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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작가의 사라지지 않는 빈자리

이홍도 X 丙소사이어티 <2032 엔젤스 인 아메리카>

영이

제204호

2021.07.15

너희의 유일한 의지는 네 기술의 대가가 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온갖 종류의 명기술과 능력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학문 및 예술에 있어서의 겉치레적인 것, 불순한 것, 장식적인 것, 명장인 체하는 것, 선동적인 것, 예술과 문학에서의 연극조의 것-무릇 훈련과 예비교육의 절대적 성실이라는 점에서, 너희에 대하여 자기증명을 할 수 없도록 하는 일체의 것을 가차없이 거부한다!1)
해외 기업들이 하나둘씩 자신들의 로고에서 무지개를 내리기 시작하는 7월 1일 첫 공연을 올린 <2032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서울변방연극제의 일환으로 신촌문화발전소의 무대에서 상연되었다. 한 달 전에 같은 무대에 올라간 <이홍도 자서전(나의 극작 인생)>의 스핀오프로 전작과 같이 이홍도가 쓰고 송이원이 연출을 맡았다. <2032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1991년 초연된 토니 쿠시너의 희곡 <엔젤스 인 아메리카>를 2032년에 무대에 올리는 것에 반대하는 작가 이홍도가 “전환 치료”를 받게 된다는 가상의 시나리오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공연이다.
전작에서 사용되었던 소품들을 거의 그대로 가져와 구성한 무대는 그 소품들의 배치에서 눈에 띄는 차이를 보인다. <이홍도 자서전>에서 정갈함을 일관되게 유지하던 책상, 의자, 쓰레기통 등의 소품들이 이번 무대에서는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있다. 더군다나 전작에서 배우들이 거리를 두고 드물게 사용했던 쓰레기통은 이번 작품에선 공연 시작 직후부터 배우가 그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토록 바라지만 좀처럼 다가오지 않는 ‘작가의 죽음’을 상징했던 쓰레기통이 이처럼 무참하게 사용되는 것은, 죽음 충동보다 더 깊은 구덩이 속에서 몸부림쳐보겠다는 <2032 엔젤스 인 아메리카>의 의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저번 공연에서도 무대 뒷면을 장악했던 슬라이드는 이번 공연에서도 같은 방식, 즉 배우들이 발화하고 인용하는 텍스트들을 띄워주는 용도로 사용되는데, 텍스트의 배치에서 전작과의 차이점을 갖는다. 우선 극본의 형태를 띠었던 전작의 형식과 달리 이번 슬라이드는 만화의 컷을 텍스트의 배경으로 삼는다. 4개로 갈라진 텅 빈 컷들은 흔히 사용되는 사각형의 구획들이 아니라 삐뚤빼뚤하게 아무런 규칙 없이 나뉘어 있다. 텍스트가 비추어질 때도 어떤 문단들은 비스듬히 기울어진 형태로 올라와 슬라이드의 불규칙성을 강화하기도 한다. 이 또한 자신에게 찾아올 죽음에 대한 피해망상보다도 더욱 뒤틀리고 파편화된 작가의 망상을 예견하는 장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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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행 – 40여 년의 거울 치료

<2032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국공립극장을 위한 퀴어 연극 제작 가이드』라는 텍스트를 인용하며 시작하는데, 여기서 성소수자들에게 금지된 전환 치료가 여전히 퀴어 작가에게는 필요하다는 언뜻 기이한 주장을 읽어낼 수 있다. 텍스트의 요지는 공동 창작 예술인 연극의 본질인 보편적이고 대중화된 소통을 위해 퀴어 작가들이 일반 대중을 타겟으로 만들어진 연극을 강제로 보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전환 치료의 과정은 퀴어 작가가 완전히 대중적 퀴어 연극의 사상을 내재화해 스스로 “나는 치료되었습니다”라고 선언할 때에서야 끝이 난다고 한다. 배우들이 해당 텍스트를 다 읽어 내려갈 때쯤 객석 뒤의 오퍼레이터가 배우들에게 영상 및 사운드 테스트를 위한 몇 가지 지시와 함께 “작가님”을 불러오라는 요청을 한다. 이어서 오퍼레이터와 배우들이 공연 시작 전의 심기일전을 위한 구호와 같이 “완치”를 외치는 것으로 “작가”의 전환 치료는 시작된다.
막상 배우들이 데리고 나온 작가의 정체는 쇠사슬에 감긴 채 빨랫대에 대롱대롱 매달린 의자이다. 이 의자-작가를 상대로 펼쳐지는 전환 치료는 이른바 “거울 치료”의 형식을 빌려온다. 2032년에 <엔젤스 인 아메리카>의 무대화를 반대하는 작가와 1990년대 <엔젤스 인 아메리카>를 반대했던 이들의 병행적(parallel) 측면들을 번갈아 비추는 것이다. 이를 위해 90년대의 세 반대자들, 롱, 코엔, 그리고 오배넌이 소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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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은 실제 킬고어 대학에서 벌어졌던 <엔젤스 인 아메리카> 반대 시위를 처음으로 계획한 인물로, 본래 깊은 기독교 신앙을 주제로 희곡 작품을 쓰며 성소수자와 유색인종에 대한 혐오적 표현으로 논란을 빚은 작가이다. 그는 공연에서 배우가 7초간 완전히 나체로 등장하는 것이나 보수 정권에 대한 조롱 등에 완전히 지쳐 공연장을 나오던 도중 익숙한 얼굴들과 마주치게 된다. 자신과 아는 기자, 작가, 총포상, 그리고 교회 장로가 같은 공연을 본 것이다. 롱은 피로를 이겨내고 백만장자 기업인 트럼프에게 편지를 쓴다는 내용까지 배우들이 서술하고 있을 때 오퍼레이터가 장면 전환을 요구한다. 이렇게 전환된 장면은 작가 이홍도가 교환학생으로 미국 대학에 갔을 때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작가는 대학의 성소수자 동아리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익숙한 얼굴들, 연극영화과 학생들이 많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여기서 롱과 작가의 병행은 익숙한 얼굴들을 통한 작당모의, 아마 거기서 얻은 소속감과 위안의 비열함을 자극하는 듯이 보인다.
코엔은 <엔젤스 인 아메리카>의 제작자이자 『국공립극장을 위한 퀴어 연극 제작 가이드』(이하 『가이드』)의 작가이다. 그는 환경을 위해 무대 제작에 반대하는 토니 쿠시너와 결별하게 되고, 복수를 위해 『가이드』를 작성하게 되었다. 이에 병행되는 이홍도의 행적은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지적인 시스젠더 이성애자 관객들을 위한 <엔젤스 인 아메리카>의 호모섹슈얼리티 분석』을 쓴 것이다. 앞서 서술했듯이 『가이드』는 퀴어 작가가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소통을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한편, 이홍도의 『분석』은 퀴어이지만 퀴어니스를 수행하지 않는 인물, 퀴어니스를 수행하지만 퀴어라고 선언하지 않는 인물 등 모호하고 위장된 퀴어니스들을 나열하는 데에 힘쓴다.
오배넌은 낮에는 자전거 수리공으로, 밤에는 네오나치 유튜버로 일하는 인물이다. 그는 흑인만 마주치면 통제할 수 없는 구역감을 느껴왔는데, 드라이브스루로 햄버거를 주문하던 도중 흑인 점원을 향한 구역감을 못 이겨 그 자리에서 구토하고 말아 결국 경찰에 송치된다. 오배넌은 경찰서에서도 흑인 경찰이 앞에 있을 때는 구역감에 진술서를 작성하지 못하고 백인 경찰이 와서야 진술서를 작성할 수 있었다. 그렇게 풀려난 그는 자신의 증상을 치료받고자 하지만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결국 자신의 구역감을 편안하게 나눌 수 있는 KKK단에 들어가게 된다. 오배넌의 이야기와 병행되는 것은 『감염병 바이블 한 권으로 끝내기: HIV/AIDS에서 COVID-19까지』라는 텍스트이다. 오배넌은 자신의 이야기를 서술하며 유튜버로 활동하며 히틀러 만세를 외치지만 그것은 일이 끝나고 나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취미일 뿐, 그것이 자신이 네오나치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밝히며, 흑인을 향한 자신의 구역감 또한 그들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생리적 증상이라고 주장한다. 『감염병 바이블』은 팬데믹 시기에 이태원에서 강남 일대를 중심으로 벌어진 퀴어 공간을 향한 전면적인 공격을 일컬어 일이 끝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취미이며 위생과 안전을 위한 행위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특이하게도 오배넌의 이야기 뒤에 따라오는 병행은 앞과 다르게 작가 자신의 이야기나 서술이 아닌데, 이는 오배넌의 이야기가 이 작품의 결말, 나아가 전체 정서 그 자체와 병행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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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역질 - 견딜 수 없는 퀴어, 사라지지 않는 작가

10개의 챕터가 끝나고 나서야 “작가”가 등장한다. 작가는 그전까지 쇠사슬에 묶인 빈 의자로만 등장하다가 마침내 이 연극의 작가 이홍도 본인이 무대 위에 등장한다. 그는 『가이드』를 다시 읽어 내려가며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텍스트의 뒷부분을 밝히는데, 결국 이 전환 치료는 작가의 외부에서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내부,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이 그 내용이다. 그리고 이 에필로그에서 아직도 쇠사슬에 감긴 의자에 앉아 더 많은 쇠사슬 위에 발을 올린 작가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은 막을 수가 없으며 무엇보다 오배넌과 마찬가지로 자신은 아직도 “덜 치료되었다”고 쓴다. 누구보다 대중을 향한 퀴어니스의 소통의 요구를 내재화한 이는 작가 본인이었으며 그럼에도 그것을 향한 혐오감을 작가는 아직까지도 느끼고 있는 것이다.
<2032 엔젤스 인 아메리카>를 지배하는 정서는 오배넌이 느꼈던 바로 그 구역감(disgust)이라고 할 수 있다. 구역감은 그것의 대상을 견딜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한다. 구역감을 느끼는 이는 자신에게 구역감을 느끼게 하는 대상을 게워내고자 하고, 그 대상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을 시 오배넌이 말한 것처럼 자기 자신조차 게워낼 지경으로 이끌게 하는 감정이다. 이 강력하고 부정적인 감정은 작가 자신의 머리 위에도 드리워져 있다. 작가는 자신에게 요구되는, 혹은 자신이 요구하는 퀴어니스를 향한 구역감을 견딜 수도 치료할 수도 없다. 그 구역질 나는 퀴어니스는 이홍도에게 <엔젤스 인 아메리카>와 그것의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지적인 시스젠더 이성애자 관객들을 위한 호모섹슈얼리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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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정서는 전작과 이번작을 나누는 가장 큰 차이이다. <이홍도 자서전>에서 작가는 선배 작가들을 죽이고 그들의 극작 기술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가 불러낸 작가 중 죽이지 못한 단 한 명의 작가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토니 쿠시너이다. <2032 엔젤스 인 아메리카>에서 밝혀진 것은 이홍도가 토니 쿠시너를 죽이고 그의 극작 기술을 흡수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의 퀴어니스를 너무나 구역질 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도저히 그것을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작가가 이토록 “대중적 퀴어니스”를 혐오하는 건 결국 그가 “작가”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가이드』에서 “퀴어”라는 단어를 전부 삭제한다고 해도, 해당 텍스트는 여전히 그대로 작동할 것이다. 단연 퀴어 작가에게뿐 아니라 작가라는 존재에게는 본질적으로 그 자신을 삭제하고 “보편적이고 일반적일 것”이라는 요구가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다만 퀴어 작가에게는 작가라는 자기 자신을 얄팍하게 덮고 있는 퀴어라는 정체성이 그 요구와 먼저 교섭하기 때문에, 구역질 나는 요구와 함께 자신의 방패이자 배반자인 그 퀴어니스를 역겨워하는 모순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도 퀴어라는 단어를 그 어떤 소수자성이나 정체성으로 치환해도 무방하다. 작가에게 자신이 작가라는 것보다 우선하는 정체성은 없기 때문이다. 공연에서 작가가 빈 의자로 나타나는 것 또한, 우리 의식과 언어가 그것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무의식처럼, 작가에게 작가는 사라지지 않는 빈자리, 실재(real)임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가령 천재일지라도 이러한 결함을 속이는 것은 가능해도 뚫고 헤쳐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우리 가장 재능 있는 화가나 음악가들을 가까이서 바라본다면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거의 예외 없이 기교나 일시적 방편의 고안품들, 사건 후에 어떤 성실이나 훈련, 교육의 견실함에 대한 인공적 유사함을 줄 원칙들의 교묘한 발명을 만들어 내고 사용하는 방법을 체득하고 있다-물론 자기 자신을 계속 속이거나, 그 양심을 언제까지 침묵시킬 수는 없다. 어쨌든 너희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근대의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이 양심의 가책때문에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을2)

[서울변방연극제 ⓒ 한민주]

이홍도 X 丙소사이어티 <2032 엔젤스 인 아메리카>
일자
2021.7.1.(목) - 2021.7.2.(금)

장소
신촌문화발전소

출연
권형준 김정화 박종현
이홍도
연출
송이원
무대
김재란
조명
서가영
음향
목소
영상
손영규
조연출
오휘민
기획
이선민
관련정보
https://www.playticket.co.kr/nav/detail.html?idx=1446
  1. 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지식』, 권영숙 옮김, 1987, 336~337쪽.
  2. 위의 책, 3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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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이

영이
폭력과 고통, 그리고 분열의 상관 관계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쓴다. 『정서 지도 그리기』, 『밑 빠진 독(毒)에 물 붓기』, 『월간 종이』 등 제작. 제2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 수상.
https://twitter.com/monthly_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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