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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리뷰]몸으로 지은, 도려낸 문장들

공연창작집단 뛰다 <휴먼 푸가>

천우연

제171호

2019.11.07

전라도에서 태어나고 성장했지만, 광주를 바로 본 것은, 스물다섯 살 때였다. 혼자 찾은 광주도청 앞은 공사로 한창이었다. 귀가 닳도록 들었던 ‘민주화 운동’ 이야기를 거대한 공사장 가림막 앞에 서서 마주했다. 반복되는 굉음들이 가림막 너머 1980년 광주의 모습을 상기 시켰다. 뜨거운 소리는 진동이 되어 발바닥을 뚫고 올라왔다. 상무대 이전 부지, 5·18기념공원에 섰다. 이곳에 오기까지 왜 이리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자책했다. 스물다섯, 내가 만난 광주는 ‘미안함’ 그 자체였다.
올해 초, 극단 뛰다가 5·18 민주화 운동을 다룬 소설가 한강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를 원작으로 공연 <휴먼 푸가>를 준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구상부터 줄곧 연습했던 화천에서 두 번의 프리뷰 공연을 진행한다는 반가운 알림도 보내왔다. 12년 전 ‘미안함’의 광주가 떠올랐다. 화천에 직접 가서 보아야만 했다. 수개월 동안 배우들이 뱉고, 지르고, 쓰러지고, 또 일어나 부딪히며 쏟아낸 광주의 아픔들이 켜켜이 쌓인 화천 연습실이 공연의 일부라 생각해서다. 온몸과 마음으로 시대를 기억하는 창작자들 곁에서 기억해야 할 광주를 다시 진하게 품어야만 했다.
가을답지 않던 유난히 추운 10월 끝자락, 화천에 왔다. 공연을 위해 설치된 조형물이 입구에서 손님을 맞는다. 폐교 내부에는 워크숍 연습 일지들, 작업 과정 방문한 광주국군병원 내부를 촬영한 설치 영상물, 작가 한강의 책들, 5·18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공연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마음이 뻐근해진다.
연습일지(좌), 국군병원 영상물 설치(우)(사진: 천우연)
벽인지 바닥인지 경계 없는 무대를 가운데 두고 관객들이 양쪽으로 앉았다. 곧 배우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손동작, 표정, 무대 위의 물체들을 따라 관객들의 시선도 바빠졌다. 배우들은 한강의 소설 텍스트를 소리로, 광주의 참상을 제각각의 몸으로 표현했다. 소리와 움직임, 아픔의 모양이 반복된다. 비슷해 보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커지다가 작아지기도 하고, 결국 완전히 변하기도 했다. 극의 흐름은 둘 이상의 가락이 독립적으로 얽혀 변주되고 교차하는 푸가(fuga)의 음악 구조와 닮았다.
극 속의 동호는 민주화 운동을 함께했던 친구 정대를 잃었다. 상무관에서 일하던 은숙은 불순한 희곡집을 내는데 도왔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일곱 대의 따귀를 맞았다. 상무관에서 동호와 함께 일한 진수는 총기를 소지했다는 이유로 심한 고문을 받았고, 기억을 꺼내는 인터뷰에 선주는 두려워 응하지 못했다. 그 시절 아들, 딸을 찾아 헤매는 수많은 어머니들은 광주 거리를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다. 광주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껍데기뿐인 삶이었다. 이들이 경험한 참상의 모양은 모두 다르나 괴로움의 수치는 비교 할 수 없으리라.
극은 점점 더 깊게 관객들을 끌어당겼다. 긴 설치미술처럼 느껴져서 그랬을까. 어느 순간 무대 위 배우조차도 물체처럼 다가왔다. 소설의 글자들은 참상의 비극을 달고 배우들의 온몸을 관통했다가 무대 여기저기를 쑤셔댔다. 피아노 건반 위에 앉자 음률은 뜯기고 반복되어 고통의 소리를 냈다. 숨이 붙은 얼굴을 덮고 있던 하얀 무명천, 도려낸 문장이 더 많은 희곡집, 와르르 무너지는 유리병, 박제될 수 없는 소리를 담은 테이프, 털어도 털어도 털리지 않는 무거운 가루, 나뒹구는 모든 물체들 위에 광주의 아픔이 앉았다. 2시간의 공연이 고통으로 가득 채워진 채 끝이 났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5월 광주의 잔혹한 학살을 정면으로 마주봤다. 죽은 이, 남겨진 이, 소리친 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이, 목격한 이, 가해한 이, 처음부터 어느 누구, 무엇 하나 좋을 것 없는 아픔만 남겼던 처참했던 시간. 1980년의 광주와 2019년의 <휴먼 푸가>는 애처로움 덩어리다. 그래서 극을 보는 내내 답답하고 아팠다.
“분수대에서 물이 나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벌써 분수대에서 물이 나옵니까, 무슨 축제라고 물이 나옵니까”
허공을 향해 소리치던 배우의 목소리가 귓가에 선하다. 돌아오는 길, 미처 자세히 보지 못했던 공연 포스터에 그려진 도청 앞 분수대 사진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뿜어지는 눈물 제 눈으로 꾸역꾸역 다시 받아 삼키고 아픈 역사 잊지 말라 통곡하는 억울함이 시린 시퍼런 눈동자처럼 보이는 것은 왜일까.
기억하고 기록해야 할 이 무거운 일을 공연창작집단 뛰다는 담담하게 온몸으로 받아썼다. <휴먼 푸가>는 붙잡지 않으면 그저 흘러가 버리는 잔혹한 학살을 이 시대, 우리는 어떻게 마주하고 기억해야 할지 묻는다. 고맙다. 봄이 오기 전, 다시 광주를 찾아야겠다.

[사진제공: 공연창작집단 뛰다ⓒ이승희]

휴먼 푸가
화천/ 
일자
2019.10.26(토) ~ 10.27(일)
장소
화천 문화공간 예술텃밭

서울/ 
일자
2019.11.06(수) ~ 11.17(일)
장소
남산예술센터

원작
한강
연출
배요섭
음악
김재훈
미술
이주야
조명
강정희
사운드
남상봉
영상
최용석
사진
이승희
조연출
김리우
무대감독
김동영
무대제작
백정집
드라마터그
이단비
출연
공병준, 김도완, 김재훈, 박선희, 배소현, 양종욱, 최수진, 황혜란
기술감독
김요찬
홍보물디자인
브랜드디렉터스
제작
남산예술센터, 공연창작집단 뛰다
관련정보
https://www.facebook.com/tuida.page/posts/2769700169715197
http://www.nsac.or.kr/Home/Perf/PerfDetail.aspx?IdPerf=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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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우연

천우연
전남 해남 땅끝마을에서 태어나 풀밭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교를 졸업하고 어린이 전시와 뮤지컬을 제작하며 서울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2008년부터 2015년까지는 공공기관의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일을 하다 2016년 일 년 반, 세계 곳곳에 있는 예술마을을 여행했다. 여행 후 『세계 예술마을로 떠나다』 책을 출간하고, 현재는 북촌문화센터에서 오래된 북촌의 마을 이야기로 여행 프로그램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머지않아 고향 해남으로 다시 돌아가 마을 주민들과 예술가들과 함께 가슴 따뜻한 일을 하고픈 꿈을 꾸고 있다. woo198304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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