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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축제로 이 세상에서 지속할 가능성_서울프린지페스티벌의 어제와 오늘

[연극인이 만난 사람] 백교희(쿄) X 홍은지

백교희(쿄), 홍은지

제254호

2024.05.30

일시:
2024년 5월 17일 13시-15시
장소:
서울연극센터 2층 세미나실
참여자:
백교희(쿄), 홍은지
기록:
박상미(샬뮈)


백교희(이하 쿄)
안녕하세요. 이런 자리에서 만나게 되니 반갑습니다.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이하 프린지)에서 언제, 어떤 역할로 활동하셨나요?
홍은지
1998년 1회 독립예술제에 예술가로 참여를 했고 그때 처음 연출을 했었어요.
1회에 연출가로 데뷔하신 거예요?
홍은지
맞습니다. 연출로서의 첫 작업은 독립예술제 1회에서 했고, 2회에는 프로그래머로 참여했어요. 이후 2003년 아시아 실험예술 공연예술 축제를 표방한 ‘넥스트 웨이브’ 참여 작품인 <세 자매-아시아 크로스 버전>을 연출했어요. 2004년 ‘리틀아시아 크리에이터스 미팅(Little Asia Creators’ Meeting, 이하 LACM)’이라는 아시아 예술가 교류 프로그램에는 참여예술가로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2007년 프린지 스튜디오 운영 시기에 입주 예술가로 프린지 공간에서 함께 활동하다가, 2013년부터 2017년까지 프린지 운영위원과 프로그래머 역할을 했었습니다. 오늘 다시 프린지 기억노동의 자리에 함께하게 되었네요. (웃음)
저는 2014년 17회 축제 때 티켓매니저로 프린지에 합류했습니다. 두 달 정도 프린지를 실컷 즐기고 석사 공부를 하러 떠났다가 돌아와 2016년에는 서울프린지네트워크 스태프로 프린지에 합류하게 되었어요. 도시재생 코디네이터로 서울의 여러 민관협력 도시재생 프로젝트나 문화예술 정책 부분의 활동을 많이 했었고, 2017년 축제 이후에 프린지를 떠났다가 결국 2021년부터 다시 프린지에 돌아와 활동하고 있습니다. 내가 제일 마음이 편하고 일하고 싶은 조직은 프린지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벽면이 하얀 공간에 작은 책상 두 개를 나란히 붙인 채, 마주 앉은 홍은지와 백교희가 서로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독립예술제의 시작, 그리고 지금의 고민

1998년의 독립예술제(프린지의 전신)는 뜻이 맞는 예술가, 관객, 기획자들이 모여서 시작된 축제라고 들었는데요. 독립예술제 시작할 즈음 구체적인 배경이나 사회적 분위기는 어땠나요?
홍은지
다들 알다시피 1997년 한국 사회가 IMF라는 큰 사건을 겪게 되잖아요. 그때나 지금이나 젊은 세대는 늘 위기의식과 불안을 가장 먼저 감지하고 그것을 몸으로 겪어내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망하는 줄 알았다는 동료들의 이야기가 기억나는데, 한국 사회가 경제 성장이라는 하나의 목표로 달려가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그런 관점에서 세상이 망한다는 인식으로 이어졌던 듯해요. 사회로 진출하는 유일한 통로로 인식된 취업의 문이 닫히니까 청년세대는 이제 망해버렸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거기에 세기말 정서도 한몫했고요.
이런 시대의 분위기가 문화예술의 새로운 움직임으로 이어진 계기들이 있었을 것 같아요.
홍은지
한편으로는 민주화 운동 이후 사회 변화에 대한 의지가 문화예술로 연결된 지점이 있어요. 젊은 세대가 다른 것을 꿈꾸고 상상하는 영역으로서 문화예술이 발현되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더불어 홍대 앞이라는 지역이 가진 특수성이, 미술대학을 중심으로 예술가들의 작업실, 매력적인 카페들, 라이브 클럽 등 다양한 문화를 담아내며 확장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들이 예술을 증폭시키는 효과를 만들어냈다는 생각이 듭니다.
홍대의 예술 지역으로의 확장, 그리고 청년세대의 문화적 열망 등 다양한 요소들이 모여서 초기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의 폭발적 에너지를 만들어낸 것이었겠네요.
홍은지
그렇죠. 프린지뿐만 아니라 1997~1998년에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예술축제가 생겨났습니다. 홍대 앞은 문화예술단체나 활동가들이 포진한 구역이었고, 일종의 문화예술자치구처럼 설정되기를 바라는 강력한 열망이 있었어요. 독립예술제의 시작을 돌이켜보면 청년들에게 사회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소명 또는 책무가 주어지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모순적으로 청년들에게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죠. 기성세대의 권한 아래서 청년예술가들이 자신만의 작업을 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기성 극단이나 무용단, 영화계 안에서 10~20년 조연출 하다가 40~50대 되어서 첫 작품을 하고 중장년이 되어 신인 연출상을 받는 웃지 못할 상황들이 있었죠. 그런 시스템에 복무하지 않으면 자기 작업을 할 수 없었어요. 지금은 좀 상상하기 어려운데, 진입 장벽이 너무 높고 험난한 과정이었어요.
연출가 홍은지. 어깨에 살짝 닿는 짙은 갈색 머리를 늘어뜨리고 동그란 테의 안경을 썼다. 검은 재킷 안에 베이지색 셔츠를 입었다. 펜의 양 끝을 잡은 두 손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가볍게 웃음 짓는 표정이다.
홍은지
독립예술제의 첫 슬로건이 ‘트자! 놀자! 비틀자!’였죠? 이 슬로건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었나요?
홍은지
네, 문화예술 관련 시스템 자체가 빈약했기 때문에, 연극, 영화, 음악, 미술 등 여러 장르에서 예술인이 되고자 했던 청년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시스템에 대한 분노, 그리고 창작에 대한 욕구 같은 것들이 서로 공명했던 것 같아요. 판을 한번 뒤집어 보자는 데 의기투합한 것이죠.
그렇게 첫해에 나온 슬로건이 ‘트자! 놀자! 비틀자!’였고, 축제는 5개 분야로 나눠서 고성방가(음악), 암중모색(영화&영상), 중구난방(거리예술), 내부공사(시각), 이구동성(공연예술)으로 진행했고, 진행 자금은 독립자금 마련하듯 십시일반 사비를 모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대학로에 모인 수천 명의 청년이 자기가 가진 재능들을 하나씩 내놓는 방식으로 축제가 구성되었어요. 그리고 예술가만으로 축제를 만들 수 없으니 사무국, 예술국, 기술국, 축제를 가동하기 위한 3개의 조직을 꾸리고요. 당시만 해도 국내에는 거리문화, 축제문화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프랑스 아비뇽페스티벌이나 영국 에든버러프린지페스티벌 같은 해외의 사례들을 참조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장의 기세가 어마어마했을 것 같아요!
홍은지
서로가 가진 예술적 상상을 어떻게 구현할지 밤새 이야기 나누었어요. 어디서 이렇게 똑똑하고 담대한 사람들이 숨어 있다 나왔을까 싶을 정도로, 하나를 내놓으면 그다음이 일사천리로 나아가는 거죠. 이런 열기가 모이면서 평소의 에너지 이상으로 힘을 발휘했던 것 같네요.
아, 프린지 전화번호 뒷자리가 아직도 8150인가요? 8월 15일 광복절, 독립기념일을 예술독립의 의미로 가져와서 전화번호도 815로 하고, 사무국에서는 콜라도 815콜라만 마신다는 소문이 있었는데(웃음).
제가 처음 경험했던 프린지도 그랬어요. 그동안 살아오면서 만나보지 못했던 사람들, 삶의 방식, 일하는 방식을 프린지에서 처음 접했고, 그런 다양하고 자유로운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에너지에 매료되었었어요. 축제기획자들끼리 하는 얘기 중에 ‘축제뽕 맞으면 계속 축제하게 된다’는 말이 있는데 저도 프린지에서 뽕 맞았나 봐요.
저는 프린지에서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가 ‘자유참가원칙’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프린지에게 ‘독립’과 ‘자유’라는 단어가 훨씬 더 개인화되고 자유롭게 느껴지는 지금 시점에서, 그것이 어떤 의미일지 매년 다시 고민하게 돼요. 독립은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일까? 우리는 어떤 자유를 추구하고 있는 걸까? 이런 얘기들을 사무국에서도 매년 다시 토론하고 고민하고 있어요. ‘자유참가원칙’은 1회 때부터 정해졌던 것인가요?
홍은지
네, 선정되지 못한, 또는 선정권 밖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해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자유 참가의 원칙을 갖는다. 또한, 자유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르는 것이므로 제작에 대한 책임은 예술가가, 기획과 축제 운영에 대해서는 사무국이 책임진다. 그리고 네트워크를 통해서 우리가 가진 것들을 나누고 연대한다. 이런 초기 원칙들을 만들어 나갔어요. 그래서 아시다시피 첫해는 대학로에서, 2회는 예술의전당에서, 그 이후에 다시 대학로로 갔다가 홍대 앞으로 왔죠. 이렇게 초기 독립예술제가 시작되었고, 2002년 서울프린지페스티벌로 개명을 하면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홍대 앞 프린지페스티벌로 자리를 잡고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기획자 백교희. C컬이 들어간 단발머리에 흰 블라우스를 입었다. 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두 손을 들어 무언가를 말한다.
백교희(쿄)
이후 2002~2006년 사이 프린지를 다룰 때 국제교류, 아시아라는 말을 사실 빼놓기가 어렵더라고요. 저는 남아있는 자료만 읽어봤는데 왜 프린지는 아시아의 프린지성에 주목했는지, 프린지는 국제교류에 대해 어떤 니즈가 있었는지도 궁금해요.
홍은지
프린지 출발점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연대,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체감하는 변화에 대한 의지가 우리만의 생각일까, 고립된 채 각자 자조하거나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는 동료들이 또 있지 않겠나. 그렇다면 확장해서 만나보자는 게 첫 번째 이유였을 것 같고요. 두 번째로 왜 아시아인가에 대해서는 그 시기 서유럽이 장악하고 있던 예술 패권에 아시아 예술가들은 진입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아시아의 청년예술가들이 모여서 기세를 가시화해내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럼 누구를 만날 것인가 했을 때, 실험적인 예술작업을 하고 있으나 지원을 받지 못하면 우리가 절대 만날 수 없는 예술가,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젊은 예술가들을 만나서 확장성을 가진 네트워크로 나아가자는 취지로 공동제작, 아시아 기획자 미팅, 아시아 독립예술 협의체 등의 프로젝트를 기획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내외부적으로 굉장한 논쟁도 있었어요. 왜냐하면 프린지의 첫 번째 원칙은 자유참가잖아요. 또 제작에 대한 책임은 예술가가 지는 것인데 왜 해외팀에게만 초청과 제작비를 제공하고 특혜를 주느냐, 이것 역시 대원칙에 위배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 제기 등 있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초청을 받지 않으면 자신의 나라 밖으로 나올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축제가 기획적 방향성을 가지고 누구와 연대를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더 나아가겠다는 연장선에서 감행했던 거죠. 그래서 일본, 홍콩, 대만,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아시아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실험 예술인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던 기획자들의 모임이 제작 프로젝트로 확장된 작업이 ‘리틀아시아 크리에이터스 미팅(LACM)’이었고, 아시아 5개국 예술가들이 모여서 정기적으로 워크숍을 하고 공동창작으로 이어진 프로젝트가 아시아문화예술의전당(ACC) 파일럿 프로그램이었던 <리아우(Riau)>라는 공연이었습니다.
최근 프린지도 보다 확장된 영역에서 어떤 동료를 만나고 함께 작업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다 보니 해외의 예술가, 기획자들을 만날 기회가 좀 생겼어요. 특히 올 초에 태국과 마카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의 독립기획자, 예술가들과 만나면서 프린지의 국제교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프린지는 누구와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어떤 시도를 해보면 좋을까에 대한 질문도 많이 생겼고요. 연출님께서 말씀해주셨던 초청에 대한 토론도 지금의 사무국 스태프들 사이에서 있었어요. 그때는 다소 급하게 이야기가 진행되어서 논의를 깊이 하지는 못했는데요. 그래서 그런지 사무국이 명확한 방향성을 가지고 누구와 연대를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기획으로 보여준다는 내용이 특히 와닿아요.
홍은지
질문을 던지는 건 기획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을 향해서 던지는 이야기, 그것으로부터 다시 질문을 만들어내는 것이 기획의 힘 아닐까요. 말 그대로 육하원칙에 의거해서 왜, 누구를 대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관한 질문을 통해 그것을 구현해 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궁금한 점이 생겼는데 지금의 프린지는 왜 국제교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인지, 해외의 동료들과 어떤 공통점을 찾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동안 축제기획자들이 해오던 고민이 우리의 것과도 너무 닮아있는데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것들을 보면서 좌절감과 답답함이 있었던 것 같고요. 또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주변의 축제기획자 동료들이 문화예술계를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축제를 다른 방식으로 운영해볼 수는 없을까 고민했거든요. 그러던 차에 작은 규모로 운영되는 민간 축제들을 만나고, 프린지와 닮은 구석이 많다고 느꼈어요. 또 더 유기적으로 예술가와 기획자가 협력하는 방식이나 축제를 운영하는 방식, 공동체와 관계를 맺는 방법들을 찾아보고 싶기도 했고요.
홍은지
그랬군요. 확실히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문화예술계 지각 변동이 크게 있었고, 이제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할까 고민해야 하는 시기인 것 같네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씬이 즐겁지 않고 힘들어서 기획자들이 떠나고 있다면, 여기서 창의적인 기획력은 뭘까, 다른 업계로 떠난 동료들을 어떻게 돌아오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연출가 홍은지가 책상 위에 펜을 쥔 손을 가볍게 올리고 정면을 바라본다.

변화하는 사회와 상호작용하기

홍대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2007년부터 2012년을 거쳐서 이제 서울월드컵경기장으로 넘어가게 되잖아요. 연출님은 2013년에 운영위원으로 합류하셨죠. 저는 경기장으로 이미 사무실이 옮겨간 후에 프린지에 합류하긴 했지만, 그 당시에 경기장으로 축제의 무대를 옮긴다는 결정 자체에 대해서, 또 축제에 참여하는 예술가, 관객을 설득하기 위한 언어화에 대해서 엄청난 토론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실제로 예술가들이 변화된 축제 무대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리기도 했고요.
홍은지
서울월드컵경기장으로 축제 사이트를 옮길 때,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어요. 2009년 두리반 사건으로 촉발되었던 홍대 앞 재개발과 폭력적인 진행 과정에 대해서 예술가들이 처음으로 노동자와 연대하기 시작했습니다. 홍대 앞 문화예술의 전성기를 만든 균형의 삼박자, 그러니까 정책을 수행하는 주체로서의 공공, 안정감을 지원해주는 자본 그리고 일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예술이 평화롭게 공존하던 시기, 파트너로서 서로를 필요로 하는 시기를 지나 불균형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다른 축제들도 그렇겠지만, 프린지는 늘 프린지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환경을 예민하게 살피고 그 안에서 프린지의 위치를 고민하는 축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만큼 주변환경과의 상호작용도 큰 것 같고요. 그 당시 프린지를 둘러싸고 있던 균형의 삼박자에 대해서 더 자세히 듣고 싶어요.
홍은지
홍대 앞 문화가 한창 활기를 띠기 시작할 때 지역 주거지의 주차장을 예술가들의 작업실로 기꺼이 내어주기도 했고, 거리예술로 일상을 전복해보겠다고 아우성칠 때 절대 그런 모습을 보일 것 같지 않았던 사장님들이 한쪽에서 같이 춤을 춘다든가, 환호를 보내거나 하는 모습들을 보여줄 때 예술이 환영, 환대받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죠. 한편 공공분야에서는 예술 현장에 자문해 그것들이 어떻게 정책적으로 반영되면 좋을지 논의하던 균형 잡힌 움직임이 있었어요. 서로 존중하며 함께 고민하고 성장했던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본이 급속도로 팽창하고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되면서 거주지와 예술가가 공존하지 못하게 되고, 홍대 앞이 관광특구로 분리되는 일이 발생했어요. 이와 동시에 공권력에 의해 예술가를 통제하고 감시하고 검열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가동되는 사건도 있었고요.
홍대에 머물면서 축제를 지속하는 여러 선택지가 있었을 것 같거든요. 홍대의 예술공간들과 협력한다든가, 대안의 축제방식을 찾아본다든가. 홍대를 떠나는 건 불가피한 선택이었을까요?
홍은지
처음에는 상업적 지구로의 변화 때문에 걷고 싶은 거리에서 축제하는 것이 어려워졌다는 문제의식이 있었죠. 누구도 이 상황을 같이 즐기기는 어려워졌고, 어떻게 보면 예술이 닦아놓은 길을 자본이나 공공이 도구화한다는 위기의식이 관통했던 듯해요.
프린지가 왜 월드컵경기장으로 갔었는지 궁금해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아요.
홍은지
서울시가 도시 내 유휴 공간을 시민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월드컵경기장을 사용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왔을 때, 프린지의 예술적 시도가 마주 닿을 기회라고 판단해서 결단을 내렸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경기장에 있는 동안 민관협력 프로젝트인 ‘상암포럼’, 예술가 레지던시 ‘프린지 빌리지’, 경기장 안의 살롱극장 ‘팔평극장’ 등 다각적인 독립예술의 방향성을 시도해볼 수 있었어요.
되돌아보면 예술가들이 작품을 창작하고 선보이는 무대가 변화한 것 외에도 월드컵경기장 시절의 프린지에서 연속적으로 주요하게 내세웠던 가치는 ‘안전한 창작환경’이었는데요. 2012년 즈음부터 사회 안에서 큰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났었고, 그 사건들이 프린지와 축제, 문화예술계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프린지 나름대로 예술가들이 안전한 환경 속에서 창작할 수 있도록 배수진을 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홍은지
우리의 근간을 흔들었다고 할 만한 중대한 변화지점을 꼽는다면 홍대 앞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예술가들이 밀려난 것을 시작으로 2014년에 세월호 참사, 2017년 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2018년 미투 운동, 그리고 2020년 코로나로 이어지는 재난과 위기가 있었습니다. 축제를 비롯한 한국 사회 전체가 겪어내야 했던 일련의 재난과 참사들 앞에서 문화예술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지요. 예술 생태계에 ‘예술 표현의 자유’와 ‘지속가능성’, 그리고 ‘안전한 창작환경’에 대한 성찰, 논의가 이어지며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사회 구조 자체에 관한 질문을 던지게 했어요. 코로나도 큰 사건이었죠. 어떤 강력한 위계조직의 구성원이 아닌, 상호 의존에 기반한 연대나 유대로 사람을 이을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것이 문화예술의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 계기가 되기도 했고요.
이런 큰 사건들을 거치면서 사회 안에서 사람들이 관계 맺는 방식,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 시간과 돈을 쓰는 방식 등이 많이 바뀌었다고 느껴요. 문화예술을 경험하는 방식도 정말 다양해졌고요. 이런 시대에 예술축제란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게 돼요.
홍은지
2015년 이후 축제들이 많이 사라졌어요. 코로나 이후에도 축제의 위기가 있었고. 사라진 예술축제들이 어떤 모습으로 막을 내렸는지, 그 안의 문제를 고민했던 시기도 있었어요. 우선 ‘한 사람이 모든 책임을 지고 결정하는 권한이 있는 1인 축제 감독 체제가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있었어요. 경기장으로 넘어오면서 프린지에서 운영위원 제도를 실험했던 이유는 이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었죠. 집단 지성의 힘을 믿어보기로 한 거예요.
또 시대의 재난을 개인이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데 있어서 예술이 사회와 맞닿을 수밖에 없는 연약함도 생각하게 됐죠. 그래서 프린지 안에서도 옆의 동료들과 팔짱을 끼고 이 상황을 함께 지나간다는 절박함으로 1년 내내 모여있자는 의미로 여름에는 축제, 봄/가을에는 포럼을 하기도 했어요. ‘올모스트 프린지’라는 이름으로 계속해서 같이 이야기하고 의제화하는 방식으로 예술과 축제를 고민했죠.
기획자 백교희가 오른손을 가볍게 주먹 쥐고 정면을 응시하며 이야기한다.
블랙리스트 사건 얘기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주제가 다원예술 같아요. 프린지와 비슷한 시기에 생긴 축제들이 다원예술 지원제도를 만드는 데 역할을 했다고 들었어요. 다원예술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하던 때에 프린지나 문화예술계에서는 어떤 논의가 오고 갔는지 궁금해요. 프린지는 그동안 다원예술장르의 대표축제로서 존재해왔고 기금지원도 다원예술장르로 받아왔는데 종종 프린지가 왜 다원예술축제인지 묻는 분들도 있거든요.
홍은지
지금도 다원예술에 대한 논의는 분분하지만 다양한 예술을 표현하는 공연, 축제, 매체들이 2000년 전후로 생기면서 기존 장르를 벗어난 창작언어들이 개발되고 있는데요. 정책의 사각에 놓인 이런 작업을 어느 그릇에 담을 것인가 하는 고민이 생겼죠. 문예진흥원이 문화예술위원회로 재편되고 다원예술 소위원회가 발족되면서 기존 문화예술 정책에서 소외되었던 영역들, 탈장르예술, 복합장르예술, 비주류예술, 독립예술, 실험예술 등을 대상으로 이를 포괄하는 ‘multidisciplinary(다학제간)’ 예술의 의미로 다원예술 개념이 등장했어요. 예술 현장의 언어가 아닌 행정정책언어에서 비롯됐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공공영역 안에 새롭고 낯선 예술적 시도들이 제도적으로 반영되고 실현해낸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200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다원예술 분야 올해의 예술상을 프린지가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블랙리스트 사건 때 다원예술분야가 지원제도에서 아예 없어지기도 했었어요. 이후 부활은 했지만, 예술과 공공이 여전히 지속가능한 파트너십을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수 있겠죠.

영원한 청년들의 축제

자유참가로 참여하는 프린지의 특성상 프린지에는 경력 초기 단계의 청년예술가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잖아요. 프린지 초창기의 청년예술가와 지금의 청년예술가는 변화한 지점이 좀 있을 것 같은데요. 혹시 느껴지는 차이가 있으신가요?
홍은지
어느 시대나 청년이 쉽지 않은 구간이라는 것은 변함없다는 생각이 들고요. 다만 청년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어떻게 이뤄지느냐에 따라서 온도 차이는 매우 클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변화를 기대하는 주체로서의 청년 그룹이 사회 정의나 불평등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공공의 영역에서 회복되기를 바라는 요청들을 꾸준히 강렬하게 이어오지 않았나, 그래서 서울프린지페스티벌도 젊은 예술이 공공의 영역 안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기를 바라는 활동들을 지속해왔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특히 2017년 청년예술정책이 서울시에서 처음 시작됐을 때 프린지도 정책논의와 일부 실행과정에 참여했었는데, 그 배경을 되돌아보면 그 전후로 청년 잔혹사가 이어져 왔죠.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만, 최고치를 경신한 청년 자살률, 2011년 최고은법으로 불리는 예술인복지법을 촉발한 사건들, 프린지를 비롯해 홍대 앞이라는 일종의 독립된 예술자치구역을 이루었다고 자만하고 있는 사이 예술계와 교육체계 안에서 끊임없이 반복 재생산되고 있던 위계폭력, 성폭력 문제들이 줄줄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고요. 청년세대의 문제를 사회적 약자의 문제로서 바라보고 어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겠다는 전제가 깔려있었다고 생각해요.
다만 이런 사회적 흐름을 타고 청년 정책들이 급물살을 타면서 아까 얘기했던 공공성이 구현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잠시 도취된 적이 있었던 것도 사실인 것 같네요. 청년에게 정책적 지원과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고무적이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정책이 단기간에 큰 규모의 예산과 함께 집행되었을 때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여러 반성의 지점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예술이 제도 다방면으로 진입하여 공적 지원의 폭을 확대하고, 자본에 취약한 예술활동에 긍정적 영향력을 줄 것이라는 기대가 동시에 예술의 공적 지원 의존도를 높인 것도 사실이죠. 공공의 정책이나 의지의 변화가 큰 변수로 작용할 수 있는 상황에서 공적 지원을 많이 받을수록 예술의 자율성도 보장되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가 성과주의에 너무 깊이 마취되어 있어서 사회가 시도나 실패를 기다려주지 않으면 혁신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상기하고 다시 재정비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른 표현으로 얘기해보자면, 사적 영역에서의 불공정과 불평등에서 실패한 양극화된 사회가 있고, 이를 만회할 수 있는 부분이 공적 영역이라면 공공의 영역은 매끄럽고 안락한 영역이라기보다 늘 시끄럽고 논쟁적이고 뭔가가 일어날 수 있는 영역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라면 공공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청년 주체 또한 어떤 역할을 스스로 해왔는지 점검해보면 좋겠어요.
기획자 백교희가 오른손을 활짝 펴고 이야기한다. 그의 뒤편으로 참관 중인 세 명의 프린지 기획자들이 앉아 있다. 이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백교희를 바라보거나, 휴대전화로 무언가를 읽고 있다.
홍은지
저는 프린지나 다른 축제들, 그리고 청년예술이 지금까지 해왔던 활동들이 고백의 언어가 아닌 증언의 언어로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이분법적으로 나눌 일은 아니지만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언어, 나의 언어를 늘 개발하고 가지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앞서 얘기했지만, 공공정책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관계가 아닌 협력의 목적과 방식이 명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기까지 얘기를 해야 할 것 같고 청년 당사자분들에게 질문을 남겨두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프린지 작품들을 하나로 뭉쳐서 그 단면을 갈라보면 그게 바로 지금 우리 사회나 예술계의 단면과 같다고 생각하는데요.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사회의 구성원인 예술가들이 가장 날것의 촉수로 감각하고 작업으로 표현한 것이 프린지의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프린지 작업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주제나 내용들이 2~3년 이내에 큰 화두로 예술계나 사회 속에서 다뤄지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이런 점에서 프린지의 작업이 이 사회의 아주 중요한 ‘증언의 언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 오늘 대화의 끝에 거의 다다른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프린지의 방향성과 프린지가 꼭 지켜야 할 가치에 관해 얘기해보고 싶었는데요. 프린지라는 축제는 어느덧 27년이 되어서 축제가 거쳐온 세월의 흔적은 두터워졌지만, 사실 프린지를 운영하는 사무국이나 축제에 참여하는 예술가, 자원활동가, 관객은 늘 새로운 사람들이거든요. 그만큼 프린지라는 축제를 해야 하는 이유, 참여해야 하는 이유도 계속해서 바뀌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 내용을 논의하지 않는다면 프린지는 죽은 축제나 다름없어질 것 같아요.
홍은지
앞으로의 방향성은 지금 프린지에 있는 분들이 내부적으로 이야기를 잘 해야 할 것 같고요.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 주체가 시대를 파악하고 표현하는 가치와 원칙이 기획으로 드러나겠죠.
가치라고 했을 땐 그동안 프린지를 거쳐 간 사람들이 얘기하는 공통적인 내용일 텐데, 다소 진부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예술에 대한 애정, 구성원 간의 상호 존중, 자기 책임, 그리고 그것에 기반한 유대감, 연대감이지 않을까요? 누군가는 그것을 신의, 네트워크, 공동체, 동료, 이런 표현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저는 이 모든 것의 가장 깊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인 것 같아요. 부끄러움을 알게 해준 곳이 프린지가 아니었을까.
사실 저희가 질문을 고민할 때 그렸던 대화 내용보다 오늘 훨씬 더 큰 내용을 다루게 되었네요. 그동안 알고 있었지만 다소 먼 얘기로 느껴졌던 내용도 다시 듣고 나니 프린지를 더 긴 맥락에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소중한 이야기 나눠주셔서 감사해요. 이만 대화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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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교희(쿄)

백교희(쿄)
공연예술을 기반으로 축제기획, 리서치, 국제교류 등 경계 없는 다양한 일을 하고 있으며, 기후위기 시대의 예술, 예술의 사회적 가치, 국내외 예술 네트워크 만들기에 관심을 갖고 있다.

홍은지

홍은지
다양한 공연방식을 고민하고 고안하며 여러 분야의 아티스트와 함께 공연예술 기반 연출작업을 해왔다.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운영위원, 프로그래머 및 신촌문화발전소 운영총괄 등의 역할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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