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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간.wav

[이 편지는 연극에서 시작되어] 목소

목소

제262호

2024.09.26

[이 편지는 연극에서 시작되어]는 두 편지글로 이루어진 대화입니다. 사운드 디자이너 목소가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그 누군가로부터 도착한 답장을 함께 싣습니다.

기사의 제목인 “***_***.wav”는 두 필자가 제목으로 선택한 말들을 나란히 놓고, 사운드 파일의 확장자를 붙인 형태입니다. 서로는 서로가 어떤 말들을 선택했는지 모르고, 기사의 제목은 편집부가 그 말들을 수신할 때 완성됩니다.

이번 편지는 사운드 디자이너 목소가 [이 편지는 연극에서 시작되어]에 띄우는 마지막 편지입니다. 극장에서 보내온 이 편지의 무수한 답장들을 언젠가 어느 극장에서 받아볼 수 있길 기다립니다.

당신에게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여름이 서서히 물러나고 있습니다. 이 글이 아마도 이 지면을 빌려 쓰는 마지막 편지일 것입니다. 그간 많은 편지들이 극장에서 쓰였습니다. 극장에서의 제 업무 또한 무언가를 송출하는 것이니 매체에 차이가 있을 뿐 그리 다른 일은 아니었다 생각합니다. 극장이라는 곳은 결국 송신과 수신의 공간입니다. 당신은 이 표현에서 배우와 관객의 사이를 떠올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직업 탓인지 그보다 먼저 음향이나 조명 장비들의 시그널과 무대 뒤의 스태프들을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2년 전 <환등회>라는 공연의 공동 연출을 맡았을 때 프로그램 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일이 있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낯선 목소리들을 향해 극장이 넓게 열릴수록, 그 뒤의 분주하고 농밀한 어둠이 자꾸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감은 눈 안으로 무대 뒤의 동료들을 생각했다. 숨죽여 극장의 대기에 녹아든 채로 정교하게 약속과 환상을 만드는 사람들. 때로 인터컴을 착용하고 있으면, 염려하며 교신하는 소리들이 밤하늘과 같은 극장의 어둠에 길게 검은색 호를 그리는 것이 보인다.

동일한 목적을 향한 수십 번의 들리지 않는 교신이, 콘솔을 통해 시그널을 정확히 송신하는 오퍼레이터의 손짓이 매 회차마다 안전하게 하나의 세계를 이룩해 냅니다. 실은 무엇보다 그 질서를 사랑하기에 기꺼이 극장의 어둠 속에 머무르는 듯합니다.
극장의 시간은 선형적이며, 일정표에 의해 엄격히 분할된 시간입니다. 그러나 연극은 과거와 미래, 그 어느 시간으로도 갈 수 있습니다. 게다가 공연 중이 아니라면 극의 어느 도중으로도 마음대로 이동할 수가 있습니다. 큐를 건너뛰고 다시 되짚어오며 여러 번 같은 순간을 다시 살 수도 있습니다. 저는 몇 번이나 시간을 이동하며, 돌이킬 수 없는 미래와 닥쳐 버린 과거 같은 것을 생각합니다. 시간 밖의 것들을 생각합니다. 폐기된 세트들과 영영 사용되지 않은 음악을 생각합니다. 아무도 보지 못한 극장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떠나온 연극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극장 밖의 시간을 생각합니다.
20년 전 저는 세상이 나아지는 중이라 믿었습니다. 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내심 단선적인 진보의 환상을 신뢰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시간은 미래의 것으로는 상상해 본 적 없는 종류의 것입니다. 삶을 뒤흔드는 어떤 불가역성의 예감에 깊은 슬픔을 느끼며, 그것을 채 소화할 새도 없이 이내 작업 속으로 잠겨들고 맙니다.
그 20년 전, 광장 언저리를 자주 서성이곤 했습니다. 랩을 통해 무언가를 말하고자 했습니다. 지금은 극장 안팎에서 소란과 고요를 동시에 응시하며 듣는 것에 대해, 함께 듣는 것에 대해 생각합니다. 2010년대 중반 연극을 만난 제가 매료되었던 것은 연극 자체보다 오히려 극장과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약속만으로 우리가 겪어 본 적 없는 시간 또한 불러낼 수 있으며, 몇 번이라도 세계를 지었다 허물 수 있는 곳에서 가능한 여러 방향의 힘 말입니다. 다른 시간들을 함께 상상하며, 멀리서 들려오는 작은 신호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기울이며, 누군가 지금 정말로 듣고 있을 소리들을 당신에게 송신합니다.

음성 신호의 주파수를 조율해 음역을 유지하는 오래된 이퀄라이저 장비가 높이 위치해 있고, 위쪽으로 손을 뻗어 그것을 조정하는 한 여성의 뒷모습이 화면을 그득 채운다.
New Order <The Perfect Kiss>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도착하는 시점에 따라 이 편지의 여러 문장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과거의 흔적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삶의 어느 순간 유난히 잘 들리는 소리와 마주치게 된다면 극장의 마음을 한 번쯤 떠올려 주기를 부탁드립니다. 당신이 함께해 주었던 긴 대화들의 행간을 가끔 꺼내 보며, 저도 극장에서 당신의 시간을 생각하겠습니다. 부디, 몸과 마음 모두 건강히 한 시절을 건너기를 기원합니다.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2024년 추석, 목소 우정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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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의 연습을 통해 ‘들리는 것’과 ‘듣는 것’에 대한 질문을 수행 중이다. <앨리스 인 베드>, <홍평국전>, <우리는 농담이(아니)야>, <스푸트니크> 등에 사운드 디자인으로 참여했다.
인스타그램 @morceau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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