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교차] 인형, ‘위안부’, 자본, 그리고 유령
<노라는 지금>, <인형의 집, Part 2>, <공주들>, <7번국도>
김방옥_연극평론가
제159호
2019.05.15
이십 년 가까이 다소 지루하기까지 했던 체홉의 시기가 흘러가고 입센이 돌아온 지 몇 년 된 것 같다. 멜랑콜릭한 무기력이나 미학적 재해석의 시간이 지나고 이제 구체적 사안을 꼼꼼히 따져보며 다시 생각해보거나 적극적 대안을 찾아보려는 시대가 온 것이다. 더구나 최근 페미니즘의 강세 속에 <인형의 집>이 다시 호명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나아가 <인형의 집>, ‘그 이후’에 관심이 가는 것도 당연하다. 작년 예술의전당의 <인형의 집>(부드소프 연출)이 콘셉트 부족과 과도한 미적 양식화로 방향감각을 잃었다는 평을 들었는데, 뒤를 이어 올해 4월에는 LG아트센터의 <인형의 집, Part 2>와 극단 놀땅의 <노라는 지금> 공연이 있었다. 두 작품 다 노라 가출 이후를 다루고 있다. 소설가 장정일은 지난 4월 4일자 한국일보 칼럼 “속편은 새로 만들어져야 한다”에서 <인형의 집, Part 2>의 공연을 반기며 연극계가 입센의 <인형의 집>을 새롭게 도전적으로 읽기를 권한 바 있다. 원작 <인형의 집>은 결말을 쉽게 수긍하기 어려우며 따라서 집을 나온 후의 노라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입센의 <인형의 집>이 반드시 여성의 주체적 자각에 관한 극이 아닐 수 있으며 <인형의 집>에 갇힌 사람에는 노라 뿐 아니라 당시 자본주의적 인간으로 형성되어 가던 남편 헬메르도 있다는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하기도 했다.
(사진제공: 극단 놀땅)
삼일로창고극장에서 공연된 <노라는 지금>(엘프리데 옐리넥 원작, 최진아 각색·연출)은 옐리넥의 원작 <노라가 남편을 떠난 후 일어난 일, 또는 사회의 지주>(1979)에 기반하고 있다. 최진아는 원작을 반 정도 살리고 ‘미투(MeToo)’에 관련해 새로운 관점을 담은 내용을 첨가했다. 오스트리아 작가 옐리넥이 마르크시스트 페미니스트인 만큼 원작은 기본적으로 장정일의 기대에 부응한다. 옐리넥의 <노라가 남편을 떠난 후...>에서 집을 나온 노라는 말(言語)로는 자아실현을 부르짖으며 여공으로 취직하지만, 자신의 성적 매력에 기대어 자본가의 정부가 되고 결국 자본가로부터 옷감가게를 얻어낸 후, 파산한 남편과 아이들을 먹여 살리게 된다. 그런데 최진아는 흥미롭게도 노라가 남편의 인형으로부터 자본의 노리개가 되는 과정 자체보다, 직공을 거쳐 자본가의 정부가 된 그녀가 급기야 매춘의 길을 선택하는 ‘그 순간’에 주목한다. 그리고는 그 순간의 흔들림을 ‘미투’의 결단의 순간과 병치시킨다. 병치되는 에피소드에서 지리학과 남교수와 여조교는 미묘한 순간을 거쳐 성적인 관계를 맺게 되는데 둘 사이의 관계에서 교수의 인간적 진지함을 의심해 온 조교는 ‘극중극’이 된 <노라는 남편을 떠난 후...>의 ‘그 순간’을 관람하다가 교수를 ‘미투’로 고발할 것을 결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교의 이런 결심은 관객과의 토론의 주제로 부쳐진다. 공연은 완성도가 그리 높지는 않았고 내가 본 날의 토론도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지만, 최진아의 시도는 쉽지 않은 부분을 건드렸고 그런 점에서 용감했다고 본다. 어떤 행동의 순간에 있어 여성 주체가 마주할 수 있는 모호함에 대해 자기반성의 거울을 들이댔다는 점에서다.
내친김에 채만식의 장편소설 <노라가 집을 나온 이유(1934)>를 다시 읽어 본다. 희곡으로 발표되지 않은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채만식의 <노라>는 장정일의 기대를 이미 제대로 구현해 놓았다. 채만식의 소설에서 집을 나온 노라는 초기 자본주의가 자리 잡기 시작한 식민치하의 서울에서 우선 금전적으로 시달린다. 생활비 몇 푼과 싸우게 된 그녀는 가정교사, 화장품판매원을 거쳐 카페 여급으로 전락해 자살 시도까지 거친 후 겨우 인쇄공장에 취업하지만, 어느 날 대출을 준 공장에 감독을 나온 은행 총재인 전남편과 마주치게 된다. 전남편은 노라에게 ‘남편의 노예가 싫다고 집을 나가더니 이제 자본의 노예가 되어 내 밑으로 다시 들어왔다’며 그녀를 모욕한다. 노라가 이제부터는 노동자와 지본가의 싸움이라며 소리치는 것으로 소설이 끝난다. 옐리넥과 채만식은 주체성을 찾아 집을 나온 노라를 자본화되어가는 세계에 다시 포박되는 것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그러나 채만식의 묘사가 훨씬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다. 1920년대를 배경으로 잡은 옐리넥의 자본주의 비판은 세계대전과 파시즘을 예견할 정도로 날카롭지만 다소 표현주의적이며 작가의 독특한 성 의식으로 인해 복잡해지는 면이 있다. 이에 비하면 최진아의 관점은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내친김에 채만식의 장편소설 <노라가 집을 나온 이유(1934)>를 다시 읽어 본다. 희곡으로 발표되지 않은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채만식의 <노라>는 장정일의 기대를 이미 제대로 구현해 놓았다. 채만식의 소설에서 집을 나온 노라는 초기 자본주의가 자리 잡기 시작한 식민치하의 서울에서 우선 금전적으로 시달린다. 생활비 몇 푼과 싸우게 된 그녀는 가정교사, 화장품판매원을 거쳐 카페 여급으로 전락해 자살 시도까지 거친 후 겨우 인쇄공장에 취업하지만, 어느 날 대출을 준 공장에 감독을 나온 은행 총재인 전남편과 마주치게 된다. 전남편은 노라에게 ‘남편의 노예가 싫다고 집을 나가더니 이제 자본의 노예가 되어 내 밑으로 다시 들어왔다’며 그녀를 모욕한다. 노라가 이제부터는 노동자와 지본가의 싸움이라며 소리치는 것으로 소설이 끝난다. 옐리넥과 채만식은 주체성을 찾아 집을 나온 노라를 자본화되어가는 세계에 다시 포박되는 것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그러나 채만식의 묘사가 훨씬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다. 1920년대를 배경으로 잡은 옐리넥의 자본주의 비판은 세계대전과 파시즘을 예견할 정도로 날카롭지만 다소 표현주의적이며 작가의 독특한 성 의식으로 인해 복잡해지는 면이 있다. 이에 비하면 최진아의 관점은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제공: LG아트센터)
위의 작품들이 여성의 주체성 논의가 경제나 자본과의 관련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다소 어두운 전망을 가지고 있다면 LG아트센터의 <인형의 집, Part 2>(루카스 네이스 작, 김민정 연출)는 미국의 최신작답게 여러모로 낙관적인 작품이다. 집을 나간 노라는 자신의 삶을 담은 책을 팔아 상업적 성공까지 거둔 페미니스트 작가로서 15년 만에 의기양양하게 돌아온다. 그리고 장정일의 기대와 달리 결혼제도를 더 강도 높게 비판하고 여성의 주체적 자각을 한층 더 소리높여 외친다. (마지막 장면에서 여주인공이 무엇인가를 외치는 것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네이스와 입센과 채만식의 작품들은 공통되기도 한다.) 이 극의 매력은 노골적인 토론극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재미있고, 주인공뿐 아니라 여러 주변 인물의 의견이나 입장을 고루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극은 노라와 유모, 노라와 토르발트, 노라와 딸 간의 일련의 토론 배틀로 이루어져 있다. 링 위의 권투시합을 연상시킬 정도로 말의 전쟁은 만만치 않으며 토론내용은 영리하게 구성되어 있다. 유모는 ‘당신도 가정을 버리고 나왔으니 나와 다르지 않다’는 노라의 지적에 채만식식의 생계형 인간의 논리로 방어한다. 자신은 집을 나오지 않았으면 직공이 되거나 몸을 팔게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상처 입은 딸 에미는 보수적 가치관으로 무장하고 한술 더 뜨는 영악한 논리로 노라에게 사라져달라고 요구한다. 원작보다는 덜 야비하게 그려진 토르발트는 남자로서의 허영을 버리지 못하고 우스꽝스럽게 패배하지만, 뜻밖의 유화적 제스처를 보이면서 잠시나마 노라 맘을 약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의 반격을 모두 물리치고 노라는 더 강해진 여전사가 되어 다시 한번 문을 열고 집을 나가 세상으로 향하는 것으로 극이 끝난다. 공연은 자칫 지루할 수 있는 논쟁의 연속에서도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했는데 이는 서이숙, 우미화, 전국향의 노련한 연기와 깔끔하고 세련된 연출과 무대 덕이다. 다만 토르발트의 성격이 워낙 어설프게 극화된 데다가 남자 캐스트들이 여배우들의 연기적 중량과 균형을 이루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극장을 나오며 엿들으니 메시지는 덤이고 관객들은 하나같이 TV 에서 본 여배우들의 강렬한 무대 연기력에 매료되어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저마다 연기 비평가인 대한민국 국민들이 이제 매체를 넘나드는 연기에 눈뜨기 시작하는 것 같아 기대된다.
(사진제공: 서울연극협회)
이번 서울연극제(예술감독 남명렬)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재공연이 많지만 젊어졌고 관객 친화적이며 주류/변방, 기성/신예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연극계의 지형이 이미 크게 바뀌고 있음을 말해준다. 극단적 한계 너머까지 밀어붙이는 몸으로 화제를 모았던 극단 신세계의 <공주들>(공동창작, 김수정 구성·연출)도 이런 페미니즘의 강세 속에 서울 연극제에 진입했다. 이번 공연은 혜화동일번지 극장에서 공연되었던 지난 9월 초연과 아주 많이 달라졌다. 후반부가 배우들의 개인 서사로 갔던 초연에 비해, 이번 공연은 여성의 몸에 대한 국가·사회적 폭력이라는 비교적 일관적 주제로 흘러갔는데, 이에 관련된 에피소드를 최근 이슈까지 계속 덧붙이다 보니 길이가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게다가 특유의 강한 톤으로 비슷비슷한 내용이 반복되어 관객들의 피로감이 커졌고 초연의 신선한 충격을 재연하기 힘들었던 면이 있었다.
엄청난 양의 참고자료들과 신세계 공연 특유의 단호한 해석, 그리고 대담한 에너지에도 불구하고 이번 공연에서도 뭔가 불분명하고 모호한 느낌이 남았다. ‘내 구멍은 나의 것’이라는 일견 명료한 메시지를 내걸고 있지만 실은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따라서 주제 면에서 정리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혼란스럽게 남는 부분은 과거 집 나온 노라를 갈등하게 했던 여성 주체성과 자본화되는 사회의 문제와도 크게 멀지 않은 듯하다. 초연 때 전반부에서는 제도 권력이 여성에게 가한 폭력을, 후반부에서는 자본화가 깊어지면서 나타나는 젊은 여성들의 혼란한 성 의식을 다뤘다면, 이번 공연은 일단 국가적 폭력에 초점을 맞춘 거대담론의 양상을 띤다. 시작과 끝도 ‘위안부’ 할머니 김공주 이야기로 일관되게 처리했다. 그러나 근현대사 백 년을 다루다 보니 뒤쪽으로 갈수록 거대담론들은 흥미로운 균열들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초반부에는 1)일제에 의한 ‘위안부’ 문제와 2)가부장적 폭력, 가족을 위한 여성의 희생이라는 서사, 3)미군위안부나 기생관광 같은 국가적 관리에 의한 폭력 등, 공주들을 ‘구멍화’하는 국가적 폭력들에 대한 비판이 강한 호소력을 지녔지만, 뒤로 갈수록 차차, 4)여성 개인들의 생존과 그에 따른 현실적 욕망, 5)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위선적 통념들, 성매매가 노동이나 경제활동으로 성립되는가의 질문, 6)자본화된 사회에서의 성의 상품화와 자본화라는 미시적 문제들이 틈을 비집고 나온다. 예를 들어서 기생관광을 반대하는 여성학자와의 토론 장면에서 요정 기생인 변공주는 ‘너희들 가정주부는 개인 전담의 무료봉사 창녀일 뿐 우리와 뭐가 다르냐’라는 식으로 반격하고, 집창촌 철폐 반대 시위에서 한 성 노동자 여성은 “너희들은 살면서 명품 안 사냐?”고 반발한다. “에이 시팔. 돈이나 오지게 벌고 싶다”라는 대사는 키(key) 대사로 뽑혀 이번 프로그램에 실렸다. 이 모든 문제를 담기위해 ‘위안부’ 할머니가 포주를 거쳐 호스트바 마담으로까지 변신했다가 빌딩 청소부를 거쳐 늙은 창녀로 전락하는 서사도 좀 무리였다. 요컨대 ‘공주들’이 단지 피해자라는 시각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얘기다.
신세계 공연은 폭력을 폭력으로 고발한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이는 칭찬일수도 비판일수도 있다. 착취되는 성(性)을 더 노골적이며 극단적 몸짓으로 폭로하고, 언어폭력을 더 심하고 천박한 욕설로 터뜨리는 과정에서 배우들의 몸은 상투적 모방과 재현이라는 경계를 넘어서기 위해 극단의 악다구니를 친다. 극한의 폭력성에 몸을 맡긴 그들은 순간적으로 재현적 배우라는 경계를 넘어 현실의 양정윤과 김보경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는 극 중의 인물과 거리를 두는 다큐멘터리 계열의 연기와는 또 다른 진정성이며 오히려 자신의 전체를 바치는 아르토의 ‘사제로서의 배우’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그들의 헌신은 관객의 비판적 인식의 문을 여는 데 기여한다. 신세계의 연극에서는 혼란 속에서도 가끔 그런 느낌들이 온다. 그것은 위험하고도 매혹적인 순간들이며 현존이며 동시에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경계 위에 있다. 그리고 그건 무엇보다 비등점을 넘어서는 배우들의 대단한 열정과 에너지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아쉽게도 그들의 에너지가 어디서 오는지 어떤 과정을 통해 나오는지 잘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관객의 불편함에 개의치 않고, 눈치 보거나 타협하지 않고,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그 용감함에는 일단 ‘대단하다’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연극에서 끓어오르는 현존이 전부는 아니다. 그럼에도 절박한 고통을 절박한 에너지로 표출하는 공연들이 너무 많아지는 게 아닐까? 한편 근래 많아지는 낭독공연들을 접하면서 이런 의문들이 들곤 했다. 왜 어떤 희곡 낭독을 들으면 이건 무대에 올리지 말고 이렇게 그냥 낭독공연으로 남겨졌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왜 생각보다 많은 희곡낭독에서 그런 생각이 드는 걸까? 그리고 왜 그런 슬픈 예감은 대개 들어맞는 걸까? 그런데 도대체 어떤 종류의 희곡을 들을 때 그런 생각이 드는 걸까? <7번국도>를 2018년 남산예술센터 서치라이트에서 낭독으로 듣고 참신한 희곡이라고 느꼈다. 같은 해 이보람의 <두 번째 시간>의 낭독도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두 작품 다 낭독공연보다 더 좋은 무대화는 쉽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었다. 언어 중심으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여서일까? 행간의 여백이 많은 희곡들이어서 일까? 아니면 과거 최인훈의 희곡을 막상 무대에서 공연했을 때 늘 뭔가 ‘이게 아닌데’ 하고 아쉬워했던 경험 때문일까?
엄청난 양의 참고자료들과 신세계 공연 특유의 단호한 해석, 그리고 대담한 에너지에도 불구하고 이번 공연에서도 뭔가 불분명하고 모호한 느낌이 남았다. ‘내 구멍은 나의 것’이라는 일견 명료한 메시지를 내걸고 있지만 실은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따라서 주제 면에서 정리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혼란스럽게 남는 부분은 과거 집 나온 노라를 갈등하게 했던 여성 주체성과 자본화되는 사회의 문제와도 크게 멀지 않은 듯하다. 초연 때 전반부에서는 제도 권력이 여성에게 가한 폭력을, 후반부에서는 자본화가 깊어지면서 나타나는 젊은 여성들의 혼란한 성 의식을 다뤘다면, 이번 공연은 일단 국가적 폭력에 초점을 맞춘 거대담론의 양상을 띤다. 시작과 끝도 ‘위안부’ 할머니 김공주 이야기로 일관되게 처리했다. 그러나 근현대사 백 년을 다루다 보니 뒤쪽으로 갈수록 거대담론들은 흥미로운 균열들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초반부에는 1)일제에 의한 ‘위안부’ 문제와 2)가부장적 폭력, 가족을 위한 여성의 희생이라는 서사, 3)미군위안부나 기생관광 같은 국가적 관리에 의한 폭력 등, 공주들을 ‘구멍화’하는 국가적 폭력들에 대한 비판이 강한 호소력을 지녔지만, 뒤로 갈수록 차차, 4)여성 개인들의 생존과 그에 따른 현실적 욕망, 5)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위선적 통념들, 성매매가 노동이나 경제활동으로 성립되는가의 질문, 6)자본화된 사회에서의 성의 상품화와 자본화라는 미시적 문제들이 틈을 비집고 나온다. 예를 들어서 기생관광을 반대하는 여성학자와의 토론 장면에서 요정 기생인 변공주는 ‘너희들 가정주부는 개인 전담의 무료봉사 창녀일 뿐 우리와 뭐가 다르냐’라는 식으로 반격하고, 집창촌 철폐 반대 시위에서 한 성 노동자 여성은 “너희들은 살면서 명품 안 사냐?”고 반발한다. “에이 시팔. 돈이나 오지게 벌고 싶다”라는 대사는 키(key) 대사로 뽑혀 이번 프로그램에 실렸다. 이 모든 문제를 담기위해 ‘위안부’ 할머니가 포주를 거쳐 호스트바 마담으로까지 변신했다가 빌딩 청소부를 거쳐 늙은 창녀로 전락하는 서사도 좀 무리였다. 요컨대 ‘공주들’이 단지 피해자라는 시각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얘기다.
신세계 공연은 폭력을 폭력으로 고발한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이는 칭찬일수도 비판일수도 있다. 착취되는 성(性)을 더 노골적이며 극단적 몸짓으로 폭로하고, 언어폭력을 더 심하고 천박한 욕설로 터뜨리는 과정에서 배우들의 몸은 상투적 모방과 재현이라는 경계를 넘어서기 위해 극단의 악다구니를 친다. 극한의 폭력성에 몸을 맡긴 그들은 순간적으로 재현적 배우라는 경계를 넘어 현실의 양정윤과 김보경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는 극 중의 인물과 거리를 두는 다큐멘터리 계열의 연기와는 또 다른 진정성이며 오히려 자신의 전체를 바치는 아르토의 ‘사제로서의 배우’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그들의 헌신은 관객의 비판적 인식의 문을 여는 데 기여한다. 신세계의 연극에서는 혼란 속에서도 가끔 그런 느낌들이 온다. 그것은 위험하고도 매혹적인 순간들이며 현존이며 동시에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경계 위에 있다. 그리고 그건 무엇보다 비등점을 넘어서는 배우들의 대단한 열정과 에너지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아쉽게도 그들의 에너지가 어디서 오는지 어떤 과정을 통해 나오는지 잘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관객의 불편함에 개의치 않고, 눈치 보거나 타협하지 않고,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그 용감함에는 일단 ‘대단하다’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연극에서 끓어오르는 현존이 전부는 아니다. 그럼에도 절박한 고통을 절박한 에너지로 표출하는 공연들이 너무 많아지는 게 아닐까? 한편 근래 많아지는 낭독공연들을 접하면서 이런 의문들이 들곤 했다. 왜 어떤 희곡 낭독을 들으면 이건 무대에 올리지 말고 이렇게 그냥 낭독공연으로 남겨졌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왜 생각보다 많은 희곡낭독에서 그런 생각이 드는 걸까? 그리고 왜 그런 슬픈 예감은 대개 들어맞는 걸까? 그런데 도대체 어떤 종류의 희곡을 들을 때 그런 생각이 드는 걸까? <7번국도>를 2018년 남산예술센터 서치라이트에서 낭독으로 듣고 참신한 희곡이라고 느꼈다. 같은 해 이보람의 <두 번째 시간>의 낭독도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두 작품 다 낭독공연보다 더 좋은 무대화는 쉽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었다. 언어 중심으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여서일까? 행간의 여백이 많은 희곡들이어서 일까? 아니면 과거 최인훈의 희곡을 막상 무대에서 공연했을 때 늘 뭔가 ‘이게 아닌데’ 하고 아쉬워했던 경험 때문일까?
(사진제공: 남산예술센터 ⓒ이강물)
<7번국도>(배해율 작, 김지우 프로듀서)의 연출을 구자혜에게 맡긴 것은 험난한 길을 마다하지 않는, 진취적 창작극 발굴을 목표로 하는 남산예술센터의 취지에도 맞는 성실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평이한 재현적 연출로는 소품에 가까운 이 희곡에 숨겨진 연극적 진동의 가능성을 다 드러내기 힘들 거라고 판단했고 따라서 재현과 환상을 극히 경계하는 구자혜에게 맡겨 대사 밑에 가려져있는 무언가를 끌어내 주고 여기는, 당연히, 극장, 그리고 그 이상으로 무대화시켜달라고 기대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이 기획은 반 정도만 성공한 듯하다. 흩어진 자동차 파편들만이 놓인 텅 빈 무대에서 각자 정면을 보고 목이 터져라 외치는 연기자들의 발화는 가끔 강렬한 낯설음과 공허감의 울림을 창출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으나, 반복과 단조로움 끝에 또 다른 익숙함으로 탁해져 버렸다. 택시기사와 군인의 대화, 여자친구와 택시기사의 대화, 등 몇 장면에서 재현을 뛰어넘는 ‘인식의 현존’을 성취했을지 모르나 보다 많은 장면에서 지루함과 피로감을 주었고 희곡의 섬세한 결은 많은 부분 희생되었다. 재현을 넘어서는 현존의 문제는 오늘날 대부분의 연출이 당면하는 고민일 것이다. 자신이 쓰고 구축한 연극 세계 속에서는 가끔 뛰어난 작품을 보여주지만, 연출가 구자혜는 아직 모종의 혼란과 모색 중에 있는듯하다.
삼성반도체 희생자의 부모인 택시기사는 어느 날, 죽은 자기 딸과 속초초등학교 동창이라는 군인을 태우게 된다. 택시기사와 함께 참사 유가족들의 일상에 밴 슬픔을 조심스럽게 따라가던 관객들은 후반부의 어느 순간 그 젊은 군인이 목매어 자살한 군대 의문사 피해자의 유령이라는 점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는 이미 죽은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 순간 부재감의 아찔한 계곡으로 밀려 내려갔던 관객들은 서서히 현실로 되돌아와 유가족과 함께 슬픔과 분노를 되새기게 된다. (남산예술센터의 공연프로그램은 이번처럼 정성스러운 편집으로 퍼포먼스의 일부가 될 때가 가끔 있다. 그러나) 이 극의 핵심은 프로그램에서 강조된 대로 ‘참사 유가족에게 요구되는 전형성’과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유가족들이 우선 겪어야 하는 낭떠러지 같은 상실감에 있다고 나는 보았다. 일인 시위도 그 상실감을 견디고 살아내기 위해 하는 일이며 정치적 의식화 역시 아마 그 절대적 상실감을 이겨내면서 가능한 것이 아닐까. 가장 아쉬웠던 것은 이 공연이 문제의 반전(反轉)적 깨달음의 장면을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프로그램에서 문화연구자 오혜진이 자크 데리다를 인용한 대로 이 참사의 시대에 유령이란 “여기 있는 사라진 자”이다. 그 유령은 사라진 과거의 존재이지만 현재의 극 중 인물뿐 아니라 부재하면서 존재하는 더 큰 낯설음과 그만큼의 울림으로 관객 안에서 다시 살아나게끔, 이 연극은 더 섬세하게 비워주었어야 했다. 그럼으로써 희곡이 지녔던 가능성의 행간들을 더 새롭게 채우고 살릴 수 있지 않았을지...?
삼성반도체 희생자의 부모인 택시기사는 어느 날, 죽은 자기 딸과 속초초등학교 동창이라는 군인을 태우게 된다. 택시기사와 함께 참사 유가족들의 일상에 밴 슬픔을 조심스럽게 따라가던 관객들은 후반부의 어느 순간 그 젊은 군인이 목매어 자살한 군대 의문사 피해자의 유령이라는 점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는 이미 죽은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 순간 부재감의 아찔한 계곡으로 밀려 내려갔던 관객들은 서서히 현실로 되돌아와 유가족과 함께 슬픔과 분노를 되새기게 된다. (남산예술센터의 공연프로그램은 이번처럼 정성스러운 편집으로 퍼포먼스의 일부가 될 때가 가끔 있다. 그러나) 이 극의 핵심은 프로그램에서 강조된 대로 ‘참사 유가족에게 요구되는 전형성’과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유가족들이 우선 겪어야 하는 낭떠러지 같은 상실감에 있다고 나는 보았다. 일인 시위도 그 상실감을 견디고 살아내기 위해 하는 일이며 정치적 의식화 역시 아마 그 절대적 상실감을 이겨내면서 가능한 것이 아닐까. 가장 아쉬웠던 것은 이 공연이 문제의 반전(反轉)적 깨달음의 장면을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프로그램에서 문화연구자 오혜진이 자크 데리다를 인용한 대로 이 참사의 시대에 유령이란 “여기 있는 사라진 자”이다. 그 유령은 사라진 과거의 존재이지만 현재의 극 중 인물뿐 아니라 부재하면서 존재하는 더 큰 낯설음과 그만큼의 울림으로 관객 안에서 다시 살아나게끔, 이 연극은 더 섬세하게 비워주었어야 했다. 그럼으로써 희곡이 지녔던 가능성의 행간들을 더 새롭게 채우고 살릴 수 있지 않았을지...?
노라는 지금
- 일자
- 2019.4.7(일) ~ 4.10(수)
- 장소
- 삼일로창고극장
- 작
- 엘프리드 옐리넥
- 각색연출
- 최진아
- 출연
- 최영도, 이준영, 남수현, 김정, 허혜수, 서유덕, 김은우, 최강현, 이랑, 박병희
- 안무
- 이경은
- 조명
- 김성구
- 오퍼
- 김정아
- 극단 놀땅
인형의 집, Part 2
- 일자
- 2019.4.10.(수) ~ 4.28(일)
- 장소
- LG아트센터
- 작
- 루카스 네이스
- 연출
- 김민정
- 출연
- 서이숙, 우미화, 손종학, 박호산, 전국향, 이경미
- 번역
- 여지현, 김민정
- 무대디자이너
- 김종석
- 조명디자이너
- 장원섭
- 음향디자이너
- 강국현
- 의상디자이너
- 박소영
- 분장디자이너
- 김남선
- 음악
- 김동빈
- MP&Company X LG아트센터
공주들
- 일자
- 2019.5.4.(토) ~ 5.12(일)
- 장소
-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 작
- 공동창작
- 연출
- 김수정
- 출연
- 강주희, 권미나, 김보경, 김선기, 김정화, 김형준, 민현기, 박형범, 양정윤, 이강호
- 드라마터그
- 김지혜
- 조연출
- 고주영, 박미르
- 무대
- 송지인
- 조명
- 윤해인
- 의상
- 김미나
- 그래픽
- 미르그라피
- 음악
- 이율구
- 음향
- 전민배
- 사진
- 박일호
- 영상
- 박영민
- 기획
- 강지연, 김성현
- 극단 신세계
7번국도
- 일자
- 2019.4.17.(수) ~ 4.28(일)
- 장소
- 남산예술센터
- 작
- 배해률
- 연출
- 구자혜
- 출연
- 권은혜, 박수진, 이리, 전박찬, 최요한
- 무대
- 장호
- 조명
- 김형연 사운드 목소 의상 우영주
- 무대감독
- 김소희
- 조연출·음향 오퍼레이터
- 류혜영
- 자막 오퍼레이터
- 김효진
- 조명 오퍼레이터
- 윤지영
- 홍보사진 이강물
- 홍보영상
- 삼인칭시점
- 인쇄물디자인
- 브랜드디렉터스
- 배리어프리버전 제작
- ㈜사운드플렉스스튜디오
- 점자제작
- 도서출판 점자
- 수어통역
- 김홍남, 최황순
- 남산예술센터, 여기는 당연히, 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