 매일 일기를 쓰고 매일 날씨를 예측하며 평생을 그렇게 살도록 훈련받지. 무조건 기계 안으로 들어가라고 등 떠밀진 않아. 기계를 선택할 것인지 마구간 천장을 선택할 것인지 쥐들에게도 선택의 시간이 주어진다. 일이 싫증 나면 꺼내주기도 하는데. 한 번 기계 안에 들어가면 밖으로 나오는 일은 극히 드물어. 이유는 모르겠어. 그렇게 시-간이 흘렀으니. 기계 속 움직이는 쥐의 모습은 정교하고 확고하게 보여. 사람들은 기계 안으로 약간의 견과류와 천공카드를 밀어 넣는다. 막내 쥐가 그것들을 받으면 천공카드엔 날짜와 장소를 기입하고 몇 세대 집안의 쥐인지 기입한다. 견과류는 아침 식탁에 올려놓고. 천공카드는 중간층의 쥐에게 건네주지. 막내 쥐의 일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냐. 일기도 써야 하고 날짜와 날씨를 꼭 기입하는 것도 잊지 않아. 맨 위층 꼭대기에 상주하는 쥐의 몸 상태도 매일 체크해서 중간층 쥐에게도 알려주고 일기에 기입하는 것도 그의 일이지. 기계 안에 존재하는 쥐는 그렇게 몇천 년을 살아 왔고. 교육 받았어. 계속 그렇게 살아가야지. 중간층의 쥐는 습도계와 대대로 내려온 일기장의 날짜를 대조해보고 과거의 날짜와 날씨를 천공카드에 기입하지.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중간 쥐는 몇 번이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그의 일은 비교 분석 통계라고 말하고 싶어. 그리고 그것을 위층의 쥐에게 전달해. 위층 쥐는 빠름 몸놀림으로 천공카드를 받아 들고 자신의 몸 상태에 따른 날씨 변화를 예측하고 최종 승인해. 그리곤 기계 밖으로 뱉어내기 전에 아래층 쥐들과 식탁에 차려진 아침을 먹어. 오늘 제공된 견과류의 수분이 어떤지. 어느 지역에서 자라고 수확한 것인지 맛에 따라 토양의 질을 말하는데, 이제는 그들만의 이야깃거리로 가벼운 잡담으로 식사를 마치면 천공카드에 사인을 하고 밖으로 내뱉지. 작은 금속 기계가 작동되고 있는 것에 대해. 택시 미터기가 작동 중이다.
약제를 사용하던 시대보다 조금 더 조금 더 정확도가 높아져 모두들 기뻐하고 있다. 그리고 바다에는 여전히 도구가 떠 있고 (잊지 않았겠지) 사람들이 더 이상 날씨 연구를 하지 않아. 일과를 마치면 집에서 가족들과 식탁에 둘러앉아 기도를 드리지. 감사의 기도. 은총의 기도. 소원의 기도. 마지막은 언제나 날씨의 기도를 드려. 그리고 당신은 침대에서 잠이 들고 아침에 눈을 뜰 때까지 날씨 걱정을 하지 않지. 걱정을 한다는 건. 조금 미련해 보이고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드니까. 당신들은 연구를 멈추었어. 사람들은 기계가 골라주는 날씨를 좋아해. 사랑해. 설령 조잡하고 엉터리 같아도 기쁜 마음으로 날씨를 받아들이지. 축복이 내렸다고. 가끔 기계 안이 소란스럽고 냄새가 나더라도. 기계가 알려주는 날씨를 기념일로 정하는 사람들도 생겨났고. 기계는 자연스럽게 작동하고 있어. 광장에서 아침 종이 울리면 기계는 천공카드를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게 뱉어내. 그런 날은 계속되고 있어. 당신은 작은 기계를 양손에 들고 있다.
과거의 어느 날. 역사가들은 이날을 중요하게 생각하진 않았나 봐. 기록하질 않았어. 그냥 가벼운 해프닝 정도로 여겼지. 정부기록보관소는 아니고 이야기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야. 봄이었다고 기억하는. 아니 가을이라고 기억하는. 사계절이 분명하지 않았던 국가였다고. 기계는 비가 온다고 관측했어. 이 날씨 예측은 집집마다 전달됐어. 사람들은 우산을 준비했지. 비가 바로 오시려나? 정오가 지나면 올까? 밤늦게 오려나? 새벽에 조용히 와서 조용히 갔을까? 사실 그날 비는 내리지 않았어. 그날 우산은 지팡이로 쓰이거나 쓰레기통으로 처박혔지. 사람들은 우산을 하루 종일 손에 쥐고 있었어. 누군가는 굳어버린 팔을 펴기 위해 공업사를 찾았고. 누군가는 수산시장에서 우산과 손을 분리했어. 그래도 사람들은 아름다운 하루로 기억됐다고 기뻐했지. 화를 내거나 불쾌하다고 말하는 사람 하나 없이…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축제 분위기에 취했어. 매해 맑은 날, ‘우산을 들고 다니는 하루의 날’을 지정한 것도 그날을 기억하고 싶어서 그랬는지 몰라.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축제는 이렇게 시작됐다, 라고 이야기꾼들이 말한다. 당신들은 날씨가 행복하다고 말했어. 또 다른 날은 맑은 하늘과 적당한 바람이 남동쪽에서 불어오고. 해상은 잔잔한 파도가 계속된다고…
또 기계가 예측을 했어. 누군가는 가까운 근교로 소풍을 떠나고 학교에서는 작은 운동회가 열리고. 바다로 나간 사람들도 있었지. 바다로 나간 사람들은 돌아오질 못했어. 폭풍이 거세게 몰아친 날이었거든. 파도가 해변을 덮고 마을 중심까지 밀려왔어. 날씨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휩쓸고 갔어. 날씨 예측이 결코 잘못돼서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은 아니야. 오로지 ‘날씨의 잘못이다’라고 믿을 뿐. 화를 내진 않았어. 모두가 침묵했지. 모두의 죽음과 고통을 애도하는 날. 사람들은 끝없는 행렬을 이어갔지. 살아남은 몇몇의 마을 사람들은 날씨를 기념하는 또 하나의 기념일로 지정해 줄 것을 국왕에게 요구했어.
기계의 날씨 예측은 맞지만 해석하는 과정에서 행여 실수가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국왕의 명령으로 그 작은 기계는 도서관으로 옮겨졌어. 기계가 더 정확한 과거의 날씨를 찾아주기만을 빌고 또 빌었지. 기계관리는 사서들이 도맡을 거야. 사람들은 여전히 기계를 위해 기도를 하고. 당신은 탁자에 앉아 있다.


- 2. 노동자 -

어떤 행동, 연극적 움직임에 대해

싱크대 배수구, 음식물 찌꺼기 냄새를 풍기듯이 사람들이 모였네
생과 활로 지쳐가는 당신
당신은 인물을 분석하고, 해석하네
인물을 구축하는 당신은 언제나 그렇듯, 당신은 인물입니까?
당신은 사람들 사이에서 인물을 구축하고 있습니까?
한 사람의 인물이 되어갈 때,
인물은 당신입니까? 직업입니까? 배역입니까?
당신은 누구시길래,
무대를 서성거리십니까? 이곳에서 실제로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굳어가는 사지를 이끌고 당신은 남구로역으로 간다. 커피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기다린다. 무엇을? 전철역은 무표정한 사람들이 만원이다. 비가 멈춘다 들었는데, 귓가를 맴돌던 소리는 환청인가? 이미 굳어버린 사람들은 무언의 비명을 지른다. 누군가 말했던가? 우리들은 시체라고. 살아가는 시체들이라고. 누가 부른 거지? 썩지 못해서 살아가는 시체들. 당신은 결코 시체가 아닌데. 굳어가는 몸을 이끌고 걷고 걸어 움직이는 당신들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당신은 굳어가는 몸을 일으켜 핏빛 덩어리를 씹는다 내장을 몸 안으로 쓸어 담고 뒤따르는 콩팥을 꿀꺽꿀꺽 삼키며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인력 사무소에 전화를 건다. 날이 밝아오면 어디로든 숨어야 하는 시체들이라고 부르짖는 사람은 누군가? 먹먹한 하늘 아래 비 피할 곳, 하루 일할 곳, 저기 멀리서 손짓하는 사람 쉽게 닿을 수 없는 곳에서 당신을 부르는데. 한 발짝 내딛고, 또 한 발짝 내디뎌 저기 멀리 손짓하는 사람에게 향하는데, 이리저리 들리는 비명 소리 쫓아, 뛰고 저리 뛰고. 사람들 분주하게 찾아 들어가 굳어버린 몸뚱이 어서 빨리 썩어 뭉그러져버리기만 바라본다. 전철역 아래서 몸이 썩기를 기도할 때, ‘코아타공 한명' 외마디 비명 소리 크게 울려 퍼지면 피 냄새를 맡은 사내들은 다시 한 번 소리의 근원지로 하나둘 모여들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콘크리트에 구멍을 뚫는 작업은 젊은 노동자의 몫이므로, 그대로 전철 지나가는 소리에 묻혀서 멀어지네. 피 한방울 살점 한 조각 얻지 못한 당신들은 검은 피부 하얗게 질려서 돌아서야 하는 마음을 담아 두 팔 벌려 허공으로 휘젓고. 굳어버린 땅, 세상은 빛날 것이야. 기상청이 예언하는 한 밤. 썩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왜 계속 늘어나서 이곳으로 모여들까? 굳어버린 몸뚱이 계속 움직여 걷고 또 걸어도 빈손으로 돌아서야 하는 두려움, 마음 한구석. 온몸이 굳어가는 사람들에게 방부제를 뿌리는 새벽. 당신은 썩지 못해 이곳을 배회한 지 오래전 기억나는데, 언제부터 있었는지 어디서 왔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네, 없어서.

- 3. 잔의 정신 -

어떤 독백, 무대 위 중얼거림에 대해

당신이 빈 머그잔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
주말 동안 국경 어딘가에서,
가족들이 얼어 죽고, 이상기온으로 세계가 조금 흔들렸네,
빈 머그잔을 손에든 당신이 부엌으로 이동하는 동안

머그잔을 손에 들고 있는데요, 불현듯 생각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지요, 빈 머그잔에 사람의 정신을 부어 넣으면 어떨까… 그런데 어떻게 부어 넣지? 일단 머리 위에 머그잔을 올려놓고 방 안 이곳저곳을 걸어봤지요, 중심을 잡고 집중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나아갔지요, 집 안을 몇 번이나 돌았는지… 어지러워서 머리 위 머그잔이 떨어-질-뻔-했죠오, 그다음으로 머그잔 주둥이에 입술을 대고 입김을 사정없이 불었죠, 불고 또 불고… 계속 불다 보면, 내 몸에 있던 모든 기운이 머그잔으로 들어가지 않을까, 싶어서, 그랬죠, 어질어질 번쩍번쩍 욱신욱신, 저는 머그잔을 귀에 가까이 가져가서 어떤 소리를 들었답니다. 고요가 흐르는 머그잔 속에, 나는 바닥에 누웠고, 옆으로 돌아누웠고, 이리저리 뒤척이다, 머그잔을 소라껍데기 마냥 귀에 대고, 아득히 들려오는 고요의 소리가, 윙- 윙-, 고요는 작고 낮은 허밍으로, 나는 허밍 소리를 쫓아, 고요는 나를, 작은 머그잔 속으로 안내했죠, 아차, 이건 내 정신이 아니야, 나는 새로운 육체에 적응하느라 원통의 작은 기둥만을 생각했어요,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집중하고 또 집중하고, 첫째 날은 차갑고 딱딱한 흙 육체가 낯설었지만, 우리네 인간은 어차피 흙으로 돌아가든지 물에 섞이든지, 불에 그을려 재로 남든지, 그러다 바람이라도 조금 후- 불면, 우리네 육체라는 게 그렇게 가벼운 것 아니겠어요? 생각해 보니 머그잔이라는 몸뚱이도 별다를 건 없더군요, 흘러내리는 내 정신 좀 봐, 둘째 날은 내가 이 머그잔을 이동시킬 수 있을까? 머그잔을 작동시킬 수 있을까? 작용과 반작용에 대해, 운동과 질량에 대해, 이동과 속도에 대해, 물리법칙을 생각했지만, 머그잔은 바닥이 넓고 중심이 밑으로 쏠려서 지면에 닿아 있으면 일단 움직이지 않잖아요, 고로 나는 움직일 수 없다, 고 결론짓자 셋째 날이 되었어요, 나는 탁자에 놓인 머그컵에 불과한 걸… 냉장고는 냉매를 이용해 내부의 열을 밖으로 이동시키는데… 나는 결심했죠, 가마에서 만들어진 육체를 떠나겠다고, 육체를 떠나라고 떠나야 한다고요, 넷째 날 나는 여러 가지 맛에 빠져들었어요,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누군가 나를 이동시켜준다, 나를 돌봐주는 누군가 있다, 여러 사람들이 나를 돌봐준다, 그동안 나는 커피 맛을 알게 됐고, 얼음의 차가운 성질을 맛보았으며, 녹차의 씁쓸한 맛이 슬픔을 이겨내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나는 따뜻한 물을 마시면서 하루하루를 보냈어요, 다섯째 날은 누군가 내 옆구리 고리를 붙잡고 방 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는데… 아차, 나는 제정신이 아니라고, 물리법칙은 정신과 육체 사이에서 벌어지는 줄다리기죠, 밀고 당기는, 끌고 미는, 떨어지고 올라가는, 속고 속이는, 달리고 멈추는, 뭐 이런 거… 물리적인 힘을 써야 하는 시대는 변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각자 취향에 맞추어서 자신에 맞는 사물들을 찾아서 그 안으로 들어가고 있어요, 정신을 넣고 있어요, 백업도 잊지 않고 있죠, 특히 매우 불안정한 물체에 정신이 들어갈 때는 특별히 정신백업 보험까지도 생각을 해봐야겠죠, 우리가 알고 있던 시대에는 육체와 정신이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은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면 생명으로써 끝이라고 믿었으니까요, 머그잔을 손에 들고 있는데요, 아, 내 정신 좀 봐,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

- 4. 사슴을 쫓는 밤 -

어떤 무대, 연극적 구조물에 대해

달 그림자는 태양 아래 숨고 사람들은 울타리로 모여드네
당신과 당신이 마주 앉아 서로를 바라보고 있네
감각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네
우리의 감각은 사랑 아닌, 이해와 타협이었음을
당신은 섬에 있고, 섬에 있을 당신이 그립네

보호실 문이 열린다. 당신은 철제 침대에 눕는다. 당신은 쥐들이 너무 많아서 잠을 잘 수 없다고 중얼거린다. 검은 물체가 천장에 매달려 당신을 노려본다. 벌레가 당신의 이마로 떨어졌다. 당신의 목덜미에 땀방울이 고인다. 천장에서 수많은 벌레들이 당신에게 떨어진다. 당신을 덮는다. 벌레들은 당신의 코와 귀와 입으로 파고든다. 당신의 살 속으로 벌레들이. 당신은 움직일 수 없었다. 모든 색을 집어삼킨 보호실에서 당신은 혼자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른거리는 형체가 당신의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당신은 사슴을 마주하고 있었다. 당신이 사슴에게 다가가려 하자, 사슴은 재빠르게 무너진 잔해 뒤로 뛰어간다. 아주 멀리, 철제 침대가 찌그덕 찌그덕 소리를 내지르며 흔들렸다. 당신의 눈꺼풀이 반복적으로 움직인다. 사슴은 재빠르게 덤불 뒤로 달려간다. 덤불 사이 뿔이 자란다. 당신을 주변을 살핀다. 사슴의 뿔이 저기 있다. 당신은 힘없이 주저앉는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낀다. 사슴은 멀리 있고, 당신은 다가갈 수 없었다. 모래 먼지가 일어나고 있었다. 두 개의 야자수가 서로를 껴안는다. 뿌연 먼지 안개가 잦아들고 막막함이 사라진다. 바닷물은 붉은색이었다. 유람선이 떠 있다.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가 서 있었다. 달, 그는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작 한 마리가 날개를 펼쳐 들었다. 화려한 날갯짓으로 날아오른다. 조잡한 플라스틱 별이 낚싯줄에 매달려 움직인다. 사슴 한 마리가 풀숲을 헤치고 있었다. 당신은 사슴을 뒤쫓는다. 밤은 끝나지 않았다. '어둠은 오래도록 계속될 거야.’ 당신이 짐승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을 때, 보호실에서 당신을 볼 수 없었다. 사슴 한 마리가 우리에 갇혀 있었다. 당신이, 당신들은, 그곳에 있었다.

높고 넓은 공간에 흰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사슴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잠시 뒤, 누가 먼저 할 것 없이 하나둘 일어나 옷을 갈아 입는다.

#
우리는 어느 날 우연히 모였으며,
우리는 어느 날 높고 넓은 공간에서,
우리는 다양한 몸짓과 얼굴 표정과 즉흥 연기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어진 텍스트를 읽으며,
우리는 장면을 만들고 연습할 것입니다.

막.

하나.
읽는 방법    1_다이소에 간다. 2_A4 사이즈 액자 8개를 구입한다. 3_희곡지구를 액자에 넣는다. 4_액자 8개를 나란히 벽에 건다. 5_읽는다.
둘.
인력배달차량에 몸 싣고 가는 길, 평택항에서 희곡지구를 봤습니다.
셋.
「희곡지구」의 처음 제목은 ‘무대감각’이며, 웹진 연극in 제242호 [희곡] 「무대남용」과 연결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넷.
챕터 1의 ‘날씨기록’은 웹진 연극in 제221호 [희곡] 「사원 앞에서」의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다섯.
챕터 2의 ‘노동자’는 쓰여진 이후 두 개의 ‘시’로 분리됩니다.
여섯.
챕터 4의 ‘사슴을 쫓는 밤’에서 ‘사슴’ 대신 ‘여우’를 ‘여우’ 대신 ‘노루’를 넣어 보기도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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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

이용훈
물류창고에서 상하차 일을 하며 희곡과 시를 쓰고 있습니다. 시집 『근무일지』와 희곡 「오함마백씨행장완판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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