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하는 시
2화 처음으로 선물 나눠준 일기
오늘 우리가 한 일.
각자 시를 두 편씩 고른다.
너는 뭐 나눠줄래. 난 시가 너무 길어서 한 장에는 안 들어가는데. 들어갈 수 있는 시를 골라야겠지. 현수막이면 더 길게 해도 될 텐데. 일단 백은선은 「도움의 돌」 「독순」을 골랐다. 안미옥은 「여름의 발원」 「목화」를 골랐다. 김승일은 「나의 자랑 이랑」 「유리해변」을 골랐다. 너 나의 자랑 이랑은 안 한다고 하지 않았나. 사람들이 읽고 이게 뭐야 할 것 같은 시 고른다고 했잖아. 막상 나눠주려고 하니까 좀 아쉬워서……
칼라 프린트를 하고 재단을 한다.
선물하는 날이다. 시를 뽑아오기로 한 사람이 인쇄 전문점에 갔다가 너무 비싸서 그냥 왔다. 을지로 가서 뽑았어야 되는데. 내가 멍청했어. 정말 미안해. 괜찮아, 그럼 오늘은 첫날이니까 조금만 뽑아보자. 100장만 해보는 거야. 동네 문방구에 갔다. 재단선이 인쇄되어 나왔다. 야, 이거 다 손으로 잘라야 되겠는데? 그럼 칼이랑 자랑 사서 카페 가서 자를까? 문방구 아저씨가 작두를 빌려줬다. 그래서 미옥이 잘랐다. 조금씩 자르자. 찢어질 수도 있으니까. 을지로 인쇄소는 알아서 잘라준대.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어떤 할머니는 은선을 너무 뚫어져라 봐서 설마 시에 관심이 있는 건가 했는데, 원피스 어디서 샀냐고 자기한테 팔라고 은선의 허리춤 옷을 붙들고 놓지 않는다. 은선은 누가 자기를 만지는 게 불편했지만, 계속 웃으면서 ‘이 옷은 빈티지라서 같은 옷을 구할 수가 없어요.’ 설명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다시 돌아오셔서 또 묻는다. 자기한테 팔라고. 이 옷이 너무 마음에 드셨나보다. 어…… 이 옷이 엄청 예쁜가봐. 뭔가 잘못되어가는 것 같은 기분. 근데 이런 기분이 또 마음에 들어. 에스컬레이터 끝에 수북이 쌓여 있는 버려진 헬스클럽 전단지 같은 것을 생각했는데. 우리가 보는 앞에서는 아무도 우리 시를 버리지 않은 게 놀라웠다.
은선은 사람들에게 천천히, 친절하게 다가갔다. 사람들은 바쁘고 분주했다. 지하철역에서 나오는 사람들, 어딘가로 가고 있는 사람들은 늘 두 손도 바빴다. 핸드폰을 쥐고 있거나, 커피를 쥐고 있거나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은선은 자신의 템포로 사람들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지나가고 나서도 말이 끝나지 않는 경우들이 있었다. 은선이 주는 시 선물을 받는 사람도 있었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머쓱해진 얼굴로 돌아와 다시, ‘누구에게 주지?’ 하는 눈빛으로 서 있었다.
은선이 고른 시 중에 「도움의 돌」은 망원동을 산책하고 망원시장을 돌아다니고 그리고 한강까지 걸어갔다온 날에 그런 경험들을 토대로 쓴 시였는데, 그걸 망원동에 와서 나눠주고 있자니 뭔가 신기했다. 시라는 게 쓰이고 활자가 되어 물성을 갖고 그게 또 사람의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고 자기의 근원에 어쩌면 조금 미칠 수도 있다는 게. 누군가는 우리 시 읽어봤을까? 어쩌면 집에 돌아가서 우울한 밤에 그걸 읽고 흔들렸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어쩌면 집에 가는 길에 버렸을지도 모르지. 시들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갔는지 상상해보는 건 조금 슬프고 흥미롭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선물이라는 말을 듣고 받는 사람들에겐 받지 않은 사람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생겨날 것이다. 확실하진 않지만, 어쩐지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엔 그런 것이 많다. 선물인 줄 몰랐는데, 받고 보니 선물 같은 것들. 홍보 전단지 인줄 알고 그냥 받다가, “이거 시예요.”라는 말을 듣고 화들짝 놀라던 사람의 표정이 생각난다. 시가 그런 것이면 좋겠다. 사람들에게 일상의 익숙한 수많은 것들 중 하나가 아니라, 전혀 뜻밖의 무엇. ‘내 일상에 이런 것이 존재했다니?’ 하고 놀라움을 발견하게 해주는 무엇.
너무 수줍으니깐 안 되겠다. 우리는 매주 만나서 노니까 노는 거라고 생각하고 하자. 그렇게 시작했는데, 진짜 노는 것 같기도 하고, 여행자 같기도 하고, 그래서 다들 계속 웃었지. 의도대로 되고 있다고. 무슨 일이 닥쳐도 다 의도된 대로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처럼. 역시 선물은 주는 사람이 기뻐야 선물이지.
이런 걸 받았어. 카페에 들어가 친구들에게 신기하고, 촌스럽고, 웃긴 전단지를 보여주는 사람처럼. 이런 걸 받았어. 시를 보여주는 거다. 나는 이런저런 장면들을 떠올리면서 역시 이걸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다음엔 어떻게 줄까. 사람들이 또 받아줄까.
만나서 시 쓰기
안미옥, 백은선, 김승일. 우리는 세 사람이다. 우리는 시인이고 친구들이다. 종종 만나서 밥을 먹었다. 그러다 누가 만나서 밥만 먹지 말고 시도 쓰면 어떻겠냐고 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만나서 시 쓰기’가 되었다. 밥 먹는 거랑 시 쓰는 거 말고 재밌는 거 뭐 없나. 고민하다가 이걸 하게 되었다. 이건 ‘선물하는 시’다. 시를 선물하는 프로젝트다.
2018/07/31
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