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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연성 없는 위로

‘없이’ 쓴 희곡

황수아

제255호

2024.06.13

[희곡] 코너에서는 2020년부터 ‘다른 손’ 희곡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희곡 쓰기를 하나의 몸짓으로 생각하며 희곡 쓰기를 구성하는 몸짓들 중 하나를 소거한 희곡들을 싣습니다. 극-창-작과는 무관해 보이는 한 존재가 없는 세계에서, 그 부재의 틈새에서 찾아오는 낯선 다른 손들을 받아들이며 도래할 새로운 희곡을 만나보세요.

붉은여자
어퍼이스트 사이드로 걸어가는 사람들
까마귀
어퍼이스트 사이드로 걸어가는 사람들
붉은여자
웃겨?
까마귀
아니. 진지한데.
붉은여자
붉다고 날 비웃는 거야?
까마귀
확실히 부럽긴 해. 난 색깔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
붉은여자
비웃는 거야? 부러운 거야?
까마귀
부러우니까 비웃는다고 말하면 비약인가?
붉은여자
확증편향이지.
까마귀
잘났어.
붉은여자
성공이네.
까마귀
그럼 비웃는 거라고 해두자.
붉은여자
죽고 싶니.
까마귀
죽고 싶은 새가 어딨겠어.
붉은여자
새는 어차피 죽어.
까마귀
너도 어차피 죽어.
붉은여자
맞아.
까마귀
먼저 죽음을 얘기하다니. 무례하게.
붉은여자
우리 사이에 무슨.
까마귀
사과해.
붉은여자
싫은데?
까마귀
그럼 내가 먼저 사과할게. 나도 죽음을 얘기했으니까. 미안해.
붉은여자
응. 난 안 미안해.
까마귀
또 졌다.
붉은여자
너무 잘 지니까 재미가 없다.
까마귀
재미 없으니까 오늘도 새장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을 거야.
붉은여자
넌 어차피 나오고 싶어 하지 않았어.
까마귀
아닌데?
붉은여자
새장은 늘 열려 있었어. 니가 나오지 않았을 뿐
까마귀
열려 있어도 새장은 새장이야. 방문도 늘 열려 있었어. 니가 나가지 않았을 뿐.
붉은여자
열려 있다고 나갈 수 있는 건 아냐.
까마귀
내 말이.
붉은여자
니가 나오면 나도 나갈게.
까마귀
니가 나가면 나도 나올게.
붉은여자
어차피 우린 못 만나겠네?
까마귀
설마.
붉은여자
니가 한 말인데 정리가 안 되는 거야?
까마귀
알았어. 쓸데없이 똑똑하단 말야. 근데 넌 못 나가.
붉은여자
왜?
까마귀
넌 어퍼이스트 사이드 사람이 아니니까.
붉은여자
까마귀
넌 영원한 이방인이거든.
붉은여자
나도 너처럼 무채색이었다면 좀 나았을까.
까마귀
기분은 좀 나았겠지.
붉은여자
달라졌을까?
까마귀
기분은 좀 나았겠지만 달라지는 건 없어.
붉은여자
왜 너랑 함께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어.
까마귀
우리 둘 다 쫓겨났으니까.
붉은여자
쫓겨난 사람은 많아. 근데 왜 하필 너와 나야.
까마귀
난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까 너랑 같이 있는 거지.
붉은여자
그러니까 내 말은
까마귀
응 니 말은.
붉은여자
지금 내가
까마귀
지금 니가.
붉은여자
쫓겨난 까마귀가 아니라 쫓겨난 사람들이랑 함께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까마귀
난민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 줄 알아?
붉은여자
어디?
까마귀
아주 허름한 체육관에 이불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서.
붉은여자
쫓겨난 까마귀들이 어디 있는 줄 알아?
까마귀
어디?
붉은여자
전신주랑 전선 위에 다닥다닥 붙어서.
까마귀
알아.
붉은여자
때로는 감전이 되면서 다리가 타버린대.
까마귀
허름한 체육관에 화장실이 한 개도 없어서 엉덩이가 얼도록 걸어가야 한대. 화장실 가려는 사람들이 도토리처럼 줄을 서서.
붉은여자
사람들이 전선을 잘라버릴까 생각했다지.
까마귀
전선이 잘리면 자기들만 불편할걸.
붉은여자
길 가다 까마귀똥 맞는 것보단 낫지.
까마귀
난민들은 결국 강제 추방될 거래. 강제 추방되면 어딘가로 보내지겠지. 가는 게 아니라 보내진다고.
붉은여자
그래. 보내지겠지.
까마귀
그곳으로? 다시?
붉은여자
어퍼이스트 사이드에 사는 사람은 어떤 기분일까?
까마귀
당연한 기분.
붉은여자
왜?
까마귀
태어날 때부터 어퍼이스트 사이드 사람이었으니까.
붉은여자
그럼 당연한 거야?
까마귀
그 외의 곳은 가본 적이 없으니까 당연하겠지.
붉은여자
그런 기분 느껴보고 싶다.
까마귀
그런 기분은 너무 심심할 거야.
붉은여자
심심해보고 싶다.
까마귀
참새들은 어떤 기분일까?
붉은여자
웬 참새?
까마귀
늘 같은 도시에 사는 기분.
붉은여자
날 위로하는 거야?
까마귀
눈치챘어?
붉은여자
개연성 없는 위로.
까마귀
괜찮아. 그런 것도 위로의 한 종류야.
붉은여자
누가 봐도 참새보단 니가 나으니까.
까마귀
그러니까. 누가 봐도 어퍼이스트 사이드 사람들보단 니가 낫다고.
붉은여자
충분히 위로가 됐어.
까마귀
그 사람 언제 온대?
붉은여자
까마귀
어제도 그랬잖아. 곧 온다고.
붉은여자
어제는 폭설 때문에 못 왔대. 지금은 눈이 녹고 있잖아.
까마귀
너 설마 기다리는 거야?
붉은여자
응.
까마귀
왜?
붉은여자
매는 먼저 맞는다는 말 알아?
까마귀
그거 한국 속담인데?
붉은여자
우리나라에도 그런 속담이 있어.
까마귀
그렇구나. 역시 지혜는 전 세계에서 통하는군.
붉은여자
매를 먼저 맞으려고 해.
까마귀
매 맞지 마.
붉은여자
맞아야지.
까마귀
그럴 거면 차라리 체육관으로 가서 순서를 기다려.
붉은여자
죽을 순서?
까마귀
또 알아? 기적이 일어날지.
붉은여자
어퍼이스트 사이드에서 날 받아줄 거라 생각해?
까마귀
아니
붉은여자
그럼 차라리 죽는 게 나아.
까마귀
돌아가도 죽지 않을 수도 있어.
붉은여자
그곳에선 죽는 게 가장 희망적인 결말이야.
까마귀
정말 그래?
붉은여자
넌 안 그래?
까마귀
생각해보자.
붉은여자
거기 있는 게 죽는 것보다 괴로워서 여기로 온 것 아냐?
까마귀
그랬지. 일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씨발. 죽도록 일하다 돌아왔다고. 근데 나무가 다 없어진 거야. 크레인이 돌아다니고 먼지가 뿌옇게 차올라서 숨을 쉴 수 없었지. 감전이 돼서 다리가 타버리더라도 전선 위에서는 어쨌든 앉아는 있잖아. 평생 날아다니다 죽을 순 없었어.
붉은여자
그렇지.
까마귀
너도 그랬던 거 아냐?
붉은여자
말하고 싶지 않아.
까마귀
붉은여자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너는 상상도 못 할 거야.
까마귀
붉은여자
정말로 더는 안 묻는 거야?
까마귀
응.
붉은여자
막상 안 물으니까 서운하네.
까마귀
말하고 싶지 않다며
붉은여자
맞아.
까마귀
사실 나도 듣고 싶지 않아.
붉은여자
그래?
까마귀
내 일만으로도 버겁거든.
붉은여자
그러면서 날 위로하다니.
까마귀
꼭 다 알아야 위로할 수 있는 건 아냐.
붉은여자
그래서 니 위로가 자꾸 개연성이 떨어지는 거야.
까마귀
괜찮아. 니 기분이 좀 나아지면 그걸로 됐어.
붉은여자
전쟁 때
까마귀
응?
붉은여자
한 군인이 민간인을 쏴 죽이는 임무를 맡았는데.
까마귀
붉은여자
총알 열 네발을 넣어 장전하고 사람들을 일렬로 세웠대.
까마귀
무서운 얘기야?
붉은여자
글쎄.
까마귀
안 들을래.
붉은여자
무서운 얘기 아냐.
까마귀
알았어.
붉은여자
근데 사람들이 열다섯 명이었어.
까마귀
무서운 얘기 아닌 거 확실해?
붉은여자
그렇다니깐. 사람들 열네 명을 죽이고 나서 열다섯 번째 사람
까마귀
해피엔딩?
붉은여자
이미 열네 명이 죽었는데 해피엔딩일 리가 있어?
까마귀
짜증나.
붉은여자
군인은 그제서야 총알이 한 알 부족하다는 걸 알았지.
까마귀
살려줬어?
붉은여자
아니.
까마귀
죽였어?
붉은여자
아니.
까마귀
그럼?
붉은여자
총알을 찾았지.
까마귀
그래서?
붉은여자
군인은 계속 총알을 찾고 있어.
까마귀
계속?
붉은여자
응. 지금까지 계속. 그리고 그 열다섯 번째 사람이 바로 나야.
까마귀
어떤 기분이야?
붉은여자
죽는 게 나은 기분.
까마귀
그런 마음이구나.
붉은여자
그래서 매를 빨리 맞는 게 나은 거야.
까마귀
해피엔딩이 될 수도 있잖아.
붉은여자
말을 참 못 알아듣네. 이미 해피엔딩은 불가능해.
까마귀
적어도 한 명이 살 수는 있는 거잖아.
붉은여자
그래. 그놈의 해피엔딩. 혼자라도 해피엔딩이 되어보고 싶어서 이곳으로 온 거야. 근데 어퍼이스트 사이드에 내 자리는 없어. 태어날 때부터 해피엔딩이었던 사람들이 날 받아주겠어?
까마귀
왜 안 되는 거지?
붉은여자
자신들의 해피엔딩이 불안해져서겠지?
까마귀
마치 참새들이 날 받아주지 않는 것처럼?
붉은여자
참새들이 널 받아주지 않아?
까마귀
나뭇가지를 내어주지 않지. 나뭇가지를 내어주면 자기들이 전선에 가야하고 그럼 다리가 타버릴 텐데.
붉은여자
누가 뭐래도 니가 참새보다 아름다워.
까마귀
고마워. 참으로 뜬금없고 개연성 없는 위로지만.
붉은여자
왔나봐.
까마귀
벌써?
붉은여자
눈이 완전히 다 녹았으니까.
까마귀
이렇게 빨리?
붉은여자
응.
까마귀
날 두고 가지 마.
붉은여자
왔다.
까마귀
그거야?
붉은여자
응.
까마귀
뭐래?
붉은여자
딱 다섯 글자.
까마귀
답답해. 그러니까 뭐라고 적혀 있어?
붉은여자
추방통지서.
까마귀
역시 예상대로군.
붉은여자
날개가 있는 니가 부럽다.
까마귀
새장 밖에서 날개타령이라니.
붉은여자
날개는 가능성이야.
까마귀
언제 갈 거야?
붉은여자
지금 가야지.
까마귀
같이 가자.
붉은여자
넌 어디로 가게?
까마귀
어디든.
붉은여자
가지 말까?
까마귀
어디든
붉은여자
가지 말까? 라고 물었어.
까마귀
여기 있는 것도 여기로 가는 거야.
붉은여자
역시 넌.
까마귀
역시 난?
붉은여자
까마귀
아까부터 자꾸 뭘 쓰는 거야?
붉은여자
편지.
까마귀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붉은여자
고향에 부치려고. 전쟁이 터지기 전의 고향에게.
까마귀
창문에 써서 고향에 부친다고? 것도 과거의 고향에?
붉은여자
이 방을 그대로 부쳐야지.
까마귀
소인은 어떻게 찍고?
붉은여자
내가 소인이 되어.
까마귀
배달은 내가 할게.
붉은여자
어떻게?
까마귀
날개가 있으니까.
붉은여자
이 방을 우체통에 넣어달라고 하자.
까마귀
누구한테 부탁하게?
붉은여자
어퍼이스트 사이드 사람들한테.
까마귀
그거 좋은 생각인데?
붉은여자
우릴 받아주진 않아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까마귀
자기들도 양심이 있으면 우체통에 넣어주는 것 정도는 하겠지.
붉은여자
그럼 내가 소인이 되고 니가 배달해주는 걸로 정리하는 거야.
까마귀
날개가 쓸모있을 때가 다 있다니.
붉은여자
감전되지 않은 니 다리도. 그리고 내 붉은색도 가끔은 쓸모가 있네.
까마귀
내 손을 잡아.
붉은여자
넌 손이 없잖아.
까마귀
그럼 내가 니 다리를 잡을게.
붉은여자
난 손이 있는데?
까마귀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붉은여자
좋아. 하나 둘 셋 하면
까마귀
뛰어내리기!
붉은여자
하나 둘
까마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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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아

황수아
희곡의 재료를 이해하려고 노력해 왔고
지금은 나만의 레시피를 만들어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부엌은 늘 엉망이 되지만, 여러 실험 중에 있습니다.
인스타그램 @alphenr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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