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함은 슬픔보다 조금 더 무겁다
(재)국립극단 <사물함>
허영균_예술·공연예술출판사 1도씨 디
제138호
2018.04.19
언제부터일까. 희망이나 순수를 말하는 청소년의 이야기는 좀처럼 찾을 수 없다. 이토록 괴팍하고 치열한 세상에서 순수 따위는 도움이 못된다. 감히 누가 앞에 나서 희망을 말할 수 있겠는가. 현실이 그러하기에, 우리는 작품 속에서도 점점 더 아픈 오늘을 만나게 된다. 지난해 낭독으로 공연했던 <사물함>이 본공연을 앞두고, 작품의 사면을 날카롭게 벼리는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닐까.
<사물함>은 작가 김지현의 데뷔작이면서, ‘여기는 당연히, 극장’의 작가이자 연출인 구자혜가 연출을 맡았다. 젊은 작가와 연출가, 배우, 청소년의 모여 10대의 감성과 목소리를 담은 희곡을 개발하는 창작 인큐베이팅 프로그램 ‘예술가청소년창작벨트’로 탄생한 이 작품은 ‘우리 안의 청소년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냉정한 대답이다. “나는 과연 살아서 어른이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고 10대를 지나온 작가 김지현이 할 수 있는. 이 시대와 우리 사회의 문제를 집요하고 치열하게 탐구하는 구자혜 연출은 이것을 정연하고, 선명하게 무대에 세우는 것으로 작가에게 공감의 한 표를 던진다.
두 갈래의 시간이 교차하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아르바이트 하던 편의점의 창고가 무너져 목숨을 잃은 ‘다은’과 다은이 죽은 이후의 혜민과 한결, 연주, 재우의 시간이다. 새 학기가 시작했다. 다은이 죽고 난 후, 학교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죽은 다은의 사물함은 열리지 않고, 그 속에선 알 수 없는 냄새만 풍겨 나온다. 비밀과외를 하며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해온 혜민과 한결 그리고 재우는 소문의 대상된다. 학교 아이들은 다은의 죽음을 두고 이들에 대해 속삭거린다. 담임의 특별면담과 전문가 심리상담, 재우의 이탈 그리고 다은의 친구 연주의 달갑지 않은 합류 등. 아이들의 일상은 전과 같지 않고, 이들은 달라진 세계의 분위기를 감지한다. 다은을 통해 담배를 샀던 재우, 다은이 아르바이트 하던 편의점집 딸 혜민, 편의점이 세든 건물주의 딸 한결…. 이들은 살아있는 다은과 친구였던 적은 없지만, 이들 삶의 내피는 죽은 이후의 다은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다은은 죽었지만, 이들의 생존 싸움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다은의 모습은 ‘라이브 방송’을 통해서만 전달된다. 퇴근 이후가 되면 인적이 드물어지는 골목 어귀의 편의점에서,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시작한 SNS 라이브 방송. 다은이 선택한 아이템은 ‘편의점 폐기음식 리뷰’다. 유통기한이 지난 폐기음식을 먹으며, 고작해야 한두 명이 접속한 라이브 방송의 화면을 보며 혼자만의 수다를 떠는 것이다. 할머니 한 사람이 함께 사는 집, 단 한 명의 친구 연주, 단 한 사람의 시청자 앞에서 다은의 삶은 진행 중이다. 미성년에게 몰래 담배를 팔아주어도, 갑자기 생리가 시작된 친구에게 체육복을 빌려주어도, 살아있는 다은과 이들의 관계는 맺어지지 않는다. 다른 세계에 사는 편의점 사장의 딸일 뿐. 그것을 원치 않았던 것은 결코 다은이 아니었을 것이다.
“폐기는 왜 폐기일 수밖에 없는지. 결국 세상 돌아가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 신경 안 쓰면 안 쓴 티가 나기 마련인 것 같고, 그럼 결국 선택받지 못하는 거고.” -다은
유통되기도 전에 폐기된 음식같은 다은의 삶은 의미심장하기도 전에 충분히 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결, 혜민, 재우에게 이 죽음은 위협이 되지 못한다. 남겨진 아이들을 괴롭히는 것은 그들 세계의 균열과 자기 삶의 흠집일 뿐, 다은의 죽음은 다른 세계로부터의 공격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다은의 친구였던 연주도 마찬가지다. 고액과외 모임에 들어오면서, 보다 안전한 세계에서 보호받길 원하는 연주가 보여주는 것은 매정함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심리의 이동이다.
“우린 잘못 없어”. 죽음의 책임을 서로에게 미루는 건물주의 딸 한결과 편의점 딸 혜민의 갈등. 이들은 서로가 아닌, 또한 학교 친구의 죽음이 아닌, 자기들의 이해를 위해서 각기 다른 ‘우리’에 자신을 묶는다. 이때의 우리는 이들이 이미 물려받은 유산이며, 바뀌지 않을 계급의 투쟁이다. 다은의 죽음은 나비의 날개짓처럼 돌풍을 몰고 오지만, 아마도 이 바람은 오래 머물다 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승리를 위한 투쟁, 패배하지 않으려는 투쟁보다 치열한 것은 지키려는 투쟁이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쏠 때, 순간의 아픔을 잊는 것처럼. 투쟁 안에서, 죽음의 충격과 애도의 마음은 잊힌다.
[사진: (재)국립극단 제공]
- 일시
- 4월 20일~5월 6일, 평일 7시반, 주말 3시(화 쉼)
- 장소
- 소극장 판
- 작
- 김지현
- 연출
- 구자혜
- 출연
- 김윤희, 이리, 정연주 외
- 문의
- 1644-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