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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_빈 무대 듣기.wav

[이 편지는 연극에서 시작되어] 김종우 X 목소

목소, 김종우

제256호

2024.06.27

[이 편지는 연극에서 시작되어]는 두 편지글로 이루어진 대화입니다. 사운드 디자이너 목소가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그 누군가로부터 도착한 답장을 함께 싣습니다.

기사의 제목인 “***_***.wav”는 두 필자가 제목으로 선택한 말들을 나란히 놓고, 사운드 파일의 확장자를 붙인 형태입니다. 서로는 서로가 어떤 말들을 선택했는지 모르고, 기사의 제목은 편집부가 그 말들을 수신할 때 완성됩니다.

목소 님께

편지를 보낸다고 하니 새삼 편지라는 글의 형식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일을 하면서 공적인 이메일을 주고받은 적은 더러 있었지만 이렇게 사적인 편지를 보내는 것은 아주 오랜만인데요. 그러면서도 이게 사적인 것인가? 공적인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서 목소 님께 최대한 사적인 말을 건네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기억하는 목소 님에 관한 것들을요.
처음 목소 님을 알게 된 건 목소 님이 목소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십여 년 전쯤이었나요. 제가 비어 있는 방과 그 방에 담긴 소리가 주인공인 공연에 드라마투르그로 참여했을 때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우습게도 저는 한동안 그때의 목소 님과 현재의 목소 님을 연결 짓지 못하고 있었는데요. 연극을 떠나 있던 기간 동안 어쩌면 많은 것들을 그렇게 잊어버리고 살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다 재작년에 <둘, 셋, 산책>이라는 공연을 준비하면서 그때의 그 분이 바로 목소 님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까맣게 잊고 있던 목소 님의 오래전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건 다 흐릿하지만 목소 님이 객석에 앉아 가만히 무대를 바라보고 있던 모습만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때 인사를 나눴었나요? 서로 대화를 주고받았었나요? 솔직히 그런 건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무대를 바라보고 있던 목소 님의 모습만은 이상하게도 제 머릿속에 온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목소 님, 그때 무엇을 보고 계셨나요? 무엇이 목소님에게 고요히 무대의 한쪽을 응시하도록 이끌었나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저는 그때 목소 님이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 보고 있었다기보다는 듣고 있었다는 말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니까 소리를, 미세한 진동을,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목소 님은 섬세하게 보려고 했던 게 아니었을까요? (물론 이렇게 말하면 목소 님은 웃으면서 “아뇨, 저는 별생각 없었는데요?”라고 대답할 것 같기는 합니다만 ㅎㅎ) 이후 공연을 함께하게 되면서 저는 목소 님이 극장의 어딘가에 앉아 그렇게 홀로인 시간을 지켜내고 있는 모습을 가끔 혹은 종종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자연스레 목소 님의 시선이 가닿은 곳의 이미지는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 보았습니다. 부족한 제 상상력으로는 쉽게 그 이미지를 추측할 수 없었지만, 이 글을 쓰는 동안 문득 윤정로 배우가 보내주었던 사진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지난 공연에서 윤정로 배우는 산책하는 길의 풍경을 찍는 연기를 하면서 실제 자신의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는데요. 일부러 객석을 피해 찍느라 극장의 천장 쪽 어두운 구석을 향해 셔터를 눌렀습니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흐릿하지만 한편으로는 밝은 조명 빛이 사진의 절반을 채우고 있는 그 이미지가 제게는 왠지 목소 님이 바라본 그곳의 모습과 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어 있지만 채워져 있고 포착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무언가를 포착한 것 같은 그 이미지가 제게 극장이라는 텅 빈 공간 속을 떠다니고 있는 무수한 소리들을 담아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면 괜한 비약일까요?

전체적으로 검은 바탕, 사진 상단에 반원형으로 밝은 빛이 퍼지는 이미지다. 사진 하단에는 희끄무레하게 형태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삐죽하게 드러나 있다.
촬영: 윤정로

마지막으로 <환등회>라는 공연의 한 장면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네요. 공연의 종반부에 목소 님이 무대 한가운데로 걸어 나와 조심스럽지만 능숙하게 마이크를 설치하던 모습을 말이에요. 저는 그 마이크가 꼭 객석에 앉아 극장의 한 곳을 응시하고 있는 목소 님의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다만 한 가지 달랐던 점은 목소 님이 객석이 아닌 무대 위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공연의 그 장면에서 저는 어떤 떨림 같은 걸 엿보았는데요. 동시에 너무 익숙해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미세한 소리들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마이크에 대고 직접 말하는 이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증폭된 소리도 없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잘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목소 님의 작업이 바로 그런 게 아닐까, 모든 소리에 귀 기울이기 위해 조심스럽게 마이크를 조정하고 그 어떤 소리도 흩어지거나 지워지지 않도록 섬세하게 애를 쓰는 작업 말이에요. 그리고 어쩌면 그건 목소라는 사람이기에 가능한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니 부디 건강하세요.
건강히, 그래서 오래도록 함께 작업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024년 6월의 어느 날
종우 드림





종우 님에게

편지 감사히 읽었습니다. 낯선 편지를 문득 받아드는 기쁨과 답장을 앞두게 된 부담을 역전해 느끼며, 이러한 일들이 어쩐지 여름의 날씨를 닮았다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그 열기와 설렘을 충분히 즐긴 후 느지막이 글을 시작합니다.
보내주신 편지를 열었을 때, 언제나처럼 극장에 있었습니다. 2층 조정실에서 무대를 넘겨다보며 한눈에 드는 만큼의 공간을 잠시 담았다가 흘려보냈습니다.
그리고 전날 술자리에서 셋업에 대해 다소 흥분해 쏟아낸 이야기들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운드 디자이너의 애환에 관한 푸념이었는데요. 잘 아실 테지만 촉박한 일정 탓에 셋업 기간 중 사운드 체크만을 위한 시간을 따로 내는 것은 요청도 확보도 좀처럼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운드를 체크할 때 혹시 다른 파트 작업을 조용히 병행해도 되겠냐는 조심스러운 부탁을 종종 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망설임 끝에 운을 떼었을 스태프들의 상황과 마음을 잘 알고 있기에 대체로는 그러한 제안에 긍정적으로 답을 하는 편입니다. 한데 그러한 진행이 실은 불가능한 일은 아닌가 곰곰 생각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그것이 그 밤 술자리에서 털어놓은 고민의 요지였습니다.
적정 레벨과 알맞은 톤을 만드는 것을 중심으로 하지만, 사운드 체크는 제게 사실 그보다 더 넓은 범위의 일인 듯합니다. 청각을 넘어선 리듬의 문제라고 거칠게 말해도 될까요. 아무리 조용하더라도 그 공간에 타인의 움직임이나 빛이 발생하는 순간 연속적으로 읽어내던 흐름에 다른 요소가 개입함으로써 제가 만들고자 했던 리듬을 놓치거나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셋업을 진행하며, 저는 무대의 여러 장소에서 그곳에 놓인 세트나 소품을 일종의 연속체로서 듣기도 하고, 배우의 움직임이나 대사를 머릿속에 불러낸 후 소리를 겹쳐 속도와 화음을 살펴보기도 합니다. 리듬 속에서 앞뒤, 좌우, 위아래로 소리의 이미지를 그려낼 때면 눈에 보이지 않는 선과 호, 때로는 도형이 공연마다 다른 질서를 타고 극장에 그려졌다 사라지곤 합니다.

검은 나무 바닥. 크기와 굵기, 모양이 제각각인 무수한 흔적들이 얕게, 혹은 깊게 패여 있다. 밝은 빛이 떨어지는 가운데 어스름한 형체의 그림자가 묻어 난다.
제공: 목소

극장은 유독 저에게 정물을 포함한 모든 것이 사건이 되며, 또 작은 사건들조차 크게 들리는 공간인 것 같습니다. 아마 일상에서보다 리듬에 더욱 집중하는 까닭이겠지요. 침묵이 극장을 메우고 있어도 순간들이 마찰하며 일으키는 요란함을 견디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한 연유들로 극장에 홀로 있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어 종우 님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느껴졌고, 또 극장 어딘가에 앉아 있는 저의 모습이 처음으로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 전 아마 식사 메뉴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 같지만요.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처음 만난 연극 또한 빈 방을 응시하는 공연이었지요. 연극을 준비하며 오랜 친구이기도 한 D의 집과 그 앞 골목에 머물면서 저는 시간을 녹음했습니다. 이렇다 할 사건이 없는 나른한 오후가 언제까지고 이어져서, 지루해질 때마다 소리의 거스러미들을 찾곤 했습니다. 지나고 나니 그 시간이 제법 훌륭한 듣기의 연습이 되어주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벌써 십 년도 더 지난 일이네요. 만약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엇에 귀 기울이고 무엇을 담으려 할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올 가을 다시 함께 극장에 들어가면 나란히 서서 텅 빈 공간에 그려지는 소리들을 오래 바라보아도 좋겠습니다. 일견 흩뿌려진 듯 보여도 제 자리를 찾아드는 합목적적인 소리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즐거울 거예요. 그때는 저도 종우 님의 시선이 가닿은 곳을 더듬어 보고 싶습니다. 그날을 기다리겠습니다.

2023년 6월, 목소 우정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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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

목소
듣기의 연습을 통해 ‘들리는 것’과 ‘듣는 것’에 대한 질문을 수행 중이다. <앨리스 인 베드>, <홍평국전>, <우리는 농담이(아니)야>, <스푸트니크> 등에 사운드 디자인으로 참여했다.
인스타그램 @morceauxx

김종우

김종우
다큐멘터리와 픽션, 극장의 안과 밖을 탐구하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프로젝트 그룹 ‘구르는 돌’의 일원이다. 연극 <모-래>, <둘, 셋, 산책>을 연출했다.
인스타그램 @jongwookim_1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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