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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각해보는 “즐거운 관람 되십시오”

세상의 모든 극장, 세상의 모든 관객

이지예

제262호

2024.09.26

연극을 경험한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요? 관객은 극장에서 무엇을 기대할까요? 웹진 연극in에서는 지금 우리의 관극 문화와 극장 규범을 질문합니다. 무대와 객석이 어떻게 서로를 환대하고 함께 충만할 수 있을지, 열린 객석과 편안한 공연이 모두에게 어떤 마음의 준비, 혹은 몸의 태도를 요구하는지, 조금은 다른 질문들을 쌓아보고자 합니다.

“‘극장’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그리고 어떤 단어들이 연상되나요?” 대학에서 연극사나 연출에 대한 강의를 시작할 때, 학기 초마다 내가 빠짐없이 던지는 질문 중 하나다. 나오는 응답들은 매번 놀랍도록 비슷하다. 연출, 배우, 무대감독과 같이 제작 현장에서 필요한 역할을 이르는 말들, 무대, 조명, 커튼과 같이 극장 공간에서 마주치게 되는 물리적인 요소들, 그리고, 연극, 뮤지컬, 콘서트처럼 극장을 채우는 여러 예술 양식의 이름들. 응답들이 매번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것에 대한 절반 이상의 책임은 식상한 질문을 던진 강사에게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몇 번이고 학기가 반복되고 해가 거듭되어도 늘 비슷한 응답만이 나오는 것이 조금도 실망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물론, 가끔은 커튼콜, 암전, 마티네 같은 응답을 받기도 한다. 극장에 대한 어떤 기억들이나, 경험들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그 응답들은 위에 언급한 응답들보다 조금 더 흥미롭기는 하나 여전히 예상 가능한 범주다.
이야기를 이어가다 보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떠올린 극장이라는 곳은 대체로 입구에서 표를 팔고, 로비를 지나 들어서게 되는 공연장이라는 것이 금세 분명해진다. 이 이미지 속에는 공통적으로 프로시니엄 아치 형태의 무대가 등장하고, 공연이 시작되면 불이 꺼지는 객석이 있다. 무대 위의 배우와 객석의 관객들에게는 각각 따로이 주어진 역할이 있고, 이 둘은 보이지 않는 벽으로 공고히 나뉘어 서로 다른 규칙의 지배를 받는다. ‘극장’에 대한 우리의 기억과 연상과 상상은, 언제부터 이렇게 단일하고 납작해진 걸까? 들어보면 이 공간은 어린이를 환영하지 않고 휠체어 사용자들에게는 정해진 몇 자리만이 ‘몫’으로 주어지는 곳이다. 정해진 시간까지 도착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기도 하고, 화장실에 갈 때에도 허락이 필요한 곳이기도 하다. 어둡고 조용하고 진지한 곳. 그래서 가끔은 어려운 곳. 그리고 또 비싼 곳. 조금 답답했고 많이 안타까웠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일을 하게 되기 전, 나는 꽤 오랜 시간을 미국 중서부에 위치한 중간 크기의 도시에서 지냈다. 대도시가 아니었음에도 그 지역의 공연계는 꽤 활기찬 편이었다. 극장의 수도 적지 않았고, 모든 극장에서 매 시즌 쉬지 않고 공연을 올렸다. 하지만 올려지는 공연의 대부분이 출판된 희곡에서 출발하는 대본 중심 연극이거나 이미 흥행에 성공한 브로드웨이 작품의 순회공연들이었다는 점에서는 조금 아쉬웠다. 큰 도시의 연극계가 나는 그래서 항상 궁금했다. 최소한 멀리서 볼 때, 그들은 언제나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시도들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오랜만에 다시 찾은 메트로폴리탄 서울의 공연계는 과연 놀라웠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다양하고 새로운 실험들이 이뤄지고 있었다. 단 한 가지만 빼고 - 공연장에서 관객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관한 아주 엄중하고 진지한 안내들.
규범에 가까운 그 지침들은 전혀 새롭지도 다양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어찌나 과도하게 통제적이고 불필요하게 간섭적인지, 약간은 무서울 정도였다. 아주 아주 친절한 목소리로 극장에서 해서는 안 되는 행동들이 읊어지는 시간, 이렇게 많은 규율에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정말 자발적으로 동의한 건지 나는 궁금했다. 나에게는 약간 억압적으로 느껴졌던 그 규율에 다른 관객들은 정말 전혀 아무렇지 않은 것인지 의아했다. 메트로폴리탄 공연계의 속도감과 다양성에 감탄하고 흥분했던 것은 정말이지 잠시, 흥은 이내 깨졌다. 나는, 나를 잠재적 사고뭉치 취급하는 어떤 극장들에 빈정이 상했다. 나는, 몸을 조금만 뒤척여도 나를 째려보는 옆자리 관객을 마주하는 것이 무서워졌다. 나는, 공연을 보는 동안 가끔은 공연보다 내 옆자리의 관객에게 더 신경을 쓰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고는 기분이 상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극장이었는데, 그 이름만으로도 설레는 공간이었는데, 그랬던 극장이 요즘은 걱정이 된다.

갈색, 카키색, 남색으로 이루어진 긴 형태의 방석이 놓여 있는 벤치. 벤치 위에는 small child seat이라고 적힌 코팅된 종이가 놓여 있다. 텍스트는 모두 대문자로 되어 있고, 특히 CHILD는 크고 굵은 글씨로 적혀 있다.
인형극 전문극단인 런던의 리틀 앤젤 씨어터 극장의 객석.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공연들을 자주 올리는 이 극장의 객석에는 (키)작은 아이들을 위한 자리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무대에서 가장 가까운 쪽에 있는 이 구역의 자리에는 아이들과 함께 온 부모나 보호자가 아이와 동반하여 앉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아이들과 함께 온 어른 관객은 이 좌석의 뒷줄에 앉거나 다른 좌석에 따로 앉도록 안내받는다) 상대적으로 키가 큰 어린이나 성인들 뒤에 앉게 될 경우 시야에 큰 제한을 받을 것이 분명한, ‘키 작은’ 어린이들만 앉을 수 있는 특별석. 그래서 이름도 ‘스몰 차일드 싯’, 작은 어린이 우선 좌석이다.

얼마 전, 한 극장에서 내 앞자리 관객이 극장 안내원으로부터 주의를 받는 것을 보았다. 내 앞자리에 앉은 관객이 잠시 무대 쪽으로 몸을 기울였는데, 그 관객이 등받이에서 몸을 떼자마자 안내원이 좌석까지 찾아와서 뒷좌석 관객의 관람에 방해가 되니 ‘바른 자세’로 앉아 주실 것을 ‘부탁’하셨다. 더없이 친절한 목소리와 공손한 손짓으로. 공연 시작 직전, 객석이 막 어두워지던 참이었다. 내 뒷자리 관객이나 그 뒷자리 관객의 입장까지를 내가 말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몸을 기울인 관객의 바로 뒤에 있던 나는, 그 관객 때문에 불편을 겪지도 방해를 받지도 않았었다. 방해는 오히려 그 안내원으로부터 받았다. 공연 시작 직전, 모두의 긴장과 흥분이 떨리는 침묵이 되어 무대 이편과 저편을 채우는 그 순간, 바로 그때 들어야 했던 “이렇게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앉으시면….” 은 실로 매우 불쾌했기 때문이다.
그 안내원으로 하여금 그렇게 안내하도록 교육했을 극장의 입장, 극장으로 하여금 그것이 관객들이 바라는 바라고 생각하게 했을 요즘의 관극 문화에 대해 생각하느라 난 한참 동안 공연에 집중하지 못했다. 내가 선물로 받은 꽃을 들고 객석에 들어가려다 저지당했던 경험, 이것은 선물이 아니라 내 개인 소지품인데 왜 내가 소지할 수 없는지 물었다가 ‘공연장 매너’도 모르는 한심한 관객 취급을 받았던 기억, 내 숨소리 때문에 관람에 방해를 받았다며 공연이 끝나자마자 옆자리 관객에게 훈계를 들었던 경험, 너무 황당하고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했다가 두고두고 분하고 억울했던 기억, 터져 나오려는 기침을 참다가 거의 유사 공황을 겪었던 경험, 기침을 참느라 몸을 숙였다 일으켰을 때, 나 들으라고 한 것이 거의 분명했던 뒷자리 관객의 한숨에 마음이 쪼그라들었던 기억. 함께 즐겁고자 찾은 공간인 극장에서 우리는 어쩌다가 이렇게 서로를 밀어내게 되었을까 싶어 서글펐다.
원활한 공연장 운영을 위해, 쾌적한 공연 관람을 위해. 일종의 지침이나 안내가 불필요하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방식이 관객의 행동 양식을 제지하고, 관리하고, 간섭하고, 감독하고, 때때로 긍정적인 공연 관람 경험에 방해가 된다면, 그때는 이 지침이나 안내를, 그리고 그것들이 작동하고 있는 방식을 다시 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도치 않게, 실수로, 우연히, 어떤 소리를 내거나 상대에게 방해가 되는 행위를 했다가 미안해하는 경우를 본 적은 더러 있지만, 누군가의 관람을 알면서도 일부러 방해하는 관객을 본 기억은 없다. 이것이 나만의 경험이 아닐 것이라 생각하는데 왜 우리는 옆자리의 누군가에게 쉽게 관대할 수 없는 걸까?

조명이 어두운 극장 안이다. 한 사람의 공연자가 객석을 향해 서 있다. 공연자 주변은 빨랫줄에 걸린 하얀 옷들로 장식되어 있다. 동그란 모양의 2-3인용 카펫이 여러 개 놓인 객석은 공연자와 마주 보는 방향으로 자리하고 있는데, 무대와 객석 사이 단차는 없다. 카펫 위에는 영아와 보호자들이 쌍을 이루어 앉거나 서 있다. 분위기는 자연스럽고 아늑하다. 이들 뒤쪽으로 공연자와 가장 먼 거리에 벤치가 놓여 있다.
유니콘 씨어터의 베이비 씨어터 공연 장면. 공연을 보러 온 아이와 보호자는 객석 공간에 준비된 카펫 위에 자리를 잡았다. 영아들은 공연 내내 앉거나 서거나 극장 여기저기를 기어 다녔다. 보호자들 역시 아이들을 따라 자유롭게 움직였다. 공연을 보는 아이들의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공연 내내 자유롭게 사진 촬영이 허락되었다. 아이들이 울거나 큰 소리를 내면 공연자는 상황에 따라 이야기 진행을 잠시 멈추거나 서 있는 위치를 바꾸었다. 바닥이 불편한 관객들을 위해 뒤쪽에는 벤치 형태의 좌석 또한 마련되어 있었다.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앞자리에 뒷자리에 앉아 있는 이 사람들을 나는 오늘 처음 만났다. 이 사람들도 나만큼 이 공연을 기대했을까, 이 사람들도 나만큼 오늘을 기다렸을까, 상상해 본다. 이 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서 그 많은 공연 중에 하필 이 공연을 하필 오늘 보기로 마음먹었을지 궁금해진다. 이 중 어떤 사람에게는 허리 디스크가 있을 수도 있고 천식이 있을 수도 있는 거겠지. 그래서 가끔 숨을 크게 쉬거나 몸을 뒤척일 필요가 있을 수도 있는 거겠지. 하지만 디스크도 없고 천식도 없어서 뒤척이지 않아도 되고 고요히 호흡할 수 있는 이들은 그런 특권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일 뿐, 그들이 더 높은 교양과 더 세련된 매너– 그런 것이 과연 있다면 –를 갖춘 것은 아닐 것이고, 기침을 하거나 몸을 뒤척인 그 관객도 동료 관객을 존중하지 않거나 자신의 관람을 타인의 관람보다 우선에 둔 것은 아닐 것이다.
무대는 객석과 유리되어 있지 않다. 공연은 진공의 상태에서 진행되지 않는다. 관객인 나와 나의 동료 관객들, 우리들 모두까지가 오늘의 공연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잠재적 훼방꾼이거나 관람 방해 요소가 아니고, 오늘의 공연을 같이 완성하는 동료이고 공동체다. 배우들이 오늘 펼쳐 보인 공연이 다시는 반복될 수 없는 것처럼, 오늘 이 조합으로 극장에 모인 우리도 공연이 끝나고 나서 다시 이렇게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서로에게 참으로 특별한 존재다. 같은 사건을 함께 목격한 사이. 이미 끝나고 기억으로만 남은 그 공연이 조금 전에 과연 실재했다고 서로 증언해 줄 수 있는 사이. 이 극장이 계속 문을 열 수 있도록 몇 번이고 이곳을 함께 찾는 사이. 그 소중하고 특별한 의미를 우리 모두가 조금 더 자주 기억한다면 우려와 염려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이는 오늘의 극장이 상호 경계가 최우선의 원칙인 것처럼 보이는 오늘의 관극 문화가 과연 조금은 경쾌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세상의 모든 극장, 세상의 모든 관객’이라는 주제로 글을 청탁받았을 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많았다. 말 그대로 내가 경험한 세계 여러 도시의 서로 달랐던 극장 문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었고, 극장 공간으로부터 자주 배제되는 관객을 초대하기 위한 세계 곳곳의 서로 다른 노력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싶었다. 극장이었다가 극장이 아니게 된 장소에 대해서, 극장으로 지어지지 않았지만 누구에게나 극장이 되어 버린 공간에 대해서도 써 보고 싶었고, 버려진 극장과 찾아진 극장, 오래된 극장과 새로운 극장, 그리고 내가 경험한 이 도시 저 도시에서의 관객들과의 수다에 대해서도 나누고 싶었다. 세상은 넓고, 극장은 많고, 관객은 다양하니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너무나 많은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주어진 지면은 짧았고, 지금 여기에서 하지 않으면 가장 깊이 후회할 것 같은 주제를 고르다 보니 내가 경험한 오늘의 극장에 대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오늘의 극장에 대한 어떤 안타까움과 어떤 서운함, 어떤 바람과 어떤 상상.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의 내부. 사진의 우측 하단에는 하얀색과 검은색의 체크무늬가 그려진 4피트 높이의 돌출형 무대 일부가 드러나 있다. 그 무대 주위로 제법 많은 수의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일부는 무대에 몸을 기대고 있고 일부는 그 뒤로 무대와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무대를 향해 서 있다. 이 사람들 뒤편으로는 나무로 된 벽과 난간으로 이루어진 3층짜리 구조물이 극장의 외형을 따라 둥글게 배치되어 있다. 이 구조물의 맨 꼭대기에는 천장이 얹혀 있지만, 서 있는 관객들 위로는 지붕이 보이지 않는다.
셰익스피어 시대 런던의 극장 분위기는 매우 소란스럽고 자유로웠다. 관객들은 공연을 보며 음식을 먹거나 술을 마셨고, 무대 위의 배우들에게 말을 걸거나 거들 연기에 대한 자기의 평가를 큰 소리로 나누기도 했다. 특히 서서 공연을 관람했던 그라운들링은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자유롭게 자리를 이동했고, 나무 양동이를 화장실로 사용하며 긴 시간 동안 공연을 관람했다. 프로시니엄 무대를 마주 보고 나란히 배치된 좌석에 앉아 객석에 불이 꺼진 동안은 그저 가만히 앉아 관람해야 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방식의 관람 문화. 사진은 셰익스피어 시대의 극장을 재현한 런던의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 극장의 외형을 따라 둥글게 배치된 객석과 뚫려 있는 천장, 돌출형 무대는 그 시대 극장의 모습과 매우 닮았다. 하지만 관극 문화는 그때와는 다르다.

시공을 거스르고 가로질러 생각해 보면, 경사진 야외에만 극장을 짓던 때가 있었다. 모든 공연이 낮에만 이뤄지던 시대도 있었고, 특별한 손님을 위한 비싼 좌석은 아예 무대 위에 마련하던 때도 있었다. 공연 중인 배우들에게 응답을 하는 것은 물론, 말을 걸거나 오렌지를 집어 던지는 것이 일반적인 때도 있었고, 극장에서 음식을 먹거나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것이 당연한 때도 있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가장 자주 마주하는 모습의 극장, 가장 자주 요구받는 모습의 관객이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모범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다행스럽게도 접근성에 대해 진지하고 적극적인 고민을 이어가는 극장들도 보이고, 더 많은 관객을 초대하기 위해 공연 시간을 다르게 하는 공연들도 눈에 띈다. 하지만 ‘없는 듯이 있을 수 있는 얌전하고 조용한 관객들’만을 반기는 것 같은 극장 분위기는 변함없이 도처에 있고, 공연 중 웃기에도 울기에도 눈치가 보이는 것 또한 여전하다.
구멍투성이의 엉터리 극장에 대한 유쾌한 기억1), 오늘날의 극장에서 관객의 자리는 어디인지 묻는 질문2), 해방된 관객을 발견하기 위해 필요한 감각에 대한 고민3), 거리예술을 통해 극장이 된 마을에 관한 이야기4)가 더 널리 더 열심히 공유되어야 할 이유다. 더 많이 묻고, 고민하고, 이야기하고, 나눌수록, 우리는 공연예술에 대한 공통의 애정을 확인하게 될 것이고, 서로를 경계해야 할 이유보다 반겨야 할 이유를 더 많이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다양한 사람들을 극장으로 초대하기 위한 색다른 방법에 대한 새로운 상상, 극장 방문이 더 많은 이에게 환대의 경험이기 위해 우리 각자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발랄한 상상. 우리에게는 아직 더 많은 상상이 필요하다.

[사진: 필자 제공]

  1. 이혜령, 「구멍 난 극장 - 세상의 모든 극장, 세상의 모든 관객」, 『연극in』 제254호, 2024.5.30
    https://www.sfac.or.kr/theater/WZ020500/webzine_view.do?wtIdx=13545&pageIndex=1
  2. 여름, 「여지를 생각하는 객석, 극장」, 『연극in』 제256호, 2024.6.27
    https://www.sfac.or.kr/theater/WZ020500/webzine_view.do?wtIdx=13586&pageIndex=1
  3. 장재키, 「“다른 감각들을 가진 관객들을 좀 만나려고요…”」, 『연극in』 제258호, 2024.7.25
    https://www.sfac.or.kr/theater/WZ020500/webzine_view.do?wtIdx=13626&pageIndex=1
  4. 임현진, 「시끌시끌한 관객 그리고 거리예술」, 『연극in』 제260호, 2024.8.29
    https://www.sfac.or.kr/theater/WZ020500/webzine_view.do?wtIdx=13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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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예

이지예
연극학 연구자, 연극놀이사.
연극사, 희곡 문학, 창작과 연출을 배우고 가르친다. 여러 예술 교육가들과 협업하면서 신경다양인 아동 청소년들을 위한 연극놀이를 개발하고 연극놀이 워크숍을 진행한다.
celafina@gam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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