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어와 음성언어가 다채롭게 공존하는 무대
핸드스피크 <사라지는 사람들>
문영민
제179호
2020.05.14
지금 세계 어느 곳보다 코로나19로 고투 중인 뉴욕에, 재작년 장애예술 연구 현지답사를 다녀왔다. 때마침 미국 농인(聾人) 예술가들의 오픈 스테이지인 ASL slam의 공연이 있어 관람할 기회가 있었다. ASL slam은 미국 수어(American Sign Language, ASL)로 시, 힙합, 댄스 등의 공연을 즉흥적으로 풀어내는 행사를 매달 미국 각지에서 개최하는 공연 플랫폼이다. 공연 시간을 약간 지나 입장하니 무대에서는 사회자가 ASL로 공연을 소개하는 듯 했고, 수어를 모르는 사람을 위해 음성통역이 함께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공연이 진행되는 카페 구석에 ASL도, 영어도 거의 하지 못하는 이중언어 소외자로 앉아있었다.
공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니 사람들이 손을 들고 즉흥적으로 무대에 나와 강렬한 동작으로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정확히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이를테면, 농인으로 받은 차별에 대한 분노, 무대에서 뜻밖에 이상형을 만난 퍼포머의 설렘 등을 경계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 자리 근처에는 ASL을 쓰는 발달장애인이 앉아있었는데, 그는 나에게 이름을 물어보았다. 내가 유일하게 아는 ASL은 ‘이름’이라는 단어와 알파벳 지화이므로, 나는 기쁘게 내 이름을 알려주고, 그와 주먹을 맞대는 인사를 하고, 제법 ‘인싸’가 된 기분으로 공연장을 나올 수 있었다.
공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니 사람들이 손을 들고 즉흥적으로 무대에 나와 강렬한 동작으로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정확히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이를테면, 농인으로 받은 차별에 대한 분노, 무대에서 뜻밖에 이상형을 만난 퍼포머의 설렘 등을 경계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 자리 근처에는 ASL을 쓰는 발달장애인이 앉아있었는데, 그는 나에게 이름을 물어보았다. 내가 유일하게 아는 ASL은 ‘이름’이라는 단어와 알파벳 지화이므로, 나는 기쁘게 내 이름을 알려주고, 그와 주먹을 맞대는 인사를 하고, 제법 ‘인싸’가 된 기분으로 공연장을 나올 수 있었다.
무관중 온라인 공연으로 지난 달 28일 네이버TV에서 생중계된 핸드스피크의 수어공연 <사라지는 사람들>을 관람했다. 공연은 두 개의 장으로, 1장은 ‘묶은 머리 나라’와 ‘풀은 머리 나라’의 갈등을 그린 “주인 없음”, 2장은 적군을 피해 도망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달빛 도망”으로 구성된다. 두 이야기 모두 화해할 수 없는 집단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묶은 머리 나라와 풀은 머리 나라의 왕자와 공주는 사랑에 빠지고, 적군을 피해 도망치는 와중에도 다리를 다친 소녀를 배려하는 사내가 등장한다. 아슬아슬하게 화해를 이룰법한 상황은 길게 이어지지 않고 두 이야기는 죽음과 배신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이 공연에서 수어와 음성언어를 배치하는 방식은 더할 나위 없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비극적인 내러티브와 대비된다. 공연에는 농인 배우 7명과 청인(聽人,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 배우 5명이 함께 등장한다. 모든 대사들은 수어와 음성언어로 함께 이야기된다. 농인 배우가 수어로 대사를 할 때 청인 배우는 이를 음성언어로 해설하고, 청인 배우의 음성언어는 수어로 통역된다. 청인 배우 두 명이 음성언어로 합을 맞추는 장면 뒤로 농인 배우 두 명이 마치 그림자처럼, 같은 장면을 수어로 연기한다. 그러나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통역’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한국수어와 한국어는 체계가 다르기에 1:1로 통역되는 것도 불가능하다. 두 언어는 무대에 나란히 존재하고 있었다. 내가 한국수어에도 익숙한 바이링구어(Bilingual : 다중언어사용자)라면 공연을 몇 배는 더 다채롭게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공연에서 수어와 음성언어를 배치하는 방식은 더할 나위 없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비극적인 내러티브와 대비된다. 공연에는 농인 배우 7명과 청인(聽人,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 배우 5명이 함께 등장한다. 모든 대사들은 수어와 음성언어로 함께 이야기된다. 농인 배우가 수어로 대사를 할 때 청인 배우는 이를 음성언어로 해설하고, 청인 배우의 음성언어는 수어로 통역된다. 청인 배우 두 명이 음성언어로 합을 맞추는 장면 뒤로 농인 배우 두 명이 마치 그림자처럼, 같은 장면을 수어로 연기한다. 그러나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통역’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한국수어와 한국어는 체계가 다르기에 1:1로 통역되는 것도 불가능하다. 두 언어는 무대에 나란히 존재하고 있었다. 내가 한국수어에도 익숙한 바이링구어(Bilingual : 다중언어사용자)라면 공연을 몇 배는 더 다채롭게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생중계 당시 스피커를 틀어놓고 공연을 관람했고, 공연영상이 무료 스트리밍 된 후 두 번째 관람에서는 스피커를 끄고 무음으로 관람했다. 그 공간의 모든 언어에서 소외되어 있었지만 강렬하고 따뜻한 경험으로 남은 ASL slam의 기억을 또 한 번 재현할 수 있을까 싶어서다. 물론 두 번째 관극이니 그렇겠지만, 수어나 동작으로만 구성된 장면들이 더 눈에 들어온다. 예컨대 1장에서 두 나라의 공주와 왕자가 사랑에 빠지는 씬이다. 어떤 통역과 해설도 없이 서로가 몸짓을 거울처럼 모방하며 둘은 사랑에 빠진다. 서로가 가까워지는 과정은 실상은 서로의 언어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다. 두 나라의 반목은 사실 머리를 묶는지 푸는지와 아무 상관도 없으며, 서로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려는 노력을 등한시한 결과가 아닐까.
소리에 집중하지 않으니 오브제의 사용도 눈에 띈다. “주인 없음”에서는 부채를, “달빛 도망”에서는 우산을 주요한 오브제로 사용했다. 부채가 새가 되어 모두가 죽고 종국에 주인이 없어진 땅을 떠도는 1장의 엔딩이 아름다운 미장센을 만든다. 2장에서 우산이 총으로 사용되다가, 주위를 녹이는 따뜻한 횃불이 되었다가, 도망자들을 괴롭히는 장애물이 되는 전환도 기억에 남는다. 다만 공연에서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라면 그러한 오브제의 배치가 너무나 균형있고 선명하게 기획된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정확한 균형을 가지고 무대 위에 존재하는 두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수어와 음성언어가 무대 위에서 갖는 매력은 서로 다른 ‘언어’로 무대 위에 존재하는 것 그 이상일 것이다. 그러나 극장 문을 열고 나오면 사회에서 수어와 음성언어가 갖는 위상은 너무나 다르다. 거의 모든 사회적 공간에서 수어통역을 찾을 수가 없고, 심지어 헌법이 보장하는 선거권을 행사하려 해도 힘겹게 수어통역을 요청해야 한다. 두 언어가 갖는 위상이 현저하게 다른 현실에서 고개를 돌려 무대 위에서 두 언어의 공존을 그린 <사라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 공연이 사회에 주는 메시지는 매우 분명해 보인다. 공연은 끝끝내 공존하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사람들을 그린다. 사회에서 수화-한국어의 갈등 없는 공존은 언제쯤 가능할 것인가.
소리에 집중하지 않으니 오브제의 사용도 눈에 띈다. “주인 없음”에서는 부채를, “달빛 도망”에서는 우산을 주요한 오브제로 사용했다. 부채가 새가 되어 모두가 죽고 종국에 주인이 없어진 땅을 떠도는 1장의 엔딩이 아름다운 미장센을 만든다. 2장에서 우산이 총으로 사용되다가, 주위를 녹이는 따뜻한 횃불이 되었다가, 도망자들을 괴롭히는 장애물이 되는 전환도 기억에 남는다. 다만 공연에서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라면 그러한 오브제의 배치가 너무나 균형있고 선명하게 기획된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정확한 균형을 가지고 무대 위에 존재하는 두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수어와 음성언어가 무대 위에서 갖는 매력은 서로 다른 ‘언어’로 무대 위에 존재하는 것 그 이상일 것이다. 그러나 극장 문을 열고 나오면 사회에서 수어와 음성언어가 갖는 위상은 너무나 다르다. 거의 모든 사회적 공간에서 수어통역을 찾을 수가 없고, 심지어 헌법이 보장하는 선거권을 행사하려 해도 힘겹게 수어통역을 요청해야 한다. 두 언어가 갖는 위상이 현저하게 다른 현실에서 고개를 돌려 무대 위에서 두 언어의 공존을 그린 <사라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 공연이 사회에 주는 메시지는 매우 분명해 보인다. 공연은 끝끝내 공존하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사람들을 그린다. 사회에서 수화-한국어의 갈등 없는 공존은 언제쯤 가능할 것인가.
국내에서 진행된 몇 안 되는 수어연극으로, 실제 무대에서 더 많은 관객을 만나지 못한 것이 아쉽다. 뮤지컬 공연을 즐겨보는 농인 친구는 수어통역이 없는 뮤지컬 공연을 볼 때에도 높은 가격대의 맨 앞 줄 좌석을 예매한다. 앞 줄 좌석에 앉았을 때 배우들의 입모양을 보기 쉽다는 이유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앞줄에 앉을 때 느낄 수 있는 감각이 훨씬 풍부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공연의 냄새, 공연음악과 무대 위 움직임이 만드는 진동과 열기가 모두 공연을 즐기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면서, 왜 뮤지컬을 즐기는 감각이 청각과 시각에서만 온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했다.
<사라지는 사람들>에서도 실제 무대의 공연을 관람했다면 훨씬 더 다채롭게 공연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아 아쉬운 포인트들이 많았다. 1장의 전쟁이 시작되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한 배우가 장엄하게 북을 두드린다. 아마도 이 장면에서 북소리를 사용한 것은 농인 배우들의 움직임의 합을 맞추려는 기능적인 이유도 있지 않을까 지레 짐작해보지만, 배경음악없이 이 장면의 북소리 진동만을 느껴도 이 장면이 주는 엄숙함을 온 몸으로 감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2장에서 우산이 장애물이 되어 펄럭이는 움직임 속에서 사람들이 도망칠 때 그 진동이나 공기의 흐름을 객석에서 직접 느꼈더라면 그 긴박감이 배가 되지 않았을까.
<사라지는 사람들>에서도 실제 무대의 공연을 관람했다면 훨씬 더 다채롭게 공연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아 아쉬운 포인트들이 많았다. 1장의 전쟁이 시작되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한 배우가 장엄하게 북을 두드린다. 아마도 이 장면에서 북소리를 사용한 것은 농인 배우들의 움직임의 합을 맞추려는 기능적인 이유도 있지 않을까 지레 짐작해보지만, 배경음악없이 이 장면의 북소리 진동만을 느껴도 이 장면이 주는 엄숙함을 온 몸으로 감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2장에서 우산이 장애물이 되어 펄럭이는 움직임 속에서 사람들이 도망칠 때 그 진동이나 공기의 흐름을 객석에서 직접 느꼈더라면 그 긴박감이 배가 되지 않았을까.
코로나19로 불가피하게 온라인 공연들을 관람하며 ‘이 공연을 직접 관람했다면’하는 아쉬움이 늘 크지만, <사라지는 사람들>의 공연은 더욱 그렇다. 특히 이 공연 관객의 상당수가, 대학로에서 상연되는 대부분의 비-수어 공연에서 배제되어온 농인 관객일 것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코로나19가 무사히 지나간 후 핸드스피크의 공연을 꼭 실제 무대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그 때까지 한국어-한국수어의 바이링구어가 되기는 아무래도 힘들겠지만, 더 많은 수어단어를 읽을 수 있게 연습해둘 것이다!
[사진 제공: 핸드스피크]
사라지는 사람들
- 일자
- 2020.04.28.(화) 오후3시
- 장소
-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무관중 네이버TV 생중계)
- 극본/연출
- 박경식
- 무대
- 김한신
- 조명
- 김대희
- 음악
- 김방선
- 의상
- 황수지
- 작곡
- 박기철, 김규수
- 분장
- 박수진
- 조연출
- 신익훈, 최상현
- 출연
- 강다형, 강우람, 강지수, 김승수, 김우경, 김지연, 박지영, 오서진, 이혜진, 장영주, 정승민, 조현철
- 기획/제작
- 핸드스피크
- 후원
- 세종문화회관
- 협력
- 공연창작소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