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너를 따라가면
그 언니 후랑크후르트로 간댔나.
거기 가면 집도 주고 옷도 준댔나.
예나 지금이나 동네에서 제일 큰 외삼촌 댁보다 훨씬 큰 대궐 같은 집이랬다. 외화에 나오는 여우들이 입을 법한 옷가지도 받는댔고, 보들보들한 수건도 양껏 쓴다 했고, 집보다 옷보다 수건보다 무엇보다 사람대우받는댔다. 그 언니 그래서 제 말마따나 지금쯤 슈바빙 돼 있으려나. 버려진 묫자리서 몰래 피던 마(麻)도 맘껏 피고, 마셔보고 싶다 노래 부르던 포도주도 원 없이 마시면서 그렇게 멀리멀리 가 있으면,
이 난리도 모르겠지.
*
너희들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 부담되면 오지 마라. 간호과장님의 전언이라며 병원에서 비상 연락망을 돌린 것은 출근 30분 전인 20일 오후 2시 반경이었다. 동료 간호원들과 함께 기숙사를 나선 정혜는 도보 5분 거리인 병원 신관 건물의 후문으로 들어갔다. 5층 일반외과 병동으로 올라가니 집에서 통근하는 다른 간호원들도 벌써 거기에 도착해있었다. 그들도 같은 내용의 전화를 받았다. 그래도 오고 싶다면 간호모를 쓰고 간호복을 입고 와라. 어찌 됐건 우리는 환자를 지켜야 한다. 그게 우리의 일이다.
책임간호원 선배는 이브닝 번 간호원들에게 수간호원 선생님이 3층 수술실에 지원을 가 있다고 말했다. 선배는 수쌤이 곧 올라올 거라며 그동안 데이 번들에게 환자 인계를 받고 있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정혜는 보조 의자를 들고 스테이션 접수대 책상으로 갔다. 작년에 정혜와 같이 이 병원에 입사한 윤희는 복부둔상 환자들이 주로 입원한 전날과 달리 오전에만 자상 환자 세 명이 수술을 마치고 병동에 올라왔다고 했다.
곤봉으로 모자라 이젠 대검까지 쓰는 거지.
그렇게 읊조린 윤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서 윤희는 오전에 1층 응급실에서 최루탄이 터졌다는 말도 전했다. 환자를 가장한 불순분자를 수색한다는 명목이었다. 미친놈들, 여기까지 연기가 퍼져서 지금껏 열어뒀잖아. 윤희가 창문으로 턱짓을 하고는 고개를 숙여 업무인계일지를 마저 적었다. 최루탄 냄새는 정혜도 익숙했지만 맵고 역한 그 냄새는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 열어젖힌 창문으로 꽃가루 냄새가 봄바람을 타고 물씬 풍겨 들었다. 일지의 업무 확인란에 연필로 줄줄이 체크 표시를 하던 윤희가 문득 정혜를 보더니 그리고 누가 들었다던데……, 라며 속삭였다.
병원을 폭파시킬지도 모른대.
에이, 설마.
얼굴을 찌푸린 정혜가 도리질을 쳤다.
아니야, 진짜 누가 들었다고 했어. 병원 곳곳에 폭탄을 이미 설치했다는 말도 있고, 폭격기를 보낼 거라는 소문도 있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혜가 미심쩍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윤희처럼 업무 확인란에 줄줄이 체크 표시를 했다. 인계를 마친 정혜는 창문을 닫으러 스테이션 앞의 창가로 갔다. 창틀에 뽀얗게 쌓인 꽃가루를 후― 불어내는데 창밖으로 병원 주차장이, 그 한가운데에 물이 끊긴 중앙 분수대가 보였다. 분수대 물은 전날 오전부터 끊겼지만 양옆으로 가지런히 심긴 주목나무들은 밤사이 더욱 파릇하게 물이 오른 듯했다. 창문을 닫은 정혜가 허리를 펴자 분수대 앞쪽에 빨간 벽돌로 지어진 3층짜리 구 본관 건물과 그 너머 병원 앞 오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평소라면 한창 혼잡했을 시간이었지만 깨진 보도블록이 즐비한 오거리에는 어느 편에서 뿌렸는지 모를 삐라들만 나뒹굴었다.
수쌤은 오후 3시 20분경에 병동으로 올라왔다. 군데군데 얼룩진 수술복을 그대로 입고 온 수쌤은 간호원들을 스테이션 안으로 불러모았다. 이 시간부로 전 간호과는 2교대로 전환한다. 알다시피 밖은 위험하다. 당분간 우리 파트는 빈 분만실에서 숙식한다. 우리 병원은 중증환자들 위주로 받기로 했다. 일반 환자는 최대한 퇴원시켜라. 상황이 더 심각해진다면 응급실, 중환자실 등으로 인력을 차출할 것이다. 또박또박 비상근무 체계를 설명하던 수쌤이 갑자기 팔짱을 끼고는 불만 서린 얼굴로 간호원들을 둘러봤다.
그리고 니들도 머리가 달렸으면 생각이란 걸 좀 해라.
수쌤은 목소리에 날을 세웠다. 내 들어보니 헛소리가 아주 창궐을 하더구나. 얘들아, 동란 때도 병원은 안 건드렸다. 제발 좀 아서라, 라고 말한 수쌤이 눈을 부라렸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긴대도 우린 죽기를 각오하고 환자들을 지켜야 한다. 가장 가까이에서 환자를 보살피는 사람이 누구냐? 교수야? 전공의야? 아니다. 우리야. 우리 간호원들이다. 그렇지 않니?
예, 맞습니다.
열댓 명의 간호원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에 흡족한 표정을 지은 수쌤은 그래, 일들 보고 있어, 라며 한결 부드럽게 말하고는 수술실로 내려가는 비상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말 그런가.
접수대 책상으로 돌아가며 정혜가 생각했다. 수쌤 말대로 설마 그러기야 하겠느냐만, 싶으면서도 혹시나 그런 일이 생긴다면 과연 그렇게 해야 하는 걸까, 라는 의심이 들었다. 대피시킬 수 있는 환자들은 다 대피시키고 우리도 도망쳐야 하지 않나, 라고 생각하던 정혜가 제자리에 앉아 머리를 훌훌 털었다. 스며든 잡념을 그렇게 흩어내는데 닫힌 창문을 뚫고 경적이 들려왔다. 아주 멀리는 아니었으나 제법 먼 곳에서 자동차 수백 대가 한꺼번에 경적을 울려댔다.
누가 들으라는 듯이,
제발 들으라는 듯이,
누구라도 제발 좀 들으라는 듯이.
그런데 이상하지.
왜 그렇게 고요했나. 분분히 퍼지던 그 시각의 볕처럼 수쌤의 말도, 경적 소리도 귓바퀴만 맴돌다 사라져버리는 것만 같았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뒤로한 채 정혜는 자신이 맡은 병실들을 순회했다. 매시간 혈압과 맥박을 측정하고 섭취량과 배설량을 체크하면서 정혜는 지침에 따라 일반 환자들에게 퇴원을 권했다. 이곳이 집보다 안전할 거라며 계속 남겠다는 사람도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은 저녁 식사 시간이 되기 전에 병동을 빠져나갔다.
수술실에서 보낸 환자들은 저녁 시간이 넘어서도 계속 올라왔다. 정혜는 수술 중간에 잠시 짬을 내어 교수들과 회진을 온 주치의에게 추가 오더를 내달라고 했다. 주치의는 약속 처방해둔 걸 보고 알아서 해달라고는 앞서가는 교수들을 헐레벌떡 뒤쫓았다. 그 모습을 보며 정혜는 입을 삐쭉였으나 그래도 이렇게 자기 재량이 많아질 때 일할 맛이 더 나긴 했다. 다시 병동을 순회하기 시작한 정혜는 당일 입원한 자상 환자들을 우선하여 살폈다. 그중 몇 명이 심한 통증을 호소하기에 정혜가 그들의 배에 길게 덮인 드레싱을 벗겨냈다. 빨갛게 부어오른 봉합 부위 주변으로 열감이 느껴졌다. 수액 연결관의 유량 조절기를 보며 항생제가 제대로 들어가는지 확인한 정혜는 상처 주위로 소독약을 꼼꼼히 발랐다. 그러고는 병동 약국에서 모르핀과 데메롤을 가져와 수액대의 항생제 약병 옆에 달았다. 마약성 진통제를 충분히 정주한 덕인지 밤이 깊어지면서 환자들은 바깥일을 까맣게 잊은 듯 하나둘 잠에 들었다.
자정 무렵의 병동은 조용했다. 정혜는 등화관제 훈련 때처럼 병동을 돌아다니며 불이 꺼진 병실에 커튼이 잘 쳐져 있는지 확인했다. 밖으로 빛이 새지 않게끔 커튼을 정리하고서 최소한의 조명만 밝힌 스테이션으로 돌아오니 책임간호원 선배가 틀어둔 라디오에서 몇 해 전에 유행한 은희의 노래가 낮은 볼륨으로 흘러나왔다. 정혜의 간호전문학교 후배인 화숙은 그 시간이 되어서야 스테이션에 한 대밖에 없는 외선전화기로 집에 전화를 했다.
엄마, 나 며칠 못 들어갈 거 같아. 아니야, 아니겠지. 글쎄. 여느 때 같지 않잖아. 몰라, 모른다니까. 응…… 엄마도 몸조심하고. 진수 절대 밖에 나가지 말라 그러고.
화숙은 짤막한 통화 끝에 남동생을 걱정했다. 그저께인가, 남자 고등학생이 탱크 위로 올라갔다가 변을 당했다는 소문이 돈 터라 신경이 많이 쓰인 모양이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자기 자리로 돌아간 화숙은 퇴원환자 차트를 마저 정리했다. 보통 때였으면 후배들이 가져온 주전부리를 나눠 먹으며 쉬어갈 시간이었지만 그들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각자 자리를 지켰다. 낯선 침묵이 감도는 스테이션에는 추억의 노래만 잔잔히 흘렀고 정혜는 개인 기록지에 적은 것들을 병동 종합기록지에 베껴 쓰면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가락을 속으로 흥얼거렸다. 그렇게 흥얼대다보니 오래전에 잊은 줄로만 알았던 가사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하굣길이면 레코드 가게 앞을 떠나지 못하던 정혜였다. 신작로 한편에 우두커니 서서 스피커에 귀를 기울인 정혜가 많이도 듣던 노래들이었다. 정혜는 은희의 노래도 좋아했지만 은희보다는 이장희였고, 이장희보다는 이연실이었으며, 이연실보다는 트윈폴리오를 좋아했다.
하, 씨발……
그러고 보니 그 언니도 참 좋아했지.
정혜처럼 레코드 가게 앞에 서서 노래를 듣다가 감정에 북받쳐 저 혼자 욕설을 뇌까릴 정도로 그 언니는 트윈폴리오를 좋아했다. 그 목소리에, 그들이 번안해 재창조한 노래들에, 그리고 그 노래들에 스민 이국의 정서에 그 언니는 완전히 심취해있었다.
그러니까 8년 전, 중학생이던 정혜가 A시의 외삼촌댁에 살 때였다. 그 무렵 정혜가 원래 살던 B직할시에 수출호황을 타고 골덴, 벨베틴, 홀치기, 쓰므기 등 각종 직물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전국에서 모여든 여공들은 마땅한 거처를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구청 공무원이었던 정혜의 아버지 임진탁은 빚을 내어 오래 전 유곽으로 쓰인 건물을 사들였는데, 첫 달 통장에 찍힌 임대수익을 본 그는 정혜의 어머니 곽계화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구청을 나왔다. 진탁은 건물을 담보로 이런저런 사업에 손을 댔으나 잘못 선 연대보증 한 번에 수십 명에게 사글세를 주던 진탁 일가는 불과 몇 달 만에 사글셋방으로 옮겨가야 했다. 이미 시내의 대학을 다니며 장학금을 꼬박꼬박 받던 맏언니는 그리 살라 두고, 오빠는 없는 가산에도 장남이니 재수학원엘 보냈고, 막내는 막내에 아들이라 직접 챙겼지만 죽일 놈 살릴 놈 소리에 반폐인이 된 진탁 대신 도나스 가게에서 일하며 가장 노릇을 해야 했던 계화에게 정혜는 덜어내야 할 입이었다. 이리는 못 산다는 계화의 성화에 A시에서 전매업을 하는 외삼촌 내외가 정혜를 맡아주었으나, 기센 년이네, 남편 잡아먹을 년이네, 독한 년이네 하며 온 동네가 뒷담을 하던 계화와는 정반대의 수식으로 불린 외숙모가 온정으로 정혜를 맡아주었으나 정혜는 저를 긍휼히 여기는 그 눈빛을 그저 사랑으로 여길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정혜가 외삼촌댁으로 돌아가는 길은 그래서 멀었다. 멀어서 먼 게 아니라 둘러둘러 가서 멀었다. 종례를 마치고 학교를 나온 정혜는 시내의 레코드가게 앞에 자주 멈춰 섰다. 사장님 취향인지 스피커에는 김추자와 양희은의 노래가 많이 나왔지만 기다리다보면 트윈폴리오의 노래도 꼭 한 번은 나왔다. 원하는 노래까지 듣고서야 송창식처럼 음, 음, 허밍을 하며 마을 어귀까지 간 정혜는 그러고도 동네 바깥을 빙빙 돌았다. 폐가 주변을 도는 날도 있었고, 추수가 끝난 논을 가로지른 날도 있었다. 실개천을 따라 걷기도 했고, 이름 없는 언덕에 오른 적도 있었고, 이름 모를 야산 둘레를 걷기도 했다.
씨발 천재 새끼……
어느 여름 오후, 그 언니도 정혜처럼 레코드가게 앞에 서있었다. 번쩍이는 에나멜 핸드백을 어깨에 메고 통통한 몸에 꼭 맞게 수선한 간호복을 입은 채로 짝다리를 짚고 선 언니가 그렇게 혼잣말을 하고는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정혜도 아는 사람이었다. 두어 달쯤 전에 외삼촌댁 건너건너 있는 하숙집에 새로 들어온 간호보조원이었다. 그즈음 사촌동생들과 정혜의 등굣길에 배웅 나온 외숙모도 그를 보며 오 박사네 의원에서 새로 뽑은 직원이라고 일러준 적이 있었다.
오 박사님은 꼭 저렇게 도화살 낀 것 같은 애들만 뽑더라.
외숙모는 저만치 앞에서 마을 어귀를 나서는 언니의 뒷모습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저 봐라, 꼴이 저게 뭐냐. 아이들 등굣길에 배웅 나온 다른 어른들도 동네서부터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유니폼을 입고 출근하는 언니를 손가락질했다.
저렇게 다니면 저가 정말 간호원이라도 된 거 같나.
외숙모는 간호복을 입고 출근하는 언니를 볼 때면 그런 말을 하고서 혀를 끌끌 찼다. 동네 사람들과 아무 교분 없이, 눈인사조차 않고 나갔다가 밤이 이슥해져서야 헝클어진 차림으로 돌아오는 언니를 두고 동네엔 온갖 말이 나돌았다. 오 박사님이 전에도 딱 저런 애들 뽑아서 정분난 거, 그 집 사모님만 모르고 온 동네가 다 알아서 우세였잖니, 라고 말한 외숙모가 정혜를 보며 우리 정혜, 행여 저런 것들이랑은 말도 섞지 마라, 좋은 것만 보고 듣기에도 짧은 게 인생이다, 라고는 정혜의 교복 매무새를 단정히 고쳐주었으나 그때의 정혜에게 트윈폴리오의 노래를 다 듣고서 혼자 훌쩍이는 사람을 멀거니 보지 않을 재간 따위는 없었다.
뭘 봐? 사람 우는 거 처음 보니?
눈물을 훔친 언니가 정혜를 흘겨봤다. 그렇게 쏘아붙인 언니는 정혜에게 등을 돌리더니 신작로를 따라 터벌터벌 걷기 시작했다. 정혜도 그 언니처럼 신작로를 걸어 외삼촌댁이 있는 동네로 갔다. 마을 초입의 갈림길에 다다른 정혜가 마을로 들어가지 않고 옆길로 빠지려는데 앞서 걷던 언니가 팩 돌아봤다.
너 왜 자꾸 졸졸 따라와?
따라가는 거 아닌데요, 집에 가는 건데요.
뭐래는 거야. 너희 집 저쪽이잖아.
언니가 어이없어하며 피식거렸다. 뜻밖의 말에 흠칫거린 정혜는 그, 그, 하며 더듬기만 하다가 별안간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그, 그러는 언니 집도 이쪽 아니잖아요!
황당하다는 듯이 코웃음을 친 언니는 집 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라고 궁싯거리고는 또다시 정혜에게서 등을 돌렸다. 정혜는 밭 사이에 난 샛길을 지나 인근의 야산으로 향하는 언니를 뒤따랐다. 얼마간 산 둘레를 걷던 언니는 밖에서 보면 길처럼 보이지도 않는 좁은 길목으로 들어갔다. 발길이 쉬 닿지 않은 오솔길 길바닥은 푸릇푸릇했고, 길가에 차양처럼 햇살을 가린 잡목들 사이로 어른 가슴높이께 자란 수풀이 무성했는데 그 길 중간에 멈춰선 언니가 수풀 속으로 두 팔을 집어넣었다.
근데요……
수풀을 헤집던 언니는 뜸을 들이는 정혜를 멀뚱히 봤다.
누가 천재 새끼예요?
정혜의 물음에 한쪽 눈만 치뜨면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은 언니는 넌 그걸 질문이라고 하니? 당연히 송창식이지, 라고 툭 내뱉고는 수풀을 헤치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오솔길에 홀로 남은 정혜는 씩, 하고 웃음을 지었다. 상기된 얼굴로 언니처럼 수풀을 헤친 정혜가 고개를 안으로 들이미니 너른 풀밭이 보였다. 묫자리로 쓰려고 다져뒀는지 가운데가 움푹 팬 풀밭에는 잡초들이 곳곳에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언니는 경사면에 퍼질러 앉아 핸드백에서 성냥갑과 돌돌 만 연초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연기를 내쉰 언니가 경사면에 비스듬히 눕더니 안을 들여다보는 정혜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거기서 뭐 하냐? 안 들어와?
*
맞교대를 한 정혜가 3층 분만실로 내려온 것은 21일 아침 7시 20분경이었다. 빈 침상에 몸을 누인 정혜는 모포를 끌어올려 햇빛을 가렸다. 일반 환자들이 대거 빠져나간 병원은 평시보다 한산했다. 인계 거리도 많지 않았고 간호과에서도 특별한 추가 지침을 내리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아침이었다. 밤을 새운 탓에 정혜는 눈을 감으면 금세 곯아떨어질 것 같았지만 고요함이 자아낸 묘한 기운에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이나 뜬눈으로 있다가 깜빡 잠에 들어도 자기처럼 잠을 설치는 다른 간호원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곧 깨어나곤 했다.
너 후랑크후르트 아니?
소세지?
말고, 말고.
컴컴한 모포 속에서 정혜가 실눈을 떴다. 이번에는 얼마나 잤을까. 모포를 들춰 분만실의 벽시계를 볼까 싶다가도 그러면 정말 잘 수 없을 것 같아 정혜는 도로 눈을 감았다. 그럼에도 한번 달아난 잠은 다시 오지 않았고, 꿈결인지 잠결인지 모를 찰나에 떠오른 그 언니와의 대화만 더 또렷해졌다. 지난 자정께 그 언니를 처음 떠올린 후로 정혜는 그 언니를 자주 생각했다. 그 언니를 만나지 않았다면 정혜는 지금 이곳에 있지도 않았을 테니까. 운수소관 따위 개나 주라며 곧 멀리멀리 떠날 거란 말을 돌림노래처럼 하던 그 언니를 못 만났더라면 정혜 역시 멀리멀리, 더 멀리, 영영 떠나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테니까. 연초에 불을 붙인 언니가 길게 숨을 내쉬면 수풀로 둘러싸인 묫자리에는 잘 삶은 걸레 냄새 같은 게 퍼졌다. 세상 누구보다 편한 자세로 비스듬히 누워 가만히 마를 피우다 정혜가 심심해할 즈음이면 언니는 너 알지? 나 거기 곧 거기 갈 거다, 라며 입을 열었다. 거기 가면 정원에 화초가 잘 가꿔진 대궐 같은 집이 있다 했고, 자기는 그 집 거실에서 드레스 밑단이 발끝에 끌리지 않도록 치맛자락을 홀홀 들 거랬다. 한낮에는 융이 덮인 소파에 파이프를 물고 앉아 루이제 린저를 읽을 것이며, 저녁이면 코니 프란시스나 에바 가드너를 닮은 벽안의 친구들과 밤새 포도주를 마실 거라고도 했다. 그럴 리가 없음에도 마치 전에 거기 살아보기라도 한 듯 언니는 그곳의 정경과 일상을 눈앞에 그려질 듯이 말했는데, 만날 때마다 조금씩 다르게 꾸며내는 언니의 이야기는 그때까지만 해도 극장에 가본 적이 없었던 정혜에게 끝날 줄 모르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외화나 진배없었다.
어찌 그리도 잘 지어냈나 몰라.
기껏해야 지금 내 나이뿐이었을 텐데.
그래서 더 그랬나. 정혜도 언니처럼 거기 가고 싶었다. 후랑크후르트든, 백림이든, 어디든 정혜는 지금쯤이면 자기도 구라파 어딘가에 있으리라 믿었다. 중학교를 마치고 본가에 돌아왔을 때, 빵 가게를 차려 갓 운영하기 시작한 계화는 간호원이 되어 독일로 가겠다는 정혜의 뜻을 격렬히 반대했다. 일손이나 거들다 시집이나 가야 할 년이 헛꿈 꾸지 마라, 아프레걸입네 비트니크입네 떠들어대니 너 따위 계집이 뭐라도 될 것 같으냐, 저 양반 공명심에 여식까지 대학물 먹인 건 맏이 하나로 족하다. 그렇게 저주를 퍼붓는 계화에게 진탁이 내가 못난 탓이다, 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주라 소리치며 계화가 차린 밥상을 엎어버리지 않았다면 독일은커녕 집에서 멀리 떨어진 C 직할시로 가겠다는 계획부터 무산됐을지도 몰랐다. 그리하여 하루 한 대 밖에 없는 시외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산길 넘어 이곳에 올 적에는 조금만 있다가 아예 이 나라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굳게 마음먹었으나 간호전문학교를 다니는 동안 독일은 간호원 수급을 멈췄고 물거품이 된 꿈에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정혜는 이곳에 남기로 했다.
그러므로 그것은 어떤 사명감 때문이 아니었다.
어떤 책임감 때문도 아니었고 어떤 숭고함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니까 오후 1시 10분경, 갑작스런 총성에 정혜가 몸을 벌떡 일으켰을 때, 끊임없이 이어지는 총성에 일제히 침상 아래로 내려간 간호원들이 바닥에 엎드린 채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이, 다급히 울리는 내선전화를 받은 책임간호원 선배가 총상 환자들이 밀려들고 있다며, 모두 1층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외치자 청진기와 혈압계 따위를 챙긴 정혜가 비상계단 위층에서부터 앞다투어 내려온 의료진들 사이로 제 몸을 밀어넣어 아래로 내달린 까닭은 그 순간 그곳에서 그렇게 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상계단을 내려온 정혜가 1층 비상구로 나와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이미 야전으로 변한 로비였다. 30병상 남짓한 응급실이 순식간에 포화되면서 원무과 직원들은 중앙계단을 통해 스프링 매트리스를 위층에서 끌고 내려왔다. 엑스선실에서 나온 방사선사들이 매트리스를 받아 로비 바닥에 깔면 간호원들과 인턴, 그리고 외과계 레지던트들이 2인 1조, 3인 1조가 되어 환자들 옆에 붙었다.
여기 좀 도와줘요!
응급실 쪽에서 환자를 업고 로비로 들어온 인턴이 외쳤다. 그리로 달려가 인턴과 함께 환자를 매트리스에 눕힌 정혜가 환자를 빠르게 훑었다. 이마에 길게 찢은 남색 와이셔츠 조각을 칭칭 두른 환자는 의식이 없어보였다. 트리아제에서 환자의 가슴팍에 붙인 종이테이프에 ‘파추하, 남, 후두부 관통상, 신경외과’라고 적힌 것을 본 정혜는 환자의 왼팔에 혈압계를 감으며 파추하님 바이탈 체크하겠습니다, 라고는 청진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백지장처럼 변한 환자의 팔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혜 맞은편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 인턴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환자의 왼팔 오금을 찌른 주삿바늘 팁에 핏방울이 맺히지 않는데도 인턴은 연신 그곳만 찔러댔다. 정혜가 환자의 허벅지를 가리키며 선생님, 페모랄로 해요, 페모랄, 이라고 하니 정신을 차린 인턴이 대퇴 혈관을 찾아 다시 컷다운을 시도했다.
됐어요, 됐어!
인턴의 말에 곧바로 수혈 팩을 연결한 정혜가 두 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저항이 느껴질 정도로 팩을 쥐어짰음에도 환자의 혈색이 돌아오지 않자 펜라이트로 동공반사가 남아있는 것을 확인한 인턴은 답답하다는 듯이 환자의 가슴을 쾅쾅 두드리며 파추하님! 파추하님! 이라 소리쳤다.
이 멍청한 새끼야, 그게 이름이겠냐.
어느새 그들 곁에 온 신경외과 레지던트 치프가 인턴을 옆으로 밀치며 면박을 줬다. 치프는 환자의 이마를 감싼 와이셔츠 조각부터 벗겨냈다. 드러난 환부를 보자마자 푸―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 그는 가운 주머니에서 검은 매직을 꺼내 환자의 가슴팍에 붙은 종이테이프 끝에 ‘가망 없음’이라고 갈겨썼다.
소생 불가능한 환자는 저기 소수술실로 옮긴다.
환자의 양쪽 겨드랑이에 손을 넣으며 치프가 말했다. 인턴은 시퍼레진 얼굴로 환자의 가랑이 사이에 들어갔다. 그들이 환자를 들어올리고서야 정혜 눈에도 그게 들어왔다. 환자는 파란색 추리닝 하의를 입고 있었다.
그런 환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로비로 밀려들었다. 하얀 블라우스에 청원단 원피스를 입은 환자는 청치마, 여, 복부총상, 일반외과. 정장 바지의 허리춤에 묵직한 열쇠고리를 찬 환자는 열쇠뭉치, 남, 사지관통상, 정형외과. 검은 바탕에 파란 줄무늬가 들어간 티셔츠를 입은 환자는 검파상, 남, 우측 흉부총상, 흉부외과.
의식을 잃으면 이름도 잃었다.
가까스로 임시의 이름을 얻은 사람만이 로비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럼에도 로비는 응급실 복도부터 원무과 접수대까지, 바닥에 뉘인 환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방사선사가 가져온 검파상님의 필름을 천장 형광등에 비춰본 흉부외과 레지던트가 정혜에게 환자를 수술실로 올려달라고 말했다. 정혜는 환자를 이동식 침대 카트로 옮겨 승강기까지 조심조심 밀고 갔다. 3층으로 올라간 승강기가 내려오길 기다리는데 발바닥이 아려왔다. 두 손으로 카트 손잡이를 짚은 정혜는 번갈아가며 깨금발을 들었다. 정혜가 이렇게라도 숨을 고른 것은 총격이 시작되고 2시간여 만이었다.
어이, 피 모자란다! 혈액원에 재고 없대?
승강기 근처에서 두부열상 환자의 상처를 봉합하던 성형외과 교수의 외침에 정혜가 그쪽을 쳐다봤다. 수액도 부족해요, 데메롤도! 그보다 멀리서 정혜 또래의 간호원이 소리쳤다. 그 간호원 바로 옆의 매트리스에서 환자의 다리를 붙잡은 정형외과 레지던트가 고관절 탈구를 도수정복하는 동안, 환자가 몸부림치는 것을 막기 위해 책임간호원 선배가 체중을 실어 그 환자를 누르고 있었다. 그 너머 로비 한쪽 끝에는 화숙과 다른 신규 간호원 몇 명이 처치에 사용한 겸자와 메스 따위를 대형 곡반에 담아 재사용이 가능하게끔 알코올 솜으로 박박 닦아냈다.
땡, 하는 청명한 소리와 함께 승강기 탑승구가 열렸다. 로비에서 시선을 거둔 정혜가 카트를 안으로 밀어넣었다. 문이 닫히니 환자가 내는 가뿐 숨소리만 조용한 승강기 안을 메웠다. 견딜 수 있을까. 환자의 창백한 안색을 살피며 정혜가 생각했다. 환자가 입었던 검은 바탕에 파란 줄무늬가 들어간 티셔츠는 가운데가 길게 잘려 양옆으로 펼쳐진 지 오래였다. 드러난 맨가슴 위에 두껍게 쌓인 패드는 환자가 숨을 쉴 때마다 조금씩 더 붉어졌다. 살 수는 있을까. 환자를 내려다보던 정혜가 고개를 푹 숙였다. 간호복 치맛자락이 반절 넘게 검붉은 빛으로 물들어있었다.
나는 살 수 있을까.
간호사 캡 아래서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듯했다. 미처 느낄 새도 없던 공포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정말 여기서 죽는 건 아닌지, 만에 하나 그리된다면 대체 누구를 원망해야 하는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좀 그만해!
흉부외과 수술방으로 환자를 들여보내고서 수술실 복도를 바삐 뛰어다니는 써큘레이팅 간호원들을 피해 정혜가 회복실 쪽으로 나가는 길이었다. 중앙수술실 한가운데의 물품 준비실에서 들려온 수쌤의 목소리에 정혜가 걸음을 멈췄다.
내가 없는 말 했어? 어제 수색하러 들어온 놈들이 그랬다며!
누군가 지지 않고 수쌤에게 대거리를 했다. 문짝이 없는 물품 준비실 밖으로 그들이 다투는 소리가 고스란히 새어나왔고 그쪽으로 다가간 정혜가 안을 슬쩍 들여다봤다. 외래와 병동 등지에서 지원을 나온 시니어급 간호원들이 문을 등지고 나란히 앉아 삶은 가제와 패드 따위를 양은 들통에서 꺼내 작업대 위에 한 장씩 쌓고 있었는데 수쌤과 시비가 붙은 다른 병동 수간호원 선생님은 수쌤을 보며 연이어 언성을 높였다.
너도 들었을 거 아니야? 오늘 밤에 헬기로 폭탄 떨어트린다잖아! 싹 다 뭉개버릴 거라잖아! 너는 걱정 안 되니? 아니, 종수는 걱정 안 돼? 나는 걱정돼! 내 자식새끼들, 엄마 없이 클까 봐 걱정돼 죽겠다!
주체하지 못하고 말을 쏟아내는 상대방을 향해 수쌤이 고개를 홱 틀었다. 정혜는 수쌤의 뒤통수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수쌤을 마주 본 상대방이 착잡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는 것만큼은 똑똑히 보였다. 상대방이 작업대로 다시 몸을 돌리면서 언뜻 잠잠해지는 듯했지만 수쌤이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아무 일 없을 거야, 쟤네도 미치지 않고서야, 라고 중얼거리자 진절머리를 친 상대방은 도저히 못 참겠다는 양 환자들이 깔려있는 회복실 쪽을 가리키며 소리질렀다.
야! 너는 저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그 손을 따라 수쌤이 반사적으로 문밖을 내다봤다. 그와 눈이 마주친 정혜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조아렸다. 예상치 못한 얼굴을 마주한 수쌤도 곤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정혜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라고 연거푸 말하고는 도망치듯이 수술실 밖으로 빠져나갔는데 그전까지 그에게서 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두려움이 그렁그렁 맺힌 눈망울은 머릿속에서 도무지 지워지지 않았다.
죽었으면?
한번은 정혜가 그렇게 물었던 적이 있다.
그 언니가 피우던 마를 뺏어 핀 어느 날이었다. 그날, 약에 취한 언니는 옆에 누운 정혜에게 연초를 건네며 해볼래? 하고 물었다. 그러고선 막상 정혜가 그걸 잡으려 들면 돌았니? 라며 정혜 손을 탁 치면서 저 혼자 비실비실 웃었다.
해볼래? 돌았니? 해볼래? 돌았니?
언니가 성대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간 목소리로 계속 깐족이자 정혜가 풀밭에서 몸을 확 일으켰다. 연초를 잡아챈 정혜는 언니 보란듯이 연기를 빨아당겼다. 정혜가 콜록콜록 기침을 하니 두 손으로 뒤통수를 괸 언니는 피식피식 웃었고 정혜는 약이 올라 더 깊이 빨아당겼다. 그렇게 몇 번이나 쑤욱 빨아당기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숨이 차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열이 올랐다. 몸도 덜덜 떨려왔다. 숨을 헐떡이던 정혜의 눈앞이 노래졌고 이내 정혜는 풀밭으로 픽, 하고 쓰러졌다.
언니는 그로부터 며칠 뒤 종적을 감추었다.
밀린 하숙비를 떼어먹은 채 야음을 틈타 사라진 언니를 두고 그간 마을에 파다하게 퍼졌던 소문은 사실로 굳어졌다.
왜 걔가 사람들이랑 말을 안 섞었겠냐. 저도 부끄러운 줄 아는 거지.
외숙모도 그런 말을 했다. 전쟁고아라더라, 작부였다더라, 약쟁이라더라, 라는 최초의 소문들은 오 박사가 제 버릇 개 못 주고 또 저가 뽑은 보조원이랑 정분이 났다는 소문으로 이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오 박사의 아랫도리 일에는 식상해하면서도 언니가 오 박사네 의원에서 오 박사의 애를 뗐다는 소문에 대해서는 광적으로 흥분했다. 말은 돌고 돌아 오 박사네 사모님 귀에도 들어갔다는 말도 들려왔고, 그 말은 사모님 보는 앞에서 애를 뗐다는 말로 바뀌기도 했다. 그렇게 한껏 부풀어오른 말은 언니가 사라지면서 편리하게도 진실이 됐는데 사람들은 진실로 바뀐 소문에는 더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정혜는 외려 더 궁금해졌는데.
이를테면, 그 언니 그래서 정말 후랑크후르트 갔을까, 같은 것들. 대궐 같은 집에서 외화에나 나올법한 드레스도 입고 보들보들한 수건도 양껏 쓰며 제 말마따나 슈바빙 되었을까, 같은 것들. 그래서 정말 그 언니 바람대로 사람대접 받고 있으려나, 같은 것들. 이제와 생각하면 절대 이루지 못할 꿈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때도 정혜는 약에 취한 언니가 어디선가 주워들은 말들을 짜깁기 해 나오는 대로 지껄인다는 것을 은연중에 느꼈지만, 그럼에도 어쩐지 그 언니는 정말 거기에 가있을 것만 같았다.
야, 너 죽은 줄 알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여전히 뒤통수를 받치고 비스듬히 누운 언니가 말했다. 정신을 차린 정혜가 잔디를 짚고서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구부정한 정혜의 등에 대고 언니는 너 집 안 가도 되냐? 라고 심상하게 물었다. 정혜는 뒤로 고개를 돌려 언니를 내려다봤다.
죽었으면?
뭐?
언니가 정혜를 흘겨보면서 날카롭게 되물었다.
나 죽었으면 어쩌려고?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는 정혜를 말없이 바라보던 언니가 별안간 꺌꺌 웃어대기 시작했다. 숨이 넘어갈 것처럼 몸을 좌우로 흔들며 웃어대던 언니가 헛웃음을 치고는 야, 하고 정혜를 불렀다. 그리고 그 언니 조막만한 입을 오물거렸지. 그렇게 뭐라 뭐라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 언니 무어라 했나.
그 언니, 그래서 뭐라 했던가……
요즘 누가 이런 걸 써. 안 그래요?
멍하니 딴생각에 잠겨있던 정혜가 매트리스를 맞잡은 남자 행정직원을 보며 벌게진 눈을 끔벅였다.
아까 내가 말했잖아, 요새 다 스프링 매트리스 쓴다고. 이게 십수 년 전에 미국에서 원조받은 거래요. 그 돈 들여서 이런 걸 주느니 밀가루나 더 줄 것이지. 안 그래요?
지하창고에서 함께 솜 매트리스를 옮겨오는 내내 조잘거리던 행정직원이 응급실 여닫이문을 안으로 젖혔다. 행정직원은 자신이 먼저 들어갈 테니 자기처럼 매트리스를 모로 세우라고 땍땍거리는 투로 정혜에게 말했다.
저녁 무렵, 아군이 무기를 획득했다는 소식이 들려온 뒤로 총격은 중단됐다. 로비와 응급실은 여전히 북적였지만 새로 들어오는 환자가 끊기면서 중상자들은 수술실이나 중환자실로 올라갔고 후순위로 밀렸던 경상 환자들도 늦게나마 처치를 받을 수 있었다. 치료에 당장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의료진들은 로비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돌렸다. 하나같이 넋이 나간 얼굴로 앉은 사람들 틈에서 정혜도 감겨오는 눈꺼풀을 비볐다. 분만실에서 선잠이 들었던 시간을 빼더라도 스물대여섯 시간은 깨어있었던 셈이었다. 몇몇 의료진들이 맨바닥에 드러눕는 것을 보고 정혜도 몸을 누이려는데, 1층을 총괄하고 있던 간호과장님이 쉬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와 솜 매트리스를 가져오라고 지시한 것이 오후 5시 50분경이었다.
무지하게 처치 곤란이었는데 하필이면 요긴하네.
행정직원은 뒷걸음질을 치면서도 계속 조잘댔다. 수면박탈 때문인지 바로 앞에서 조잘거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정혜는 그 소리에 머리가 아파왔다. 솜 매트리스를 세로로 세워 응급실 처치실의 유리창에 덧대고 나니 행정직원이 정혜 쪽으로 다가와 핀잔을 줬다.
에헤이, 여기 창문 다 안 덮었잖아요. 이 사람이 왜 이래.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른 정혜가 대꾸를 않은 채 매트리스를 옆으로 끌어당겼다. 유리창을 완전히 가린 것을 확인한 행정직원이 손바닥으로 매트리스를 툭툭 쳤다.
저도 방탄용으로 쓰일지는 몰랐겠지, 안 그래요?
또다시 말을 걸기에 짜증이 벌컥 인 정혜가 충혈된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허탈한 표정으로 매트리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의 옆모습은 차올랐던 화를 누그러트리게 했고, 수고하셨다며 힘없이 인사를 건넨 정혜는 처치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정혜를 놓칠세라 행정직원이 졸졸 쫓아오면서 아니 근데, 라고 또 무언가를 조잘거리는 찰나,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발파 현장을 방불케 하는 충격음이 병원 외벽을 무자비하게 때렸다. 응급실 유리창들이 연달아 깨졌고 건물마저 흔들리는 듯했다.
뭐야! 이거 뭐야!
행정직원이 바닥에 바짝 엎드리며 소리쳤다. 두 팔로 머리를 감싼 정혜도 그의 옆에서 몸을 웅크렸다. 순식간에 다시 아수라장으로 변한 병원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소강상태에 긴장을 늦추고 있던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본능대로 행동했다. 많은 이들이 바닥에 엎드리거나 몸을 움츠렸고, 어떤 이들은 침상 위의 환자를 제 몸으로 감쌌다. 누군가는 그런 사람들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려고 했고, 정혜는 몸을 와들와들 떨면서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기도를 했다.
죽고 싶지 않다.
제발, 죽고 싶지 않다.
죽더라도 지금은 아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거짓말처럼 총격이 멈췄다. 정혜의 간절한 기도가 통하기라도 한 듯, 외벽을 세차게 때리던 충격음이 일거에 중단됐다. 사람들은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그들이 사색이 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반쯤 열린 응급실 정문으로 시커먼 물체가 빠르게 날아들었다. 반합처럼 생긴 쇳덩이가 쩡,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부딪혔다. 두어 번 튕긴 쇳덩이가 정혜 가까이에서 팽그르르 돌았다.
죽을 수 없다.
정혜가 벌게진 눈으로 웅크린 사람들을 둘러봤다. 죽어서는 안 된다. 정혜가 몸을 일으켰다. 왜 죽어야 하나. 우리가 왜, 죽어야 하나. 바닥을 짚고 일어난 정혜가 떨리는 몸을 가눴다.
다 나가!
정혜가 온 힘을 다해 외쳤다.
다 나가야 돼! 나가!
정혜가 사방으로 길길이 뛰며 소리쳤다.
폭탄이야! 나가! 다 나가라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목청이 터져라 소리질렀다. 거듭된 외침과 몸부림에 진이 빠져 몸을 비틀거리면서도 정혜는 멈추지 않았다. 혼미해진 정신 탓인지 제 목소리마저 제 귀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제 몸 같지도 않은 눈가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쏟아지는 눈물이 줄줄 흘러나온 콧물과 범벅이 됐다. 축축해진 얼굴 아래서 일순 열이 확 올랐고 어느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 숨을 헐떡이는 동안 시야가 급격히 뿌예졌다. 눈앞이 노래지면서 지근의 사람들마저 아스러지는 듯했다.
정신 차려! 최루탄이야!
행정직원이 휘청거리는 정혜를 붙잡으며 소리쳤다. 투척된 쇳덩이에서 매캐한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행정직원은 정혜의 한쪽 팔을 뒷목에 걸치고서 정혜를 로비로 끌고 갔다. 아닌가. 그게 아닌가. 몽롱한 기운 탓인지, 연기 탓인지 응급실에서 로비로 대피하는 사람들이 흐릿하게 보였다. 아니라면, 그게 아니라면……
정신을 잃은 정혜의 몸이 축 늘어졌다.
정혜를 부축한 행정직원의 몸이 한쪽으로 기우뚱거렸다.
*
세상이 끝나고 인류가 절멸한다면 이런 풍경일까.
그 넓은 대로에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대로변의 가게들은 모두 문을 걸어잠갔다. 철제 셔터 사이로 군데군데 깨진 유리창 아래에는 파편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투석에 사용했던 보도블록 조각도 보이지 않았고 거리에 뿌려진 삐라들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깨끗했다. 지나칠 만큼 깨끗했다. 병실에서 깨어난 정혜가 무언가에 홀린 듯이 병원 밖을 나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신관 건물 외벽에는 총탄 자국들이 엇비슷한 높이로 점점이 박혀있었다. 그 한끝에 처치실 유리창은 산산이 조각나있었다. 전날 덧대어둔 솜 매트리스는 그대로였고 매트리스 가운데 생긴 작은 구멍으로 만개한 목화처럼 솜털이 멍울져있었지만 발아래에는 누가 치우기라도 한 것처럼 유리 조각 하나 밟히지 않았다.
22일 오후 1시 10분경, 정혜는 병원 앞 오거리에서 이어지는 대로의 초입에 서 있었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사람들만 홀연히 증발한 그 거리에서 정혜가 저 끝의 소실점을 바라보았다. 마치 누가 거기 있기라도 한 듯, 정혜는 아주 오랜 시간 그곳을 보았다. 소실점 너머로 검은 연기 한 줄이 가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뿐이었다.
대로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 씨발……
깊은 잠에 빠졌던 정혜는 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
씨발, 천재 새끼.
언니가 레코드 가게 앞에 서서 혼잣말을 했다. 언니, 언니, 하고 불러보았지만 언니에겐 정혜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듯했다. 언제인가 보았던 장면이었다. 그걸 깨달은 정혜가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언니는 고개를 푹 숙일 것이다. 그리고 훌쩍일 것이다. 어, 어, 우네. 정말 운다. 언니, 울어요? 어차피 들리지 않을 거란 생각에 정혜가 놀리듯이 묻는다.
정말 울어? 진짜?
언니가 고개를 홱 돌려 정혜를 노려본다. 흠칫 놀라는 정혜를 보며 히죽거린다.
야, 너 죽은 줄 알았다.
달싹이지도 않은 입술로 그렇게 말한 언니가 정혜에게서 등을 돌린다. 언니는 신작로를 따라 터벌터벌 걸어간다. 신작로에는 희뿌연 연기가 가득하다. 정혜는 언니를 뒤따라간다. 내딛지도 않은 걸음으로 정혜가 언니의 뒤를 따라간다. 동네에 가까워질수록 연기가 차츰 자욱해진다. 눈을 따갑게 하고, 열이 오르게 하고, 숨길을 막아버릴 연기라는 걸 정혜는 알지만 눈이 따갑지 않다. 열도 오르지 않는다. 숨도 마음껏 쉰다. 그렇다면 이건, 연기가 아닌가. 연기가 아니라면 이건……
정혜는 인기척을 느꼈다. 주위를 둘러보니 개천 방면으로 난 길목에 중학교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 둘이 전봇대 뒤에서 정혜처럼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정혜를 본 아이들이 깜짝 놀라 몸을 숨겼다가 다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정혜 말고는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아이들은 전봇대 뒤에서 나와 병원 앞 오거리로 후다닥 뛰어갔다. 뜀박질하는 두 아이의 뒷모습 너머 빨간 벽돌로 지어진 구 본관 건물이, 그 뒤로 하얀색 신관 건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혜도 아이들처럼 병원으로 향했다. 피가 굳어 뻣뻣해진 간호복이 정혜가 걸을 때마다 쩍, 쩍,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아무도 없는 오거리를 가로질러 병원으로 들어가는 정문에 이르자 정문 양옆의 시멘트 문설주 사이로 사람들이 삐져나와 있는 게 보였다.
이 줄이죠? 여기 맞죠?
아이들 중 한 명이 맨 끝에 선 중년여성의 소맷자락을 흔들면서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한 중년여성이 아이들을 제 앞에 세웠다. 사람들은 저마다 앞사람의 뒤통수를 보며 한 줄로 서 있었다. 정혜는 그들 가까이 다가갔다. 정문에서 구 본관 건물 현관까지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꺾인 행렬은 빨간 벽돌로 된 외벽을 따라 옆으로, 옆으로 이어졌다. 등 뒤에서 울리는 경적 소리에 정혜가 뒤를 돌아보니 소형트럭 한 대가 병원 앞 오거리를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화물칸 앞 짐받이를 붙잡고 선 사람이 확성기를 입에 대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시민 동지 여러분, 병원에 피가 부족합니다. 가능하신 분은 병원으로 가서 헌혈에 동참해주십시오. 시민 동지 여러분, 병원에……
……이건, 꿈이구나.
그렇게 깨닫기 무섭게 시야를 가리었던 연무가 한순간에 걷혔다. 연기가 연기가 아니었던 것처럼 신작로도 신작로가 아니었다. 언니를 뒤따르던 정혜가 서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대로였다. 언니가 걸어간다. 병원 앞 오거리에서 이어지는 대로를 언니가 걷는다. 대로 끝에는 하얀빛이 있다. 저만치 앞서 걷는 언니를 보면서도 정혜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발을 구르고, 손도 휘휘 내저어보지만 정혜는 그 자리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다. 하얀빛으로 스며드는 언니 뒤에다 대고 정혜가 언니, 언니! 하고 부른다.
죽었으면?
정혜가 외치듯이 묻는다.
나 죽었으면 어쩌려고?
정혜는 사람들 옆을 걸었다. 구 본관 건물의 측면을 지나, 주차장 가운데 줄지어 심긴 주목나무를 따라 행렬은 계속 이어졌다. 더디게, 더디게 앞으로 나아가는 줄에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사람들이, 손을 잡고 굳은 얼굴로 나란히 선 노부부가, 손 그늘을 하고서 줄담배를 피워대는 아저씨들이 있었다.
내 피가 더러워, 더럽냐고!
아저씨들 중 하나가 앞에 서 있던 역전 유흥가의 작부들과 실랑이가 붙은 모양이었다.
네 피만 피고 내 피는 피 아니야!
작부 한 명이 내지르는 고성에 아저씨가 할 말을 잃고 담배만 뻑뻑 피워댔다. 주차장 분수대를 서너 바퀴 휘감은 줄은 꼬리가 길게 늘어진 높은음자리표처럼 신관 건물로 이어졌다. 전날 저녁까지만 로비에는 많은 환자들이 남아있었지만 이제 다들 병동으로 올라간 듯했다. 전날의 일이 꿈이라도 되는 것처럼 깔끔하게 비워진 그곳은 헌혈을 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원무과 직원들이 사람들을 로비 한편에 마련된 임시 채혈장으로 안내했고 임상병리사들과 간호원들이 그곳에서 채혈을 진행하고 있었다.
왜 안 돼요, 왜?
아까 그 아이들 또래로 보이는 남학생이 보조 침대에 리넨을 덮은 임시 채혈대 앞에서 울먹였다. 제 피라도 써주세요, 제발요. 그래 주시면 안 돼요? 아이의 키에 맞춰 허리를 굽힌 간호원이 열여섯 살 밑으로는 헌혈이 안 된다며 아이를 달랬다.
미안해, 누나가 정말 미안해.
화숙은 아이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아이를 돌려보낸 화숙이 채혈대 옆에 앉으려고 몸을 트는데 인파 속에 섞여 있는 정혜와 눈이 마주쳤다.
선배!
잰걸음으로 정혜에게 다가온 화숙이 몸은 괜찮으냐고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정혜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이게 뭐야. 아직 옷도 안 갈아입었네. 화숙은 정혜의 간호복을 매만지다 빈 채혈대 뒤로 늘어선 사람들을 돌아봤다.
선배, 여기 잠시만 맡아주실래요? 저 화장실도 다녀오고 선배 갈아입을 옷도 가져오게.
응, 다녀와. 천천히 다녀와.
화숙의 통통한 볼을 쓰다듬으며 정혜가 말했다. 채혈대 옆에 앉은 정혜는 종종걸음으로 멀어지는 화숙을 바라보았다.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화숙의 뒷모습을 보자 잠에서 깨기 직전, 하얀빛으로 사라지는 언니의 뒷모습에 대고 울부짖던 자신이 문득 떠올랐다. 눈앞을 가려오는 하얀빛이 너무나 시려 감아버렸던 눈을 살며시 떴을 때, 내리쬐는 쨍한 볕에 얼굴을 찌푸린 정혜가 언니의 목소리를 들었던 그 순간을.
낸들 알겠냐. 그냥 이렇게 누워있었겠지.
그러고서 언니는 다시 두 손으로 뒤통수를 받쳤다. 움푹 팬 풀밭에 누워 언니는 가만히 눈을 감았지. 너 근데 진짜 집 안 가도 돼? 라고 심드렁하게 물으며.
채혈 적합자입니다.
임상병리사가 정혜에게 쪽지를 건넸다.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이 임시 채혈대에 누웠다. 정혜는 쪽지에 적힌 이름을 확인했다. 맞다고 대답한 헌혈자가 와이셔츠 왼쪽 소매를 걷었다. 그래서 그 언니 정말 거기 가 있을까. 정혜가 고무압박대로 헌혈자의 팔을 묶었다. 거기 가서 집도 받고 옷도 받았을까. 알코올 솜으로 팔오금을 닦은 정혜가 조금 따끔합니다, 라고 나직이 말했다. 팁에 핏방울이 맺히자 정혜가 수혈 팩을 연결했다. 빈 팩 안으로 들어온 피가 검붉게 휘돌아 쳤다.
1980년 5월 22일의 오후.
정혜는 투명한 팩 안에 조금씩 차오르는 피를 묵묵히 지켜보았다.
거기 가면 집도 주고 옷도 준댔나.
예나 지금이나 동네에서 제일 큰 외삼촌 댁보다 훨씬 큰 대궐 같은 집이랬다. 외화에 나오는 여우들이 입을 법한 옷가지도 받는댔고, 보들보들한 수건도 양껏 쓴다 했고, 집보다 옷보다 수건보다 무엇보다 사람대우받는댔다. 그 언니 그래서 제 말마따나 지금쯤 슈바빙 돼 있으려나. 버려진 묫자리서 몰래 피던 마(麻)도 맘껏 피고, 마셔보고 싶다 노래 부르던 포도주도 원 없이 마시면서 그렇게 멀리멀리 가 있으면,
이 난리도 모르겠지.
너희들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 부담되면 오지 마라. 간호과장님의 전언이라며 병원에서 비상 연락망을 돌린 것은 출근 30분 전인 20일 오후 2시 반경이었다. 동료 간호원들과 함께 기숙사를 나선 정혜는 도보 5분 거리인 병원 신관 건물의 후문으로 들어갔다. 5층 일반외과 병동으로 올라가니 집에서 통근하는 다른 간호원들도 벌써 거기에 도착해있었다. 그들도 같은 내용의 전화를 받았다. 그래도 오고 싶다면 간호모를 쓰고 간호복을 입고 와라. 어찌 됐건 우리는 환자를 지켜야 한다. 그게 우리의 일이다.
책임간호원 선배는 이브닝 번 간호원들에게 수간호원 선생님이 3층 수술실에 지원을 가 있다고 말했다. 선배는 수쌤이 곧 올라올 거라며 그동안 데이 번들에게 환자 인계를 받고 있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정혜는 보조 의자를 들고 스테이션 접수대 책상으로 갔다. 작년에 정혜와 같이 이 병원에 입사한 윤희는 복부둔상 환자들이 주로 입원한 전날과 달리 오전에만 자상 환자 세 명이 수술을 마치고 병동에 올라왔다고 했다.
곤봉으로 모자라 이젠 대검까지 쓰는 거지.
그렇게 읊조린 윤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서 윤희는 오전에 1층 응급실에서 최루탄이 터졌다는 말도 전했다. 환자를 가장한 불순분자를 수색한다는 명목이었다. 미친놈들, 여기까지 연기가 퍼져서 지금껏 열어뒀잖아. 윤희가 창문으로 턱짓을 하고는 고개를 숙여 업무인계일지를 마저 적었다. 최루탄 냄새는 정혜도 익숙했지만 맵고 역한 그 냄새는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 열어젖힌 창문으로 꽃가루 냄새가 봄바람을 타고 물씬 풍겨 들었다. 일지의 업무 확인란에 연필로 줄줄이 체크 표시를 하던 윤희가 문득 정혜를 보더니 그리고 누가 들었다던데……, 라며 속삭였다.
병원을 폭파시킬지도 모른대.
에이, 설마.
얼굴을 찌푸린 정혜가 도리질을 쳤다.
아니야, 진짜 누가 들었다고 했어. 병원 곳곳에 폭탄을 이미 설치했다는 말도 있고, 폭격기를 보낼 거라는 소문도 있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혜가 미심쩍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윤희처럼 업무 확인란에 줄줄이 체크 표시를 했다. 인계를 마친 정혜는 창문을 닫으러 스테이션 앞의 창가로 갔다. 창틀에 뽀얗게 쌓인 꽃가루를 후― 불어내는데 창밖으로 병원 주차장이, 그 한가운데에 물이 끊긴 중앙 분수대가 보였다. 분수대 물은 전날 오전부터 끊겼지만 양옆으로 가지런히 심긴 주목나무들은 밤사이 더욱 파릇하게 물이 오른 듯했다. 창문을 닫은 정혜가 허리를 펴자 분수대 앞쪽에 빨간 벽돌로 지어진 3층짜리 구 본관 건물과 그 너머 병원 앞 오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평소라면 한창 혼잡했을 시간이었지만 깨진 보도블록이 즐비한 오거리에는 어느 편에서 뿌렸는지 모를 삐라들만 나뒹굴었다.
수쌤은 오후 3시 20분경에 병동으로 올라왔다. 군데군데 얼룩진 수술복을 그대로 입고 온 수쌤은 간호원들을 스테이션 안으로 불러모았다. 이 시간부로 전 간호과는 2교대로 전환한다. 알다시피 밖은 위험하다. 당분간 우리 파트는 빈 분만실에서 숙식한다. 우리 병원은 중증환자들 위주로 받기로 했다. 일반 환자는 최대한 퇴원시켜라. 상황이 더 심각해진다면 응급실, 중환자실 등으로 인력을 차출할 것이다. 또박또박 비상근무 체계를 설명하던 수쌤이 갑자기 팔짱을 끼고는 불만 서린 얼굴로 간호원들을 둘러봤다.
그리고 니들도 머리가 달렸으면 생각이란 걸 좀 해라.
수쌤은 목소리에 날을 세웠다. 내 들어보니 헛소리가 아주 창궐을 하더구나. 얘들아, 동란 때도 병원은 안 건드렸다. 제발 좀 아서라, 라고 말한 수쌤이 눈을 부라렸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긴대도 우린 죽기를 각오하고 환자들을 지켜야 한다. 가장 가까이에서 환자를 보살피는 사람이 누구냐? 교수야? 전공의야? 아니다. 우리야. 우리 간호원들이다. 그렇지 않니?
예, 맞습니다.
열댓 명의 간호원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에 흡족한 표정을 지은 수쌤은 그래, 일들 보고 있어, 라며 한결 부드럽게 말하고는 수술실로 내려가는 비상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말 그런가.
접수대 책상으로 돌아가며 정혜가 생각했다. 수쌤 말대로 설마 그러기야 하겠느냐만, 싶으면서도 혹시나 그런 일이 생긴다면 과연 그렇게 해야 하는 걸까, 라는 의심이 들었다. 대피시킬 수 있는 환자들은 다 대피시키고 우리도 도망쳐야 하지 않나, 라고 생각하던 정혜가 제자리에 앉아 머리를 훌훌 털었다. 스며든 잡념을 그렇게 흩어내는데 닫힌 창문을 뚫고 경적이 들려왔다. 아주 멀리는 아니었으나 제법 먼 곳에서 자동차 수백 대가 한꺼번에 경적을 울려댔다.
누가 들으라는 듯이,
제발 들으라는 듯이,
누구라도 제발 좀 들으라는 듯이.
그런데 이상하지.
왜 그렇게 고요했나. 분분히 퍼지던 그 시각의 볕처럼 수쌤의 말도, 경적 소리도 귓바퀴만 맴돌다 사라져버리는 것만 같았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뒤로한 채 정혜는 자신이 맡은 병실들을 순회했다. 매시간 혈압과 맥박을 측정하고 섭취량과 배설량을 체크하면서 정혜는 지침에 따라 일반 환자들에게 퇴원을 권했다. 이곳이 집보다 안전할 거라며 계속 남겠다는 사람도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은 저녁 식사 시간이 되기 전에 병동을 빠져나갔다.
수술실에서 보낸 환자들은 저녁 시간이 넘어서도 계속 올라왔다. 정혜는 수술 중간에 잠시 짬을 내어 교수들과 회진을 온 주치의에게 추가 오더를 내달라고 했다. 주치의는 약속 처방해둔 걸 보고 알아서 해달라고는 앞서가는 교수들을 헐레벌떡 뒤쫓았다. 그 모습을 보며 정혜는 입을 삐쭉였으나 그래도 이렇게 자기 재량이 많아질 때 일할 맛이 더 나긴 했다. 다시 병동을 순회하기 시작한 정혜는 당일 입원한 자상 환자들을 우선하여 살폈다. 그중 몇 명이 심한 통증을 호소하기에 정혜가 그들의 배에 길게 덮인 드레싱을 벗겨냈다. 빨갛게 부어오른 봉합 부위 주변으로 열감이 느껴졌다. 수액 연결관의 유량 조절기를 보며 항생제가 제대로 들어가는지 확인한 정혜는 상처 주위로 소독약을 꼼꼼히 발랐다. 그러고는 병동 약국에서 모르핀과 데메롤을 가져와 수액대의 항생제 약병 옆에 달았다. 마약성 진통제를 충분히 정주한 덕인지 밤이 깊어지면서 환자들은 바깥일을 까맣게 잊은 듯 하나둘 잠에 들었다.
자정 무렵의 병동은 조용했다. 정혜는 등화관제 훈련 때처럼 병동을 돌아다니며 불이 꺼진 병실에 커튼이 잘 쳐져 있는지 확인했다. 밖으로 빛이 새지 않게끔 커튼을 정리하고서 최소한의 조명만 밝힌 스테이션으로 돌아오니 책임간호원 선배가 틀어둔 라디오에서 몇 해 전에 유행한 은희의 노래가 낮은 볼륨으로 흘러나왔다. 정혜의 간호전문학교 후배인 화숙은 그 시간이 되어서야 스테이션에 한 대밖에 없는 외선전화기로 집에 전화를 했다.
엄마, 나 며칠 못 들어갈 거 같아. 아니야, 아니겠지. 글쎄. 여느 때 같지 않잖아. 몰라, 모른다니까. 응…… 엄마도 몸조심하고. 진수 절대 밖에 나가지 말라 그러고.
화숙은 짤막한 통화 끝에 남동생을 걱정했다. 그저께인가, 남자 고등학생이 탱크 위로 올라갔다가 변을 당했다는 소문이 돈 터라 신경이 많이 쓰인 모양이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자기 자리로 돌아간 화숙은 퇴원환자 차트를 마저 정리했다. 보통 때였으면 후배들이 가져온 주전부리를 나눠 먹으며 쉬어갈 시간이었지만 그들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각자 자리를 지켰다. 낯선 침묵이 감도는 스테이션에는 추억의 노래만 잔잔히 흘렀고 정혜는 개인 기록지에 적은 것들을 병동 종합기록지에 베껴 쓰면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가락을 속으로 흥얼거렸다. 그렇게 흥얼대다보니 오래전에 잊은 줄로만 알았던 가사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하굣길이면 레코드 가게 앞을 떠나지 못하던 정혜였다. 신작로 한편에 우두커니 서서 스피커에 귀를 기울인 정혜가 많이도 듣던 노래들이었다. 정혜는 은희의 노래도 좋아했지만 은희보다는 이장희였고, 이장희보다는 이연실이었으며, 이연실보다는 트윈폴리오를 좋아했다.
하, 씨발……
그러고 보니 그 언니도 참 좋아했지.
정혜처럼 레코드 가게 앞에 서서 노래를 듣다가 감정에 북받쳐 저 혼자 욕설을 뇌까릴 정도로 그 언니는 트윈폴리오를 좋아했다. 그 목소리에, 그들이 번안해 재창조한 노래들에, 그리고 그 노래들에 스민 이국의 정서에 그 언니는 완전히 심취해있었다.
그러니까 8년 전, 중학생이던 정혜가 A시의 외삼촌댁에 살 때였다. 그 무렵 정혜가 원래 살던 B직할시에 수출호황을 타고 골덴, 벨베틴, 홀치기, 쓰므기 등 각종 직물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전국에서 모여든 여공들은 마땅한 거처를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구청 공무원이었던 정혜의 아버지 임진탁은 빚을 내어 오래 전 유곽으로 쓰인 건물을 사들였는데, 첫 달 통장에 찍힌 임대수익을 본 그는 정혜의 어머니 곽계화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구청을 나왔다. 진탁은 건물을 담보로 이런저런 사업에 손을 댔으나 잘못 선 연대보증 한 번에 수십 명에게 사글세를 주던 진탁 일가는 불과 몇 달 만에 사글셋방으로 옮겨가야 했다. 이미 시내의 대학을 다니며 장학금을 꼬박꼬박 받던 맏언니는 그리 살라 두고, 오빠는 없는 가산에도 장남이니 재수학원엘 보냈고, 막내는 막내에 아들이라 직접 챙겼지만 죽일 놈 살릴 놈 소리에 반폐인이 된 진탁 대신 도나스 가게에서 일하며 가장 노릇을 해야 했던 계화에게 정혜는 덜어내야 할 입이었다. 이리는 못 산다는 계화의 성화에 A시에서 전매업을 하는 외삼촌 내외가 정혜를 맡아주었으나, 기센 년이네, 남편 잡아먹을 년이네, 독한 년이네 하며 온 동네가 뒷담을 하던 계화와는 정반대의 수식으로 불린 외숙모가 온정으로 정혜를 맡아주었으나 정혜는 저를 긍휼히 여기는 그 눈빛을 그저 사랑으로 여길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정혜가 외삼촌댁으로 돌아가는 길은 그래서 멀었다. 멀어서 먼 게 아니라 둘러둘러 가서 멀었다. 종례를 마치고 학교를 나온 정혜는 시내의 레코드가게 앞에 자주 멈춰 섰다. 사장님 취향인지 스피커에는 김추자와 양희은의 노래가 많이 나왔지만 기다리다보면 트윈폴리오의 노래도 꼭 한 번은 나왔다. 원하는 노래까지 듣고서야 송창식처럼 음, 음, 허밍을 하며 마을 어귀까지 간 정혜는 그러고도 동네 바깥을 빙빙 돌았다. 폐가 주변을 도는 날도 있었고, 추수가 끝난 논을 가로지른 날도 있었다. 실개천을 따라 걷기도 했고, 이름 없는 언덕에 오른 적도 있었고, 이름 모를 야산 둘레를 걷기도 했다.
씨발 천재 새끼……
어느 여름 오후, 그 언니도 정혜처럼 레코드가게 앞에 서있었다. 번쩍이는 에나멜 핸드백을 어깨에 메고 통통한 몸에 꼭 맞게 수선한 간호복을 입은 채로 짝다리를 짚고 선 언니가 그렇게 혼잣말을 하고는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정혜도 아는 사람이었다. 두어 달쯤 전에 외삼촌댁 건너건너 있는 하숙집에 새로 들어온 간호보조원이었다. 그즈음 사촌동생들과 정혜의 등굣길에 배웅 나온 외숙모도 그를 보며 오 박사네 의원에서 새로 뽑은 직원이라고 일러준 적이 있었다.
오 박사님은 꼭 저렇게 도화살 낀 것 같은 애들만 뽑더라.
외숙모는 저만치 앞에서 마을 어귀를 나서는 언니의 뒷모습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저 봐라, 꼴이 저게 뭐냐. 아이들 등굣길에 배웅 나온 다른 어른들도 동네서부터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유니폼을 입고 출근하는 언니를 손가락질했다.
저렇게 다니면 저가 정말 간호원이라도 된 거 같나.
외숙모는 간호복을 입고 출근하는 언니를 볼 때면 그런 말을 하고서 혀를 끌끌 찼다. 동네 사람들과 아무 교분 없이, 눈인사조차 않고 나갔다가 밤이 이슥해져서야 헝클어진 차림으로 돌아오는 언니를 두고 동네엔 온갖 말이 나돌았다. 오 박사님이 전에도 딱 저런 애들 뽑아서 정분난 거, 그 집 사모님만 모르고 온 동네가 다 알아서 우세였잖니, 라고 말한 외숙모가 정혜를 보며 우리 정혜, 행여 저런 것들이랑은 말도 섞지 마라, 좋은 것만 보고 듣기에도 짧은 게 인생이다, 라고는 정혜의 교복 매무새를 단정히 고쳐주었으나 그때의 정혜에게 트윈폴리오의 노래를 다 듣고서 혼자 훌쩍이는 사람을 멀거니 보지 않을 재간 따위는 없었다.
뭘 봐? 사람 우는 거 처음 보니?
눈물을 훔친 언니가 정혜를 흘겨봤다. 그렇게 쏘아붙인 언니는 정혜에게 등을 돌리더니 신작로를 따라 터벌터벌 걷기 시작했다. 정혜도 그 언니처럼 신작로를 걸어 외삼촌댁이 있는 동네로 갔다. 마을 초입의 갈림길에 다다른 정혜가 마을로 들어가지 않고 옆길로 빠지려는데 앞서 걷던 언니가 팩 돌아봤다.
너 왜 자꾸 졸졸 따라와?
따라가는 거 아닌데요, 집에 가는 건데요.
뭐래는 거야. 너희 집 저쪽이잖아.
언니가 어이없어하며 피식거렸다. 뜻밖의 말에 흠칫거린 정혜는 그, 그, 하며 더듬기만 하다가 별안간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그, 그러는 언니 집도 이쪽 아니잖아요!
황당하다는 듯이 코웃음을 친 언니는 집 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라고 궁싯거리고는 또다시 정혜에게서 등을 돌렸다. 정혜는 밭 사이에 난 샛길을 지나 인근의 야산으로 향하는 언니를 뒤따랐다. 얼마간 산 둘레를 걷던 언니는 밖에서 보면 길처럼 보이지도 않는 좁은 길목으로 들어갔다. 발길이 쉬 닿지 않은 오솔길 길바닥은 푸릇푸릇했고, 길가에 차양처럼 햇살을 가린 잡목들 사이로 어른 가슴높이께 자란 수풀이 무성했는데 그 길 중간에 멈춰선 언니가 수풀 속으로 두 팔을 집어넣었다.
근데요……
수풀을 헤집던 언니는 뜸을 들이는 정혜를 멀뚱히 봤다.
누가 천재 새끼예요?
정혜의 물음에 한쪽 눈만 치뜨면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은 언니는 넌 그걸 질문이라고 하니? 당연히 송창식이지, 라고 툭 내뱉고는 수풀을 헤치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오솔길에 홀로 남은 정혜는 씩, 하고 웃음을 지었다. 상기된 얼굴로 언니처럼 수풀을 헤친 정혜가 고개를 안으로 들이미니 너른 풀밭이 보였다. 묫자리로 쓰려고 다져뒀는지 가운데가 움푹 팬 풀밭에는 잡초들이 곳곳에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언니는 경사면에 퍼질러 앉아 핸드백에서 성냥갑과 돌돌 만 연초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연기를 내쉰 언니가 경사면에 비스듬히 눕더니 안을 들여다보는 정혜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거기서 뭐 하냐? 안 들어와?
맞교대를 한 정혜가 3층 분만실로 내려온 것은 21일 아침 7시 20분경이었다. 빈 침상에 몸을 누인 정혜는 모포를 끌어올려 햇빛을 가렸다. 일반 환자들이 대거 빠져나간 병원은 평시보다 한산했다. 인계 거리도 많지 않았고 간호과에서도 특별한 추가 지침을 내리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아침이었다. 밤을 새운 탓에 정혜는 눈을 감으면 금세 곯아떨어질 것 같았지만 고요함이 자아낸 묘한 기운에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이나 뜬눈으로 있다가 깜빡 잠에 들어도 자기처럼 잠을 설치는 다른 간호원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곧 깨어나곤 했다.
너 후랑크후르트 아니?
소세지?
말고, 말고.
컴컴한 모포 속에서 정혜가 실눈을 떴다. 이번에는 얼마나 잤을까. 모포를 들춰 분만실의 벽시계를 볼까 싶다가도 그러면 정말 잘 수 없을 것 같아 정혜는 도로 눈을 감았다. 그럼에도 한번 달아난 잠은 다시 오지 않았고, 꿈결인지 잠결인지 모를 찰나에 떠오른 그 언니와의 대화만 더 또렷해졌다. 지난 자정께 그 언니를 처음 떠올린 후로 정혜는 그 언니를 자주 생각했다. 그 언니를 만나지 않았다면 정혜는 지금 이곳에 있지도 않았을 테니까. 운수소관 따위 개나 주라며 곧 멀리멀리 떠날 거란 말을 돌림노래처럼 하던 그 언니를 못 만났더라면 정혜 역시 멀리멀리, 더 멀리, 영영 떠나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테니까. 연초에 불을 붙인 언니가 길게 숨을 내쉬면 수풀로 둘러싸인 묫자리에는 잘 삶은 걸레 냄새 같은 게 퍼졌다. 세상 누구보다 편한 자세로 비스듬히 누워 가만히 마를 피우다 정혜가 심심해할 즈음이면 언니는 너 알지? 나 거기 곧 거기 갈 거다, 라며 입을 열었다. 거기 가면 정원에 화초가 잘 가꿔진 대궐 같은 집이 있다 했고, 자기는 그 집 거실에서 드레스 밑단이 발끝에 끌리지 않도록 치맛자락을 홀홀 들 거랬다. 한낮에는 융이 덮인 소파에 파이프를 물고 앉아 루이제 린저를 읽을 것이며, 저녁이면 코니 프란시스나 에바 가드너를 닮은 벽안의 친구들과 밤새 포도주를 마실 거라고도 했다. 그럴 리가 없음에도 마치 전에 거기 살아보기라도 한 듯 언니는 그곳의 정경과 일상을 눈앞에 그려질 듯이 말했는데, 만날 때마다 조금씩 다르게 꾸며내는 언니의 이야기는 그때까지만 해도 극장에 가본 적이 없었던 정혜에게 끝날 줄 모르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외화나 진배없었다.
어찌 그리도 잘 지어냈나 몰라.
기껏해야 지금 내 나이뿐이었을 텐데.
그래서 더 그랬나. 정혜도 언니처럼 거기 가고 싶었다. 후랑크후르트든, 백림이든, 어디든 정혜는 지금쯤이면 자기도 구라파 어딘가에 있으리라 믿었다. 중학교를 마치고 본가에 돌아왔을 때, 빵 가게를 차려 갓 운영하기 시작한 계화는 간호원이 되어 독일로 가겠다는 정혜의 뜻을 격렬히 반대했다. 일손이나 거들다 시집이나 가야 할 년이 헛꿈 꾸지 마라, 아프레걸입네 비트니크입네 떠들어대니 너 따위 계집이 뭐라도 될 것 같으냐, 저 양반 공명심에 여식까지 대학물 먹인 건 맏이 하나로 족하다. 그렇게 저주를 퍼붓는 계화에게 진탁이 내가 못난 탓이다, 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주라 소리치며 계화가 차린 밥상을 엎어버리지 않았다면 독일은커녕 집에서 멀리 떨어진 C 직할시로 가겠다는 계획부터 무산됐을지도 몰랐다. 그리하여 하루 한 대 밖에 없는 시외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산길 넘어 이곳에 올 적에는 조금만 있다가 아예 이 나라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굳게 마음먹었으나 간호전문학교를 다니는 동안 독일은 간호원 수급을 멈췄고 물거품이 된 꿈에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정혜는 이곳에 남기로 했다.
그러므로 그것은 어떤 사명감 때문이 아니었다.
어떤 책임감 때문도 아니었고 어떤 숭고함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니까 오후 1시 10분경, 갑작스런 총성에 정혜가 몸을 벌떡 일으켰을 때, 끊임없이 이어지는 총성에 일제히 침상 아래로 내려간 간호원들이 바닥에 엎드린 채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이, 다급히 울리는 내선전화를 받은 책임간호원 선배가 총상 환자들이 밀려들고 있다며, 모두 1층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외치자 청진기와 혈압계 따위를 챙긴 정혜가 비상계단 위층에서부터 앞다투어 내려온 의료진들 사이로 제 몸을 밀어넣어 아래로 내달린 까닭은 그 순간 그곳에서 그렇게 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상계단을 내려온 정혜가 1층 비상구로 나와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이미 야전으로 변한 로비였다. 30병상 남짓한 응급실이 순식간에 포화되면서 원무과 직원들은 중앙계단을 통해 스프링 매트리스를 위층에서 끌고 내려왔다. 엑스선실에서 나온 방사선사들이 매트리스를 받아 로비 바닥에 깔면 간호원들과 인턴, 그리고 외과계 레지던트들이 2인 1조, 3인 1조가 되어 환자들 옆에 붙었다.
여기 좀 도와줘요!
응급실 쪽에서 환자를 업고 로비로 들어온 인턴이 외쳤다. 그리로 달려가 인턴과 함께 환자를 매트리스에 눕힌 정혜가 환자를 빠르게 훑었다. 이마에 길게 찢은 남색 와이셔츠 조각을 칭칭 두른 환자는 의식이 없어보였다. 트리아제에서 환자의 가슴팍에 붙인 종이테이프에 ‘파추하, 남, 후두부 관통상, 신경외과’라고 적힌 것을 본 정혜는 환자의 왼팔에 혈압계를 감으며 파추하님 바이탈 체크하겠습니다, 라고는 청진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백지장처럼 변한 환자의 팔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혜 맞은편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 인턴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환자의 왼팔 오금을 찌른 주삿바늘 팁에 핏방울이 맺히지 않는데도 인턴은 연신 그곳만 찔러댔다. 정혜가 환자의 허벅지를 가리키며 선생님, 페모랄로 해요, 페모랄, 이라고 하니 정신을 차린 인턴이 대퇴 혈관을 찾아 다시 컷다운을 시도했다.
됐어요, 됐어!
인턴의 말에 곧바로 수혈 팩을 연결한 정혜가 두 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저항이 느껴질 정도로 팩을 쥐어짰음에도 환자의 혈색이 돌아오지 않자 펜라이트로 동공반사가 남아있는 것을 확인한 인턴은 답답하다는 듯이 환자의 가슴을 쾅쾅 두드리며 파추하님! 파추하님! 이라 소리쳤다.
이 멍청한 새끼야, 그게 이름이겠냐.
어느새 그들 곁에 온 신경외과 레지던트 치프가 인턴을 옆으로 밀치며 면박을 줬다. 치프는 환자의 이마를 감싼 와이셔츠 조각부터 벗겨냈다. 드러난 환부를 보자마자 푸―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 그는 가운 주머니에서 검은 매직을 꺼내 환자의 가슴팍에 붙은 종이테이프 끝에 ‘가망 없음’이라고 갈겨썼다.
소생 불가능한 환자는 저기 소수술실로 옮긴다.
환자의 양쪽 겨드랑이에 손을 넣으며 치프가 말했다. 인턴은 시퍼레진 얼굴로 환자의 가랑이 사이에 들어갔다. 그들이 환자를 들어올리고서야 정혜 눈에도 그게 들어왔다. 환자는 파란색 추리닝 하의를 입고 있었다.
그런 환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로비로 밀려들었다. 하얀 블라우스에 청원단 원피스를 입은 환자는 청치마, 여, 복부총상, 일반외과. 정장 바지의 허리춤에 묵직한 열쇠고리를 찬 환자는 열쇠뭉치, 남, 사지관통상, 정형외과. 검은 바탕에 파란 줄무늬가 들어간 티셔츠를 입은 환자는 검파상, 남, 우측 흉부총상, 흉부외과.
의식을 잃으면 이름도 잃었다.
가까스로 임시의 이름을 얻은 사람만이 로비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럼에도 로비는 응급실 복도부터 원무과 접수대까지, 바닥에 뉘인 환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방사선사가 가져온 검파상님의 필름을 천장 형광등에 비춰본 흉부외과 레지던트가 정혜에게 환자를 수술실로 올려달라고 말했다. 정혜는 환자를 이동식 침대 카트로 옮겨 승강기까지 조심조심 밀고 갔다. 3층으로 올라간 승강기가 내려오길 기다리는데 발바닥이 아려왔다. 두 손으로 카트 손잡이를 짚은 정혜는 번갈아가며 깨금발을 들었다. 정혜가 이렇게라도 숨을 고른 것은 총격이 시작되고 2시간여 만이었다.
어이, 피 모자란다! 혈액원에 재고 없대?
승강기 근처에서 두부열상 환자의 상처를 봉합하던 성형외과 교수의 외침에 정혜가 그쪽을 쳐다봤다. 수액도 부족해요, 데메롤도! 그보다 멀리서 정혜 또래의 간호원이 소리쳤다. 그 간호원 바로 옆의 매트리스에서 환자의 다리를 붙잡은 정형외과 레지던트가 고관절 탈구를 도수정복하는 동안, 환자가 몸부림치는 것을 막기 위해 책임간호원 선배가 체중을 실어 그 환자를 누르고 있었다. 그 너머 로비 한쪽 끝에는 화숙과 다른 신규 간호원 몇 명이 처치에 사용한 겸자와 메스 따위를 대형 곡반에 담아 재사용이 가능하게끔 알코올 솜으로 박박 닦아냈다.
땡, 하는 청명한 소리와 함께 승강기 탑승구가 열렸다. 로비에서 시선을 거둔 정혜가 카트를 안으로 밀어넣었다. 문이 닫히니 환자가 내는 가뿐 숨소리만 조용한 승강기 안을 메웠다. 견딜 수 있을까. 환자의 창백한 안색을 살피며 정혜가 생각했다. 환자가 입었던 검은 바탕에 파란 줄무늬가 들어간 티셔츠는 가운데가 길게 잘려 양옆으로 펼쳐진 지 오래였다. 드러난 맨가슴 위에 두껍게 쌓인 패드는 환자가 숨을 쉴 때마다 조금씩 더 붉어졌다. 살 수는 있을까. 환자를 내려다보던 정혜가 고개를 푹 숙였다. 간호복 치맛자락이 반절 넘게 검붉은 빛으로 물들어있었다.
나는 살 수 있을까.
간호사 캡 아래서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듯했다. 미처 느낄 새도 없던 공포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정말 여기서 죽는 건 아닌지, 만에 하나 그리된다면 대체 누구를 원망해야 하는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좀 그만해!
흉부외과 수술방으로 환자를 들여보내고서 수술실 복도를 바삐 뛰어다니는 써큘레이팅 간호원들을 피해 정혜가 회복실 쪽으로 나가는 길이었다. 중앙수술실 한가운데의 물품 준비실에서 들려온 수쌤의 목소리에 정혜가 걸음을 멈췄다.
내가 없는 말 했어? 어제 수색하러 들어온 놈들이 그랬다며!
누군가 지지 않고 수쌤에게 대거리를 했다. 문짝이 없는 물품 준비실 밖으로 그들이 다투는 소리가 고스란히 새어나왔고 그쪽으로 다가간 정혜가 안을 슬쩍 들여다봤다. 외래와 병동 등지에서 지원을 나온 시니어급 간호원들이 문을 등지고 나란히 앉아 삶은 가제와 패드 따위를 양은 들통에서 꺼내 작업대 위에 한 장씩 쌓고 있었는데 수쌤과 시비가 붙은 다른 병동 수간호원 선생님은 수쌤을 보며 연이어 언성을 높였다.
너도 들었을 거 아니야? 오늘 밤에 헬기로 폭탄 떨어트린다잖아! 싹 다 뭉개버릴 거라잖아! 너는 걱정 안 되니? 아니, 종수는 걱정 안 돼? 나는 걱정돼! 내 자식새끼들, 엄마 없이 클까 봐 걱정돼 죽겠다!
주체하지 못하고 말을 쏟아내는 상대방을 향해 수쌤이 고개를 홱 틀었다. 정혜는 수쌤의 뒤통수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수쌤을 마주 본 상대방이 착잡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는 것만큼은 똑똑히 보였다. 상대방이 작업대로 다시 몸을 돌리면서 언뜻 잠잠해지는 듯했지만 수쌤이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아무 일 없을 거야, 쟤네도 미치지 않고서야, 라고 중얼거리자 진절머리를 친 상대방은 도저히 못 참겠다는 양 환자들이 깔려있는 회복실 쪽을 가리키며 소리질렀다.
야! 너는 저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그 손을 따라 수쌤이 반사적으로 문밖을 내다봤다. 그와 눈이 마주친 정혜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조아렸다. 예상치 못한 얼굴을 마주한 수쌤도 곤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정혜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라고 연거푸 말하고는 도망치듯이 수술실 밖으로 빠져나갔는데 그전까지 그에게서 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두려움이 그렁그렁 맺힌 눈망울은 머릿속에서 도무지 지워지지 않았다.
죽었으면?
한번은 정혜가 그렇게 물었던 적이 있다.
그 언니가 피우던 마를 뺏어 핀 어느 날이었다. 그날, 약에 취한 언니는 옆에 누운 정혜에게 연초를 건네며 해볼래? 하고 물었다. 그러고선 막상 정혜가 그걸 잡으려 들면 돌았니? 라며 정혜 손을 탁 치면서 저 혼자 비실비실 웃었다.
해볼래? 돌았니? 해볼래? 돌았니?
언니가 성대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간 목소리로 계속 깐족이자 정혜가 풀밭에서 몸을 확 일으켰다. 연초를 잡아챈 정혜는 언니 보란듯이 연기를 빨아당겼다. 정혜가 콜록콜록 기침을 하니 두 손으로 뒤통수를 괸 언니는 피식피식 웃었고 정혜는 약이 올라 더 깊이 빨아당겼다. 그렇게 몇 번이나 쑤욱 빨아당기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숨이 차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열이 올랐다. 몸도 덜덜 떨려왔다. 숨을 헐떡이던 정혜의 눈앞이 노래졌고 이내 정혜는 풀밭으로 픽, 하고 쓰러졌다.
언니는 그로부터 며칠 뒤 종적을 감추었다.
밀린 하숙비를 떼어먹은 채 야음을 틈타 사라진 언니를 두고 그간 마을에 파다하게 퍼졌던 소문은 사실로 굳어졌다.
왜 걔가 사람들이랑 말을 안 섞었겠냐. 저도 부끄러운 줄 아는 거지.
외숙모도 그런 말을 했다. 전쟁고아라더라, 작부였다더라, 약쟁이라더라, 라는 최초의 소문들은 오 박사가 제 버릇 개 못 주고 또 저가 뽑은 보조원이랑 정분이 났다는 소문으로 이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오 박사의 아랫도리 일에는 식상해하면서도 언니가 오 박사네 의원에서 오 박사의 애를 뗐다는 소문에 대해서는 광적으로 흥분했다. 말은 돌고 돌아 오 박사네 사모님 귀에도 들어갔다는 말도 들려왔고, 그 말은 사모님 보는 앞에서 애를 뗐다는 말로 바뀌기도 했다. 그렇게 한껏 부풀어오른 말은 언니가 사라지면서 편리하게도 진실이 됐는데 사람들은 진실로 바뀐 소문에는 더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정혜는 외려 더 궁금해졌는데.
이를테면, 그 언니 그래서 정말 후랑크후르트 갔을까, 같은 것들. 대궐 같은 집에서 외화에나 나올법한 드레스도 입고 보들보들한 수건도 양껏 쓰며 제 말마따나 슈바빙 되었을까, 같은 것들. 그래서 정말 그 언니 바람대로 사람대접 받고 있으려나, 같은 것들. 이제와 생각하면 절대 이루지 못할 꿈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때도 정혜는 약에 취한 언니가 어디선가 주워들은 말들을 짜깁기 해 나오는 대로 지껄인다는 것을 은연중에 느꼈지만, 그럼에도 어쩐지 그 언니는 정말 거기에 가있을 것만 같았다.
야, 너 죽은 줄 알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여전히 뒤통수를 받치고 비스듬히 누운 언니가 말했다. 정신을 차린 정혜가 잔디를 짚고서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구부정한 정혜의 등에 대고 언니는 너 집 안 가도 되냐? 라고 심상하게 물었다. 정혜는 뒤로 고개를 돌려 언니를 내려다봤다.
죽었으면?
뭐?
언니가 정혜를 흘겨보면서 날카롭게 되물었다.
나 죽었으면 어쩌려고?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는 정혜를 말없이 바라보던 언니가 별안간 꺌꺌 웃어대기 시작했다. 숨이 넘어갈 것처럼 몸을 좌우로 흔들며 웃어대던 언니가 헛웃음을 치고는 야, 하고 정혜를 불렀다. 그리고 그 언니 조막만한 입을 오물거렸지. 그렇게 뭐라 뭐라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 언니 무어라 했나.
그 언니, 그래서 뭐라 했던가……
요즘 누가 이런 걸 써. 안 그래요?
멍하니 딴생각에 잠겨있던 정혜가 매트리스를 맞잡은 남자 행정직원을 보며 벌게진 눈을 끔벅였다.
아까 내가 말했잖아, 요새 다 스프링 매트리스 쓴다고. 이게 십수 년 전에 미국에서 원조받은 거래요. 그 돈 들여서 이런 걸 주느니 밀가루나 더 줄 것이지. 안 그래요?
지하창고에서 함께 솜 매트리스를 옮겨오는 내내 조잘거리던 행정직원이 응급실 여닫이문을 안으로 젖혔다. 행정직원은 자신이 먼저 들어갈 테니 자기처럼 매트리스를 모로 세우라고 땍땍거리는 투로 정혜에게 말했다.
저녁 무렵, 아군이 무기를 획득했다는 소식이 들려온 뒤로 총격은 중단됐다. 로비와 응급실은 여전히 북적였지만 새로 들어오는 환자가 끊기면서 중상자들은 수술실이나 중환자실로 올라갔고 후순위로 밀렸던 경상 환자들도 늦게나마 처치를 받을 수 있었다. 치료에 당장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의료진들은 로비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돌렸다. 하나같이 넋이 나간 얼굴로 앉은 사람들 틈에서 정혜도 감겨오는 눈꺼풀을 비볐다. 분만실에서 선잠이 들었던 시간을 빼더라도 스물대여섯 시간은 깨어있었던 셈이었다. 몇몇 의료진들이 맨바닥에 드러눕는 것을 보고 정혜도 몸을 누이려는데, 1층을 총괄하고 있던 간호과장님이 쉬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와 솜 매트리스를 가져오라고 지시한 것이 오후 5시 50분경이었다.
무지하게 처치 곤란이었는데 하필이면 요긴하네.
행정직원은 뒷걸음질을 치면서도 계속 조잘댔다. 수면박탈 때문인지 바로 앞에서 조잘거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정혜는 그 소리에 머리가 아파왔다. 솜 매트리스를 세로로 세워 응급실 처치실의 유리창에 덧대고 나니 행정직원이 정혜 쪽으로 다가와 핀잔을 줬다.
에헤이, 여기 창문 다 안 덮었잖아요. 이 사람이 왜 이래.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른 정혜가 대꾸를 않은 채 매트리스를 옆으로 끌어당겼다. 유리창을 완전히 가린 것을 확인한 행정직원이 손바닥으로 매트리스를 툭툭 쳤다.
저도 방탄용으로 쓰일지는 몰랐겠지, 안 그래요?
또다시 말을 걸기에 짜증이 벌컥 인 정혜가 충혈된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허탈한 표정으로 매트리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의 옆모습은 차올랐던 화를 누그러트리게 했고, 수고하셨다며 힘없이 인사를 건넨 정혜는 처치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정혜를 놓칠세라 행정직원이 졸졸 쫓아오면서 아니 근데, 라고 또 무언가를 조잘거리는 찰나,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발파 현장을 방불케 하는 충격음이 병원 외벽을 무자비하게 때렸다. 응급실 유리창들이 연달아 깨졌고 건물마저 흔들리는 듯했다.
뭐야! 이거 뭐야!
행정직원이 바닥에 바짝 엎드리며 소리쳤다. 두 팔로 머리를 감싼 정혜도 그의 옆에서 몸을 웅크렸다. 순식간에 다시 아수라장으로 변한 병원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소강상태에 긴장을 늦추고 있던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본능대로 행동했다. 많은 이들이 바닥에 엎드리거나 몸을 움츠렸고, 어떤 이들은 침상 위의 환자를 제 몸으로 감쌌다. 누군가는 그런 사람들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려고 했고, 정혜는 몸을 와들와들 떨면서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기도를 했다.
죽고 싶지 않다.
제발, 죽고 싶지 않다.
죽더라도 지금은 아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거짓말처럼 총격이 멈췄다. 정혜의 간절한 기도가 통하기라도 한 듯, 외벽을 세차게 때리던 충격음이 일거에 중단됐다. 사람들은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그들이 사색이 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반쯤 열린 응급실 정문으로 시커먼 물체가 빠르게 날아들었다. 반합처럼 생긴 쇳덩이가 쩡,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부딪혔다. 두어 번 튕긴 쇳덩이가 정혜 가까이에서 팽그르르 돌았다.
죽을 수 없다.
정혜가 벌게진 눈으로 웅크린 사람들을 둘러봤다. 죽어서는 안 된다. 정혜가 몸을 일으켰다. 왜 죽어야 하나. 우리가 왜, 죽어야 하나. 바닥을 짚고 일어난 정혜가 떨리는 몸을 가눴다.
다 나가!
정혜가 온 힘을 다해 외쳤다.
다 나가야 돼! 나가!
정혜가 사방으로 길길이 뛰며 소리쳤다.
폭탄이야! 나가! 다 나가라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목청이 터져라 소리질렀다. 거듭된 외침과 몸부림에 진이 빠져 몸을 비틀거리면서도 정혜는 멈추지 않았다. 혼미해진 정신 탓인지 제 목소리마저 제 귀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제 몸 같지도 않은 눈가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쏟아지는 눈물이 줄줄 흘러나온 콧물과 범벅이 됐다. 축축해진 얼굴 아래서 일순 열이 확 올랐고 어느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 숨을 헐떡이는 동안 시야가 급격히 뿌예졌다. 눈앞이 노래지면서 지근의 사람들마저 아스러지는 듯했다.
정신 차려! 최루탄이야!
행정직원이 휘청거리는 정혜를 붙잡으며 소리쳤다. 투척된 쇳덩이에서 매캐한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행정직원은 정혜의 한쪽 팔을 뒷목에 걸치고서 정혜를 로비로 끌고 갔다. 아닌가. 그게 아닌가. 몽롱한 기운 탓인지, 연기 탓인지 응급실에서 로비로 대피하는 사람들이 흐릿하게 보였다. 아니라면, 그게 아니라면……
정신을 잃은 정혜의 몸이 축 늘어졌다.
정혜를 부축한 행정직원의 몸이 한쪽으로 기우뚱거렸다.
세상이 끝나고 인류가 절멸한다면 이런 풍경일까.
그 넓은 대로에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대로변의 가게들은 모두 문을 걸어잠갔다. 철제 셔터 사이로 군데군데 깨진 유리창 아래에는 파편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투석에 사용했던 보도블록 조각도 보이지 않았고 거리에 뿌려진 삐라들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깨끗했다. 지나칠 만큼 깨끗했다. 병실에서 깨어난 정혜가 무언가에 홀린 듯이 병원 밖을 나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신관 건물 외벽에는 총탄 자국들이 엇비슷한 높이로 점점이 박혀있었다. 그 한끝에 처치실 유리창은 산산이 조각나있었다. 전날 덧대어둔 솜 매트리스는 그대로였고 매트리스 가운데 생긴 작은 구멍으로 만개한 목화처럼 솜털이 멍울져있었지만 발아래에는 누가 치우기라도 한 것처럼 유리 조각 하나 밟히지 않았다.
22일 오후 1시 10분경, 정혜는 병원 앞 오거리에서 이어지는 대로의 초입에 서 있었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사람들만 홀연히 증발한 그 거리에서 정혜가 저 끝의 소실점을 바라보았다. 마치 누가 거기 있기라도 한 듯, 정혜는 아주 오랜 시간 그곳을 보았다. 소실점 너머로 검은 연기 한 줄이 가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뿐이었다.
대로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 씨발……
깊은 잠에 빠졌던 정혜는 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
씨발, 천재 새끼.
언니가 레코드 가게 앞에 서서 혼잣말을 했다. 언니, 언니, 하고 불러보았지만 언니에겐 정혜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듯했다. 언제인가 보았던 장면이었다. 그걸 깨달은 정혜가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언니는 고개를 푹 숙일 것이다. 그리고 훌쩍일 것이다. 어, 어, 우네. 정말 운다. 언니, 울어요? 어차피 들리지 않을 거란 생각에 정혜가 놀리듯이 묻는다.
정말 울어? 진짜?
언니가 고개를 홱 돌려 정혜를 노려본다. 흠칫 놀라는 정혜를 보며 히죽거린다.
야, 너 죽은 줄 알았다.
달싹이지도 않은 입술로 그렇게 말한 언니가 정혜에게서 등을 돌린다. 언니는 신작로를 따라 터벌터벌 걸어간다. 신작로에는 희뿌연 연기가 가득하다. 정혜는 언니를 뒤따라간다. 내딛지도 않은 걸음으로 정혜가 언니의 뒤를 따라간다. 동네에 가까워질수록 연기가 차츰 자욱해진다. 눈을 따갑게 하고, 열이 오르게 하고, 숨길을 막아버릴 연기라는 걸 정혜는 알지만 눈이 따갑지 않다. 열도 오르지 않는다. 숨도 마음껏 쉰다. 그렇다면 이건, 연기가 아닌가. 연기가 아니라면 이건……
정혜는 인기척을 느꼈다. 주위를 둘러보니 개천 방면으로 난 길목에 중학교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 둘이 전봇대 뒤에서 정혜처럼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정혜를 본 아이들이 깜짝 놀라 몸을 숨겼다가 다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정혜 말고는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아이들은 전봇대 뒤에서 나와 병원 앞 오거리로 후다닥 뛰어갔다. 뜀박질하는 두 아이의 뒷모습 너머 빨간 벽돌로 지어진 구 본관 건물이, 그 뒤로 하얀색 신관 건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혜도 아이들처럼 병원으로 향했다. 피가 굳어 뻣뻣해진 간호복이 정혜가 걸을 때마다 쩍, 쩍,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아무도 없는 오거리를 가로질러 병원으로 들어가는 정문에 이르자 정문 양옆의 시멘트 문설주 사이로 사람들이 삐져나와 있는 게 보였다.
이 줄이죠? 여기 맞죠?
아이들 중 한 명이 맨 끝에 선 중년여성의 소맷자락을 흔들면서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한 중년여성이 아이들을 제 앞에 세웠다. 사람들은 저마다 앞사람의 뒤통수를 보며 한 줄로 서 있었다. 정혜는 그들 가까이 다가갔다. 정문에서 구 본관 건물 현관까지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꺾인 행렬은 빨간 벽돌로 된 외벽을 따라 옆으로, 옆으로 이어졌다. 등 뒤에서 울리는 경적 소리에 정혜가 뒤를 돌아보니 소형트럭 한 대가 병원 앞 오거리를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화물칸 앞 짐받이를 붙잡고 선 사람이 확성기를 입에 대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시민 동지 여러분, 병원에 피가 부족합니다. 가능하신 분은 병원으로 가서 헌혈에 동참해주십시오. 시민 동지 여러분, 병원에……
……이건, 꿈이구나.
그렇게 깨닫기 무섭게 시야를 가리었던 연무가 한순간에 걷혔다. 연기가 연기가 아니었던 것처럼 신작로도 신작로가 아니었다. 언니를 뒤따르던 정혜가 서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대로였다. 언니가 걸어간다. 병원 앞 오거리에서 이어지는 대로를 언니가 걷는다. 대로 끝에는 하얀빛이 있다. 저만치 앞서 걷는 언니를 보면서도 정혜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발을 구르고, 손도 휘휘 내저어보지만 정혜는 그 자리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다. 하얀빛으로 스며드는 언니 뒤에다 대고 정혜가 언니, 언니! 하고 부른다.
죽었으면?
정혜가 외치듯이 묻는다.
나 죽었으면 어쩌려고?
정혜는 사람들 옆을 걸었다. 구 본관 건물의 측면을 지나, 주차장 가운데 줄지어 심긴 주목나무를 따라 행렬은 계속 이어졌다. 더디게, 더디게 앞으로 나아가는 줄에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사람들이, 손을 잡고 굳은 얼굴로 나란히 선 노부부가, 손 그늘을 하고서 줄담배를 피워대는 아저씨들이 있었다.
내 피가 더러워, 더럽냐고!
아저씨들 중 하나가 앞에 서 있던 역전 유흥가의 작부들과 실랑이가 붙은 모양이었다.
네 피만 피고 내 피는 피 아니야!
작부 한 명이 내지르는 고성에 아저씨가 할 말을 잃고 담배만 뻑뻑 피워댔다. 주차장 분수대를 서너 바퀴 휘감은 줄은 꼬리가 길게 늘어진 높은음자리표처럼 신관 건물로 이어졌다. 전날 저녁까지만 로비에는 많은 환자들이 남아있었지만 이제 다들 병동으로 올라간 듯했다. 전날의 일이 꿈이라도 되는 것처럼 깔끔하게 비워진 그곳은 헌혈을 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원무과 직원들이 사람들을 로비 한편에 마련된 임시 채혈장으로 안내했고 임상병리사들과 간호원들이 그곳에서 채혈을 진행하고 있었다.
왜 안 돼요, 왜?
아까 그 아이들 또래로 보이는 남학생이 보조 침대에 리넨을 덮은 임시 채혈대 앞에서 울먹였다. 제 피라도 써주세요, 제발요. 그래 주시면 안 돼요? 아이의 키에 맞춰 허리를 굽힌 간호원이 열여섯 살 밑으로는 헌혈이 안 된다며 아이를 달랬다.
미안해, 누나가 정말 미안해.
화숙은 아이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아이를 돌려보낸 화숙이 채혈대 옆에 앉으려고 몸을 트는데 인파 속에 섞여 있는 정혜와 눈이 마주쳤다.
선배!
잰걸음으로 정혜에게 다가온 화숙이 몸은 괜찮으냐고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정혜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이게 뭐야. 아직 옷도 안 갈아입었네. 화숙은 정혜의 간호복을 매만지다 빈 채혈대 뒤로 늘어선 사람들을 돌아봤다.
선배, 여기 잠시만 맡아주실래요? 저 화장실도 다녀오고 선배 갈아입을 옷도 가져오게.
응, 다녀와. 천천히 다녀와.
화숙의 통통한 볼을 쓰다듬으며 정혜가 말했다. 채혈대 옆에 앉은 정혜는 종종걸음으로 멀어지는 화숙을 바라보았다.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화숙의 뒷모습을 보자 잠에서 깨기 직전, 하얀빛으로 사라지는 언니의 뒷모습에 대고 울부짖던 자신이 문득 떠올랐다. 눈앞을 가려오는 하얀빛이 너무나 시려 감아버렸던 눈을 살며시 떴을 때, 내리쬐는 쨍한 볕에 얼굴을 찌푸린 정혜가 언니의 목소리를 들었던 그 순간을.
낸들 알겠냐. 그냥 이렇게 누워있었겠지.
그러고서 언니는 다시 두 손으로 뒤통수를 받쳤다. 움푹 팬 풀밭에 누워 언니는 가만히 눈을 감았지. 너 근데 진짜 집 안 가도 돼? 라고 심드렁하게 물으며.
채혈 적합자입니다.
임상병리사가 정혜에게 쪽지를 건넸다.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이 임시 채혈대에 누웠다. 정혜는 쪽지에 적힌 이름을 확인했다. 맞다고 대답한 헌혈자가 와이셔츠 왼쪽 소매를 걷었다. 그래서 그 언니 정말 거기 가 있을까. 정혜가 고무압박대로 헌혈자의 팔을 묶었다. 거기 가서 집도 받고 옷도 받았을까. 알코올 솜으로 팔오금을 닦은 정혜가 조금 따끔합니다, 라고 나직이 말했다. 팁에 핏방울이 맺히자 정혜가 수혈 팩을 연결했다. 빈 팩 안으로 들어온 피가 검붉게 휘돌아 쳤다.
1980년 5월 22일의 오후.
정혜는 투명한 팩 안에 조금씩 차오르는 피를 묵묵히 지켜보았다.
※ 참고문헌
조영국, 김안자 외, 『5·18 10일간의 야전병원 ― 전남대병원 광주민주화운동 의료활동집』, 전남대학교병원, 2017.
조영국, 김안자 외, 『5·18 10일간의 야전병원 ― 전남대병원 광주민주화운동 의료활동집』, 전남대학교병원, 2017.
이현석
자주 휘파람을 붑니다.
2020/04/28
2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