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리뷰] 우리는 모두 결투장에 내던져진 플레이어다
지금아카이브 <결투>
김상옥
제163호
2019.07.11
극장 로비에는 “결투 참가자 유의사항“을 담은 유인물이 비치되어 있고, ‘이곳’이 결투장임을 알리는 안내방송과 함께 연극이 시작된다. 안내방송은 공연이 시작되기 전 나오는 여느 극장의 것과 다를 바 없어서, 다이제시스(Diegesis)적 공간과 현실이 중첩된 채로 결투 진행요원인 ‘나’(이지혜 분)를 맞는다. 그는 누군가를 향해 결투 참가자 최은효(배선희 분)를 기억하냐고 질문한다. 인간들은 같은 DNA를 가진 몸으로 분열을 계속해 나갔다. 정부가 이를 처리하기 위해 결투 시스템을 도입했고, 각 대학 강당과 극장 등이 결투장으로 운영되었다. 분열된 두 몸 중 어느 쪽이 본체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한쪽이 죽을 때까지 결투가 이어지며, 살아남는 자만이 본체이자 인간으로 여겨진다. 분리체가 된 몸은 법에 따라 이물로 지정되어 공동체 밖으로 걸러지고 만다. 검정 밑바닥 위에 그어진 하얀 사각 프레임 옆으로 비켜 앉은 ‘나’, 그 간략한 무대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 보는 객석의 사람들. 우리 모두는 어느 순간 자신이 관객이자 구경꾼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나’의 기억 속에서 ‘최은효’는 하얀 틀이 부여한 장소 안으로 들어와 대결한다. 그러나 45구경짜리 총이나 쇠곤봉도, 살육전의 스펙터클도 없이 최은효의 몸짓만이 그날의 결투를 건조하게 보여준다.
‘나’는 분리체 최은효의 표정에서 슬픔, 체념과 같은 정서적 반응을 읽어낸다. 하나가 아니라 둘로 존재하는 것, 이 타자성을 허용하지 않는 동일자의 세계에서 분리체는 우울의 정동을 지닌다. 자본주의 도시 환경은 최은효가 분리체와 공존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걔 때문에 들어간 비용도 무시할 수 없었고요.” 합리, 등가, 이성, 일치, 소유 등이 지배하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관계는 비용으로 계산된다. 양적인 득실로 모든 관계가 축소되는 신자유주의 시스템 속에서 분리체는 ‘나’에게 불편한 부탁을 한다. “불쌍한 저 애의 친구가 되어주세요.” 이 적당하지 않은 지나침, ‘염려’는 질적인 감정으로서 분리체를 쉽게 죽이려는 본체의 태도와 등가를 이루지 않고 비대칭적이다. 최은효는 분리체와 함께 생활하면서 자신과의 차이를 발견한다.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문을 열어선 안 된다는 자신과 달리, 분리체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문을 열자고 말한다. 천사인지 도적인지 구분하지 않는 분리체의 환대는 이익을 따지지 않는다. 그런데 도시민의 조건적 환대는 비용을 이유로 타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서울로 거주지를 옮긴 후 두 최은효는 결투장에 서야 했다.
“저게 본체고 내가 분리체라면?” 최은효는 분리체가 자신 안에 이미 깃들어있던 존재임을 알고 있다. 자신도 분리체와 같은 생각을 문득문득 해왔다고 얘기한다. 한 몸 안에서 자기동일성이 어긋나고, 타자가 침투하는 경험. 신체 두 개로 자아가 분열하는 상상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통일된 하나일 수 없다. 존재자는 이중적이고 복합적이다. 우리는 자족적이지 않으며, 내 안에 나이지만 내가 아닌 것을 갖고 있다. 본체는 ‘나’에게서 분열체가 자신을 ‘염려’했다는 사실을 전달받고 감정의 변화를 보인다. 결투에서 느꼈다는 분노, ‘나’를 만났을 때의 경계심과 당혹감, 그리고 분열체에 대한 희미한 동정심과 수치심에 이르기까지. 분리체의 슬픔은 본체의 분노를 변화시킬 수 있었을까? 분열체는 바깥에 있지만 본체의 완전한 외부가 아니기에 소유하거나 지배할 수 없다. 그들은 잠시 억압될 뿐 다시 본체 안에서 태어난다. 최은효는 자신의 또 다른 이미지인 분열체와의 만남을 통해 본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이처럼 분열체는 부차적이거나 비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결투가 4분에서 15분으로 점점 길어지고, 분열체는 죽음을 거듭할수록 살고자 하는 욕망을 키우며 되살아난다. 다시 등장한 최은효는 몇 번의 결투를 거쳤는지도 기억하지 못한 채 또 다른 최은효가 되어있다.
“저게 본체고 내가 분리체라면?” 최은효는 분리체가 자신 안에 이미 깃들어있던 존재임을 알고 있다. 자신도 분리체와 같은 생각을 문득문득 해왔다고 얘기한다. 한 몸 안에서 자기동일성이 어긋나고, 타자가 침투하는 경험. 신체 두 개로 자아가 분열하는 상상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통일된 하나일 수 없다. 존재자는 이중적이고 복합적이다. 우리는 자족적이지 않으며, 내 안에 나이지만 내가 아닌 것을 갖고 있다. 본체는 ‘나’에게서 분열체가 자신을 ‘염려’했다는 사실을 전달받고 감정의 변화를 보인다. 결투에서 느꼈다는 분노, ‘나’를 만났을 때의 경계심과 당혹감, 그리고 분열체에 대한 희미한 동정심과 수치심에 이르기까지. 분리체의 슬픔은 본체의 분노를 변화시킬 수 있었을까? 분열체는 바깥에 있지만 본체의 완전한 외부가 아니기에 소유하거나 지배할 수 없다. 그들은 잠시 억압될 뿐 다시 본체 안에서 태어난다. 최은효는 자신의 또 다른 이미지인 분열체와의 만남을 통해 본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이처럼 분열체는 부차적이거나 비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결투가 4분에서 15분으로 점점 길어지고, 분열체는 죽음을 거듭할수록 살고자 하는 욕망을 키우며 되살아난다. 다시 등장한 최은효는 몇 번의 결투를 거쳤는지도 기억하지 못한 채 또 다른 최은효가 되어있다.
분열하는 사람은 고정적인 장소로서의 육체로 존재하지 않고, 확실한 분류 체계에 포박되지 않는다. 반면 결투 진행요원인 ‘나’는 분열하지 않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는 결투의 현장에 표백제를 뿌리고 열심히 죽음의 흔적을 지운다. 퇴근 후엔 새로 개업한 레스토랑에서 자극적인 맛과 달콤한 노래를 소비한다. 주어진 구조 속에서 맡은 일을 성실히 반복할 뿐, 백정의 자식이라고 욕을 먹어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사람. 소비자이자 관람자, 타인의 시선에 영향받지 않는 이러한 자들만이 자신의 시선으로 결투를 지켜볼 수 있다. ‘나’는 잔혹한 살해 도구를 받치는 은쟁반처럼 자신이 단단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랬던 그도 친밀하지만 낯선 자와의 만남을 통해 우그러지게 된다. ‘나’는 다른 직원들처럼 화면을 통해 본 참가자의 몸이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는 현상을 경험한다. 분열한 자들의 신체에서 끔찍한 실재의 이미지를 본다.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거라 생각해서 누구에게 말한 적은 없다. ‘나’는 직업에 대해, 이 도시의 규칙에 대해, 결투장에 대해 술회할 때는 혼잣말을 한다.
그런데 동료 K와 최은효에 관해 얘기할 땐 마치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듯 어미를 바꾼다. “어느 날 내가 최은효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 그는 최은효의 안부가 궁금하다. 이 염려로 인해 둘은 다시 만난다. 최은효는 남편과 가족이 될 순 있었지만 친구가 될 순 없다고 말했다. 계약으로 맺어진 공동체적 관계에서는 큰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친밀하지만 낯선, 타자와의 만남이 그를 변화시키는 사건이 된다. ‘내’가 최은효를 만난 이후 분열하게 된 것처럼. 친구로 지내자는 최은효의 제안에 ‘내’가 어떤 응답을 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이 타자를 향한 개방의 의무가 이후 분열의 원인임을 짐작할 수 있다. 분열의 과정은 마치 주체가 자식을 낳는 출산처럼 묘사된다. “우리가 분열할 거라는 건.” 극 막바지에 이르러 ‘나’가 그 자신이자, 그가 아닌 존재에게 말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나’는 이제 모니터를 통해 참가자를 바라보던 관객에서, 결투장 한가운데에 선 플레이어가 되었다. 이미 우리 모두가 그렇다. 타자성을 억압하는 세계 안에서 언제까지고 시스템을 소비할 수 있는 관객은 없다.
[사진제공: 지금아카이브ⓒ손영규]
결투
- 일자
- 2019.06.27(목) ~ 07.07(일)
- 장소
- 서강대학교 메리홀 소극장
- 원작
- 윤이형
- 각색/연출
- 김진아
- 출연
- 배선희, 이지혜
- 목소리 출연
- 이리, 장윤실
- 드라마터그
- 송이원
- 무대디자인
- 김재란
- 음향디자인
- 목소
- 조명디자인
- 정하영, 윤의선
- 조명감독
- 정유석
- 조연출
- 나온유
- 기획
- 최주희, 박하영, 신재영
- 제작
- 지금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