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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라 쓰고 ‘가능성’이라고 읽는 프로젝트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2024 실패를 위한 실험실(실.실.실)
OH명 <언니의 언니의 언니> X 독거청년들 <K연극전공 망해라!(죄송합니다)>

장윤정

제261호

2024.09.12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에서 실패를 위한 실험실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여기서 실패란 “앞으로 펼쳐질 미완·미결의 연극적 시도에 대한 실패, 공연의 아이디어가 주변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거나 지지받지 못했던 실패, 나에게서 연극이 멀어져 삶에서 이제는 더 이상 연극인으로 불리지 않았던 꿈에 대한 실패, 혹은 그간 공공기관 및 제도권 지원사업의 영역에서 실패해 온 경험을 의미”한다. <언니의 언니의 언니>(이하 <언니의>)와 <K연극전공 망해라!(죄송합니다)>(이하 <K연극전공>)은 이 프로젝트에 속한 공연들이다. 이외에 <정확한 사랑의 실험>도 상연된 바 있으나, 아쉽게도 관람을 하지 못하여 앞선 두 작품을 바탕으로 어떠한 의미의 실패가 담지되고 있는지 살펴보려 한다.

세 언니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시간
OH명 <언니의 언니의 언니>

OH명은 김섬, 박소정, 박소희, 신민승으로 구성되어 있다. 발달장애를 가진 소정을 중심으로,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에 관하여 탐구하는 팀이다. 초창기 작업과는 달리 구성원에 일부 변화가 생겼는데, 유대 관계를 바탕으로 때에 따라 유연하게 구성원이 합류 또는 이탈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OH명은 2022년 <누구야오늘놀기딱좋아쉴게맥주먹자(feat.결혼하고싶어)>(이하 <누구야>) 공연을 시작으로, <함께 살아가기 프로젝트 : ‘__’파티>(2023), <함께 살아가기 프로젝트 : ㅅㅅㅅㅅ​>(2023) 작업을 거치면서 다양한 실험을 시도해왔다. 지난 작업들이 주로 주택 공간에서 이루어졌다면, <언니의>는 극장 공간에서 진행되었다. 본격적인 프로시니엄 무대에서 OH명의 공연이라니,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극장에 들어서면 세 명의 언니들이 관객을 맞이한다. ‘첫째 언니’를 맡은 섬(배우 김섬)과 ‘둘째 언니’ 소희(배우 박소희), ‘셋째 언니’ 소정(배우 박소정)이다. 환대의 분위기와 함께 객석으로 이동하자, 좌석에는 배우들이 직접 촬영하고 인화한 사진엽서 한 장이 놓여있었다. 그 뒷면에 적힌 소소한 손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음향과 조명을 다루는 장치와 스태프들은 객석 곁에 자리했다. 그러니까 <언니의>는 꾸밈없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놓는 세계였다.
1부는 셋째 언니 소정의 무대로 구성되었다. 소정은 드라마 <꾸러기 천사들>과 <뻐꾸기 둥지>의 장면을 연기했다. 무대 정면의 스크린에 드라마 장면이 펼쳐지고 영상 속 배우들의 목소리가 울리면,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대사를 소정이 그대로 발화하며 연기하는 방식이다. 스크린에는 연기하는 소정의 모습이 투사되어 등장인물들과 마주보는 형태로 나타남으로써, 마치 소정과 인물이 대화하는 구도가 연출되었다.

<언니의 언니의 언니> 공연 사진. 분홍색 반소매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마이크를 든 소정의 뒤로 벽면 가득 프로젝터 화면이 영사된다. 화면은 둘로 나뉘어 좌측에는 드라마의 장면이, 우측에는 실시간으로 소정을 촬영한 영상이 나란히 나오고 있다.

기술적인 부분도 흥미로웠지만, 공연을 더욱 재미나게 한 것은 소정의 일인 다역 연기였다. <뻐꾸기 둥지>는 “이혼 위기의 부부가 싸우는” 장면인 만큼 인물마다 극단적인 성격을 띠고 흥분된 억양을 구사했다. 소정 혼자서 모든 인물을 표현하다 보니 직관적으로 연기 톤이 급변했고, 그 온도 차에서 관객의 웃음이 유발되곤 했다. 드라마 내용이 다소 폭력적임에도 소정은 꼭 이 작품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팀원의 만류를 뿌리칠 만큼 소정을 적극적으로 이끌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소정이 무대에서 하고 싶고, 보여주고 싶은, 그래서 관객과 교감하고자 했던 지점은 무엇이었을까? 소정에겐 홀로 무대에 서는 행위로써 기대하는 무언가가 있었던 듯하다.
소정은 이미 <누구야>에서 관객을 만나 연기한 바 있다. 애니메이션 <짱구는 못말려>의 일부 장면을 연기했는데, 대사와 억양을 원작과 동일하게 발화하는 방식으로 감정 연기를 수행했다. <언니의>에서 소정이 행한 연기도 이와 유사하다. 변화한 것은 연기해내는 감정의 스펙트럼이 넓어졌다는 것과 스크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연기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연기를 스스로 객관화하며 극중 인물로서 연기를 수행하는 과정은 관점의 이중성을 체현한 것과 같다. 때때로 관객의 반응에 따라 즉각적으로 화답하듯 소정의 연기에 변화가 생기곤 했다. 분명 소정의 연기는 <누구야>에서 보다 더 확장된 형태였다.
사실 앞선 정량적 관점에서 나아가면 소정의 공연은 더 풍부하게 읽힌다. 스크린 속 소정은 기술적 한계로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종종 어색하게 서 있는 모습이 연출되곤 했다. 그럴 때면 마치 세계 속에 함께 존재하는 듯하면서도 그 속에 편입되지 못하고 주변부에 놓인 관찰자처럼 보이곤 했는데, 그 순간 관객은 극으로부터 이탈하여 현존하는 소정을 인식하게 된다. 동시에 아토 퀘이슨이 『미학적 불안감』에서 언급한, “장애의 재현이 미학적 영역과 윤리적 영역 사이를 불안하게 오락가락”하는 ‘미학적 불안감’이 발생한다. 드라마의 장면으로 인지하던 세계에 일상의 현실로서 비장애중심 사회 속 소정의 모습이 틈을 내며 개입하는 것이다. 관객은 드라마 내의 소정, 그곳에서 관찰자인 소정, 무대 위의 소정 사이를 횡단하며, 재현과 현실 간의 복합적 층위를 감각하게 되었다. <언니의>는 지난 작업의 변주이면서 OH명과 소정의 공연에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끔 했다. 앞으로 소정의 작업이 지속된다면, 그 의미가 축적됨에 따라 어떠한 윤곽을 그려낼지 궁금해진다.
<언니의>는 OH명의 작업에서 변곡점에 위치한다. 그동안 소정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었다면, 이 공연에서는 팀원들의 이야기 또한 동등한 비중으로 등장한다. 특히, ‘둘째 언니’ 소희의 서사를 조명한 점이 인상적이다. 소희는 소정과 쌍둥이 자매이면서도 1분 먼저 태어나 ‘언니’가 되었다. <언니의>에서 소희는 소정과 함께 유소년기를 보내며 ‘천사’라는 수식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이야기한다. 이제는 언니이기를 그만하기로 결심하고, “야”와 “너”의 호칭 사이를 오가고 싶은 소희의 내면에는 소정의 보호자가 아닌 또래의 수평적인 위치로 관계를 재정립하고자 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
소희가 관객에게 전한 “소정의 이야기가 아닌 제 이야기”는 힘들게 용기 낸 자기 고백과 같다. ‘천사’ 혹은 ‘소정의 언니’가 아닌 오롯이 ‘나’로서 존재하고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마음, 그에 못지않은 소정을 향한 애정, 발달장애를 가진 소정과 함께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과 그 과정에서의 기대 및 실망 등 복잡한 마음이 이야기 속에서 한데 어우러졌다. 소희의 자기 고백에는 개인사를 넘어서는 지점이 있는데, 발달장애를 가진 소정을 피보호자로 그리고 자신을 보호자로서 인식하는 사회의 관습적 태도에 관하여 성찰하게끔 한다. 소희가 바란 것은 보호자가 아닌 삶의 동행자다. 그것은 소정과 “친구”로서 서로의 주체성을 인정받고 수평적 관점에서의 연대 의식으로 읽히길 소망하는 것과 같았다.

<언니의 언니의 언니> 공연 사진. 섬과 소정이 나란히 가부좌를 틀고 카펫 위에 앉아있다. 그들이 앉은 작은 카펫에는 미러볼 조명기, 마이크, VR기계 등이 나란히 놓여있고, 소정은 앞을 가리키며 무언가 이야기한다. 소정의 다리에 왼손을 얹은 섬은 가볍게 웃는 얼굴로 정면을 응시한다.

‘첫째 언니’로 등장하는 ‘섬’은 “극장에서 나로 존재하기”를 시도한다. 그동안 배우로서 완벽함을 도모해야 했던 만큼 극장은 늘 긴장되는 곳이었다면, 이번 공연에서만큼은 그 어떤 역할도 덧입지 않고 오롯이 ‘나’로서 자연스럽게 존재해보기를 실험한 것이다. 섬은 때때로 소정과 소희의 공연에 필요한 부분을 수행하며 곁에서 지켜보는 위치에 있었다. 심리적으로 객석과 무대 사이쯤에 존재하며, 온전히 자신을 고려한 시간을 보냈다. 이로써 ‘세 언니’들은 저마다 원했던 극장을 만났다.
<언니의>를 통해 각자 ‘나’를 위한 작업을 함으로써, OH명의 세계는 보다 더 건실해지고 있었다. 주택 공간에서 낯선 이들과 만나던 지난 프로젝트들은 본격적인 극장공연으로 변화하였고, 소정은 이제 무대에서 관객을 향해 홀로 연기를 시도한다. 소정의 사회활동에 몰두했던 소희와 섬은 스스로를 돌아보기 시작했고, 그만큼 세 사람은 서로의 의지처가 되는 동시에 자신의 실존을 간과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번 작업이 OH명의 지속적인 활동의 자양분이 되기를 바라본다. 어쩌면 <언니의>가 OH명의 세계관이 확장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설핏 기대가 앞선다.
소정이 이따금 갑작스러운 발언을 하면 관객들은 유쾌하게 웃어넘겼다. 소희는 때때로 눈물을 참지 못하였는데, 아마도 마음 깊숙이 자리한 무언가가 애쓸 도리 없이 터져 나온 것이리라 짐작된다. 관객은 그러한 소희를 향해 응원과 격려로 호응했다. 덕분에 공연은 웃음과 울음을 넘나들었고, 무대와 객석 사이의 거리감은 사라진 채 극장에는 정서적 유대감이 형성되고 있었다. 이날 관객들이 보인 태도는 장애를 가진 이를 대상화하여 바라보거나 장애에 관한 이야기를 극복 서사로 받아들이는, 정상성 사회로 타자의 편입을 기꺼이 허락하는 시혜적·비장애중심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그것은 ‘애정’, ‘감응’, ‘호혜’에 가까웠다. 『농담, 응시, 어수선한 연결』에서 구술자 김지수와 저자 김슬기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윤리적 공존을 위해 감응성 훈련이 필요함과 서로 다른 몸들이 관계 맺음으로써 ‘호혜’가 발휘할 가능성에 관하여 노정한 바 있다. <언니의>에서 배우와 관객의 수줍고도 명백한 상호 감정 교류는 그 가능성의 현현을 감각토록 했다.
<언니의>는 마지막으로 ‘언니의 선언’을 외치고 노래한다. 문득 소정 또한 셋째 ‘언니’임을 곱씹게 되는데,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 또한 누군가에겐 삶을 선행한 ‘언니’라는 점이 포착된다. 좌석에 놓인 사진엽서에서는 ‘언니’의 ‘불완전함’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OH명이 관객에게 공유하는 내밀한 고백이었다. 그중 다음의 문구가 눈에 띈다.

“먼저 태어났다고 뭘 더 알겠니 우리 같이 걸어나가자.”

손글씨에 포개어진 모두를 향한 OH명의 마음이 은은하게 전해진다.

<언니의 언니의 언니> 공연 사진. 왼쪽부터 소희, 소정, 섬이 둥글게 서 손을 모았다가 위로 번쩍 들어 올리며 환하게 웃고 있다.

K연극전공, 그것이 알고 싶다.
독거 청년들 <K연극전공 망해라!(죄송합니다)>

인생의 과정에 있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할 때, 지속해서 마음을 옭아매는 과거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K연극전공>은 힘들었던 과거의 시간을 하나하나 톺는 방식을 택한다. 역설과 비유와 유머를 경유하여 끝내 마음의 평온에 이르기까지, <K연극전공>은 요컨대 학교에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이들의 제의(祭儀)의 시간이었다.
‘K연극전공’, ‘망해라!’, ‘죄송합니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제목의 기저에는 도발적인 태도와 그에 상반되는 여린 심성이 공존한다. 대체 K연극전공이 무엇이길래 호기롭게 망하길 기원하면서도 조심스러운 사과를 하는 것일까? 공연을 쫓아가다 보면 ‘K연극전공’의 의미를 어렴풋이 가늠하게 된다. 시작은 K입시부터였다. 연기와 연출을 전공하기 위해 험난한 입시 과정을 거친 송희(배우 한송희), 수현(배우 성수현), 강석(배우 김강석)은 드디어 지방에 거점을 마련한 대학교에 입학한다. 부푼 기대와 달리 대학에선 혼란스러운 과정을 겪게 되고, 드디어 졸업하였으나 이들은 여전히 ‘K연극전공’의 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과연 무슨 까닭인 걸까?

〈K연극전공 망해라!(죄송합니다)〉의 공연 사진. 수현, 송희, 강석 세 사람이 서로 어깨가 닿을 만큼 가까이 붙어 무릎을 꿇고 상체를 숙이고 있다. 송희는 두 손을 감싸 모으고 위쪽을 바라보고, 강석 역시 위를 올려다보며 무언가 말하고 있다.

공연은 여러 화두를 던지는데, 연극의 서울 집중화 현상과 대학별 선형적 줄세우기 문화, 연극전공학과 내에서 교수자의 절대적인 권위와 교수자와 학습자 사이의 수직적인 위계질서 및 폐쇄적인 소통체계, 학과 내부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상황 등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니까 이 모든 총합이 바로 ‘K연극전공’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점들이 과연 이 세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일까? 소위 입시 서열에서 상위권이라 일컫는 학교의 연극전공자들 사정은 어떠할까? 이 공연에 ‘K’가 붙은 것은 분명 한국 특유의 성질을 고려한 것이리라 짐작된다. 예컨대 국내 연극 현장과 연극관련학과의 생태계가 직·간접적으로 밀착되어 있음을 주목해볼 수 있다. 현장 작업을 겸하는 교수자의 경우 학교에서의 관계가 사회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학습자는 그의 권위를 무시할 수 없게 된다. 자연히 교내의 수직적 위계질서는 공고해질 수밖에 없고, 도제식 문화는 교수자의 권위주의적 지배 질서를 고스란히 학습자 사회로 이행시킨다. <K연극전공>에서 등장인물들이 고통받는 까닭은 교수자가 조성한 환경에 따라 학습자 사회에서 분열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교수자는 졸업공연에서 연출을 맡은 학습자에게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고, 연출 중심의 수직적 소통체계가 형성되며, 공연의 기준은 교수자의 선호 정도에 달려 있으니, <K연극전공>의 등장인물 및 졸업공연 참여자들은 수평적이며 독립적인 안전한 창작환경을 경험하지 못한다. 이 지점은 K연극 관련 학과를 전공하였다면 누구에게나 해당할 수 있는 문제적인 현실이다.
이처럼 실타래같이 얽힌 과거의 문제를 <K연극전공>은 재기발랄하게 풀어나간다. 상대의 입장을 다르게 해석해보고, 스스로 교수자가 되어 관객을 대상으로 하고 싶은 수업을 진행한다. 피해의식으로부터 비롯되는 자격지심을 해결하기 위해 ‘서울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에 가서 모교 커밍아웃하기’도 실행한다. 그 과정에서 대학명과 무관하게 서로가 서로에게 응원을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임을 경험한다. 이 일련의 과정 끝에 졸업 작품 재 합평회가 있다. 졸업 공연 때 함께 했던 사람들과 과거에 나누지 못했던 진심을 이야기하며 묻어두었던 문제를 직면하고, 분석과 성찰을 바탕으로 다음/사회를 향해 ‘나아가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마지막에 이르러 관객들과 함께 졸업 공연을 다시 만듦으로써 미래를 향한 걸음을 뗀다. 덕분에 관객들 또한 감히 말하지 못했던 내면 깊숙한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K연극전공 망해라!(죄송합니다)〉의 공연 사진. 송희, 강석, 수현 세 사람이 각자 졸업증서를 펼쳐 보이며 밝은 표정으로 포즈를 취한다. 세 사람은 각각 초록색, 보라색, 카키색 귀가 달린 니트 모자를 착용하였다.

한송희, 성수현, 김강석으로 구성된 독거 청년들은 오롯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관객과 나누었다. <K연극전공>이 매력적인 까닭은 이 지점에 있었다. 졸업 후 이제 막 현장에 나온 이들이 본인들에게 가장 와닿는 문제 현실을 공연화하고 담론의 장을 마련한 점이 유효했다. 작품 전반에 나타나는 진솔함이 관객을 향해 설득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학내사건을 소재로 하기에 소소하고 지엽적으로 읽힐 수 있는 화두임에도 ‘K연극’이라는 상징으로써 학교 및 연극 현장의 문제까지 길어온 것 또한 인상적이다. 공연의 형식과 연기도 흥미로웠는데, 파편적인 구성으로써 창작 랩과 춤, 조별 과제 형태의 PPT 내용과 영상 등을 통해 다양한 시청각적 재미를 경험하게끔 했다. 비록 서사의 짜임새에서 성긴 부분도 있었지만, 세 사람의 능청스럽고 재기발랄한 연기가 관객의 호응을 유도하며 그 지점을 보완해냈다. 사회초년생의 풋풋함이 묻어나면서도 심연에 자리한 깊은 감정을 표현해내기도 했는데, 다각적인 관점에서 독거 청년들은 앞으로 다양한 작업을 통해 표현의 스펙트럼이 넓어질 것이 기대되는 창작집단이었다.
<K연극전공>에는 K연극전공에 관한 반감과 연극을 향한 애정이 공존하고 있다. 망하길 기원하면서 동시에 사과하는 이중적인 마음은 그러한 까닭에서 기인한다. 독거 청년들은 이 작품을 통해 K연극전공을 졸업하고 애정하는 ‘연극’을 시작할 것이다. 교수자도 학교명도 무의미한, 오로지 ‘나’와 ‘동료’가 공존하는 세계를 일구어 나갈지도 모른다. 객석 뒤쪽 벽면에 붙은 독거 청년들의 작업일지가 극장을 나서는 과정에 눈길을 사로잡았다. “졸업공연”에서 겪은 일련의 과정으로부터 나아가기 위해 그 시간을 재해석하여 기록하고 표현한 내용들이었다. 비단 독거 청년들 뿐만이 아니라 여느 K연극을 전공한 학생과 졸업생들에게도 해당할 일이다. 모두 무사히 “졸업공연”이라는 통과의례를 넘어서, 안전하고 수평적인 환경 속에서 하고 싶었던 연극을 할 수 있기를, 부디 연극보다 사람을 더 주목하는 동료들을 만날 수 있길 바라본다. 이제 드디어 사회로 진입한 독거 청년들의 다음 작품은 또 어떠한 모습일지 기대해본다.

실패에서 비롯되는 또 다른 가능성

실패를 위한 실험실 프로젝트임에도 <언니의>와 <K연극전공>에서 ‘실패’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언니의>의 경우, 과거에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것이 실패하였음을 언급하지만, 역설적으로 관객들과 OH명의 소통으로부터 새로운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발견하게끔 했다. <K연극전공>은 실패한 ‘졸업’과 ‘졸업공연’을 이야기하지만, 관객과 함께 다시 졸업공연을 함으로써 심리적 졸업을 해버렸다. 이쯤 되면 ‘실패를 위한 실험실’이 실패한 것인가라는 유쾌한 질문을 하게 된다. 어쩌면 본 프로젝트가 내심 기원하는 것은 실패로부터 비롯되는 긍정적인 가능성이 아닐까 짐작하게 된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관람하지 못한 만큼 프로젝트에 관한 온전한 분석은 어렵겠으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있다. 이 프로젝트가 신진 창작자들에게 기꺼이 기회를 제공하였다는 점이다. 작품의 규모나 구성원의 경력을 가늠하지 않고 오롯이 도전과 실험을 위해 극장 공간을 열어둔 것만으로도 프로젝트의 미덕이 크다. 덕분에 관객은 새로운 창작자들을 만나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양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창작자도 관객도 실패를 용인하고 그 과정에서 미래를 기대토록 한다는 점에서, 이 프로젝트는 여러모로 유의미하다.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의 행보를 응원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진 제공: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 촬영: 박태양]

혜화동1번지 2024 실패를 위한 실험실(실.실.실)
OH명 <언니의 언니의 언니> X 독거청년들 <K연극전공 망해라!(죄송합니다)>

OH명 <언니의 언니의 언니>
  • 일자 2024.8.8 ~ 8.9
  • 장소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독거 청년들 <K연극전공 망해라!(죄송합니다)>
  • 일자 2024.8.11
  • 장소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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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정

장윤정
연극평론가. 연극평론과 드라마터그 활동을 한다.
공연에 따라 저마다의 미덕이 있으리라 믿는다.
사람과 글이 함께 성장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yjlife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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