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대화는 하나의 텍스트를 두고 다르게 해석하는 두 명의 평론가가 독해의 차이를 독자들에게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형식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고안되었습니다. 대상 텍스트는 《문학동네》 2019년 여름호에 실린 손보미 소설가의 「밤이 지나면」입니다. 문학잡지에 발표된 소설인데다 종이 잡지이다 보니, 독자분들의 접근성을 고려하여 작가에게 양해를 구하고 비유에 재수록 요청을 드렸고 작가의 허락하에 위 소설을 ‘여기’에 싣습니다. 아래의 대화에는 소설의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대량 포함되어 있으므로 작품을 먼저 읽은 후에 저희의 대화를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장은정(이하 장) : 안녕하세요. 비평적 대화라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 중인 장은정이라고 합니다.
   한설(이하 한) : 안녕하세요. 얼마 전에 치과 의사가 된 한설이라고 합니다.
   장 : 반갑습니다. 미리 말씀드렸다시피, 오늘의 대화에서는 한 번에 세 문장 이상 발언할 수 없는 것이 규칙입니다. 이해하셨나요?
   한 : 네, 기존 좌담을 읽을 때마다 느꼈던 것이지만, 문장 수의 제한이 없으면 독백처럼 자기 할 말만 하는 경우가 많아서 세 문장 이하로 발언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장 : 제안 드렸을 때 흔쾌히 수락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제게 최근 발표된 소설 중 총 세 편을 추천해주셨고 저희는 최종적으로 손보미의 「밤이 지나면」을 대상 텍스트로 정하게 됐는데요. 그 과정을 설명해 주시겠어요?
   한 : 우선 제가 2019년 한 해 동안 《문학동네》에서 세 명의 평론가와 함께 계간평을 맡았다는 사실부터 밝혀야 할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저희의 평가는 상반되게 엇갈렸는데, 「밤이 지나면」은 만장일치로 호평을 받은 굉장히 드문 소설이었습니다. 트위터를 통해 선생님께서 이런 반응이 너무도 의아하다고 말씀하셨을 때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장 : 정확히 어떤 지점에서 이 소설이 호평을 받았나요?
   한 : 기술적으로 완숙한 ‘여성적 성장담’으로 읽힌다는 것이 컸던 것 같네요.
   장 : 사실 저 역시 최근 소설을 정기적으로 같이 읽고 토론하는 모임을 가지던 중에 멤버 전원이 이 소설을 모두 호평한 바 있습니다. 그때 의문이 들었습니다. ‘좋은 소설’이라는 기준이 모두에게 이미 합의된 것인가?
   한 : 멤버의 구성이 궁금하네요.
   장 : 제 수업을 들었던 문학전공 학생 두 명과 기성 소설가 한 명, 그 소설가에게 소설 작법 과외를 받고 있는 문학 비전공자 학생 두 명, 이렇게 여섯 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중 제도권에서 현재 활동하는 사람은 저를 포함하여 세 명입니다.
   한 : 아, 그러면 제도권과 비제도권, 혹은 전공자와 비전공자 관계없이 통계적으로 10명 중 9명이 호평한 셈이네요.
   장 : 네, 맞아요. 저는 그게 신기했어요. 각자 소설을 평가하는 기준이 다르다면 이렇게 높은 수치로 ‘좋은 소설’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었을까? 다들 좋은 소설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궁금했어요.
   한 : 그렇다면 장은정 선생님께선 어떻게 이 소설을 읽으셨나요?
   장 : 아무 감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로 시 비평을 써 온 저로서는 ‘아, 내가 정말 소설에 대해 잘 모르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신뢰하는 선배들 중 소설 평론가 두 분께도 평을 물어봤습니다.
   한 : 뭐라고 답변하셨나요?
   장 : 다 제가 좋아하는 분들이라 취향이 비슷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두 분이 마치 짠듯이 같은 표현을 썼는데 “애매하다”고 하셨어요. 그게 바로 제가 느낀 감흥 없음과 일치했어요.
   한 : 그럼 12명 중에 9명, 75%의 비율로 호평은 받은 소설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네요.
   장 : 그래서 더 궁금했어요. 내가 모르는 감각을 다들 가지고 있는 건가? 다른 사람들은 왜 감탄했고 나는 그러지 못했지?
   한 : 저도 여기 오기 전에 (문학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독서 모임에서 활동하는 지인 두 명에게 의견을 물어봤는데, 그분들은 밀도 높은 소설이라 평했어요. 한편 소설을 쓰는 지인은 애매한 소설이라 평가했습니다.
   장 : 아, 그러면 15명 중의 11명이 호평했으니 여전히 70% 가까운 선호도를 보이네요.
   한 : 세부적으로 보자면, 제도권에선 55%의 비율(9명 중의 5명)로 호평이고, 제도권 밖에선 80%의 비율(6명 중의 5명)로 호평이네요.
   장 : 그렇다면 대중적으로 좋은 소설의 기준이 어느 정도 성립된 부분이 있다고 해석할 수 있겠네요. 뭐, 엄밀한 통계적 방법론을 따른 건 아니지만요.
   한 : 또 평론가의 작업 중 하나가 문학장에 새로운 미학적 기준을 계속해서 기입하는 것에 가깝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제도권 내에서 활동 중인 사람들의 평가가 반반으로 갈리는 것은 어느 정도 수긍이 되는 수치라고 생각합니다.
   장 : 네, 그래서 서로 상반되는 견해를 가진 선생님과 제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한 : ‘좋은 소설’의 기준이 선생님과 저의 상이한 배경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그것부터 살펴보면 어떨까요? 1)
   장 : 저는 반대에요. 작품을 읽을 때 각자 처한 배경에서 습득한 규범을 벗어나는 경험도 존재하므로 우선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차이를 해석할 때 배경에 대해 분석해보는 방법이 경험을 쉽게 재단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소설이 왜 재밌었어요?
   한 : 첫째로, 낮과 밤이라는 전통적 대조를 현대적으로 이식한 것이 재밌었고요. 둘째로, 앞서의 대조를 통해 세계의 비밀을 넌지시 드러낸 느낌도 재밌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것이 결국 ‘글쓰기’라는 방식으로 고백되는 것도 재밌었습니다.
   장 : ‘현대적으로 이식했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한 : 낮과 밤이 각각 정상성과 비정상성을 상징하는 것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밤이 지나면」은 그것을 소수자(정확히는 장애를 겪은/는/을 존재)2)의 ‘생존 서사’로 연결시켰다고 생각했어요.
   장 : 그치만 화자를 장애를 겪은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아이를 양육하길 거절한 상황에서, 화자가 일부러 말하지 않기로 한 것은 거의 유일하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던 일이잖아요. 제겐 그건 약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기 위한 절박한 전략으로 보여요.
   한 : 화자의 실어증이 신체적 혹은 정신적 기능 장애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본인의 결정으로 이뤄진 것이죠. 그러나 소설에서 선생이나 영예은이 화자를 대하는 태도는, 그러니까 검증과 치료의 대상으로 화자를 대하는 태도는 여전히 이 소설을 장애적 맥락에서 읽을 수 있게끔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장 : ‘생존 서사’라는 표현이 흥미롭네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겠어요?
   한 : 화자는 도주에서 실패한 이후 자신의 병리적(이라 규정되는) 경험을 일종의 무기로써 활용하는 방법을 터득합니다. 평소에는 숨기다가도 불리한 상황에 처하면 거리낌없이 드러내죠.3) 이런 논의와 관련해서 선생님께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젠더적인 맥락에서도 비슷한 독해를 수행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장 : 요즘 흔히 ‘여성서사’라는 표현을 쓰는데 위험한 비평적 용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90년대 ‘여성시’라는 용어가 2000년대로 들어오면서 페미니즘 비평 담론을 게토화 시키는데 기여했다고 생각해요.
   한 : 그렇다면 선생님께선 「밤이 지나면」을 어떻게 읽으셨나요?
   장 : 제가 느끼기에 이 소설은 ‘말하지 않기 위한’ 소설처럼 보였어요.
   한 :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있을 수 있나요?
   장 : 음, 다들 이 소설의 치밀한 구성을 크게 칭찬하잖아요. 완성도의 측면에서 보면 물론 저도 동의해요. 그런데 저는 이 촘촘하고 밀도 높은 소설적 구조가 일종의 ‘말하지 않기’ 위해 선택된 위장막처럼 보여요.
   한 : 그럼 작가가 무엇을 숨기려고 하는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장 : 그건 가려져 있으니 알 수 없죠. 다만, 제가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말하는 것’이라고 느낀 부분이 있긴 해요.
   한 : 해당 부분을 정확히 인용해주실 수 있나요?
   장 : 피구를 하다가 공에 맞아서 화자가 피를 흘리는 장면에서 이런 문장이 나오죠. “신체는 통제를 벗어난다.” 그리고 교통사고 직후, “체액, 축축한 느낌, 경미하지만 분명한 신체적인 훼손.” 이 부분이요.
   한 : 아, ‘신체’와 ‘체액’이 공통되네요. 여기서 손보미의 육성을 들으신 건가요?
   장 : 정확히는 손보미 작가의 육성이 아니라 제가 작품을 읽으며 상정한 ‘작가’의 목소리라고 해야겠네요. 피구를 하는 장면에서 화자는 어떻게든 소리를 내지 않으려 했으나 너무 아파서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고, 도주하고자 했으나 사고로 인해 그녀가 다쳐서 흘리는 피는 비유로 느껴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것 외의 디테일들은 일종의 속임수처럼 느껴졌어요.
   한 : ‘일종의 속임수’라는 것은 작가가 정교한 구조를 설계한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거기서 핵심적인 부분은 앞서 지적한 부분밖에 없으며 나머지는 그럴듯한 겉치레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장 : 네, 맞아요. 저는 이 소설이 화자가 일부러 말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처럼, 이 소설도 보통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되는 소설 문법을 그대로 구현하여 ‘잘 쓰여진 소설’로 보이도록 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실천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즉 제게 이 소설이 감흥이 없다는 것은 ‘못 쓴 소설’ 혹은 ‘좋지 않은 소설’이 아니라 ‘말하지 않으려는 것’을 ‘실제로 듣지 않는’ 독서 경험인 것 같아요.
   한 : 정리해서 말하자면, 선생님은 메타적으로 소설을 독해한 결과 화자와 작가가 동일하다고 판단하신 셈이네요. 화자가 말하기를 거부하듯 작가도 말하기를 거부하고 있다면서요. 그러면 이 소설은 결국 ‘나는 말하고 싶지 않은데 왜 자꾸 말하라 그러냐’며 어떠한 외부적 압박에 강하게 항변하고 있다는 거네요?
   장 : 네, 맞아요. 그런 점에서 독자가 소설의 내부로 뛰어들어 흩어진 디테일들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해석 체제를 구축하는 것은 작가가 만들어놓은 덫에 걸려 들어가는 일 같아요. 그 해석이 성공적일수록 작가가 말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더 듣지 못하게 된다고 생각했어요.
   한 : 음, 뭔가, 저는 독자가 장애의 시좌 4) 에서 수용할 수 있게 독해한 것 같고, 선생님은 메타적 관점에서 작가가 ‘숨긴 것’과 ‘밝힌 것’을 찾아내고 그것의 효용을 묻는 것 같아요.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기원했을까요?
   장 : ‘작가가 숨긴 것과 밝힌 것’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사실 순서가 뒤바뀐 것 같아요. 제가 이렇게 독해하게 된 건 ‘왜 이 소설이 내게 아무 감흥도 주지 않지?’라는 제 독서 경험에 대한 질문을 먼저 던졌고,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면서 이 소설의 밀도를 이루는 수많은 뛰어난 디테일들이 하나의 어떤 중심점으로 모이지 않도록 설계되었다고 느꼈어요. 그렇다면 일부러 그 중심점을 만들어 해석체계를 구성하기보다 흩어진 디테일 자체를 감상해야 하지 않나? 생각했던 거죠.
   한 : 일종의 작법 측면에서 이야기를 하신 건데, 선생님께서 문예창작학과의 수많은 창작자들 사이에서 합평을 경험한 것과도 관련 있을까요?
   장 : 음, 완전히 관련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죠. 작가가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그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작가에게 어떤 가치가 반드시 작동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건 독자도 마찬가지여서, 감흥이 없다면서도 이 소설을 끝까지 그리고 여러 번 읽은 내 욕망은 무엇일까?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한 : 저는 아무래도 블로그를 오랫동안 운영하기도 했고 서사의학 5) 을 잠시나마 공부한 적이 있기도 해서 독자에게 최대한 유효한 의미로 다가오게끔 작품을 읽게 되는 것 같아요. 선생님은 저의 해석을 작품에 존재하지 않는 중심점을 일부러 설정해 체계화하는 과정으로 느끼시는 것 같은데, 그래도 저는 아직 장애학이 대중적으로 수용되지 않는 지금-여기의 상황에서 이런 방식의 독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6)
   장 : 물론 그 해석 자체는 흥미로워서 ‘아,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들어요. 근데 제가 느끼기엔 그 해석은 소설과는 사실 별로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물론 뭐 꼭 상관있을 필요는 없지만요.
   한 : 어느새 소설 이야기에서 각자의 비평관 이야기로 넘어간 것 같은데, 다시 소설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볼까요?
   장 : 좋습니다. 선생님의 해석을 좀더 들어보고 싶어요.

(▷다음호에서 이어집니다)

장은정, 한설

장은정: 비평적 대화란 무엇일까? 대화하는 법을 처음부터 새로 배우고 있다.
한설: 과몰입형 이차창작자

2021/02/23
39호

1
공교롭게도 장은정과 한설은 세대(80년대생과 90년대생), 젠더(여성과 남성), 지적 배경(문예창작학과 치의학), 활동 분야(시 비평과 소설 비평) 등이 판이하게 다르다. 에드워드 사이드, 호미 바바, 헨리 루이스 게이츠, 일레인 쇼월터, 주디스 버틀러 등에 의하여 밝혀진 바와 같이 정전으로 통칭되는 텍스트는 서구-백인-남성-이성애자로 축약되는 평균적 템플릿에 기반하고 있으며, 좋은 소설의 미학적 기준 역시 그렇다. 이번 대담을 통해 장은정과 한설의 수많은 차이가 어떻게 상반된 독해로 이어졌는지 드러나길 바라며, 좋은 소설이 편향된 정의라는 사실도 다시 한번 확인되길 바란다.
2
《문학동네》 2019년 가을호에 발표된 계간평 「여름방학 리뷰일기」에서 이지은은 “외숙모가 ‘화목한 가정’이라는 허울을 지키기 위해 그녀를 (…) ‘아내/엄마’가 되지 못한/될 수 없는 ‘미친 여자’로 치부하는 것”에 주목하여 「밤이 지나면」이 “그녀에 대한 배제와 혐오”(강조는 인용자)로 작동하는 ‘정상적’ 세계에 대한 소설이라 판단한다. 김건형 역시 비슷한 분석을 거쳐 「밤이 지나면」이 “낭만화된 여성 연대나 신비화된 여성의 광기로 나아가지 않”으면서도 “여성 인물들만으로 상징계를 문제삼는” 소설이라 판단한다. 한편, 김녕과 한설은 ‘낮’과 ‘밤’의 상징성에 주목하여 「밤이 지나면」이 “잊히지 않는 밤도 있다는 걸” 수용하는 것으로 결지되는 “성장소설”이라 판단한다. 요컨대, 「밤이 지나면」은 ‘정상적’ 세계가 ‘여성’을 향한 ‘배제’와 ‘혐오’를 통해 구축된다는 사실을 앞서 적시한 다음 그것을 어린 여성 화자가 ‘밤’의 고정적 특질로서 이해하며 오디세우스로 대표되는 남성적 성장담과 사뭇 다른 결의 독특한 성장담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밤이 지나면」이 도주와 성장을 기준 삼아 「사랑의 꿈」(《문학사상》 2019년 10월호)과 「크리스마스의 추억」(《문학3》 2019년 3호)-「해변의 피크닉」(《문학과 사회》 2020년 겨울호)으로 쪼개졌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이것은 가장 타당한 독해 중 하나일 것이며 작가의 의도에 가장 근접한 독해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앞서 밝힌 이번 대담의 취지를 생각하여 여기서는 부러 장애를 앞세워 소설을 심각하게 오독하려 한다. 병이라는 단어가 의외로 빈번하게 등장하는 사실, “[화자가] 병에 걸렸“기에 “여러분이 잘 도와줘야“ 한다는 동정적 태도가 선생에서 외숙모와 외삼촌으로 확대될 때 도주가 발생했다는 사실, 또 화자가 납치를 당했다며 외숙모가 “기어코 나를 입원시켰“으며 “선생이 드디어 병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이러한 오독을 가능케 만든다.
3
디자인 연구자인 그레이엄 풀린은 인공 보철 디자인이 ‘패션(fashion)’과 ‘디스크레션(discretion)’ 사이를 왕복하며 발전해왔다고 평가한다. 김원영과 김초엽이 제안한 대로 기계와 인간의 혼종적 존재를 의미하는 사이보그를 매개 삼아 장애를 사유해본다면, 장애의 ‘몸’적 표현 역시 ‘패션’과 ‘디스크레션’ 사이를 왕복하며 발전해왔다고 여겨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약간의 비약을 감행해 화자가 “함께 고무줄놀이를 하고, 다투고, 질투하고, 눈물을 흘리고, 억지를 부리는” ‘정상적’ (낮의) 세계에 진입하면서도 “내가 납치‘당했었다’는 이야기”를 때때로 언급하며 ‘비정상적’ (밤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자원화하는 것도 장애의 ‘몸’적 표현으로 여길 수 있지 않을까. 김원영, 김초엽, 『사이보그가 되다』, 사계절, 2021, 156쪽.
4
“저에게는 ‘시좌’라는 말이 ‘관점’과 조금 다른 뉘앙스로 다가왔는데요, 후자가 관찰의 대상과 주체라는 양자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면, 전자는 어떤 시공간에서 주체가 자리한 위치와 관련된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보는 지점[관점, point of view]’이 달라지면 동일한 대상의 다른 면을 보게 됩니다. 반면 ‘보는 자리[시좌, position of view]’가 달라지면 풍경 자체가 달라진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오월의봄, 2019, 10∼11쪽.
5
서사의학자를 자처하는 리타 샤론은 ‘서사적 역량(narrative competence)’의 임상적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녀에 따르면 환자와 관련된 수많은 서사를 탁월하게 ‘인식’하고 ‘흡수’하여 ‘해석’한 다음 ‘감동’받는 의사일수록 질병이 환자의 생활에 어떠한 실존적 영향을 끼치는지 더 잘 파악하고 행동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서사적 역량은 선천적으로 주어지지 않으며 임상의 대리물로서 꾸준히 텍스트를 분석해야 얻어진다. 때문에 샤론은 매년 워크숍을 거듭하며 의학 교육 과정에 문학 교육이 포함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황임경, 「의학과 서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2011, 153∼157쪽.
6
리타 샤론에게 문학적 텍스트란 임상적 텍스트를 독해하는 데에 있어 요긴하게 활용되는 참고 문헌이다. 『82년생 김지영』이 여성의 언어 중 하나로 채택되며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르게끔 도와주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오늘날 문학의 효용은, 샤론식으로 말하자면, 공통적인 현실의 대리물을 제공하여 우리로 하여금 시민적 덕성을 가지고 사회 문제에 접근하게 도와주는 것일 테다. 따라서 가라타니 고진이 엄숙하게 적었던 ‘문학의 종언’은 너무나도 일렀다. ‘네이션’과는 다른 각도에서 ‘상상의 공동체’는 여전히 형성되고 있다. 한설, 「하필이면 평론가라서」, 《자음과 모음》 2020년 봄호, 196∼2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