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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조 안팎에서 숨을 쉬려면

2024 국립정동극장 세실 [창작ing] 춤추어라 빨간구두야 <고등어>

이서연

제255호

2024.06.13

연극 <고등어>는 소문의 주인공인 열다섯 살 경주와 경주를 뒷담화하는 친구들에게 바른말을 했다가 관계가 틀어지는 열다섯 살 지호의 이야기이다. 이차 성징이 시작되는 두 열다섯 살을 소개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경주는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담배빵, 칼빵, 남자친구의 이름을 팔에 새긴 모습. 조건만남을 한다더라는 소문의 대상. 하지만 지호에게 경주는 ‘뽀얀’, 완벽해서 부러운, 줄무늬 양말을 신은, 과학 시간에 배운 터무니없는 ‘용해도’ 노래마저 아름답게 흥얼거리는, 계속 시선을 잡아두는 사람이자 친해지고 싶은 잠정적 친구이다. 같은 반에서 만나기 전, 지호는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경주를 본 적 있다. 경주의 귀 뒤 푸른 점이 지호를 사로잡았다. 고등어는 파래, 파라면 지구, 지구는 창백한 푸른 점, 푸른 점은 경주. 지호는 어쩌면 경주의 푸른 점에서 고등어 또는 세계 또는 지호 자신을 이미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지호는 경주를 보고 있다. 경주는 세상의 소음을 차단하려는 듯 헤드셋을 쓴 채 수조 안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고등어>의 공연 사진. 정육면체 모양의 철제 프레임 두 개를 이어 붙여 만든 수조 앞에 헤드폰을 끼고 흰 백팩의 어깨끈을 가볍게 쥔 채 허공을 바라보는 경주가 있다. 그의 뒤편으로 경계심 넘치는 표정의 지호와 호기심 넘치는 표정의 존재들이 경주를 바라본다. 경주와 지호는 교복차림이고, 존재들은 각자 짙고 연한 파란색의 사복을 입었다.

‘존재’에 힘입어 우정으로 소문과 싸워서 비기기

‘존재’로 불리는 이들은 의성어를 뱉고, 춤과 랩을 선보이고, 지호가 쓴 쪽지와 레몬 사탕을 경주에게 전해주고, 지호와 경주의 메시지를 읽어주는 목소리가 되고, 같은 반 학생이 되고, 돌봄에 지친 지호 엄마가 되고, 통영 어부가 된다. 이들이 무엇이고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존재들을 통해 이 극이 온전히 지호와 경주의 이야기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이 존재들은 지호와 경주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서 무엇이든 되기 때문이다. 이 여러 역할들은 서사만 두고 보면 기능적인 역할들로 보이지만, <고등어>는 연극이기에 ‘존재’를 맡은 배우들이 역할을 수행하며 발생시키는 에너지에 초점을 두고 싶다. 이들의 존재감은 고등어보다도 먼저 벽을 깨고 객석으로 넘어온다. 존재들은 관객에게 지호와 경주를 소개해주고, 둘을 따돌리기도 하고, 둘의 우정을 강화하기도 하고, 둘을 배에 태우기도 하고, 둘과 고등어를 나눠 먹기도 한다. 각 ‘존재’들은 같은 몸으로 다른 몸들이 되면서 지호와 경주 곁에 있다. 연극의 서사는 지호와 경주를 보여주지만, 지호와 경주가 차지하는 서사 비중만큼 ‘존재’들은 연극 안에서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부피를 차지한다.
어린 지호는 엄마에게 조용히 좀 하라며 혼난 이후, 말하는 사람보다는 쓰는 사람에 가까워진 것 같다. 경주에게 쪽지를 쓴 당일, 늘 무언가를 쓰는 지호는 엄마 욕, 같은 무리 친구들의 욕을 잔뜩 적어놓은 빨간 일기장을 잃어버린다. 이를 훔쳐 읽은 친구들은 잔인하고 계획적으로 급식소에서 일기장을 꺼내며 지호를 공격한다. 결국 지호는 “걔가 - 했대”라는 말만 들리는 급식소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한다. 그날 밤 지호는 경주에게 돌연 메시지를 받는다. “괜찮냐?” 한 마디로 시작된 대화는 한밤중 하천 다리 밑 만남으로 이어진다. 지호와 경주는 경주가 훔쳐 온 엄마 애인의 화분을 함께 깨부순다. 이 순간 무대 양옆에 위치한 스크린에서는 반짝거리는 빛의 파편들이 튀어 다닌다. 지호와 경주의 답답함이 약소하게나마 해소되기를 바라듯이. 둘은 이제 막 친구가 된 게 이상할 정도로 상의도 하지 않은 둘만의 핸드 셰이크를 완벽하게 해낸다.
경주는 소문 따위 아무것도 들리지 않다는 듯 버텨왔지만, 친구인 지호가 그 자리에 있어서 그랬을까. 급식실에서 소문 공장을 가동하자 경주는 참지 않고 식판을 그 애(어떤 존재) 머리 위로 쏟는다. 밥알이 들어가는 동시에 말을 전하는 입들은 바빠지고 지호는 사라진 경주를 찾아 나선다. 지호는 불현듯 경주의 푸른 점을, 노량진 수산시장을 떠올린다. 지호는 곧장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열차의 파란 바닥 위에서 생선 냄새를 맡으며 경주에게로 향한다. 경주는 텅 빈 수조 앞에 서 있다. 경주는 수조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너무 죽지도, 너무 살아있지도 않은 고등어 같다고 털어놓는 경주의 말을 경청하던 지호 대신, 너무나 살아있는 지호의 장기가 요동치며 대답한다. 지호는 컵밥으로 허기를 채우며 마취된 채 죽은 듯이 살아있는 고등어 말고, 수조 안에서 살아있는 고등어 말고, 펄떡이는 고등어를 보러 가기를 제안한다. 경주는 통영으로 갈 차비를 걱정하는 지호에게 가방 앞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현금을 꺼내 보여준다.
버스를 타고 통영으로 가는 둘은 ‘수조 밖’과 가까워지는 듯했다. 통영에 도착했으나 어린 자신들을 태워주지 않고 배가 떠나자, 용감무쌍한 중2들은 어선 끝에 냅다 매달린다. 이때 조명은 가장자리에서 지호와 경주를 비추어 이들의 그림자가 벽에 크게 묻는다. 이들의 불만과 용기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고등어잡이 배에 겨우 올라탄 둘은 까만 풍경을 보면서 애들이 하는 얘기가 진짜일지 묻는 경주에게 지호는 우리가 여기 있는 게 진짜라고 답한다. 수천 마리의 고등어를 마주한다. 다시 터미널, 경주는 좀 더 머물기로, 지호는 서울로 떠나기로 한다. 서울로 돌아간 지호는 경주와 처음으로 놀았던 하천을 다시 찾는다. 깨트린 화분에서 스스로 자란 꽃을 보며 경주의 부재에서 경주의 존재를 느낀다. 칠흑 같은 통영 하늘과 바다 한가운데서 조잘거리는 지호에게 쓸데없이 예쁘게 말한다며 작가나 되라던 경주의 말에 “두고 봐, 진짜 쓸 거야······.” 라 답했던 지호는 다시, 계속해서 무언가를 쓴다.

<고등어>의 공연 사진. 교복을 입고 머리를 높게 하나로 묶은 지호가 책상에 앉아 들뜬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한다. 그의 뒤편으로 존재들이 웃음 짓거나 서로를 부둥킨 채 서 있다.

수조 바깥이 있을까

지호와 경주가 올라탄 고등어잡이 배는 수천 마리의 고등어를 포획했고, 그 순간 천장에서는 언급된 것만큼 많아 보이진 않는 흰색과 파란색 공들이 우수수 무대 위로 쏟아진다. 팔딱이는 지호와 경주는 잡힌 고등어 몇을 바다로 풀어준다. 즉, 그 공들을 객석으로 던진다. 어떤 관객은 그 공을 잡는다. 연극이 끝난 뒤 안내원은 관객들의 퇴장을 도우며 공을 잡은 분께 반납을 부탁드린다는 안내를 외치고 있었다. 고등어는 연극 안팎에서 상품으로 전락한다. 극 중에서도 지호와 경주는 처음에는 주저하다 선장의 거듭되는 제안에 갓 잡아 살아있는 귀한 고등어 살점을 맛본 뒤 감탄한다. 지호와 경주가 자신들의 상징물을 먹었듯이, 그 수천 마리의 고등어는 누군가의 영양과 허기를 채우기 위해 팔릴 것이다. 어떤 관객이 공을 잡고, 이를 다시 회수하는 극장이 있는 것처럼.
수조 바깥은 무엇일까? 성인이 되는 일? 학교를 벗어나는 일? 어딘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 통영으로 가기 위한 경비를 꺼낼 때 경주는 그 돈을 가리켜 몸 판 돈이라는 말을 장난처럼 뱉는데, 이에 당황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지호에게 웃으며 ”진짠데?”라고 날리듯 말한다. 가볍게 툭 뱉듯이 그려지는 이 말은 경주가 소문의 대상이었음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극은 유쾌하고 발랄하지만 씁쓸함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기에, 이 말은 질문을 만들어낸다. 연극에서도 말하듯이 하늘이든 땅이든 이야기든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알 수 없다. 경주는 ‘답답한 집구석’이라고 말하면서도, 나한텐 안 웃어주는 엄마가 애인 때문에 웃는 게 짜증 나면서도 좋은, 예전의 언니를 그리워하는, 〈Home Sweet Home(즐거운 나의 집)〉을 부르는 복잡한 진짜이다.

<고등어>의 공연 사진. 마주 보고 선 지호와 경주가 한 손을 활짝 펴 맞대고 웃음 짓는다. 그들의 뒤로 몸을 낮추고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이 광경을 바라보는 두 존재가 있다.

수조 바깥을 희망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다. 정말 바깥으로 나가면 자유롭게 팔딱거릴 수 있는 건지, 또 다른 바깥이 생기는 게 아닌지, 지호와 경주가 말했듯이 용해도·주기율표 같은 노래가 아니라 답답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학교에서 알려줘야 하는 것 아닌지, 수조 안에서 겨우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무언지, 수조 바깥에서는 숨 쉴 수 없음을 알면서도 바깥만 바라보게 하는 세계를 곱씹어본다.1) 간혹 일부 배우들은 무대를 벗어나 객석 쪽에서 마이크를 사용하거나 무대와 객석 사이 경계에 앉아서 말한다. 이는 정해진 곳을 조금이라도 벗어나 어디서 어떻게 진동할지를 고민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호는 눈 감으면 경주가 보이고 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을 꼭 감는다. 연극은 그 간절함을 들어주는 것처럼 통영 바다로 추정되는 파도 소리와 경주의 소리로 가늠되는 〈Home Sweet Home〉 허밍을 들려주며 새벽 바다 같은 어둠과 함께 막을 내린다. 다시 불이 들어오면 배우와 관객은 (고등어 공과 배우들의 몸으로 약간 깨진) 제4의 벽 너머로 인사를 나눈다. ‘현생’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충남에 이어 학생인권조례가 폐지된 현실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 다른 게 아니라 그냥 다르게 여겨질 뿐인 수많은 경주들은 (아무리 진부한 말일지라도) 그저 자신을 자신으로 바라봐 줄 지호들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지호는 경주를 찾으러 가는 길에 파란, 비릿한 냄새가 나는 1호선을 탔다. 나도 극장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1호선에 올라탔다. 파란 바닥 위에서 복잡한 냄새를 맡으며 지호가 경주에게 건넸던, 경주가 선장에게 선물로 던졌던, <고등어> 창작진이 관객들에게 나눠준 레몬 사탕 한 알을 손에 쥐고서.

<고등어>의 공연 사진. 무대에 푸른 조명이 가득하고, 교복 위에 구명조끼를 입은 지호와 경주가 각자 오른손을 강하게 마주 잡고 있다. 지호는 굳게 서 있고, 경주는 맞잡은 지호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듯 앉은 자세다.

[사진 ⓒ국립정동극장]

2024 국립정동극장 세실 [창작ing] 춤추어라 빨간구두야 <고등어>
  • 일자 2024.5.29 ~ 6.13
  • 장소 국립정동극장 세실
  • 작가 배소현 연출 최재영 출연 이유진, 하예은, 김예진, 박지영, 공아름, 김민형, 윤동성, 신미래, 김도형 드라마터그 홍혜련 조연출 전준구 음악감독 옴브레 음향디자인 박민희 무대디자인·무대감독 신재경 조명디자인 강정희 의상디자인 김민우 영상그래픽디자인 정원교 무대제작협력 황규동 주최·주관 (재)국립정동극장 작품개발 극단 춤추어라 빨간구두야
  • 관련정보 https://www.jeongdong.or.kr/portal/bbs/B0000252/view.do?nttId=9054&menuNo=200002
  1. 이 글을 쓰면서 수연의 도움을 받았고, 계급을 생각하며 이야기를 다시 볼 것을 제안 받아 『랭스로 되돌아가다』를 다시 읽었다. 글 안에 인용할 재주가 없어 일부 소개한다.
    “나는 학교 체계가 우리 눈앞에서 작동하는 모습 속에서 진정 사악한 기계를 보지 않을 수 없다. 민중 계급의 아이들을 배척하고, 계급적 우위 및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차별적인 접근 기회를 영속화하고 정당화하는 것. 그 기계는 설령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이러한 결과에 다다른다. 학교는 피지배자들에 맞선 전쟁이 벌어지는 전장 가운데 하나다. 교육자들은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그들이 사회질서의 거역할 수 없는 힘에 대항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거나, 있다손 치더라도 아주 미미하다.” 디디에 에리봉, 이상길 옮김, 『랭스로 되돌아가다』, 문학과지성사, 2021, 138-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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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연

이서연
관객, 주6일 커피 파는 사람. 공연을 위한 홍보물을 디자인하거나 기록을 위한 사진을 찍습니다. <타임스퀘어>, <sf 식당>에서 사진을, <교교교>에서 디자인/사진을 맡았습니다. cacahueteetchataig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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