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이 도시철학자로 거듭난 거리의 연극청년
[김은성의 연극데이트] 연출가 이경성
김은성_극작가
웹진 20호
2013.03.21
- 인터뷰 말미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역대 최악의 인터뷰였습니다. 정리하려면 큰일 났네요. 왜 이렇게 말을 못하세요?" 잠시 호흡을 고른 그가 답했다. "저 원래 말 잘해요. 말 잘하는 것, 나한테 쉬운 일입니다. 말 잘하는 사람, 사기꾼 되기 쉬워요. 그럴싸한 말들은 최대한 안하려고 노력합니다." 시종일관 차분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의 연극여정을 들려준 이경성의 '준비된 텍스트 없는 연극세계'로 우리, 잠시 멈춰 서서 들어가 보자.
대본 없이 만드는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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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은 어떤 작업을 준비 중인가?
<서울연습 - 모델. 하우스> 라는 공연을 만들어 가고 있다. 4월 23일부터 5월 18일까지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될 것이다.
연습은 얼마나 진행 되고 있는가?
초반부 장면 만들고 있는데 중간에 한번 뒤집어엎은 후라 요즘은 약간 머릿속이 뒤죽박죽인 상태다.
어떤 공연인가?
여섯 명의 배우들이 각자의 과거부터 시작해서 현재 도시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감각하고 인식하는 도시적인 풍경들을 재료로 삼아서 어떤 캐릭터를 만들어내고 각자의 무늬를 만들어가는 작품이다.
무늬?
'터에 새겨진 무늬'를 의미하는 '터무니'라는 말이 있다. 건축가 승효상 선생의 건축언어를 통해서 새롭게 느낀 말이다. 도시에 어떤 무늬들이 새겨져 왔고, 어떤 무늬들이 덧대어 갈지 생각해보는 공연이 될 것이다. 이 시대 도시를 살아가는 여러 층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시각화하고 구조화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번에도 대본 없이 준비하는 공연인가?
그렇다. 텍스트로 사용할 수 있는 재료들을 수집해서 배우들의 행위나 다양한 연극적 장치들로 구성해가는 과정이다.
대본 없이 공연을 만들어가는 작업을 많이 하는 이유는?
연출경험 초창기였는데 극작가가 써놓은 텍스트를 가지고 연출을 하는 게 창작자로서 성이 안차는 느낌이 있었다. 미술 같은 분야는 작가가 세상을 텍스트로 삼아서 직조를 하는데, 연출도 작가가 써놓은 대본을 가지고 하는 것보다 연출이 혹은 함께하는 구성원들이 본인들의 세상을 텍스트로 삼아서 공연을 만들어 가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다른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바젤의 소년, 연극과 만나다
언제 어디서 태어났나?
1983년 스위스의 바젤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까지 지내다 한국에 왔다. 88년 초에 한국에 들어왔다.
바젤에서 태어난 이유는?
부모님이 유학중이셨다. 신학과 종교철학을 공부하러 가셨던 거다. 바젤대학교가 신학과 철학의 전통이 아주 강한 대학으로 알고 있다. 니체, 야스퍼스, 융도 바젤대학 출신이다.
고향에 대한 기억은 남아있나?
바젤은 작은 대학도시인데 전원적인 작은 마을이 기억에 남아있다. 아침에 부모님 손을 잡고 집을 나서면 아주 오래된 빵집에서 나던 빵 냄새도 기억에 남아있고, 몬테소리 유치원에 다녔는데 스위스 아이들과 같이 공부했다. 유치원에서는 독일어를 썼고 집에서 부모님과는 우리말을 썼다.
고향에는 언제 다시 가봤나?
몇 번 갔었다. 가장 최근에는 작년 10월에 다녀왔다. 많이 변했더라. 굉장히 작은 도시였는데 대형마트도 들어섰고, 한국식당도 생겼더라.
한국에 돌아와 적응은 잘 했는지?
잘 지냈다. 독일어도 금방 다 까먹었다. (웃음) 놀 궁리만 하는 어린이였다. 매일매일 내일은 무슨 놀이를 할까 고민하는 행복한 아이였다. 『톰 소여의 모험』을 좋아해서 한때는 톰 소여 흉내를 내며 학교에 다닌 적도 있다. 주머니 속에 귤껍질, 딱정벌레를 넣어서 맨발로 다니기도 했다.
연극에 대한 호감은 어떻게 갖게 되었나?
중학교 때 부모님 직장 때문에 미국에서 1년 중학교를 다녔다. 학교에 연극수업이 있었다. 연극경험을 처음하게 된 것인데 흥미를 느꼈던 것 같다.
그때부터 연극을 하고 싶다는 꿈이 생긴 건가?
아니다. 나는 모범생도 아니었고 문제아도 아니었고 어중간한 청소년이었다.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는 동안 여러 성극聖劇 을 경험했지만 장차 연극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토요명화 보는 것을 좋아했고,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감독의 길』을 읽은 후에 영화감독에 대한 꿈이 막연하게 생기긴 했지만 그나마 고등학교에 들어간 이후에는 막연한 꿈도 잊게 되더라.
공부에 많이 치였나 보다?
외국어고등학교를 갔다. 학교생활 자체만으로 끔찍한 곳인데… 지금 돌아봐도 정말 청소년기, 그 좋은 시기에 좋은 향기를 품지 못하게 하는 환경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나마 좋은 친구들이 있어서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 고등학생 때는 언론인이나 국제기구 같은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조금은 갑작스럽게 연극을 전공하게 되었다.
어떤 과정이 있었나?
수능을 봤는데 원하던 점수가 나오지 않았다. 재수를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전에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니?" 하시면서 연극영화과를 지원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물으시더라. 모집요강을 찾아보니 연극과 영화에 연출전공이 있는데 연기를 전공하는 친구들이랑 같이 다니는 게 더 재밌을 것 같아서 연극연출을 택하게 됐다. 큰 준비 없이 운 좋게 붙게 되었다.
- 요즘은 어떤 작업을 준비 중인가?
- 척박한 곳에서 피어나는 연극의 감동
대학생활은 어땠나?
처음 들어가서 약간의 쇼크가 있었다. 세상에 연극을 이렇게 하나? 군대 같은 분위기. 강압적인 위계질서, 군대식 집합… 학교생활에 고민이 많던 시기에 다행히 좋은 선배들을 만났다. 연극작업에 열중하는 선배들을 만나면서 서서히 적응해가기 시작했다. 연극이 점점 좋아지더라.
어떤 계기가 있었나?
1학년 때 학교 야외공연의 조연출을 하면서 관객과 처음 만났는데 그 희열이 컸다. 방학 때는 선배들과 함께 프랑스 아비뇽페스티벌을 보러 갔었다. 연극과 삶이 섞여있는 그 향기가 진하게 다가왔다. 이전에 내가 학교나 대학로에서 경험했던 연극의 뭔가 무겁고 암울한 느낌이 부담스러웠는데 아비뇽의 기운이 참 좋았다. 그런 기운들이 한국에서도 잘 형성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 생각이 어떤 공부와 작업으로 이어졌을지 궁금하다. 학생시절 경험한 작품을 들려 달라.
군대에 가기 전과 후가 좀 다른데, 군대 가기 전에는 뭐랄까 조금 쌘 작품, 강렬한 감동을 주는 그런 작품이 좋았다. 피터 쉐퍼의 「아마데우스」 같은 작품. 그래서 첫 연출작도 황지우의 「오월의 신부」를 골랐었다.
그렇다면 군대 다녀온 이후에는 어떻게 달라졌는가?
군대에서 잊을 수 없는 연극경험을 했다.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자대배치를 받았는데 연병장에 군대랑 너무 어울리지 않는 근사한 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저기서 야외공연 한번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군대에서 그게 가능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기회가 찾아오더라. 병장시절에 '부대 창설 행사' 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연극을 해보겠다고 대대장님을 찾아갔다. 마침 당시 부대 분위기가 구타, 총기사고 때문에 뭔가 문화행사가 필요한 때였다. 대대장 허락을 받아서 공연을 준비하게 됐다.
연병장에서의 야외공연이라, 어떤 작품이었는지 정말 궁금하다.
각자 사연을 가지고 있는 네 명의 남자가 등장해 낚시를 하면서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는 <사계>라는 연극을 쓰고 연출했다. 군 생활 30년의 원사, 중대장 대위, 이등병, 상병, 계급을 초월한 출연진이 구성됐다. 나무 밑에 땅을 파서 작은 호수를 만들어 무대를 만들고 훈련용 야전의자를 깔아서 객석을 만들었다. 재래시장에서 크리스마스 트리용 별 전구를 사다가 조명을 설치했다. 산전수전을 겪은 원사님이 공연 전에 대본을 손에 들고 덜덜덜 떨고 계시더라. 공연 후에는 다들 "조금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아쉬워하면서 나무 아래에서 맥주를 마셨다. 척박한 곳에서 연극이 피어나는 감동을 경험하게 된 거다. 연극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구나. 그런 가능성을 가지고 있구나. 체험하게 된 거다.
거리의 연극청년, 도시에 눈을 뜨다
그런 체험이 제대 후에 어떤 작업으로 연결 되었는가?
복학 후에 '실험극 연출실습' 수업에서 이철성 선생님을 만나게 됐다.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동안의 내가 겪었던 연극방식과는 또 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다. 말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깊은 체험을 느낄 수 있는 연극을 발견하게 된 거다. 선생님께 전화를 해서, 조연출 해보고 싶다고 말씀을 드리고 공연에 참여하게 됐다.
어떤 공연이었나?
2007년 서울역 일대에서 공연된 극단 비주얼씨어터컴퍼니 꽃의 <벽 in open space at 2030 project 서울역>(이철성ㆍ유영봉 연출)이라는 퍼포먼스 공연이었다. 서울역에서 오고가는 여러 사람들의 에너지를 리서치해서 공연을 만들었었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작해서 쇼핑몰 입구까지 이어지는 공연이었는데 음… 거기서부터 내 노선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노선이 달라졌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연극을 문학적인 텍스트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도 있구나. 장소도 극장이 아니었을 때 이미 그 공간에 존재하는 에너지와 기류를 가지고 연극을 만들 수 있겠구나 그런 가능성을 체험을 하게 된 거다.
그래서 어떤 작품을 만들었는가?
4학년 때 대학로 횡단보도 앞에서 공연을 했다. <초대>라는 작품이었는데 빨간불과 파란불이 규칙적으로 오고가는 건널목에서 와인파티를 열었다. 횡단보도 중간에서 정원사가 콘크리트 위에 꽃을 심는 퍼포먼스가 진행되는 동안 퍼포머들이 신호를 기다리는 행인들에게 와인을 따라주는….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공연을 진행을 하던 퍼포머들이 빨간불이 켜지고 차들이 지나다니는 횡단보도 위에서 서로를 안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작품이었다. 작품? 아니 그런 시도를 했었다.
다음 작품, 아니 다음 시도는 무엇이었나?
<드림 오브 산초>라는 야외공연을 했다. 돈키호테를 모티브로 삼아 돈키호테의 야성을 잊고 사는 현대인들의 이야기였다. 공식적인 데뷔는 그 공연으로 했다. 2008년 서울변방연극제 참가작이었다.
그 이후에는 어떤 작업들을?
2010년까지 내가 하고 싶은 작업을 계속해나갔다. 극장 공간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려는 시도로는 <움직이는 전시회>가 있었고, <드림 오브 산초>로 춘천마임축제에 참가한 후 영국 에든버러에 가서 공연도 하고 왔다. 그러다가 <당신의 소파를 옮겨 드립니다> 라는 '도시이동 연구 혹은 연극'을 통해서 앞으로 내가 나가야할 구체적 방향성을 찾게 됐다.
어떤 방향을 찾은 것인가?
<당신의 소파를 옮겨 드립니다>는 안무가, 건축가, 설치미술가 등 다양한 예술가들이 모여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도시에 대해 연구를 좀 해보자는 뜻이 모인 작업이었다. 광화문을 재해석한 예술가들이 각자의 지도를 만들면 관객들이 그 지도를 보고 광화문의 곳곳을 찾아갈 수 있게 하는 공연이었다. 그래서 관객으로 하여금 일상과 연극을 오고가는 경험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서 내가 살고 있는 도시공간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도시공간에 대한 문제의식?
도시가 잘 꾸며져 있지만 굉장히 통제되어 있다는 걸 느끼게 됐다. 굉장히 감시당하고 있는 공간이구나. 도시에 대해서 더욱 궁금해졌고 그런 궁금함을 도시공간 속의 공연으로 만들어가고 싶다는 의지를 갖게 됐다. 당분간은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이어가게 되지 않을까 싶다.
- 두려움과 만남의 에너지
한동안 작품이 뜸했는데?
작년에 공부를 하러 영국에 다녀왔다. 영국은 석사과정을 방학 없이 네 학기에 받을 수 있다. 내가 하는 작업들이 어느 지점에 놓여있나 감을 잡고 싶었다. 나의 공연 언어를 이론적으로 어떻게 정리를 할 것인가 점검하는 과정을 보내고 왔다.
앞으로 어떤 연극을 해나가고 싶은가?
음… 오태석 선생님의 인터뷰가 기억에 남아있다. "사람들이 청량음료를 좋아하는 것 같지만 마음속으로는 깊은 산속의 샘물을 그리워한다." 연극이 청량음료의 기능도 해야 하지만 근원적인 그리움을 건드릴 수 있는 그런 연극을 하고 싶다. 시대적으로 현대예술이 개념예술이다 뭐다 이런저런 추세가 있는데 내가 직접적으로 누군가의 삶을 통해서 감동을 전해주는 형태보다는 한편의 시 같은, 그러니까 누가 읽어도 각자만의 방식으로 해석이 가능한 모호하면서도, 에둘러 이야기하지만 각자 만이 가지고 갈 수 있는 그런 연극을 하고 싶다.
극장과 텍스트의 해체와 실험 역시 계속 되는가?
물론이다. 연극이라는 매체의 본질에 대해서도 질문을 해야 한다. 무대가 왜 필요한지, 거대 세트는 왜 필요한지, 오늘날 극장이 가지고 있는 기능이 대체 뭔지… 그냥 엔터테인먼트의 기능인지… 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질문을 해가면서 찾을 수 있는 연극을 계속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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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경하는 연극인이 있다면?
기국서 선생님. 존경하다기 보다는 좋아한다. 일단은 시대를 감각적으로, 시대와 함께하는 감각적인 세포가 있는 것 같다. 그것들이 독특하게 무대화가 되는 것 같다. 그분 자체가 그런 연극을 할 수 있었던 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경성이 생각하는 연극은?
만남이 아닐까? 만남을 통해서 만들어 지는 것이 연극은 아닐까? 그것에 포커스가 맞춰질 때 연극 작업을 이어 갈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런데… 김은성 작가는 실패를 두려워하는가?
실패를 두려워하냐?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는가? 답부터 하자면 엄청나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정말 많다.
나 역시 매번 두렵다. 그래서 물어본 거다. 대본을 가지고 하는 연극이 아니니까 연습하다가 막힐 때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없다. 대본도 없는 밑도 끝도 없는 저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니까… 기댈 곳이 없으니까…. 결국은 나 자신을 믿어야 되는데 믿었다가 의심하고 그것이 끊임없이 반복되니까!
- 존경하는 연극인이 있다면?
- 이경성 (연출가,공연작가)
극단 Creative VaQi 대표
2007년 Creative VaQi를 창단, 현재까지 대표 및 연출가로 활동해 오고 있다. 극장공간과 텍스트 위주의 연극을 넘어 미디어, 설치미술, 무용 작가등과의 협업하여 폐건물, 광장, 횡단보도 등의 삶 속의 공간에서 공연 만들기를 시도하며 보다 ‘통합된 예술작업하기’에 관심을 가진다.
주요작품
<침묵><움직이는 전시회><무빙스페이스>
<당신의 소파를 옮겨 드립니다> <더 드림 오브 산쵸>
<냉장고 안의 토마토가 썩을 때까지 우리가 갈 수 있는 거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