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리뷰]너도 나도 살아서 증명하자
두산아트센터 <인정투쟁; 예술가편>
임승태
제172호
2019.11.21
가수 윤복희의 노래 ‘여러분’이 흐르는 동안 일곱 배우가 무대를 지나간다. 나는 다른 관객들과 더불어 그 광경을 지켜본다. 이 장면이 시작할 때 영사된 피터 브룩의 말 - “어떤 사람이 지나가고 다른 사람이 그것을 바라본다면 그것으로 연극이 시작되기에 충분하다.” - 처럼 그 광경은 연극이 시작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다. 이 장면 이름이 ‘커튼콜’인 이유는 그 광경이 연극의 시작으로 충분하다면 거기서 끝나도 좋다는 믿음이었던 걸까. 그 누구보다 개성적인 모습의 배우들이 무대를 가로지르는 광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함이 있었다. 하지만 이 연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고, 그 이후의 이야기는 내가 그저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이 작품에서 매우 중요하게 언급하는 바로 그 ‘예술인패스’를 가지고 있고 그날도 이 패스를 이용해 공연을 할인받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리뷰하는 내 마음은 조금 복잡하다. 비록 나는 평론으로 예술 활동을 인정받아 예술인패스를 얻은 것은 아니지만, 평론 또한 예술인복지재단에서 인정하는 예술 활동이다. 다시 말해 평론가는 <인정투쟁; 예술가편>의 바깥에 있지 않으며, 당사자로서 ‘나/너/그’일 수 있다. 이 점에서 나는 이 작품을 분석하기보다 ‘평론가의 인정투쟁’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느낀다.
먼저 나는 평론가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스스로 평론가라고 말하고 다니지는 않지만, 남들이 그렇게 부르는 걸 사양하지는 않는다. 예술인복지재단의 예술활동증명 기준에는 최근 3년간 “3편 이상의 연극 비평을 관련 잡지 등을 통해 발표하였거나 1권 이상의 연극 비평집 출간”을 한 경우라 정하고 있다. 지난 3년간 웹진 연극in 외에도 세 군데 이상 종이 잡지에 기고했으니 나를 평론하는 예술인으로 불러도 될 것 같다. 하지만 얼마 전 알게 된 바로는 아직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이른바 평협의 회원이 될 자격은 갖추지 못했다. 국가가 공인하는 평론가의 자격은 갖추었으나 국내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협회의 인정을 받지는 못한 나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B급, 혹은 하류 평론가 정도로 해두자. 마치 예술인패스를 발급받은 공인 배우(3년간 3개 작품 이상 출연)라도 국립극단 시즌 단원에 응시하려면 더 많은 경력(5년간 5개 작품 이상 출연)이 필요하듯.
먼저 나는 평론가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스스로 평론가라고 말하고 다니지는 않지만, 남들이 그렇게 부르는 걸 사양하지는 않는다. 예술인복지재단의 예술활동증명 기준에는 최근 3년간 “3편 이상의 연극 비평을 관련 잡지 등을 통해 발표하였거나 1권 이상의 연극 비평집 출간”을 한 경우라 정하고 있다. 지난 3년간 웹진 연극in 외에도 세 군데 이상 종이 잡지에 기고했으니 나를 평론하는 예술인으로 불러도 될 것 같다. 하지만 얼마 전 알게 된 바로는 아직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이른바 평협의 회원이 될 자격은 갖추지 못했다. 국가가 공인하는 평론가의 자격은 갖추었으나 국내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협회의 인정을 받지는 못한 나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B급, 혹은 하류 평론가 정도로 해두자. 마치 예술인패스를 발급받은 공인 배우(3년간 3개 작품 이상 출연)라도 국립극단 시즌 단원에 응시하려면 더 많은 경력(5년간 5개 작품 이상 출연)이 필요하듯.
평론은 예술가의 인정투쟁 결과물을 기술/해석/평가하는 것을 통해 평론가 자신이 인정받고자 한다는 점에서 메타 투쟁이다. 내 경우엔 평가란 말의 의미를 작품의 가치를 감정한다기보다는 작품이 어떤 가치를 담지하고 있는지 찾아내는 것으로 이해하려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내 글을 동일한 잣대로 봐줄 거라는 믿음이 아직 굳건하지는 못하다. 특히나 인터넷으로 발행하는 글에서는 조회 수나, 공유 횟수, 또는 ‘좋아요’ 숫자를 통해 매번, 그리고 지속해서 평가받는 기분이 든다. 조회 수가 많지만 좋아요가 없으면 ‘제목만 그럴싸했구나’로, 조회 수마저 적으면 ‘제목마저 부실했구나’로 들린다. 댓글은 선플이든 악플이든 관심의 표현으로 여길 마음의 준비를 오래전부터 해왔지만 실천할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아주 가끔 내 글을 잘 읽었다는 사람을 만날 땐 그것이 그냥 인사치레로 하는 말인지 진심을 담은 말인지 재빨리 판단해야 한다. 인사치레로 하는 말에 ‘어떤 글을 말씀하시냐’라든지 ‘어떤 부분이 좋았냐’라고 묻는다면 내 애독자는 되지 못할지언정 나의 친구 혹은 업무상 파트너가 될 수 있는 사람마저 잃을 수 있다.
객석 후미진 곳에 조용히 앉아서 잘 웃지도 않고 우는 일은 더더욱 없이 심각하게 무대를 쳐다보다가 어느샌가 극장을 빠져나간 사람이라면 평론가일 확률이 높다. 외로운 늑대를 자처하는 평론가들은 대부분 사회성이 부족해서이기보다는 엄정하고 공정한 판단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자신을 고립시키는 사람들이다. 작품에 정직하게 반응하는 것이 평론가의 의무이기에 연출이나 배우를 만나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하고 싶지도 않다. 그렇다고 남의 영업장에서 싫은 소리를 하고 싶지도 않기에 공연이 끝나고 관계자들과의 접촉을 꺼리게 된다.
객석 후미진 곳에 조용히 앉아서 잘 웃지도 않고 우는 일은 더더욱 없이 심각하게 무대를 쳐다보다가 어느샌가 극장을 빠져나간 사람이라면 평론가일 확률이 높다. 외로운 늑대를 자처하는 평론가들은 대부분 사회성이 부족해서이기보다는 엄정하고 공정한 판단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자신을 고립시키는 사람들이다. 작품에 정직하게 반응하는 것이 평론가의 의무이기에 연출이나 배우를 만나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하고 싶지도 않다. 그렇다고 남의 영업장에서 싫은 소리를 하고 싶지도 않기에 공연이 끝나고 관계자들과의 접촉을 꺼리게 된다.
요즘 나는 칭찬할 거리를 찾으려고 애쓴다. 그 내용을 그대로 글로 옮기는 일은 드물지만, 현장에서 만난 작품 관계자에게는 좋았던 점을 최대한 전하려고 노력한다. 공연에서 좋았던 점을 기억하는 것은 나에게도 좋은 일이다. 그 시간을 행복하게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할 말이 없을 땐 내가 이해력이 부족해서, 혹은 내 준비가 부족해서라고 여기려 한다. 하지만 좋은 말을 해도 상대방이 마냥 기뻐하지만은 않는다. 뭔가 싫은 소리를 숨기고 입에 발린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평론하는 사람은 까칠한 소리나 하는 쪽이 자연스럽다는 기대-혹은 무(無)기대-가 이미 형성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작품을 보는 동안, 혹은 보고 난 직후에는 마치 내가 판사라도 된 듯 작품에 대해 이런저런 판단을 내려보기도 한다. 이건 괜찮아, 저건 아니야. 하지만 그런 인상들을 문장으로 굳혀가면서 그리고 그러한 인상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를 되물어가는 과정을 거치다 보면 결국은 많은 것이 내 문제였음을 깨닫게 된다. 실은 내가 지루했고 내가 어렵게 느껴놓고선 괜히 관객 핑계를 댄다. 한때 평론가가 관객의 대표로 발언하던 시절엔 이 방법도 통할 수 있었다. 공연에 대한 관객 반응이 수집되지 않던 시절에는 신문에 발표되는 극평이 관객을 대변하고 이끄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도 완전히 다르다. 많은 관객이 공연이 끝나면 자신의 호불호를 자기 블로그나, SNS, 이제는 유튜브에까지 매우 분명하고 상세히 남긴다. 전문가들, 평론가들의 반응이 그들에게 참고가 될 순 있어도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 현상은 특히나 한 줄 평에서 두드러진다. 전문가들의 한 줄 평에 대한 일반 관객, 혹은 네티즌의 댓글에는 소위 전문가들의 식견에 의문을 표하고 조롱하는 일이 적지 않다.
평가자가 더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착각은 그가 내린 평가가 발표될 때 평가자에 대한 평가가 시작된다는 걸 망각할 때만 가능하다. 어떠한 평가든 평가자가 어떤 가치 판단을 하는 사람인지를 드러낸다. 작품을 통해 나를 알아가는 건 귀한 일이다. 하지만 그래서 이 작업이 의외로 감정 소모가 많다는 것을 최근 부쩍 느낀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즐거운 마음으로 평론하는 방법을 찾아본다. 물론 글을 발표하는 이상 독자의 일반적인 평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창작자들이 내 글을 보면서 내리는 평가와 관련해서는 다른 길을 찾고 싶었다. 적어도 내 쪽에서 먼저 시험 채점하듯 평가하지 않는 것, 공연의 완성도나 스타일 등에 대해서 나의 호불호를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는 것, 내가 좋아하는 방식이 아니라고 해도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 그들이 펼쳐놓은 판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 등등이 내가 바라는 평론의 방향이다.
그래도 여전히 평론은 불안한 작업이다. 더 교묘한 인정투쟁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그네의 웃옷을 벗기는 내기든, 인정투쟁하는 예술가들과 대화하는 일에 있어서든 차가운 바람보다는 따뜻한 햇볕이 더 효과적이라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작품을 보는 동안, 혹은 보고 난 직후에는 마치 내가 판사라도 된 듯 작품에 대해 이런저런 판단을 내려보기도 한다. 이건 괜찮아, 저건 아니야. 하지만 그런 인상들을 문장으로 굳혀가면서 그리고 그러한 인상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를 되물어가는 과정을 거치다 보면 결국은 많은 것이 내 문제였음을 깨닫게 된다. 실은 내가 지루했고 내가 어렵게 느껴놓고선 괜히 관객 핑계를 댄다. 한때 평론가가 관객의 대표로 발언하던 시절엔 이 방법도 통할 수 있었다. 공연에 대한 관객 반응이 수집되지 않던 시절에는 신문에 발표되는 극평이 관객을 대변하고 이끄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도 완전히 다르다. 많은 관객이 공연이 끝나면 자신의 호불호를 자기 블로그나, SNS, 이제는 유튜브에까지 매우 분명하고 상세히 남긴다. 전문가들, 평론가들의 반응이 그들에게 참고가 될 순 있어도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 현상은 특히나 한 줄 평에서 두드러진다. 전문가들의 한 줄 평에 대한 일반 관객, 혹은 네티즌의 댓글에는 소위 전문가들의 식견에 의문을 표하고 조롱하는 일이 적지 않다.
평가자가 더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착각은 그가 내린 평가가 발표될 때 평가자에 대한 평가가 시작된다는 걸 망각할 때만 가능하다. 어떠한 평가든 평가자가 어떤 가치 판단을 하는 사람인지를 드러낸다. 작품을 통해 나를 알아가는 건 귀한 일이다. 하지만 그래서 이 작업이 의외로 감정 소모가 많다는 것을 최근 부쩍 느낀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즐거운 마음으로 평론하는 방법을 찾아본다. 물론 글을 발표하는 이상 독자의 일반적인 평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창작자들이 내 글을 보면서 내리는 평가와 관련해서는 다른 길을 찾고 싶었다. 적어도 내 쪽에서 먼저 시험 채점하듯 평가하지 않는 것, 공연의 완성도나 스타일 등에 대해서 나의 호불호를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는 것, 내가 좋아하는 방식이 아니라고 해도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 그들이 펼쳐놓은 판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 등등이 내가 바라는 평론의 방향이다.
그래도 여전히 평론은 불안한 작업이다. 더 교묘한 인정투쟁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그네의 웃옷을 벗기는 내기든, 인정투쟁하는 예술가들과 대화하는 일에 있어서든 차가운 바람보다는 따뜻한 햇볕이 더 효과적이라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공연의 연장선에서 쓴 글이지만 너무 내 얘기만 한 것 같다. 공연이 그러했듯 마무리는 다시 ‘무대’로 돌아가자. 배우로 인정받는 일이 어렵고 때로는 모순의 연속이기도 하지만, 무대 밖 세상에 무관심한 채 자기 성공에 몰두하다간 결국 설 자리를 잃게 될 거라는 공연의 전망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여기에 평론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평론은 작품과 세상을 연결해주는 다리로 존재해야 한다. 평론이 작품이든 세상이든 그 어느 쪽과 눈높이를 맞추지 못하는 한 누구도 그 다리를 굳이 지나가지 않을 것이다.
인정투쟁
- 일자
- 2019.10.29(화) ~ 11.16(토)
- 장소
-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 작/연출
- 이연주
- 드라마터그
- 김슬기
- 출연
- 강보람, 강희철, 김원영, 김지수, 백우람, 어선미, 하지성
- 조연출/음향오퍼레이터
- 강예슬
- 무대디자인
- 남경식
- 조명디자인
- 신동선
- 조명오퍼레이터
- 유승열
- 조명크루
- 홍유진, 정하영, 서승희, 정주연, 유승열, 오미남
- 음향/영상디자인
- 목소
- 의상디자인
- 김우성
- 분장디자인
- 장경숙
- 분장진행
- 남혜연
- 움직임지도
- 김명신
- 움직임워크숍
- 노경애, 김명신
- 보이스 코치/목소리 출연
- 최정선
- 동시자막
- 이현주
- 음성해설제작
- 사운드플렉스스튜디오
- 음성해설
- 최희진(연극배우)
- 무대감독
- 이보한
- 무대조감독
- 전희도
- 무대제작
- J-COM(대표 전혁)
- 무대크루
- 이윤중, 김세진, 정우근, 김범준
- 그래픽디자인
- 박연주
- 사진기록
- 정희승(포스터, 프로필), 김용민(연습), 서울사진관(공연)
- 영상기록
- 헤즈 스튜디오(연습), 미니멀랩(공연)
- 인쇄
- 으뜸프로세스
- 제작협력
- 극단 애인
- 기획제작
- 두산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