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명사



   

   당신은 검지에 불을 붙입니다
   새끼손가락은 까맣고
   지표는 불가능합니다
   손톱만큼의 불과
   손톱보다도 큰 그림자
   무엇도 가리킬 수 없습니다
   

   나의 검지가 키잡이가 되어 파도의 방향을 읽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팔을 잡고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계속 걸었습니다
   

   당신은 스스로를 모자라고 소개합니다
   나는 목소리입니다
   모자가 잘 어울린다고 당신을 칭찬합니다
   

   당신의 소지품: 라이터, 젖은 노트, 색깔이 있는 펜, 국적 불명의 동전들
   

   먼저 눈을 뜬 사람이 해를 찾습니다
   노을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왔다가
   사라집니다
   당신과 나는 경쟁하듯이 해를 부릅니다
   모자와 나는 해를 그리워하고
   날이 점점 짧아지고 당신의 일기가 밀려
   감당하기 어려워집니다
   

   무수한 0월 0일 0시 0분
   

   당신은 앞발이 퇴화된 동물을 닮아갑니다
   물어뜯을 손톱을 잃은 치아들이
   허공에서 딱딱 부딪칩니다
   

   유리병에 들어 있는 쪽지
   구호 물품, 인스턴트커피, 백열등, 각설탕, (물에 번짐)
   털실과 (빈칸), 형광 스티커, (물에 번짐) 반복 재생, 새해
   10회차 공연, 필기류, 착한 목수와 벌목, 모노톤, 목각 인형
   

   나: (무심코 말하듯이) 당신, 거기 있어요?
   

   나는 당신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옷걸이와 옷걸이 사이로
   당신이 배우들에게 소품을 건네주었습니다 덕분에
   털모자를 쓰고 나는 가장 긴 계절을 보냈습니다
   나는 백발이었습니다
   딱딱하게 얼은 모래사장 위로 엉킨 발자국들과
   낮은 웅성거림
   빠르게 식어가는
   해돋이
   어둠이 점점 눈에 익어갔습니다
   

   나의 소지품: 당신의 주머니에서 몰래 꺼낸 동전 몇 개
   

   당신의 팔을 잡을 수 없는 날에는
   각자의 왼쪽으로 걷습니다
   구호도 없이 왼쪽으로 행진
   

   당신과 나는 가장 멀어지다 말 한마디에 가장 가까워집니다
   여기
   여기
   당신과 나의 탐험은 다시 이어집니다
   이곳은 뇌야
   당신은 바닥에 바싹 엎드려 속삭입니다
   우리는 모두 포유류야
   우리는 모두 돌아갈 거야
   흙으로
   먼지로
   

   우리는 고래의 혀를 잘라 먹으면서 거짓말을 나눕니다
   

   당신 : 이것은 심장이야
   당신, 돌덩이를 가져온다
   나 : 심장은 붉고 뜨거워
   당신, 검게 그을린 손가락 마디 하나를 든다
   당신 : 이것이 심장이야
   

   당신은 잘 짜인 각본처럼 무너집니다 나는 다시금 당신을 작은 나무 블록처럼 쌓아올릴 수 있습니다 위태롭게
   당신은 다시 오르고
   내립니다
   

   눈을 뜨고 감고 감고 감고 감고 뜨고 감고
   들숨과 날숨과 들숨과 날숨과 들숨과 숨
   왼쪽에서 오른쪽과 왼쪽
   오른쪽에서 왼쪽에서 왼쪽
   나지막하게 옮아가는 하품을 확인합니다
   

   손가락 한 마디만 한 당신의 심장으로
   유리병의 입구를 막고
   노을을 삼킨 지평선 쪽으로
   유리병을 던집니다 참은 숨을 내쉬자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파도가 파도를 몰고
   파도를 이끌고
   파도가 파도를 맞고
   파도를 선도하고 파도가
   파도처럼 파도를 종용하고
   파도는 파도에게
   파도에서 파도와 파도가
   파도까지
   

   해변으로 고래가 밀려옵니다
   고래는 붉게 타오르는 당신의 머리를 낳았습니다





   많은 사람



   나는 앨범에 속하지 않은
   몇 장의 사진들을 기억해낼 수 있다

   꽃 박람회가 한창인 그 도시에서
   어린 너가 엄마의 품에 안겨 사진을 찍을 때
   사진 밖에서 사람들은 잠시 기다렸다가
   플래시가 터지고
   모두가 흩어졌다

   그 사진을 잃어버리거나
   불에 타거나 찢어져도
   너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너는 마지막 학년을 앞두고 이사를 갔고
   우리는 같은 졸업 앨범에 실리지 못했다
   카메라 앞에서
   아이들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너는 낯선 아이들과 단체가 되어 사진을 찍었다
   그 많은 아이들 속에 너의 얼굴이 있었다
   눈을 반쯤 감은 채로

   봄마다 꽃 박람회가 열리고
   봄이 오기 전에 수많은 아이들이 학교를 떠난다

한상은

나는 ‘너’에게 씁니다. 너를 잘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합니다. 그래도 너에게 계속 말을 건넵니다. 나는 여기서 계속 쓰고 있다고.

2018/03/27
4호