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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시간을 기꺼이 기다리는 일이

[무엇을, 어떻게, 왜] 이래은 X 성수연

성수연(파이리)

제255호

2024.06.13

[무엇을, 어떻게, 왜]는 배우이자 창작자인 성수연이 진행하는 대화입니다.
동시대 창작자들이 무엇에 주목하고, 어떻게 작업하며, 그 일을 왜 하는지 들어봅니다.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날이 슬슬 더워지고 있네요. 아직 밤엔 공기가 선선해서 저는 친구와 종종 밤산책을 함께 하고 있어요. 두서없는 대화를 나누면서 웃기도 하고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문득, 이야기를 듣는 일은 공연을 보는 일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빨리 감거나 건너뛸 수 없고, 다 헤아릴 수도 없는 누군가의 시간에 잠시 함께하는 일. 그 시간을 소중히 나누기 위해 연극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요?
연출가 이래은 님과 대화를 나눈 기록입니다.



이래은
당근라페 좋아하세요? (당근라페를 꺼낸다)
성수연
저 당근라페 좋아해요. 잘 먹겠습니다. (당근라페를 먹는다) 와! 이거 엄청나게 맛있네요! 직접 만드신 건가요? 제가 먹어본 당근라페 중에 제일 맛있어요!
이래은
그래요? 괜찮아요? 다행이다.
성수연
정말 맛있어요. 진짜 맛있다. 어떤 레시피로 만드셨어요?
이래은
특별한 레시피는 없고, 그냥 재료들을 닥치는 대로 푹푹 떠서 듬뿍듬뿍 넣었어요.
성수연
정말 맛있어요. 진짜 맛있어요. 최고로 맛있어요.
이래은
진짜요? 다행이네. 다행이야.
성수연
와, 감사합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이래은
별로 바쁘지 않아서 이럴 때 할 수 있는 일들을 계속 생각하고 있어요. 사람들과 모여서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도 만들었었고요.
성수연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는 자리였나요?
이래은
<길을 막는 숲>이라는 제목으로 세 번에 걸쳐서 라운드테이블 자리를 여러 동료들과 같이 마련했었는데요. 처음엔 다양한 돌봄을 하고 있는 연극인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어요. 육아를 하고 계신 분들 중심으로요. 육아를 하다 보면, 누군가가 모이자고 나서주지 않으면 업계 관련 자리에 나오기 쉽지 않더라고요. 두 번째로는 기후위기와 관련된 공연을 만들고 있거나,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리고 세 번째로는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변화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만들어봤는데요. 그 시기를 통해 발견한 것들을 서로와 나누는 것에 집중하고자 했고요.
성수연
재밌고 좋은 자리였을 것 같아요. 그런 자리를 만드신 이유도 궁금하고요.
이래은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곳에 머물며 서로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서 듣는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경험으로 알고 있어요. 서로가 가늘게 이어졌으면 했어요. 그래서 동아 연극상 상금을 이런 자리 마련하는 데 사용하고 싶었어요. 돌봄 이야기하던 첫 모임에서는 딸기를 준비했어요. 저는 제가 돌봄을 받는다는 기분을 누군가가 밤을 까준다거나 딸기의 꼭지를 따줄 때 느꼈었거든요. 아무도 저의 딸기 꼭지를 따주지 않아요, 아무도.
성수연
지금 딸기 사 와서 꼭지 따드릴게요(웃음).
이래은
(웃음) 그래서 누군가를 돌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일상과 다른 감각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꼭지를 딴 딸기를 이만큼 가져다가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했어요(웃음).
성수연
찡하네요. 누군가가 꼭지를 따준 딸기를 먹는다는 것. 딸기를 나눠 먹으며 좋은 이야기를 많이 나누셨나요?
이래은
시간이 절대 부족할 만큼요. 돌봄을 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고립감은 굉장히 커요. 그래서 이런 자리가 이어지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육아 등의 돌봄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모임을 이어갈 수 있는 여력이 없을 수 있잖아요. 그들이 계속 나올 수 있는 터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잠깐씩 아이들 데리고 마실 나오면서라도 내가 현장과 동떨어지지 않고 있다는 감각을 느낄 수 있도록요. 육아뿐 아니라 앞으로 다양한 돌봄을 하는 동료들도 계속 늘어날 테고요. 이건 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이 대화를 보시는 분들도 예술가로서 시민으로서 같이 고민해보면 좋겠어요.
성수연
이런 모임을 통해 작업할 동력이나 살아갈 힘을 얻는 편이세요?
이래은
여러 마음이 섞여 있어요. 동력을 얻을 때도 있지만 기를 뺏길 때도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나는 자리를 마련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에요. 누군가가 어떤 만남이 필요하다고 하면 조금이나마 서로 이어질 수 있는 시간을 만드는 일이요. 만남은 필요해요. 한 번 만나고 다시 연락을 안 하는 사이가 되더라도 만났던 그 순간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 있으니까요. 또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안도하는 호흡들을 나누고 서로 눈빛들을 마주하는 것이 주는 힘이 있죠. 다 프린지에서 배운 거예요. 프린지에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들이 많았잖아요.
연출가 이래은. 짧은 커트 머리에 검은색 셔츠를 입었다. 긴 소매를 몇 번 접어 올려 왼쪽 손목에 카키색 밴드의 손목시계가 드러나 있다. 양 손바닥을 펼쳐 앞으로 살짝 내밀며 이야기하고 있다.
성수연
맞아요. 아, 그래서 프린지를 할 땐 덜 외로웠나 봐요. 저도 부끄러움이 많아서 적극적으로 모임에 참여하지 못하는 편인데 프린지에서는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니까요. 그런 만남을 만들어주시니 좋네요. (당근라페를 먹는다) 와, 맛있어.
최근에 <이것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이하 <이사이>)를 공연하셨지요. 초연과는 달리 더블캐스팅이었고, 저는 한 번밖에 못 봤지만, 듣기로는 두 팀이 완전히 다른 공연이었다고 하던데요? 연습을 어떻게 진행하셨을지 궁금해요.
이래은
작품분석, 워크숍, 기본 동선 잡기는 다 같이 했고요. 장면연습은 두 팀이 거의 따로 연습했어요. 연습실 공간에 칸막이를 치고, 그날 연습할 장면을 어떤 팀이 먼저 할지 가위바위보 등으로 정하고, 시간을 정해놓고 연습하고, 그 팀이 끝나면 다른 팀이 이어서 연습하고요.
성수연
연출부는 계속 일해야 했던 거네요(웃음).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이래은
네. “이래은은 왜 안 쉬어?” 해도 “안 쉬어. 쉬면 나 힘 풀려. 안 돼.” 그러면서 했어요. 연습실에서 연출부가 다른 공연에 비해 일을 더 많이 했어요. 두 팀에 모두 출연하는 박은호 배우님은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셈이기도 했고, 두 팀의 배우들이 각각 연기가 다르니 그에 따라 또 자신의 연기를 바꿔야 했어요.
성수연
그랬겠네요. 걱정되는 부분도 많으셨을 것 같아요.
이래은
제가 특히 걱정했던 건 ‘내가 양쪽에 다르게 디렉션 하면 어떡하지?’였어요. 저는 작업 중 연습실 동료들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아요. 그래서 그 순간순간에 집중하고 반응하면서 발견한 것을 나누거든요. 같이 있는 사람이 달라지면 연출적으로 발견하는 것도 다를 수밖에 없어요. 그랬는데 김태령 조연출님이 연습을 쭉 기록하고, 기록한 것들을 찾아 확인하면서 양쪽 팀에서 하는 제 디렉션이 같다는 걸 계속 확인해주셨어요. 안심하면서 작업할 수 있었어요.
성수연
접근성 회차도 있었잖아요. 당연하겠지만 두 팀이 달랐을 것이고, 모든 리허설을 두 번씩 했을 것이고, 진짜로 공연 두 편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겠어요.
이래은
어떤 장면은 아예 두 팀의 조명 디자인 자체가 달랐어요. 전체적으로 조명 큐, 음향 큐 타이밍도 많이 달랐고요. 그런데도 우연히 비슷한 순간이 생기던데, 그럴 때 재밌었어요. 비슷한 그림 찾기.
성수연
두 팀의 공연을 다 본 분들이나 프로덕션을 같이 하는 사람들만 아는 재미가 있었겠어요. 한정된 시간 안에 공연 두 편을 만드는 것처럼 하셨으니, 만드신 분들은 힘드셨겠지만 정말 대단하고, 또 의미 있는 일이 아니었나 싶어요.
이래은
연출 라인은 정해져 있고, 인물들이 해야 하는 행동은 같은데, 그 인물들이 각각의 배우의 해석과 만났을 땐 전혀 달라지더라고요. 같은 인물인데도 불구하고 다 달라지는 거예요. 놀라운 작업이었어요. 그게 작업 시간의 한계 속에선 어렵기도 했고요.
성수연
어렵지만 재밌었을 것 같아요.
이래은
재밌죠. 실은 재밌었어요. 그러니까 버텼던 것 같아요. 결과적으로도 굉장히 색깔이 다른 두 개의 공연이 나왔고, 관객분들도 두 개의 다른 공연을 각각 즐기셨죠.


사진작가가 등장한다. 모두 인사를 나눈다.
 
성수연
작가님, 당근라페 좋아하세요? 이거 이래은 연출님이 직접 만드신 당근라페인데 드셔보시겠어요? 정말 맛있어요.
사진작가
그럼 한 번 먹어보겠습니다. (당근라페를 먹는다) 우와. 음?! 음! 음!
성수연
진짜 맛있죠?
사진작가
네!
이래은
작가님,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사진을 찍으면 항상 무척 무섭게 나오거든요. 그래서 걱정이 많습니다.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며) 우리 다리를 꼬지 말아봐요.
성수연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며) 왜요?
이래은
이 자세는 몸에 해를 끼치잖아요. 사진 안에 몸에 해를 끼치는 자세를 남겨서 누군가가 잠깐이라도 그런 자세를 보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성수연
그럴 수 있겠네요. 자꾸 보게 되면 익숙하고 괜찮아지는 것이 있는데, 그게 좋은 경우도 있겠지만 좋지 않은 경우도 있겠어요.
이래은
맞아요. 아픈 몸 자체는 드러나도 되죠. 아니, 드러나야지요, 계속.
성수연
맞아요. 그러고 보니 아까 주변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하셨잖아요. 그만큼 본인이 주변에 영향을 미치는 일에 대해서도 섬세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이래은
실은 인터뷰하는 것도 무서워해요. 몰라요, 수연이 알아서 잘 정리하겠죠(웃음)? 수연은 이 대화 코너를 진행하면서 어떠셨어요? 2021년 가을부터 하셨지요?
성수연
네. 처음엔 대화를 글로 정리하는 것이 어려웠어요. 녹취를 풀고 재구성해서 정리하기까지 시간도 굉장히 많이 걸렸고요. 그러다 AI 음성기록 어플의 도움을 받게 됐고(웃음), 글 쓰는 것에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시간도 줄고, 재미를 느끼기도 해요.
배우 성수연. 회색 톤의 청색 셔츠를 입었다. 갈색에 노란색이 섞인 가슴께까지 내려오는 웨이브 머리. 환하게 웃고 있다.
이래은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어떠셨어요?
성수연
굉장히 좋았어요. 녹취를 풀고 글로 정리를 하려면 녹음된 대화를 계속 듣잖아요. 누군가의 말을 계속 듣고, 그 말을 글자로 바꾸며 계속 들여다보고 있으면 정리하는 동안에도 대화가 지속되는 느낌이에요. 아마 이 코너에서 저와 대화를 나누셨던 분들이 저에게 느끼는 친밀감보다 제가 그분들에게 느끼는 친밀감이 훨씬 클 거예요. 말씀을 드린 적이 없으니 그 어떤 분도 이 사실을 모르시겠지만 저는 혼자 그분들과 친하답니다(웃음). 아마 그 사람의 그 순간과 친한 것이겠지요. 대화를 나누는 일도, 대화를 다시 듣는 일도, 그것을 다시 구성하고 정리하는 일도 저에게 ‘듣는 연습’이 되고 있기를 바라는 중입니다.
이래은
좋네요.
성수연
그런데 저에게 이 부분을 이렇게까지 물어본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야.
이래은
나는 성수연한테 관심이 많으니까.
성수연
심쿵. 그러고 보니 래은이 연출한 공연들을 볼 땐 항상 두근거리는 순간을 경험하는 것 같아요. 심장박동수가 확 올라가는 순간. <이사이>도 그랬고 <김이박이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김이박이 고등학교에 입학한다>(이하 <김이박>)도 그랬어요. <서울 도심의 개천에서도 작은 발톱 수달이 이따금 목격되곤 합니다>도 그랬고요.
이래은
정말요? 정말 그래요?
성수연
네. 저라는 관객에게는 분명히 그래요. 많은 분들이 그렇게 느끼실 것 같고요.
이래은
다행이다! 앞으로 좀 더 그렇게 해보려고요.
성수연
BPM 연극? 이래은의 연출 메소드, BPM 올리기(웃음). 정말 좋네요. 심장이 두근거리는 공연을 좋아한다고 언젠가 말씀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공연을 좋아하는 것과 공연을 그렇게 만드는 것은 좀 다른 일일 수도 있잖아요. 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예를 들면 저도 볼 때 좋은 것과 만들 때 좋은 것이 좀 다를 때도 있거든요. 그런데 래은은 두근거림을 좋아하고, 그렇게 만들고, 그렇게 만든 공연이 보는 사람을 두근거리게 하는 것 같아요. 굉장히 좋은 의미로 래은과, 래은의 공연이 닮아있는 것 같다고 느껴요.
이래은
세상에, 영광이에요. 이런 이야기를 듣다니. 오늘 내 생일이다!
성수연
(노래한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이래은
이걸 받네? 무서운 사람.
성수연
무대에 어떤 역동이 계속 있어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무대 위에서 발생하는 진동의 폭이 크다고 해야 할까요? 정서도 밝았다가 어두웠다가, 무대 위 여러 요소들의 에너지가 막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하면서 만들어내는 진폭이 커서 이렇게 두근거리는 걸까 싶었어요. 뭔가가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이래은
배우분들이 잘해서 그래요. 저는 가끔 배우들을 질투하는데, 너무 좋아해서 그런가 봐요. ‘얄미워 죽겠어’ 싶다가도 ‘사랑해요!’ 하게 되고. 그러고 보니 제가 늘 이 상태군요! 왔다 갔다 하는. 질투는 나의 힘, 사랑해, 미워, 사랑해, 하는(웃음).
성수연
가. 가지 마. 가. 가지 마.
이래은
가지 마! 오지 마! 여기 있어! 여기 있지 마! 떠날 거야! 머물 거야!
성수연
(목소리를 높여) 가지 마! 오지 마!
이래은
(목소리를 높여) 내 곁에만 있어 줘! 아니야!
성수연
(큰 웃음) 스스로가 그런 진폭이 좀 큰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이래은
심하지요. 그래서 그 평정심이라는 단어를 무척 좋아한답니다. 9와 숫자들의 <평정심>이라는 노래도 정말 사랑하고요. 평정심은 참 만나기 어려운데, 그래도 아주 가끔 볕을 쬘 때라든가 나무 잎사귀 흔들리는 소리를 들을 때, 잠깐 바람처럼 저를 스쳐 지나가 주지요.
성수연
저도 평정심을 찾아다닌답니다. 저는 저를 계속 몰아붙여서 둔감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스위치를 끄고, 그게 평정심이라고 착각한 적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저는 제가 민감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인정한 게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연출가 이래은과 배우 성수연이 무릎 높이의 원탁 두 개를 나란히 놓고 마주 앉아 있다. 한 원탁 위에는 노트북과 태블릿 PC가 펼쳐져 있고, 또 다른 원탁 위에는 작은 라탄 바구니와 매듭을 묶은 손수건, 컵 두 개와 간식 등이 놓여 있다. 두 사람 모두 무릎에 팔꿈치를 기대고 서로를 향해 몸을 기울인 채다. 성수연은 한쪽 손을 턱 밑에 가져다 댄 채 시선을 위로 하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고, 이래은은 그런 성수연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그들 뒤로 멀찌감치 소파와 벽면 가득 책이 꽂힌 책꽂이가 있다.
이래은
아, 그랬군요. 그러면 그 전엔 어떻게 생각하셨어요?
성수연
나약하고 가끔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걸 감추고 버텨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어떤 계기를 통해 다른 관점으로 저를 바라보면서 여러 노력을 통해 알게 됐는데, 저는 확실히 민감한 편이고, 특히 촉각과 압력감각에 민감한 사람이었어요.
이래은
그래서 이렇게 움츠린 자세로 서 계실 때가 많았군요. 아이구, 고생 많으셨어요.
성수연
그러다 힘들었던 순간들을 돌아보게 됐어요.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한 괴로움이 쌓여서 영문도 모르는 채 어두운 상태가 된 적도 많았던 것 같아요. 필요한 때에 저를 잘 보호하거나 돌보지도 못했고요. 스스로를 잘 살필 방법들을 찾는 중이에요. 래은은 어떠세요?
이래은
저는 저를 싫어했어요, 오랫동안. 그래서 사랑하려고 애를 많이 썼고, 그건 결국 실패했어요. 얼마 전부터는 나를 사랑하기 위해 너무 애쓰지 말고, ‘나’와 ‘나를 싫어하는 나’가 그저 별로 친하지 않은 룸메처럼 지내게 해보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걔가, 물론 그 걔도 전데, ‘정말 싫어! 수준 떨어져!’라고 하면 저는 ‘그래. 수준 떨어지지. 맞아. 니가 눈이 높아’라고 해요. 그러면 거기서 끝나더라고요. 서로를 괴롭히지 않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요. 평화롭습니다.
성수연
룸메 이야기 재밌어요. 더 이야기해주세요.
이래은
제가 저와 룸메로 지내게 되면서, 저를 전보다 받아들이게 됐어요. 때에 따라 도망치는 것도 필요하고, 아프면 누워서 쉬어도 된다고 생각하게 됐고요. 예전에는 저를 괴롭히는 일에 에너지를 많이 썼는데, 몸이 좀 약해져서 에너지가 떨어지니까 저를 괴롭힐 에너지도 없어졌어요. 이제는 얼마 없는 에너지를 아껴서 저와 제 주변을 돌보고, 이렇게 당근라페도 만들고,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 마련하고, 차 마시고, 소풍 가고 그렇게 지내고 있어요. 그럴 때 서로에게서 영감도 받고 힘도 생기고 그렇더라고요. 어차피 고통이 삶의 기본값이니까, 잠깐잠깐 틈틈이 쉬면서 지내는 거죠. 아, 제가 아크로바틱 학원을 다녀요. 보여줄까요? (래은, 자리에서 일어나 옆돌기를 한다)
성수연
(박수) 아니, 언제부터 다니셨어요? 멋지다! 아크로바틱 학원을 다니신다니.
이래은
작년 12월부터요. 교통사고 이후 몸이 너무 가라앉으니까 뭐라도 해야겠는데, 도구를 쓰지 않는 운동을 해보고 싶어서 등록했어요. 선생님의 코칭이 섬세해서 코칭에 따라 움직임이 달라지는 것이 정말 재밌어요. 그리고 수강생들 연령대가 다양해서 좋아요. 해냈을 때의 성취감을 아니까 서로서로 응원하게 되고요. 몸이 너무 아플 땐 학원에 가서 그냥 앉아 있기만 하거든요.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고만 있어도 몸이 서서히 풀려요. 그리고 세상에! 제가 돌잖아요. 제가 세상의 중심축이 돼요. 그게 주는 힘이 있더라고요. 아직은 잘 못하지만 좀 더 연습해서 다리도 뻗고 멋있게 할 수 있도록 해볼게요. 올 가을까지 핸드 스프링을 하는 게 목표입니다.
성수연
꼭 보여주세요. 기다릴게요. (당근라페를 먹는다) 아, 맛있어. 그러고 보니 청소년극도 하시고, 청소년들을 만날 일도 종종 있으시잖아요. 그럴 땐 어떤 기분을 느끼시나요?
이래은
청소년들을 만나면 관성대로 가던 삶의 방향을 꺾는 느낌이에요. 생애주기에 따라 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태도라든가 사회적 위치라든가 그런 게 생기기 마련이잖아요. 그럴 때 청소년들 옆에 있으면, 조금 이상한 말이지만, 정신이 차려져요.
성수연
재미있네요. 정신이 차려진다.
이래은
타인에 대한 감각이 열려요. 제가 혼자, 혹은 제 주변 몇몇 사람들하고만 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 환기하게 돼요. 그래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청소년들이 극장에 가서 움직이는 배우들의 몸, 시간을 많이 들여서 벼린 그 순간을 많이 만났으면 좋겠거든요. 그게 제가 연극으로 해야 할 일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고요. 많은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가만히 앉아 있게 되는 상황에 내몰리잖아요. 요즘은 일상에서도 몸이 멈춰있고요. 자신의 감각으로 세상을 만나는 경험을 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만드는 일은 결국 다 같이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만들어가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자원이 많아야 하는데, 청소년들이 접할 수 있는 자원이 너무 화면 안에만 있잖아요. 타인의 시간을 손가락으로 스킵하는 것이 손쉬운 곳이요. 타인의 시간을 기꺼이 기다리는 일이 만들어주는 근육이 있잖아요.
성수연
요약본 시대이긴 하지요. 혹은 빨리 감는 시간이나 건너뛰는 시간에 익숙한.
이래은
극장에서 연극을 보면서는 스킵을 할 수 없으니까, 그 자체가 타인에 대한 감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성수연
이 말 정말 좋네요. 타인의 시간을 기꺼이 기다리는 일. 굉장히 거창한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연극은 이 시대에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배우 성수연. 손바닥이 위로 가게 왼손을 살짝 옆으로 뻗어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다.
이래은
저는 배우가 온 존재로 세상을 감각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관객이 그들과 함께 머물면서 때론 아름답고 때론 고통스러운 세계를 같이 감각하고 사유할 수 있는, 그런 시공간을 만들어내는 일이 바로 연극이 해야 하는,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수연
오늘 대화를 나누다 보니, 래은은 어떤 필요를 발견하면 그곳으로 기꺼이 자신을 보내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까 말씀하신 모임 <길을 막는 숲>의 기획도 그렇고요.
이래은
올해 능력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구상해보려고 해요. 저는 세상이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들을 갖고 있지 않다고 여겼었고, 저를 오랫동안 낙오자라고 생각했어요. 힘도 세지고 싶었고, 훨씬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었고, 소위 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나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요. 스스로를 능력주의로 차별하고 혐오했던 거죠. 그런데 저 자신이라는 룸메와 각방을 쓴 이후 그제야 하나둘 저의 다른 쓸모들이 보이더라고요.
성수연
예를 들면 어떤 쓸모인가요?
이래은
저는 당근라페를 맛있게 잘 만들고, 아크로바틱을 잘 못해서 사람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고, 향기 좋은 차를 누군가와 같이 마실 수도 있어요. ‘쓸모’라는 말에 대한 고민은 있어요. 다른 단어로 바꿔보고 싶긴 해요. ‘쓸모’라는 말로 사람을 물질화시키는 것은 지양하면서 나는 또 내가 세상에 쓸모 있었으면 좋겠고, 이게 능력주의적 차별 혐오이지 않나 고민하다가도 또 다른 생각을 찾기도 하고. 재미있어요. 사유와 성찰이 계속 어떤 역동을 만드니까요. 고꾸라졌다가 일어났다가, 또 넘어지면 넘어진 대로 누워 있다가, 누워서 보이는 것들을 보며 놀다가, 이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예전처럼 자학하며 제 안으로 파고들지 않고, 밖을 바라볼 수 있는 걸 보니 그래도 조금은 힘이 생긴 것 같아요. 저 자학하지 않고 작업한 공연이 <김이박>이 처음이에요.
성수연
저도 온갖 방법으로 자학을 하며 작업을 했을 텐데, 그걸 잘 들여다보고 다른 방법을 찾고 싶어요. 또 어떤 작업을 계획하고 계세요? 아까 말씀하신 능력주의에 관한 이야기?
이래은
네. 올해 안에 초안을 쓰고 싶어요. 그리고 안정민 작가가 쓴 <초록빛 목소리>를 낭독극으로, 공연에 나오는 장소에서 하고 싶어요. 지원금에 떨어졌는데, 지원금이 없다고 공연을 못 하는 상황을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극장 대관을 하지 않고 관객들과 함께 재미있게 낭독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해보고 싶어요. 관객들을 위한 연기 디렉션을 미리 좀 준비해서 관객들도 읽는 재미를 느끼고, 배우들도 관객들을 가까이에서 만나고요.
성수연
재미있겠네요. 궁금해요.
이래은
그래요? 이오진 작가가 쓴 <우리는 적당히 가까워>를 그렇게 낭독한 적이 있거든요. 서울시립여성청소년센터 나는봄에서의 초연 이후 5년 만에 신촌문화발전소에서 한 건데, 그 사이에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사회적 감수성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공연의 호흡을 따라가며 확인할 수 있도록 실제 일어난 사건들을 중간중간에 넣어서 관객들과 같이 읽었어요. 관객의 성별, 나이와 관계없이 모두 한데 섞여서 다양한 성별과 세대의 역할들을 하니까 유쾌한 순간과 안전함의 공감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무척 즐거웠던 공연입니다.
성수연
어떻게 그런 기획을 하게 되셨어요?
이래은
연극을 하려면 오랜 시간을 들여 훈련해야 하잖아요. 관객분들도, 연극을 막 시작하는 사람들도 연극을 어렵지 않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이런 형식으로 해봤어요.
성수연
좋네요. 연극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을 학교에서 배우면 좋을 텐데.
이래은
우리나라에도 학교에 연극 과목이 있고, 계속 변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연극’ 교과서를 읽어보지도 않았네요. 읽어봐야겠어요. 그런 노력도 안 했네. 아이들이 어떻게 연극을 접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네요. 창피하네.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안 해본 것도 너무 많고, 아주 그냥 애가 닳아요(웃음).
연출가 이래은. 이를 드러낸 채로 환하게 웃고 있다.
성수연
(웃음) 안 해본 것들 중 어떤 것들을 해보고 싶으세요?
이래은
연극 교과서도 읽어 봐야 하고, 영화도 안 본 게 너무 많고, 패러글라이딩도 해보고 싶어요. 서핑도 해보고 싶고, 핸드 스프링도 해야 하고, 백텀블링도 하고 싶어요. 안 먹어본 음식도 많고, 다양한 종교의 사원들도 가보고 싶어요. 빈 교회나 성당, 절 안에 가만히 있을 때의 기분 있잖아요. 클래식 콘서트도, 브람스 교향곡 들으러 가고 싶어요.
성수연
하고 싶은 일들을 들어보니 거의 다 몸과 관련된 일이네요. 패러글라이딩, 서핑, 텀블링, 먹는 것, 종교사원 안에 있어 보는 것 등등. 래은은 감각이 예민하고, 그게 래은에게 중요하기 때문에 힘들 때도 있으시겠지만, 그래서 또 그만큼 누군가에게 어떤 감각을 잘 전달하시나 봐요.
이래은
정말 그런가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성수연
오늘 여러모로 좋은 이야기 섬세하게 잘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이야기 잘 들어주신 것도 감사하고요. 당근라페도 감사합니다. (당근라페를 먹는다) 아, 맛있어. 그럼 질문 주고받기를 하며 오늘의 대화를 마무리해보면 어떨까요?
이래은
좋습니다.


이래은과 성수연, 서로를 바라본다.
 
성수연
네가 보기에 나에게는 어떤 쓸모가 있어?
이래은
네가 최근에 해본 가장, 사람들은 쓸모없다고 하지만 쓸모 있는 행동은 뭐야?
성수연
너를 만나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무서울 때가 있어?
이래은
너는 연극이 좋아, (세게 발음하며) 연극이 좋아?
성수연
연극을 하는 동안 제일 행복감을 많이 느끼는 순간이 언제야?
이래은
당근 좋아해?
성수연
네가 만든 당근라페, 지금까지 제일 맛있게 먹은 사람이 누구야?
이래은
너, 에게 일상과 연극의 교집합은 얼만큼이야?
성수연
너는 연극을 안 하고 사는 삶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어?
이래은
나 연극 좋아하는구나, 라고 새삼스럽게 깨닫는 순간 몇 개 얘기해줄래?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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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파이리)

성수연(파이리) 본지 편집위원
배우, 창작자. 다양한 형태의 연극작업을 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sooyeon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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