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괴담에서 환담으로

극단 이방인 <캐빈방정식>

권혜린

제259호

2024.08.08

연극 <캐빈방정식>은 김초엽 작가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SF 연극으로서, 백화점 옥상 놀이공원에 있는 공중관람차를 배경으로 자매의 관계를 ‘국지적 시간 거품’을 통해 보여주는 작품이다. 특히 과학 이론을 결합해 가장 가까운 가족이더라도 같은 시간을 사는 것이 불가능함을 드러내면서 확장된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국지적 시간 거품’을 연구하던 물리학자 현화가 사고로 ‘시간지각 지연 증후군’에 걸려 혼자 생활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동생인 현지는 언니의 회복을 위해 노력한다. 여기에서의 회복은 느리게 가는 언니의 시간을 자신과 동일한 시간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어느 날 언니는 자신의 상황을 견디기 힘들다며 떠나고, 3년 뒤에 갑자기 관람차의 괴소문을 조사해 달라는 편지를 보낸다. 관람차에서 별다른 것을 발견하지 못한 현지는 편지로 언니를 소환하고 두 사람은 관람차에 함께 탄다.
극장에 들어서면 입구에서 ‘운행중’이라고 적힌 팻말을 앞에 둔 채 배우가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곧 관객들이 앉은 좌석과 좌석 사이의 통로를 체인으로 연결한다. 놀이공원에서 놀이기구가 출발하기 전, 체인을 연결하는 것과 맞물려 관객들은 저절로 캐빈 안에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관람차 탑승권’이라고 적힌 티켓을 받고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미 캐빈 입장이 시작된 것이다.

<캐빈방정식>의 공연 사진. 등받이를 젖힌 수동 휠체어에 한 인물이 누워있고 남색 반소매 상의와 검은 바지를 입은 인물이 조금 떨어져 서서 그를 바라본다. 베이지색 바닥에는 회색으로 격자무늬가 그려있고, 벽면과 기둥은 흰색이다. 서 있는 인물의 뒤에 위치한 기둥에는 다양한 수식과 그림이 그려져 있다. 기둥 아래에 둥근 단을 만들었고, 단 위에 흰색 1인용 책걸상을 두었다.

각각의 우주-시간을 인정하기

입장 후 관객들이 경험하는 것은 사람 사이의 거리와 관계, 감정에 대한 것이다. 두 사람은 비록 같은 장소와 시간에 계속 있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서로에게 느린 안부를 전하는 과정에서 감정의 교류가 나타난다. 현화가 보조 기기로 한 자 한 자 느리게 건넸던 말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일상적으로 하는 흔한 안부 인사인 ‘잘 지내’였다. 또한 견딜 수 없다고 하면서 도망칠 때도, 다시 찾아왔을 때도 ‘고마워’라는 말을 건넨다. 현지가 자신의 언니는 불행마저 특별했다고 했던 것과 달리, 현화가 현지에게 전하고 싶었던 진심은 가장 평범한 것이었다. 안부 인사를 한다는 것은 물리적 거리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고맙고 사랑하지만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떠나야 할 만큼 끔찍한 관계”가 일종의 원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작품에서 모든 것에 원인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와 같은 관계가 원인이 되어 떠나게 된 이후에야 제대로 된 안부 인사를 건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작품에서 “시간은 객관적이지도 공평하지도 않다”라고 했던 것처럼, 각각의 우주에서 서로 다르게 흘러가는 시간은 함께 살아가는 것조차 쉽지 않고 사실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단 자매가 순간적으로 멈춘 채 동일한 시간을 잠깐 사는 순간은 가능하다. 그 순간은 “적합한 조건과 상황”을 전제로 한 캐빈방정식의 시간 속에서 실현된다. 계속 같이 있는 것은 견딜 수 없지만 ‘국지적 시간 거품’에서 띄엄띄엄 만나는 것은 괜찮다. 두 사람의 시간은 평행선으로 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교집합으로써 ‘국지적 시간 거품’에서 잠시 만난다. 중첩된 시간 속에서 관람차 괴담은 언니의 ‘확실한 계산’을 담아 ‘감지’하는 감정의 과학이 된다. ‘수많은 주머니 우주’가 있는 것처럼 각각의 우주를 인정하며, 서로 거리를 둔 상태에서 건네는 안부 인사가 가장 평화롭다. 이처럼 이해가 아닌 인정만이 서로를 오해하지 않을 수 있게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퍼지는 관람차 괴담은 비일상적이지만 유물론자인 언니가 그곳에서 ‘국지적 시간 거품’을 발견했을 때 그것은 유일한 실체가 된다. 그리고 그제야 귀신과 핏자국으로 이루어진 소란스러운 괴담은 두 사람이 정답게 나누는 이야기인 환담이 된다. 동시적으로 주고받는 대화가 아니라 ‘나’가 비로소 언니의 생각을 깨닫고, 언니의 웃음을 보며 감정과 느낌을 나누는 시간 차의 이야기인 것이다.

<캐빈방정식>의 공연 사진. 벽면에 커다란 글자로 ‘고마워, 사랑해. 더 견딜 수 없었어.’라는 문구가 커다랗게 영사된다. 한 인물이 이를 바라보며 팔짱을 끼고 서있다.

연극 <캐빈방정식>은 원작을 대부분 따라가지만, 각색된 부분들도 있다. 원작에서는 논문을 전달했던 대학원 친구와 잠시 만났던 애인이 별개의 인물이자 미미한 인물이지만, 연극에서는 둘을 합쳐 애인이 비중 있게 등장한다. 알록달록한 주머니를 단 배우들이 관람차가 되기도 하고 주머니 우주를 표현하기도 하면서 웃음을 준다. 원작의 진지한 분위기와는 다른 유쾌함과 발랄함은 어려운 과학 이론을 상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또한 결말을 어떻게 표현할지 가장 궁금했는데, 자매가 앉아 있는 높은 의자를 세 명의 배우가 떠메고 와서 빙글빙글 돌리는 것으로 표현했다. 높이 멈춰 있던 의자가 돌아가는 것은 관람차를 직관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국지적 시간 거품’을 생각하면 오히려 반대로 설정하는 것이 좋았을 것 같다. 즉, “밖에서 보면 분명히 캐빈들이 등속으로 움직이는데, 안에서는 정상으로 갈수록 풍경도 시간도 멈춘 것처럼 느껴지는” 시공간의 상대성을 표현하기 위해 결말에서는 관람차가 멈추는 편이 극적인 효과를 주었을 것 같다. 영상을 활용하여 파동을 잘 느끼게 해주었지만 원작에 자주 나오는 “시간 왜곡 거품”이라는 표현처럼, 돌아가다가 어느 순간 잠깐 멈추는 느낌도 연극에서 경험하고 싶었다.

자유롭게, 그리고 뒤늦게 완성되는 연극

이 연극의 특징은 관객에게 관람의 자유를 한껏 허락했다는 것이다. 맥주를 마시면서 볼 수도 있고, 관람 중에도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조용하게 관람하는 분위기에 익숙했던 터라 갑자기 주어진 자유를 온전히 누리기는 어려웠다. 대체로 고요한 분위기였으나, 몇몇 관객이 사진과 동영상을 찍는 것을 따라 용기를 내 휴대폰을 들 수 있었다. 관객 참여의 기회도 많아 반응이 좋았다. 배우가 관객에게 다가가 휴대폰을 주면서 자신의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하고, 텔레비전 코드를 쥐여 주기도 한다. 관객이 배우가 내민 코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거나 다르게 행동하는 모습이 예기치 못한 즐거움을 주기도 했다.
찍을 당시에는 몰랐으나, 이와 같이 관객이 찍은 사진과 영상들은 연극이 끝난 뒤에도 작품을 채워 주고 완성해 주었다. 다르게 말하면 연극 <캐빈방정식>은 연극을 본 그 상황에서 완성되지 않았다. 연극을 볼 때는 텔레비전 바로 옆에 앉아 있어서 텔레비전 화면에 어떤 글자가 적혀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후 다른 관객들의 사진 속에서 ‘안테나 연결상태를 확인하세요’라는 문구를 볼 수 있었다. 흰 벽에 적힌 여러 기호와 수식도 한쪽 방향만 보였기에, 반대 방향은 다른 관객들이 찍은 사진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시간지연식은 중력장이 강한 곳에서 시간이 더 느리게 흐른다”라는 말처럼 연극을 보는 시간이 60분이 아니라 더 느리게 흐르면서 연장되는 느낌이었다. 연극 <캐빈방정식>을 공연하는 공연장이 거대한 캐빈처럼 느껴졌다면, 그 안에 모인 관객들도 ‘국지적 시간 거품’을 경험한 것이 아닐까? 또는 연극 자체가 하나의 캐빈방정식 같았다는 말로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캐빈방정식>의 공연 사진. 전반적으로 보라색 조명이 물든 공간에 노란색, 흰색, 파란색, 초록색 등 알록달록한 조명들이 비친다. 무대 가운데에 성인 허리보다 조금 높은 단이 앞에서 뒤로 길게 설치되어있고, 그 위에 놓인 플라스틱 등받이 의자에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이 웃음을 터트린다. 단의 아래 좌우에서는 두 인물이 단에 기대어 단 위에 앉은 이들을 응시한다.

[사진 제공: 극단 이방인]

극단 이방인 <캐빈방정식>
  • 일자 2024.7.25 ~ 8.4
  • 장소 연희예술극장
  • 원작 김초엽 각색 엄예솔, 정승환 연출 엄예솔 출연 공지수, 정연주, 최문혁, 김도이, 백하형기 총괄프로듀서 신재철 기획프로듀서 오영현 그래픽 2roomperson 무대감독 엄성현 조연출 박주희 무대디자인 정승환 조명디자인 김지우 음향디자인 이현석 영상디자인 한서연 의상디자인 김동희 주최/주관 엄예솔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이방인, 연희예술극장, HOKISIM, 길자스페이스디자인, 만유인력
  • 관련정보 https://www.instagram.com/p/C9CXjt0P0xM/?igsh=ZDgxenRrMDZyaTNz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선택 버튼

권혜린

권혜린
작가, 강사, 문학 연구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더 자유롭게 읽고 쓰기를 꿈꿉니다.
lingi31@hanmail.net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