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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시간

하소정

제261호

2024.09.12

(일상)의 시간

연극이 끝나고 난 뒤, 공연자는 집에 돌아와 공연 짐을 부려 다시 하나하나 제자리를 찾아 차곡차곡 쌓고 나서, 묵은 빨래를 돌리고 쌓여있는 설거지를 끝내는 것으로 일상을 다시 시작합니다. 하지만 바로 일상이 그렇게 돌아가는 것은 체력이 남아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이틀은 죽은 듯이 잠을 자고 밥 먹고 잠자고 밥 먹고 잠자고를 반복해야 몸이 알았다고 일어나겠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동안 몸을 움직이는 일은 강아지와 나가는 저녁 산책이 전부이고요(아침 산책은 생활동반자의 몫으로 돌려야 합니다).

회색 보도블록에 앉은 강아지의 뒷모습을 높은 시점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갈색모를 가진 강아지는 하늘색과 초록색 배색의 하네스를 착용했다. 하네스에 연결된 산책줄에는 ‘친구환영’이 적힌 민트색 와펜이 달려있다.

(시작)의 시간

관객참여 설치퍼포먼스 <1/4평의 시간>은 2018년도에 실험으로 시작했던 작업이 거리공연과 실내공연에 이어 전시와 우드카빙 워크숍, 인터뷰 워크숍이라는 파생상품을 낳으며 6년을 살아남았습니다. 처음엔 생각지도 못했던 롱런입니다. 관객들의 이야기로 살이 붙고 키가 자라는 이 작업은 하소정이라는 작업자와 함께 아주 천천히 걷고 있습니다. 지난 8월 6회를 맞이한 페미니즘 연극제에서도 19일 월요일부터 25일 일요일까지 일주일간 12회차 공연을 진행하며 이 작업으로서는 나름 긴 호흡으로 관객들과 만났습니다. 낯설지만 금세 반가워지는 얼굴들과 서로의 이야기에 연신 끄덕이다가 공연의 여운을 각자 가방에 챙기고는 이내 헤어졌습니다. 6년. 이 작업의 씨앗이 커나가는 데 걸린 시간입니다. 그 씨앗은 두 개의 장면에서 비롯되었는데요. 한 장면은 예술을 업으로 삼고 있는 제가 농한기에 나무 숟가락을 깎던 모습에 “그 비생산적인 일을 왜 하고 있냐?”며 날아온 무용의 노동에 대한 따가웠던 질책으로 시작합니다. 이에 다시 작업실로 돌아가 새벽이 되도록 내리깎아 완성한 숟가락 하나와 책상 위에 쌓여있던 수북한 칼밥. 5시간 동안 쉬지 않고 깎았지만 돈 한 푼 나오지 않는 무용의 노동은 허리통증과 함께 통쾌한 웃음을 선사했습니다. 나를 벌어먹이지 못하는 노동으로 제가 깎은 것이 밥을 떠먹이는 숟가락이었으니까요. 휴대폰 메모장에 이 날의 단상을 끄적이며 첫 번째 장면이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한 달 뒤 찾아온 두 번째 장면은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였습니다. 입관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뵈었던 할아버지의 몸. 그 몸은 참 작았습니다. 할아버지를 담을 관도 두 뼘이 겨우 될까 싶게 생각보다 훨씬 작았는데 그 관을 다 채우지 못하는 더 작은 그 몸이 유난히 보였습니다. 96년이라는 시간을 그를 지탱했던 노동의 총체였던 몸이 저 작은 관 하나도 채우지 못하는 건가 싶어서. 입관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와서 또 습관처럼 휴대폰 메모장을 열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 두 장면이 이리저리 엮이기 시작했습니다.

나무 책상 위에 손으로 깎은 나무 숟가락과 칼밥, 목공칼이 놓여있다. 책상 뒤쪽 움푹 들어간 공간에 놓인 나무상자와 스테인리스 컵이 흐리게 촬영되었다.

(6년)의 시간

이야기들이 6년의 시간만큼 1/4평에 쌓였습니다. 관객들의 이야기, 인터뷰이들의 이야기, 저의 이야기 모두. “그때의 나랑 지금은 다를 텐데” 인터뷰를 진행했던 인터뷰이에게 이번 공연소식을 전했을 때 그가 했던 말입니다. 그렇죠. 우리는 달라졌습니다. 육아에 매몰되어 힘들어했던 두 아이의 엄마는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그만의 평안을 찾고 있습니다. 마이크를 자처했던 활동가는 병실로 돌아가 다시 진한 환자들의 시간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29년을 한결같았던 보험설계사는 몸과 마음이 힘들어 일을 놓고 고객들이 아닌 자신을 돌보고 살피는 데 1년을 보낸 뒤 지금은 다시 복귀하여 고객들을 만납니다. 숲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던 숲해설가는 자신만의 작은 정원을 열심히 가꾸고 있고, 공연자인 저는 이제는 ‘열심히’ 일을 하지 않겠다며 ‘워라밸’을 외치면서 일상과 공연의 균형을 이리저리 굴리며 맞추고 있습니다. 6년이라는 시간은 느리지만 또박또박 우리에게 다가와 부딪히고 지나쳐갔습니다. 그 안에는 길었던 환란도 있었고요. 코로나 이전의 저와 코로나를 지나온 저는 달라져 있었고,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 달라지고 그에 따른 선택이 뒤따르니 어떤 일들을 겪어낸 이후의 우리는 꽤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일을 대하는, 삶을 대하는 것이 달라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요.
돈을 버는 일과 돈을 쓰는 일, 직업이 되는 일과 취미로 여겨지는 일, 무용한 일과 무용하지 않은 일의 경계에서 날이 섰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날이 조금 무뎌진 듯합니다. 작업과 경력, 배움과 평가, 증명이 끊이지 않고 저를 거쳐 가던 중 맞은 폭탄 같았던 번아웃 이후로는 더욱이. 이제는 ‘나를 세우는 일’, ‘나를 살리는 일’이 뭔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일’이 되어야 하는 때‘도 인정합니다. 주위 사람들의 공감을 얻기 어려울 때도 있지만 그럴 땐 눈과 귀를 닫고 스위치를 잠시 끄기도 합니다. 한동안 놓고 있었던 취미를 다시 시작하려고 수강권을 끊고, 공연 기간 내내 하루를 전부 기다리는 시간으로 보내야 했던 반려견과 함께 시간을 충실히 보내려고 노력하면서요.

나무 벤치에 앉아 흙바닥에 가지런히 모은 두 사람의 양발을 촬영한 사진이다. 금장 장식이 달린 검은 로퍼에 흰 레이스 단목양말을 신은 이는 벤치에 바로 앉아있고, 맨발에 검은색 가죽으로 된 샌들을 신은 이는 비스듬히 앉아 옆에 앉은 이의 발을 향해 양발을 모으고 있다.

(성장)의 시간

그동안 이 작업을 쭉 함께해 온 지기이자 동료는 가슴 벅찼던 이번 연극제 관객들의 관람소감을 전해 듣고 제게 말했습니다. 이제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그리고 유수의 거리예술축제를 거의 다 참가했다고 판단되는 시점에서 이 작업이 갖는 수익구조와 다음 스텝에 대해 다시 그림을 그려봐야 한다는 이야기도요. 고개를 끄덕이면서 생업으로서 가지는 이 작업의 위치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앞으로 어떻게 포지셔닝해야 하는지 생각합니다. 그 시작은 관객들이 남기고 간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것부터입니다. 마음에 닿는 이야기들을 추리고 그들이 그린 숟가락을 나무로 하나씩 깎고 기록으로 남기는 과정을 다시 시작하는 일. 그렇게 당장은 돈이 되지 않는 ‘비생산적인 일’로 의미를 쌓고 다음 작업을 모색할 것입니다. 공연과 공연의 사이, 이번 작업과 다음 작업의 사이가 느슨하지만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도록. 일이란 끊임없는 자신의 성장을 의미한다고 말했던 이번 공연에서 만난 한 관객의 대답이 생각납니다. 성장을 바라보는 마음. 나무는 죽을 때까지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것이 길이든 부피든 깊이로의 성장이든지요. 또는 성장하지 않음을 선택함으로써 성장을 도모한다고도 합니다.

(만남)의 시간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실험 초반, 어떤 이는 제게 무용함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를 적어주며 응원해주었고 어떤 이는 하소정이 작가임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냐며 소리를 높이기도 했습니다. 인터뷰를 통해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합니다. 낯선 이의 질문에도 자신의 이야기를 서슴없이 꺼내주던 생생한 표정들. 그리고 공연장에서 마주했던 꼬마 관객부터 초로의 관객까지 각자 빈 나무토막에 그린 크레파스 그림과 연필로 적어 내려간 담담한 글, 직접 목소리로 들려주었던 이야기들도요. 새로운 이야기들을 마주하는 작업은 계속 만남의 시간을 만들어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시선과 목소리가 만나고 발걸음과 손뼉이 만납니다. 이야기와 이야기들이 만나 서로 공명하다 헤어집니다.
<1/4평의 시간>의 장르를 묻는 질문에 관객참여 설치퍼포먼스라고 소개하며 공연이라고 답합니다. 관객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1도 성립하지 않는 공연은 그 공간과 시간을 함께 공유하는 만남으로 완성됩니다. 극‘I’인 공연자이지만 관객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만큼은 절로 활기차지는 이 만남을 계속 이어갈 겁니다. 늘 보통의 오늘을 맞이하면서요.

<1/4평의 시간> 공연의 참여자가 만든 숟가락 디자인과 그 디자인에 맞추어 깎은 숟가락을 한 손에 들어 촬영하였다. 가로 약 5cm, 세로 20cm 정도의 나무 블록에 주황색 크레파스로 손잡이의 끝부분이 둥근 숟가락을 그렸다. 숟가락 그림의 아래에는 볼펜으로 ‘서른 다섯에 암환자가 됐고, 서른 여섯에 아빠가 돌아가셨다. 이제야 나는, (정확히 알아 볼 수 없는 두 단어) 내 삶의 숟가락을 만들고 있다’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사진: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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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소정

하소정
공연창작자이자 공연노동자입니다.
기억, 정서 시간이 깃든 이야기를 수집하고 기록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합니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 관객들과의 만남을 좋아합니다.
avecmoraeal@gmail.com
https://linktr.ee/moraeal_j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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